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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이병기시조의 예술성

김재홍∙경희대 교수, 문학평론가


1.

  가람 이병기(嘉藍 李秉岐, 1891∼1968)의 시조 창작은 1925년 「조선문단」10월호에 「한강을 지나며」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그의 시조 창작과 비평 활동은 한국 시와 전통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고, 우리의 현대 시조가 어떤 내용과 형식을 지녀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폭넓은 시사를 던져 준다. 그의 시조는 전통 문학사에 뿌리를 두면서도 새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서 거듭 태어나려는 혁신의 노력을 보여 줌으로써 전통의 현대적 계승을 일정 정도 성취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가람의 시조는 지금까지 ‘시조 중흥의 祖’로서 숭앙되거나 ‘시조를 옛시조에서 벗어나 근대 시문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여 준 것’이라고 찬양되는 대상으로서 높이 평가돼 온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섬세한 언어 감각에 의하여 한국적 리리시즘을 재현한 것’이라거나 ‘어둔한 듯한 말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절실한 내용을 회복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다소 비판적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람의 시조는 시 자체로서뿐만 아니라 시사적 위치에 있어서도 대체로 비중 있는 대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시조 작품은 『가람시조집』(문장사, 1939)에 처음 정리되고 『가람시조선』(삼중당, 1975), 『가람문선』(신구문화사, 1966)으로 집성돼 있지만, 그것이 가람의 전체 작품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는 가람시전집이나 가람전집의 간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조와 국문학 연구 및 수필 등은 시 문학사 연구나 국어 국문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에 가람 시조를 예술성과 현실 인식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이하 텍스트는 이병기,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을 참고한다).
  

2.

  모든 시의 예술성은 시에 쓰인 언어, 즉 시어의 쓰임새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것은 시어의 표현성, 독창성, 참신성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시어는 예술적 가치 구현의 한 척도가 된다. 가람 시조의 예술성도 이러한 시어에 대한 인식과 그 활용에서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詩歌는 詩語의 藝術입니다. 詩語로 하여 사람의 감정의 의미를 표현한 것입니다. 언어의 靈的 結晶인 한 아름다운 세계를 지어낸 것입니다. 이렇게 시가에 있어서 언어와의 관계가 중대합니다. 그러므로 시가의 세계를 엿보자면, 먼저 그 언어의 맛을 감촉할 줄 알아야 합니다(이병기, 「시조 감상과 작법」,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요컨대 시란 ‘언어의 靈的 結晶’이기에 시에서 언어는 예술성을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가람은 언어의 미적 가치에 주목한 시조 시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시조 인식이 지닌 근대성의 단초를 엿볼 수 있겠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시어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과 배려가 나타난다. 그것은 대략 고유어의 활용, 고어의 재발견, 방언의 쓰임새, 그리고 조어(개인 시어) 또는 조음소 사용 등으로 다양하게 구사되고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먼저 그의 시에는 한자어보다는 고유어의 활용이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해만 설풋하면 우는 풀버레 그 밤을
  다하도록 울고 운다.
  
  가까히 멀리 예서 제서 쌍져 울다
  외로 울다 연달어 울다 뚝 끈쳤다
  다시 운다 그 소리 단조하고 같은 양해도
  자세 들으면 이놈의 소리 저놈의 소리 다 다르구나.
  
  남몰래 겨우는 시름 누어도 잠 아니 올 때
  이런 소리도 없었은들 내 또한 어이하리.
  ―「풀버레」
  시조이면서도 현대 시 같은 참신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시어와 그 쓰임새에서 연유한다. 한자 투가 아니라 고유어가 활용되면서 자연스러운 율조와 어감을 통해 새로운 시조의 격조를 이루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근래 시조의 새 맛이 적다는 것은 그 用語에 대한 評도 된다. 그 용어는 반드시 다 진부한 말을 쓰는 것도 아니지마는, 어쨌든 이러한 평을 아니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중략……) 이러한 漢文文句도 어느 특수한 경우에는 쓸는지도 모르나 항다반 써야 할 것은 아니다. 이러한 漢文文字를 쓰면 쓴 만큼 그 시조에는 한문 냄새가 많이 나는 듯하다. 그리하여 독자에게도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한다(이병기, 「시조는 혁신하자」 ꡔ가람문선ꡕ, 신구문화사, 1966).
  이러한 가람 스스로의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시조가 새로운 맛을 내기 위해서는 한문 투어나 한자 중심 태도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라는 말이다. 그것은 뒤집어 말해 가능한 한 우리말, 즉 고유어를 갈고 닦아 쓰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실제로 가람의 시조에는 한자가 사용되고 있는 예가 적지 않게 발견되지만, 전체적인 면에서는 고유어의 발굴과 확장을 위한 노력이 집중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인용 시에서도 보듯이 고유어를 활용한 시들이 정서적 환기력이 강하고 완성도 또한 높음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 이러한 고유어 활용에 대한 관심의 소산으로 옛말, 즉 고어(古語)를 적극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도 시의 예술성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외오 두고두고 그립어 하든 그대
  다만 믿어 오기 고운 그 맘이려나.
  이제야 보는 얼굴도 맘과 다름없구나.
  
―「그 뜻」부분
  
  사니 산가하여 살음에 조이는 마음
  괴오든 오누도 벙그러이 지내는 이날
  이곳에 님을 뫼심이 다행하다 하더니
  
―「追悼·1」부분
  
  한두 株 감나무는 집마다 심어 두고
  열매는 붉기 전에 저자로 다 나가고
  고운 잎 남은 그 가지, 꽃은 아니 바꾸리.
  
―「故土」부분
  
  이제야 피는 양은 때가 늦어 그리는지
  푸른 닢 사이사이 흰 숭이 붉은 숭이
  제여곰 수줍은 듯이 고개 절로 숙인다.
  
―「함박꽃」부분
  인용한 네 수의 시조에서 옛말, 즉 고어가 활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뜻」에서는 ‘외오 두고/그립어 하든’과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追悼·1」에서는 ‘괴오든’(사랑하던)이 옛말에 해당한다. 또한 「故土」에선 ‘저자’가 대표적인 고어이며, 「함박꽃」에선 ‘제여곰’이 그러한 예가 된다. 이러한 옛말의 활용은 국어 미의 재발견이라는 미학적 의미에서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일제 강점하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시조와 한글 사랑을 통한 민족혼 지키기라는 민족사적 의미에서 보더라도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러한 고유어 또는 옛말은 가람 시조 도처에서 적극 활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셋째로 가람 시조에는 지역 말, 즉 방언의 활용이 주요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다시 옮겨 심어 분에 두고 보는 파초
  설레는 눈보라는 창문을 치건마는
  제먼여 봄인 양하고 새움 돋아 나온다.
  
―「파초」 부분
  
  병아리 어미 찾어 마당가에 뱅뱅 돌고
  실엉 위 어린 누에 한잠을 자고 날 때
  누나는 나를 다리고 뽕을 따러 나가오.
  
―「그리운 그날·1」 부분
  
  해마다 이곳에도 봄은 돌아오지마는
  벍언 모래 비알 풀 한 닢 아니 나고
  서글픈 개구리 소리 재를 넘어 들리오.
  
―「주시경 선생의 묻엄」 부분
  
  어스름 저므는 날 누가 나를 부르노라.
  으슷한 골을 찾어 성모르로 돌아가니
  재 넘어 달은 흐르다 구름 새로 숨어라.
  
―「밤·1」 부분
  인용 시들에는 지역 말로서 전라 방언이 자연스럽게 활용됨으로써 시의 어감과 분위기를 맛깔 나게 만들어 준다. 향토적인 서정을 물씬 풍길뿐만 아니라 민족어의 영역을 확대하고 심화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방언의 활용은 실상 그것이 지역적 정서의 계발과 함께 언어적인 면에서 시적 평등을 실천하는 효과적인 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시의 심미적 가치를 상승시키는 중요한 동력으로서 작용한다. 아울러 이러한 방언 활용은 시적 친화력을 유발하는 것과 더불어 민중적 생명력을 제고하는 데도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한다. ‘제먼여/실엉/다리고/벍언/비알/으슷한/성모르’ 등의 방언 활용은 고유어나 고어 활용과 함께 민족어의 완성을 향한 노력의 징표라는 점에서 시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넷째로는 개인 시어로서 조어 또는 조음소 활용에 대한 섬세한 배려를 꼽을 수 있다.
  ① 담머리 넘어 드는 달빛 은은하고하두개 소리 없이 나려지는 오동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오동꽃」
  
  ② 맵시며 차림차리 단장한 미인이다.유달리 맑은 향취 은은하게 움즉이고 서로히 대할 적마다 웃는 듯도 하구려.
  
―「옥잠화」 부분
  
  ③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난초ㆍ1」
  
  ④ 밤은 고요하고 天地도 한맘이다.스미는 瑞香의 향기 몸은 더욱 곤하도다.어드런 술을 마시어 이대도록 취하리.
  
―「瑞香」 부분
  개인 시어(ideolect)란 시인이 개인적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조어 또는 조사법(措辭法, poetic diction)을 말한다. 가람의 시에는 이러한 개인 시어 또는 개성적인 조사법이 자주 활용되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시 ①에서 개인 시어는 ‘담머리/하두개’ 등을 꼽을 수 있다. ‘담머리’는 담장 위를 뜻하는 조어이며, 하두개는 ‘한두 개’의 시적 조어에 해당한다. 의미와 소리를 고려하여 만들어 낸 개인 시어라고 하겠다.
  시 ②에선 ‘차림차리’가 그 한 예이다. ‘차림새’라는 말을 변용하여 만든 새로운 말의 쓰임새라고 하겠다.
  시 ③에서는 ‘조오다/서늘바람’이 그 예가 된다. ‘조오다’는 ‘졸다’의 변격으로서 조음소 ‘오’가 삽입되어 부드러운 어감과 함께 음조를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서늘바람은 서늘하게 부는 바람을 명사로서 통합한 경우이다.
  시 ④에서는 ‘어드런/이대도록’이 여기에 해당한다. ‘어드런’은 ‘어떤’을 변화시켜 부드러운 어감과 음수율 조절 기능을 수행한다. ‘이대도록’도 ‘이토록’을 변화시킨 경우라고 하겠다.
  이처럼 가람은 있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과 함께 스스로 시어를 만들거나 변화시켜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의미와 뉘앙스를 확대하고 심화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경주하고 있다. 실상 『가람시조집』에는 ‘하얀한/밝안하고/서들대다/에두른/되오/강파른/에운/외로/이아치다/고곰/청처짐/헤뜨다/애나무/괴앙이/성모르/콩서리/대공/되바람/느꺼운/버들눈/숭어리/슳어하다/볏가리/모롱이/소소리바람/투술한/옹곳/솔고/오또기’ 등 수많은 고어, 방언, 조어 등 고유어가 다양하게 활용됨으로써 시의 심미적 가치를 고양시키는 한편 민족혼의 표상으로서 민족어의 완성을 향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관심을 환기한다. 실상 가람 자신이 “그러므로 시조―詩歌―를 지으려면 우리말에 대한 많은 공부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말 공부가 매우 부족하다. (……중략……) 우리말의 性質, 形態, 妙味, 美感들도 알고 그리고 쓰고 짓고 하여야 한다.”라고 한 것도 우리말의 절차탁마와 확대·심화가 시조의 예술성 확보와 완성도 고양, 그리고 미적 근대성 확보에 지배적인 관건이 됨을 강조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3.

  지금까지 가람의 시조는 멋과 풍류의 시로서 그가 「문장」지의 중심 인물 또는 문장파 세계관의 비조로서 논의되는 것이 보편적인 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언어의 조탁에 남다른 경지를 열어 보인 것과 시조라는 틀을 살리되 거기 옹색하게 얽매이지 않고 시조다운 시조를 살려 낸 시조 중흥의 조(祖)로 평가돼 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정당한 논지이고 바람직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서 우리는 시조시학사에서 가람 시조가 민족 문학의 한 전범으로 놓임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 문학이란 무엇이던가? 한마디로 그것을 민족이 처한 현실문제를 다룬 문학이라고 정의해 볼 수는 없을 것인가? 가람 시조가 전통적인 민족 문학의 정수로서 시조 장르를 고집하고 개척해 가면서 민족이 처한 현실문제를 다루고 그 핵심 문제로서 분단 비극과 그 극복에 대한 염원과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면, 가람 문학이야말로 바람직한 민족 문학의 한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점에서 앞으로도 가람 시조시학에 대한 총체적이면서도 새로운 시각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면서도 절실한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