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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글날에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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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은 생물이다 |
노회찬∙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이번 한글날 나에게 소망이 있다면 한글로 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 보는 일이다. 원래 완장 문화에 경계심이 높고 금배지에 대한 거부감 역시 크긴 하지만 국회의원 배지가 한문에서 한글로 바뀐다면 기꺼이 달아 보고 싶은 심정이다.
2004년 5월 30일. 국회 등원 첫날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이 몰려와서 물었다. 왜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않았냐는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지만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 온 질문인양 답했다. 한글로 바뀔 때까지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않겠다고. 이 보도를 접한 어느 한글 단체에서 한글로 ‘국’자가 들어간 배지를 백여 개 만들어 보내왔다. 다른 의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국회의원 배지를 한글로 바꾸는 국회 규칙 개정안도 제출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미 한글로 바꾼 행정부, 사법부와 달리 국회는 깃발과 공식 문양 등에서 여전히 과거의 한문 관행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공문서는 한글로 작성되어야 한다는 국어기본법이 제정된 2005년 이후에는 국회 깃발, 배지, 문양 등이 모두 법률에 저촉되는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사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국회의원의 이름 표기법이다. 국회에서 국회의원의 이름 표기 방식은 해당 국회의원 자신이 직접 선택한 표기 방식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문 표기 방식을 선택한 국회의원은 각종 명패, 전광판은 물론 모든 공문서에 한문으로만 이름이 표기된다. 각종 공문서에 국회의원의 이름이 한문으로 표기되는 것은 국어기본법에 위배되는 일이다. 나아가서 이것은 국민에 대한 약속 위반이다. 한문으로 이름을 표기할 것을 고집하는 국회의원 중에서 국회의원 선거 때 한문 이름으로 유권자 앞에 나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말하자면 유권자들 앞에 제시된 것도 한글 이름이고 투표 용지에 기재되어 당선된 것도 한글 이름이다. 그런데 당선 이후엔 한글 이름을 버리고 한문 이름으로 활동한다면 이는 약속 위반에 속하는 것이다.
흔히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따지고 보면 말과 글 역시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수백 년간 살아 있다가 종래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 말과 글이다. 쓰면 쓰는 만큼 갈고 닦이면서 발전하고 안 쓰고 내버려 두면 점점 낡아 사라지는 것이 또한 말과 글이다. 그래서 1945년의 한글과 2005년의 한글은 같을 수가 없다. 산업과 문명의 발전에 따라 생활과 세태의 변화에 따라 말과 글도 함께 변화하고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우리말과 우리글의 발전을 위해 우리가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과학 기술과 문명의 발전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사물과 개념을 우리말과 글로 담아내기 위해 우리는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과 재정을 쏟아 붓고 있는가? 이를 담당하는 국가 기구와 공식 절차라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는가? @를 골뱅이라 부르게 된 것처럼 모든 것을 자연 상태에 그대로 맡겨 둘 것인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되어 온 법률안에 ‘에듀테인먼트’라는 용어가 있어 그 뜻을 물으니 ‘기존의 정적이고 수동적이며 고리타분한 교육 방식이 아니라 재미있고 능동적인 놀이체험식 교육 방식’을 뜻한다고 한다. 에듀케이션(교육)과 엔터테인먼트(오락)의 영어 합성어라는 것이다. 법률에 에듀테인먼트라 표기할 때 그 뜻을 이해할 국민이 얼마나 되겠느냐면서 적절한 우리말로 바꿀 것을 검토하라고 했더니 얼마 후 국어 전문 기관에서 법률에 에듀테인먼트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별 문제가 없다는 회신이 있었다며 그대로 통과시켜 버렸다. 이로써 우리말, 우리글 하나는 태어나지도 못한 채 자신의 자리를 빼앗겨 버렸다.
한글날이 국경일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인류 문화의 위대한 유산인 한글 제정을 나라와 겨레가 크게 기뻐하며 기리기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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