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형식∙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1. 들어가기
1. 1. 국어에서는 명사가 지시하는 사물의 수량을 표현할 때, 특이한 구성이 나타난다. 다음은 ‘곰 세 마리’라는 창작 동화의 일부인데, 이것을 통해 구체적인 예를 확인해 볼 수 있다.
- (1) 옛날 어느 숲 속에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조그만 아기 곰, 엄마 곰, 그리고 커다란 아빠 곰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곰들의 식사 시간인가 봐요. 세 마리의 곰은 밥그릇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기 곰은 조그만 그릇, 엄마 곰은 중간쯤 되는 그릇, 아빠 곰은 커다란 그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세 마리의 곰은 의자도 하나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 (이하 생략)
―유아교육연구회(1999), 「엄마의 구연동화」, 신서출판사, 51쪽
위의 밑줄 친 부분에서 국어의 수량 표현과 관련되는 몇 가지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어떤 대상(‘곰’)의 수량을 표현하는 데 대상을 나타내는 명사 ‘곰’과 수량을 뜻하는 형태 ‘세’ 외에 또 하나의 언어 형태 ‘마리’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어에서는 ‘three bears’가 되겠지만, 국어에서는 ‘*세 곰들’이 아니라 ‘곰 세 마리’ 또는 ‘세 마리의 곰’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국어의 수량 표현에는 영어와는 달리 ‘마리’와 같은 형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1)
영어의 경우 ‘fifty head of cattle, three sheets of paper’에서처럼 ‘cattle, paper’ 등의 일부 명사의 복수 표현은 각각 ‘head, sheet’ 등과 같은 어휘에 의해 수량이 표현된다. 그러나 영어의 이러한 표현은 쓰임의 범위가 제한되고, 형식이 고정된다는 점에서 국어와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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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위 (1)에서 ‘마리’는 국어의 수량 표현에서 나타나서 단위를 표시하는 역할을 하는데, 국어에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형태가 상당수 존재한다. 예를 들어, ‘친구 한 명, 종이 한 장, 사과 두 개, 칼 한 자루, 자동차 한 대’ 등의 ‘명(名)’이나 ‘장(張), 개(個), 자루, 대(臺)’ 등도 이와 관련되는 형태이다. 전통적으로 국어 문법에서는 이와 같은 형태를 명사의 수량 단위(unit)를 표시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왔다. 그리하여 전통 문법에서는 이것을 단위 명사, 단위성 의존 명사 등으로 불렀으며, 현행 학교 문법에서는 수량단위의존명사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가 단순히 수량의 단위를 표시한다는 해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2) |
ㄱ. |
옛날 어느 숲 속에 {호랑이, 토끼, 부엉이, 매미} 세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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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옛날 어느 숲 속에 세 마리의 {호랑이, 토끼, 부엉이, 매미}가 살고 있었습니다. |
(3) |
ㄱ. |
옛날 어느 숲 속에 곰 세 {마리, *명, *개, *대}-이/가 한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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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세 {마리, *명, *개, *대}의 곰은 밥그릇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
위 (2)에서 ‘마리’는 ‘곰’ 외의 다른 명사와 호응하는데, 이때의 명사는 동일한 부류(동물)에 해당한다. 여기서 이른바 수량 단위를 표시하는 형태인 ‘마리’는 호응 관계를 이루는 명사가 특정한 부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또한 ‘곰’은 (3)에서처럼 ‘마리’와는 호응되지만, ‘명(名), 개(個), 대(臺)’ 등과는 서로 호응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들 각각의 형태가 호응 관계를 맺는 명사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위 (2, 3)에서 ‘마리’가 동물의 부류와 호응한다면, ‘명(名)’은 인간, ‘개(個)’는 사물, ‘대(臺)’는 기계의 부류와 관련되는 것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마리’를 비롯한 ‘명(名), 개(個), 대(臺)’ 등은 수량의 단위를 표시하는 것 외에 선행하는 명사의 의미적인 부류(class)를 표시하는 기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들을 분류사(classifier)라 하기도 한다.
1.3. 국어는 위와 같은 분류사 형태가 존재하는 이른바 분류사-언어(classifier-language)에 속한다.2)
세계의 여러 개별 언어는 분류사의 존재 유무에 따라 분류사-언어와 비분류사-언어로 구분된다.(Aikhenvald, 20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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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사에는 여러 유형이 있는데, 국어에 존재하는 것은 일본어나 중국어, 미얀마 어, 타이 어 등과 같이 이른바 수 분류사(numeral classifier)에 해당한다. 수 분류사는 분류사의 여러 유형 중에서 가장 널리 분포하며, 어휘적 성격을 띠는 형태로 실현되기 때문에 비교적 잘 인식되는 것이 특징이다.3)
일본어의 조수사(助數詞), 중국어의 양사(量詞), 미얀마 어와 타이 어의 유별사(類別詞) 등이 이와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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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분류사는 명사 지시물의 수량을 한정하는 단위를 표시하며, 아울러 명사의 의미적인 부류를 한정한다. 즉, 수 분류사는 단위 표시와 부류 표시의 두 가지 기능을 함께 지니는데, 이 중에서 부류 표시 기능이 보다 본질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부류를 표시하는 형태가 그 부류에 속하는 사물들의 단위를 표시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어의 분류사는 국어 화자들이 주변 사물을 어떻게 구분하여 인식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국어의 분류사는 명사 지시물의 의미 부류를 한정하는 기능으로 하여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수량의 단위로 쓰였고, 이것이 오랜 세월을 두고 굳어지면서 부류와 단위 표시 형태로 정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서 국어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분류사들을 부류 표시 기능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 분류사의 범주화 기능
2. 1. 앞의 (1-3)에서처럼 국어의 분류사는 ‘명사-수량사-분류사’(‘곰 세 마리’) 또는 ‘수량사-분류사-명사’(‘세 마리의 곰’)의 형식으로 나타난다.4)
여기서 수량사는 수나 양을 표현하는 어휘를 말한다. 예를 들어, ‘곰 {한, 두, 몇, 여러} 마리’에서 밑줄 친 것이 수량사에 해당한다. 그리고 ‘수량사-분류사-명사’의 형식에서는 ‘수량사-분류사’ 뒤에 조사 ‘의’가 첨가되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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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성에서 명사와 분류사는 의미적으로 종(種)과 유(類)의 관계를 이루어 상호 선택적인 성격을 띤다. 예를 들어, 위 (1-3)에서 명사인 ‘곰, 호랑이, 토끼, 부엉이, 매미’ 등은 종(種)에 해당하고, 분류사 ‘마리’는 유(類)에 해당하여, 전자가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 된다.
(4) |
ㄱ. |
{곰, 호랑이, 토끼, 부엉이, 매미} |
세 |
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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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種) |
<수량> |
유(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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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 ������, ������, ������, ...... } 세 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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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4ㄱ)의 ‘곰, 호랑이, 토끼, 부엉이, 매미’는 국어 화자들에게는 동질적인 부류로 인식된다. 그리하여 (4ㄴ)의 명사 위치(‘������, ������, ������, ......’)에는 (4ㄱ)의 명사들과 같은 부류의 것이 온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5)
이와 같이 분류사는 일종의 은유(metaphor) 작용을 통하여 선행하는 명사를 이해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은유는 알려진 사실로부터 유추(analogy)를 통해 알지 못하거나 분명치 못한 사실을 명확히 해 주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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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지시물의 동질성은 내적 또는 외적 유사성에 바탕을 둔다. 내적 유사성으로는 생물(living)과 무생물, 유정물(animate)과 무정물, 인간(human)과 비인간 등이 기준이 될 수 있으며, 외적 유사성으로는 모양(shape)이나 크기(size) 등과 같은 형상(figure)이 기준으로 제시된다. 국어의 분류사를 이러한 기준을 바탕으로 몇 가지 범주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6)
국어에서 분류사 형태는 매우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대표적인 형태 일부만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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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주 |
분류사 형태 |
생물 |
인간 |
인간성 |
‘명(名), 분, 사람, 놈’ |
비인간 |
동물성 |
‘마리, 두(頭), 필(匹)’ |
식물성 |
‘그루, 포기, 뿌리’ |
무생물 |
형상성 |
‘개(個,), 줄기, 개비, 장(張), 모, 톨’ |
기능성(비형상성) |
‘대(臺), 척(隻), 자루, 권(卷)’ |
위에서 하위 범주 구분의 경우 생물의 인간성이나 동물성, 식물성 범주는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무생물은 일반적으로 모양이나 크기 등과 같은 형상이 주요한 기준이 되는데, 한편으로는 사물의 기능(function)에 따르는 한 무리의 분류사가 존재한다.
위의 구분에 따라 하위 범주별로 해당되는 분류사의 예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5) |
ㄱ. |
친구 한 명 / 어른 한 분 / 자식 두 놈 |
: 인간성 범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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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돼지 10 {마리, 두} / 말 열 {마리, 필} |
: 동물성 범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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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
나무 한 그루 / 풀 한 포기 |
: 식물성 범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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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
사과 한 개 / 종이 한 장 / 밤 한 톨 |
: 형상성 범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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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
자동차 한 대 / 호미 한 자루 / 책 한 권 |
: 기능성 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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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분류사는 통사적으로 의존성이 강해서 수량사 뒤에 오는 제한이 있으며, 의미적으로는 ‘개(個)’나 ‘대(臺)’ 등과 같이 투명하지 않아서 그것이 지시하는 바가 매우 포괄적이고 불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분류사 중에는 사물의 부분을 가리키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자루’는 전체-부분의 관계에서 어떤 사물의 부분을 지시하는 명사인데, 이것이 분류사로 쓰이는 것이다.
(6) |
{칼, 총, 호미, 연필} 한 자루를 샀다. |
위 (6)에서 ‘자루’는 ‘칼, 총, 호미, 연필’의 공통 부분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분을 가리키는 말은 온전한 명사로 쓰일 때에는 하나의 몸체(body)가 되지만, 분류사로 쓰일 때에는 특정 명사류가 지시하는 사물의 부류를 지시한다. 이렇게 부분 지시어가 분류사로 쓰이는 것은 인간이 부분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된다.7)
전체를 이루는 여러 부분 중에서 분류사로 선택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한 부류 안에서 일정한 체제를 유지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부분들의 기능적인 영역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인간성 범주의 분류사 ‘명(名)’은 인간에게서 이름의 중요성과 관련되고, 동물성 범주의 분류사 ‘마리’는 동물의 주요한 부분이 ‘머리’라는 인식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식물성 범주의 분류사 ‘그루, 포기’ 등으로 구분되는 것도 어느 부분의 기능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가 하는 점과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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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분류사-언어에서 유정성(animate)와 인간성(human)은 분류사 체계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분류사는 인간성, 동물성, 식물성 범주로 구분된다. 국어에서 동물성 범주와 식물성 범주는 그리 크게 분화되지 않으며, 대체로 앞의 (ㄴ,ㄷ)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성 범주의 분류사는 개별 언어에 따라 매우 다른 체계를 이룬다. 여기서 고려되는 기준으로는 성에 따른 남성/여성, 나이에 따른 어른/아이 등의 구분이 일반적이지만, 각 언어 사회의 체계를 반영하여 분화되는 특징이 있다.8)
예를 들어, 미얀마 어의 경우 분류사가 불교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구분되는 사회 계층을 반영한다.(우형식, 2001;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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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의 경우 ‘명(名), 분, 사람, 놈’ 등이 대표적인 인간성 분류사에 해당하는데, 이들의 용법적 구분은 전통적인 사회 계층이나 신분, 가족 관계, 그리고 나이 등이 주요한 기준이 된다.
(7) |
친구 한 {명, 분, 사람, 놈} |
(8) |
ㄱ. |
어른 한 {분, 명, 사람, *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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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아이 한 {*분, 명, 사람, ?놈} |
위 (7)에서 사회적 신분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 명사 ‘친구’는 분류사 ‘명(名)’과 ‘분, 사람, 놈’ 모두와 호응 관계를 이룰 수 있으며, 화자가 ‘친구’를 어떠한 사회적 관계로 인식하여 표현하는가에 따라 이들은 달리 선택될 수 있다. 그렇지만 (8)의 경우 일반적인 사회적 기준에 비추어 ‘어른’과 ‘아이’의 분류사 형태는 달리 선택되는데, 이러한 점에서 인간성의 분류사는 사회 언어학적인 측면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존재는 대체로 인간성 분류사와 호응되지만, 이도 역시 개별 언어에 따라 다르다. 국어의 경우 신성하거나 선(善)을 상징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분’ 또는 ‘명(名)’이 선택되고, 악(惡)을 상징하는 존재는 ‘놈’ 또는 동물성의 ‘마리’로 호응될 수 있다. 그리고 생명성이 사라진 경우에는 ‘구(具)’로 나타난다.
(9) |
ㄱ. |
하늘에서 세 {분, 명}의 천사가 내려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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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밤새 세 {??명, 놈, 마리}의 도깨비들과 씨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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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
격전지에서는 수십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
한편, 의인화된 명사 지시물이 인간성의 분류사와 호응하는 경우가 예상될 수 있다. 국어의 경우 이러한 표현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언어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주 발견되기도 한다.
(10) |
ㄱ. |
일곱 {*명, 마리}의 아기 염소들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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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저 인형 두 명 더 주세요. |
위에서 (10ㄱ)은 의인화된 표현에서 인간성 분류사가 호응 관계를 이루지 못하지만, 언어 발달의 초기 단계 화자는 (10ㄴ)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9)
어린이들의 언어 발달을 분류사와 관련하여 보면, 대체로 ‘형상성→동물성→인간성’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외적인 형상에서 내적인 속성으로 발달됨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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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형상성 범주의 분류사는 시각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며, 모양이나 크기에 따라 구분된다.10)
무생적 사물에서 모양이 중요한 자질이 되는 것은 대부분의 수 분류사 언어에 공통되는 현상으로, 이것은 인간의 사물에 대한 인식이 시각에 크게 의존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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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의 경우 모양을 기준으로 하여, ‘담배 한 개비’의 ‘개비’는 길고 가느다란(long) 1차원적 사물과 관련되며, ‘종이 한 장’의 ‘장(張)’은 얇고 평평한(flat) 2차원적 사물과 관련된다. 그리고 ‘밤 한 톨’의 ‘톨’이나 ‘두부 한 모’의 ‘모’는 둥글거나(round) 모난(angular) 3차원의 사물과 호응한다. 특히 형상성의 범주에 널리 나타나는 것에 ‘개(個)’가 있다.
2차원의 형상성 분류사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장(張)’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2차원의 형상성 분류사의 속성인 넓고 평평하며 얇은 특징을 지닌 대상과 넓게 호응 관계를 이룬다.
(11) |
ㄱ. |
그의 안주머니에서 접혀 있는 종이 몇 장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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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차표 한 장 (명함, 엽서, 사진, 그림, 수표, 지폐, 편지, 카드) |
(12) |
ㄱ. |
가방 안에는 와이셔츠가 여섯 장이나 들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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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모포 한 장 (팬티, 치마, 속옷, 담요, 카펫, 누비이불, 수건, 손수건) |
(13) |
ㄱ. |
마른 김 한 장은 달걀 두 개분의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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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유리 한 장 (멍석, 합판, 레코드, CD, 방석, 비누, 연탄, 기와) |
위 (11ㄱ)에서 ‘장(張)’이 2차원적 특징을 지닌 ‘종이’와 호응 관계를 이루는데, ‘장(張)’과 호응할 수 있는 명사를 더 예시하면 (11ㄴ)과 같이 될 것이다. 이렇게 ‘장(張)’이 지니고 있는 모양상의 자질은 (12, 13)과 같이 의류나 침구류, 그 밖의 사물과도 호응 관계를 이루게 한다.
한편, ‘개(個)’는 형상성의 보편적 분류사로서 형상적 자질과 관련되는 명사 지시물 대부분과 호응 관계를 이룬다. 특히 ‘개(個)’는 대상을 사물화(事物化)하는 특징이 있어서, 시각적 인지가 가능한 사물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사물까지도 시각을 바탕으로 표현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14) |
ㄱ. |
그 호텔에는 풀장과 테니스 코트가 서너 개 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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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이것만 있다 하면 현감 자리 몇 개인들 못 사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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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
그 사람은 세 개 은행에서 예금을 모두 인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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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
가슴 속에서 두 개의 자아가 하나로 합쳐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위에서 (14ㄱ)은 분명히 구분되는 한정된 공간이 ‘개(個)’와 호응 관계를 이루고 있다. 특히 (14ㄴ)의 추상적인 지위나 (14ㄷ)의 특정 기관, 그리고 (14ㄹ)의 추상적인 대상도 ‘개(個)’와 호응 관계를 이룸을 보여 준다.
그런데 ‘줄기’는 본래 식물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형상성의 분류사로 쓰이면 은유적인 확장이 크게 나타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15) |
ㄱ. |
한 줄기 오솔길이 나무꾼들의 내왕으로 형태가 남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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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두 줄기 선로, 두 줄기 발자국, 한 줄기 강물 |
(16) |
ㄱ. |
순간 금순이의 두 눈에서는 두 줄기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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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한 줄기 바람, 한 줄기 소나기, 한 줄기 빛 |
위에서 (15)는 구체적인 대상이 ‘줄기’와 호응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16)은 구체적 대상의 은유적 표현과 관련된다. 이와 같은 특징으로 하여 다음의 (17)에서처럼 주관적인 감정이나 객관적인 사실, 시간의 흐름 등이 시각적으로 형상화되거나,11)
특히 이러한 은유는 추상적인 대상으로까지 확장되는데, 그리하여 ‘줄기’를 이른바 존재론적 분류사(ontological classifier)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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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에서처럼 청각의 대상이 시각적인 인식의 대상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12)
이것은 공감각적인 표현으로 일종의 이미지 은유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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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ㄱ. |
이상하게 한 줄기 희망 같은 것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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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한 줄기 질긴 생을 못 버리고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다. |
(18) |
ㄱ. |
긴 울음 후에 한 줄기 고운 가락이 솟구쳐 올라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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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한 줄기 용트림, 한 줄기 부르짖음, 한 줄기 웃음소리 |
2. 4. 다른 언어에서처럼 국어의 기능성(비형상성) 범주의 분류사는 매우 복잡하게 존재한다. 그것은 기능(function) 범주가 문화적인 특징을 수용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문화적 양상이 시대에 따라 달리 형성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어에서 기능적 속성과 관련되는 분류사로는 ‘대(臺), 척(隻), 자루, 권(卷)’ 등이 대표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19) |
ㄱ. |
멀리서 버스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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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수십 척의 고깃배들이 잔잔한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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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
모든 대원들에게는 M1 소총과 권총 한 자루씩 배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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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
어제 산 책 다섯 권을 모두 읽었다. |
위 (19)에서 ‘대(臺)’는 ‘버스’와 같은 교통 기관과 관련되고, ‘척(隻)’은 선박과 관련되며, ‘자루’는 총이나 칼 등과 같이 손잡이가 있는 무기나 도구와 관련된다. 그리고 (19ㄹ)의 ‘권(卷)’은 서책류와 관련된다. 이 중에서 특히 ‘대(臺)’는 전형적으로 동력을 지닌 기계류와 관련되고, ‘자루’는 손을 사용하는(handling) 도구와 관련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대(臺)’와 ‘척(隻)’은 동력 추진성을 바탕으로 하는 기계성과 이동성, 그리고 운송성으로 설명되는데, 이 중에서 기계성이 가장 원형적이며 널리 적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13)
이것은 다음의 예를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
(1) |
ㄱ. 장난감 자동차 한 {*대, 개} / 종이비행기 한 {*대, 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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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종이배 한 {*척, 개} |
위에서 ‘자동차’나 ‘비행기, 배’는 기능성 부류의 전형이지만, 장난감이나 종이로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대(臺)’와 호응 관계가 성립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개체적 사물로 인식되어 형상성의 분류사 ‘개(個)’와 호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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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속성과 부합되는 것으로 탈것(vehicle)이 예상된다. 여기서 탈것의 속성은 인간이 기계의 내부에 들어가 기계와 함께 움직이며 기계의 동작을 제어함을 뜻한다.
(20) |
ㄱ. |
저쪽에서 버스 세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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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자동차 한 대 (택시, 오토바이, 기차, 자전거, 마차 인력거14))
‘마차, 인력거’ 등은 동력 추진성이 사람에 바탕을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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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ㄱ. |
멀리 배 세 척이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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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기선 한 척 (범선, 어선, 고깃배, 나룻배, 군함, 잠수함) |
기능성 범주의 분류사 ‘대(臺)’는 기계성은 두드러지나 자동적인 이동성과 운송성의 조건을 만족하는 정도가 낮은 인공물(가전제품이나 기계류 등)과도 호응 관계를 이룬다.
(22) |
ㄱ. |
그는 혼자 있을 때면 라디오 한 대를 유일한 벗으로 삼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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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TV 한 대 (VTR, 라디오, 앰프, 디스크 플레이어, 카메라, 컴퓨터, 전화기, 선풍기, 냉장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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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
발전기 한 대 (이앙기, 면직기, 프린트기, 소독기, 재봉틀, 등사기, 인쇄기, 자동판매기) |
또한 악기류도 ‘대(臺)’와 호응 관계를 이루는데, 이것은 악기류가 기계성을 띤 것으로 인식됨을 뜻한다. 그런데 악기류는 기능과 함께 형상성의 크기가 또 하나의 자질로 적용되어 큰 것일 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작은 것일수록 호응 가능성이 낮아진다.15)
크기의 자질과 관련하면 다음의 예를 통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 |
ㄱ. 손목시계 한 {*대, 개} ㄴ. 전기면도기 두 {*대, 개} |
(2) |
ㄱ. 트라이앵글 한 {*대, 개} ㄴ. 피리 한 {*대, 개} |
위 (1)에서 자동성의 자질을 갖는 ‘시계’와 ‘전기면도기’는 ‘대(臺)’와 호응하지 않으며, (2)에서 악기류의 일부도 역시 같은 특징을 보여 준다. 이것은 기계류와 악기류가 작아질수록 ‘개(個)’와 호응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기능성보다는 형상성의 크기 자질이 일차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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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ㄱ. 낡은 교실에는 풍금 한 대가 놓여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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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가야금 한 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
그러나 동력 추진성을 지닌 기계류라기보다 단순히 사물로서의 속성으로 표현되거나 자동성이 없는 것은 ‘대(臺)’와 호응 관계를 이루지 않는다.
(24) |
ㄱ. 대합실 안에는 난로 한 {*대, 개}가 놓여 있었지만 불기는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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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괘종시계 한 개 (연필깎이, 주사기) |
(25) |
ㄱ. 너덧 {*대, 개}의 테이블에는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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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책상 한 개 (의자, 침대, 탁자, 옷장, 화장대) |
위에서 (24)의 도구류나 (25)의 가구류는 ‘대(臺)’와 호응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2. 5. 분류사는 명사 지시물을 부류화하지만, 하나의 명사가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될 때에는 특정 문장 안에서 실현되는 문맥적 의미에 따라 명사와 호응 관계를 이룬다.
(26) |
ㄱ. 총 한 {개, 자루, 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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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총 한 {개, 자루, *방} 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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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총 한 {*개, *자루, 방} 맞았다. |
위 (26)에서 ‘총’은 문맥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을 때에는 (26ㄱ)과 같이 분류사 ‘개(個), 자루, 방(放)’과 관련되지만, (26ㄴ, ㄷ)과 같이 ‘사다, 맞다’ 등의 서술어와 통합될 때에는 문맥에서 실현되는 의미에 따라 관련되는 분류사가 구별된다.
특정 명사와 분류사의 호응 관계는 명사보다는 실재 세계에 존재하는 지시물의 속성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하나 이상의 분류사가 선택될 수 있으며, 명사-분류사의 호응 관계는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수용 가능성의 정도(degree of acceptibility)를 포함한다. 또한 주어진 명사와 함께 쓰인 분류사의 수용 가능성은 명사가 지시하는 사물의 그때그때의 실재적 상황에 의존되는 것이 특징이다.
3. 분류사 구성의 형식과 의미
3. 1. 국어는 수사 체계가 고유어 계열과 한자어 계열로 존재하는데, 이것이 분류사 앞에서 수량사로 나타날 때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되더라도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다.
(27) |
ㄱ. 탑승객이 12명 사망했다. (십이/열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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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소설책을 20권 읽었다. (이십/스무) |
위 (27)에서 12, 20은 숫자로 표기되었지만 실제 발음은 ‘열두, 스무’의 고유어계와 ‘십이(十二), 이십(二十)’의 한자어계 모두 가능하다. 그런데 고유어 계열과 한자어 계열은 용법상에 차이가 있어서, 일반적으로 현대 국어에서는 수의 단위가 낮을 때는 고유어 수사가 선택되고, 단위가 높아질수록 한자어 수사가 쓰이는 경향이 있다.
(28) |
ㄱ. 연필 {*일/한, *이/두, 오십/쉰} 자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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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돼지 {*일/한, *이/두, 오십/쉰} 마리 |
위 (28)에서 볼 때, 분류사 ‘자루’와 ‘마리’에서 1, 2와 같은 작은 수일 때는 한자어 수사가 분류사와 통합되지 않지만, 50과 같은 10단위 수일 때는 통합이 가능하다.
분류사는 어원을 기준으로 하여 고유어 계열과 한자어 계열, 그리고 외래어 계열로 나뉘는데, 수량사와 분류사는 어원이 같은 계열의 것끼리 통합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리하여 분류사가 고유어일 때 수량사도 고유어와 통합되고, 한자어와 외래어 등의 외래적인 분류사는 외래적인 성격을 띠는 한자어 수량사와 통합 관계를 이룬다.
(29) |
ㄱ. {한, *일} 해 / {*한, 일} 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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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두, *이} 살 / {*두, 이} 세 |
위 (29)에서 같은 단위를 나타내는 ‘해’와 ‘년(年)’, ‘살’과 ‘세(歲)’가 어원에 따라 수량사의 선택이 고유어 계열과 한자어 계열로 구분된다.
그런데 한자어 계열의 분류사 중에는 위 (27)과 같이 한자어와 함께 고유어 수량사와 호응 관계를 이루는 것도 있으며, 고유어 수량사와만 통합되는 것도 있다.
(30) |
2시 3분 5초 (*이시 삼분 오초 / 두시 삼분 오초) |
위 (30)에서 ‘2시 3분 5초’를 ‘이시 삼분 오초’가 아니라 ‘두시 삼분 오초’로 읽는 것을 보면, ‘시(時)’는 한자어 계열이지만 항상 고유어 수량사와 통합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수량사-분류사의 통합 관계는 분류사의 어휘적인 성격과 국어 화자의 어원 의식에 관련된다.
3. 2. 국어의 경우 단수와 복수가 형태적인 표지로 구분되지 않는 대신에, 분류사 구성에서 수량사가 ‘한’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단수를 표시하는 기능이 있다. 다시 말하면, 국어에서 명사의 단수는 수량사가 ‘한’으로 나타나는 구성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또한 ‘한’은 가장 적은 수량을 뜻하는 것이므로 지소적인 수량을 뜻하기도 한다.
(31) |
조금 전에 손님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
(32) |
ㄱ. 그는 파지 한 장 내지 않고 단숨에 붓을 휘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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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그 집은 쥐 새끼 한 마리 없는 흉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
위 (31)에서 ‘손님 한 분’의 ‘한 분’은 불특정의 단수를 표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16)
이러한 ‘한’의 용법은 영어의 부정관사 ‘a, an’과 대비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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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2)에서 ‘한’은 1의 수를 표현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가장 적은 수량에 해당되어 지소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한’이 지소적 의미로 나타날 때에는 부정적 표현이 뒤따르고 조사가 결합되지 않거나 극한적인 의미를 띠는 보조사가 결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3. 분류사 구성의 실제적인 용법을 살펴보면, 동일한 분류사가 이루는 구성에서 앞의 (1)에서처럼 ‘명사-수량사-분류사’와 ‘수량사-분류사-명사’의 형식이 겹쳐 나타나기도 한다.17)
여기서는 분류사의 위치를 중심으로 분류사가 뒤에 오는 ‘명사-수량사-분류사’ 형식을 후행 구성, 앞에 오는 ‘수량사-분류사-명사’ 형식을 선행 구성이라 하여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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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ㄱ. 곰 세 마리가 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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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세 마리의 곰이 살고 있었다. |
위 (33)에서는 두 가지 구성이 함께 가능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들의 의미와 용법이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어서 (33ㄱ)과 (33ㄴ)은 어떤 차이를 지니고 있다.
‘명사-수량사-분류사’의 후행 구성에서 명사는 그것이 지시하는(또는 지시할 수 있는) 구성원 모두를 문제 삼는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명사가 지니고 있는 속성을 지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서 ‘수량사-분류사-명사’의 선행 구성에서 명사는 ‘수량사-분류사’에 의해 한정되는 지시물을 하나로 묶어 문제 삼는다. 즉, 선행 구성은 수량사구에 의해 한정된 대상만을 지시한다.
(34) |
ㄱ. |
너는 사과를 몇 개 먹었니? → 나는 사과를 세 개 먹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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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너는 몇 개의 사과를 먹었니? → 나는 세 개의 사과를 먹었다. |
위 (34)는 명사 ‘사과’의 수량을 묻고 대답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34ㄱ)과 같은 후행 구성으로 나타나며, (34ㄴ)의 선행 구성은 어색하다. 그것은 (34ㄴ)의 선행 구성은 ‘사과’의 수량이 한정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후행 구성은 수량에 초점을 두는 것이어서 명사의 수량을 한정하는 의미가 두드러지는 특징을 나타낸다. 이러한 후행 구성의 수량 한정의 기능은 명사와 수량사-분류사 구성이 동격의 의미를 지닐 때 후행 구성으로 구성되는 현상을 통해서 더욱 분명히 할 수 있다.
(35) |
ㄱ. |
우리 늙은이 두 사람이 얼마나 흥겨운 대화를 나눴겠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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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우리 두 사람의 늙은이가 얼마나 흥겨운 대화를 나눴겠소? |
위 (35)에서 명사(‘늙은이’)와 수량사-분류사 구성(‘두 사람’)은 의미상 동격인데, 이 경우에는 후행 구성이 선호된다.
후행 구성이 명사가 지시하는 사물의 수량에 중점을 둔다면, 선행 구성은 개체화된 지시물을 확증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즉, 선행 구성은 그것이 표현하는 수와 부류에 관한 정보가 최소적이거나 문맥상 예측이 가능할 때에 선호되는 것이다.
(36) |
ㄱ. |
당신에게 배운 의술로는 생업은커녕 한 그릇의 밥, 한 잔의 술도 빌어먹지 않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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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당신에게 배운 의술로는 생업은커녕 밥 한 그릇, 술 한 잔도 빌어먹지 않겠다. |
위 (36ㄱ)에서 중요한 것은 명사가 지시하는 개체이며, 그것의 수와 부류적 가치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한 그릇의 밥’과 ‘한 잔의 술’은 1이라는 수량보다는 ‘밥’과 ‘술’에 초점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36ㄴ)와 같이 후행 구성으로 바꾸면, 수량이 강조되는 것이다.18)
이것은 다음의 예를 비교하면서 이해할 수 있다.
(1) ㄱ. 앞에 가던 자동차 두 대가 사고를 당했다.ㄴ. 앞에 가던 두 대의 자동차가 사고를 당했다.
위에서 (1ㄱ)은 ‘앞에 가던 ‘자동차’가 여럿임이 전제되고 그 중에서 ‘두 대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1ㄴ)은 ‘앞에 가던 자동차’가 ‘두 대’이고 그것이 모두 ‘사고를 당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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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화용적으로 보면, 후행 구성은 수에 관한 정보가 새로운 것일 때 선호된다. 그렇기 때문에 후행 구성은 전형적으로 수량사에 의해 전달되는 정보가 새로운 것일 때 도입부로 쓰이는 경향을 띤다. 앞의 (1)에서 제시한 동화에서 도입 부분은 후행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간략히 하여 옮겨 쓰면 다음과 같다.
(37) |
ㄱ. |
옛날 어느 숲 속에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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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세 마리의 곰은 밥그릇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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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
세 마리의 곰은 의자도 하나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
위 (37)은 이야기의 전개 순서로 배열된 것인데, 도입부는 (37ㄱ)과 같이 후행 구성으로 나타나고 이후 반복될 때에는 (37ㄴ, ㄷ)과 같이 선행 구성으로 나타난 것이다.19)
이것은 후행 구성이 선행 구성에 비해 동사와 가까운 위치에 나타난다는 사실과도 일치한다. 국어가 문장 구성에서 동사에 가까운 것일수록 새로운 정보를 나타낸다고 보면, 후행 구성은 담화상으로 수량-신정보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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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선행 구성은 동일 지시물 묶음과 관련하여 특정한 개체를 반복적으로 지시하는 데 비해서, 후행 구성은 불특정 개체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38) |
ㄱ. 세 명의 친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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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친구 세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39) |
ㄱ. ??세 명의 비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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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비서 세 명을 구하고 있습니다. |
위에서 (38ㄱ)은 명사 ‘친구’가 화자와 청자의 인지 체계 안에서 한정되는데,20)
즉, 화자와 청자는 이때의 ‘친구’가 ‘철수, 영희, 영수’를 지시함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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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서 (38ㄴ)의 ‘친구’는 누구라고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39ㄱ)은 ‘구하고 있는 비서’의 범위 안에 포함되는 대상이 한정되지 않기 때문에 어색하고, (39ㄴ)이 적절한 표현이 된다.
선행 구성은 명사에 의해 도입된 대상을 반복적으로 지시하는 특징이 있어서 이어지는 문맥에서 그 대상을 지속적으로 형상화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선행 구성의 개체화 효과는 지시물을 좀 더 생생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데, 이것은 시나 소설 등의 서정적인 표현에서 많이 나타난다.
(40) |
ㄱ. |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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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저기에 한 사람의 중년에 가까운 여자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것이 비밀스러운 즐거움이었다. |
위에서 (41ㄱ)의 ‘술’은 이 작품에서 배경으로 형상화되며, (41ㄴ)의 ‘여자’는 뒤에 이어지는 사건과 관련을 갖는다. 이것은 선행 구성이 이어지는 문맥에서 중요한 특정 지시물을 언급하는 용법상의 특징과 관련되는 것이다.
4. 마무리
앞에서 국어 분류사의 형태적인 실현과 의미적인 부류화 양상을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보았다. 특히 이들에 대해 전통적인 수량 단위 표시 기능에서 벗어나 명사 지시물에 대한 의미적인 부류를 표시하는 기능을 중심으로 기술하면서, 이러한 의미 부류의 표시 기능이 국어 분류사의 본질적인 성격에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얼핏 보면, 국어에서 분류사는 불필요한 군더더기인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앞에서 제시한 ‘곰 세 마리’에서 명사 ‘곰’과 수량사 ‘세’만으로도 이들의 수량은 충분히 반영될 수 있으며, 명사 ‘곰’ 그 자체만으로도 그것이 동물의 부류에 속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어의 분류사는 명사 지시물이 존재하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그 부류를 구분함으로써, 그것의 내적·외적 속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리하여 특정 분류사와 관련되는 명사 지시물들은 동질적인 속성을 지니는 하나의 부류로 묶일 수 있음을 예측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분류사에 의한 수량 표현도 그 구성 형식에 따라 문법적이거나 화용적인 의미가 달리 실현된다. 이를 테면, ‘곰 세 마리’와 ‘세 마리의 곰’이 그 자체의 논리적 의미에서는 동일하다 할 수 있겠으나, 각각이 표현되는 상황과 관련해 보면 전달되는 의미는 반드시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명사 지시물의 수량에 초점을 두는가 아니면 수량이 한정된 명사 지시물에 초점을 두는가의 차이와 관련되는 것이다.
분류사에 의한 부류화는 언어 내적으로 보면 명사와 분류사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로 분석할 수 있으나, 여기에는 개별 언어 화자의 인지 구조나 문화, 사회 등과 같은 언어 외적 요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하여 분류사와 명사 사이의 선택 관계(즉, 분류사에 의한 명사 지시물의 부류화 양상)는 개별 언어권의 문화나 사회적 특성 등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국어의 분류사는 국어 화자들의 세계 인식에 대한 태도와 사고방식 등의 인지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국어 화자들이 오랫동안 구축해 온 문화와 사회 구조를 반영하는 언어 형태라는 점에서 그 존재 의의가 부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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