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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택부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 위원장 |
한글날 국경일 승격 축하 말씀 보기
지난해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의안 번호 173572)’이 통과됨으로써 세계 최고의 글자 한글을 기리는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었다. 한글날이 공휴일에서조차 제외된 지 15년 만의 일이었다. 그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한글날의 승격을 위해 몸 바쳐 싸워 왔고, 노구를 이끌고 항상 그 중심에 서서 대열을 이끌었던 사람이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던 전택부 선생이다.
평생을 한글 운동과 YMCA 운동을 삶의 두 가지 축으로 삼아 흔들림 없이 외길을 걸어온 ‘오리 할아버지’ 전택부 서울 YMCA 명예 총무를 만나 국경일이 된 한글날을 맞이하는 감회를 들어 보았다.
고은 시인은 “시인은 가슴속에 소년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시인은 아니지만 아흔을 넘긴 전택부 선생의 가슴속에도 소년이 간직되어 있다. 인터뷰는 그 소년을 끌어내기 위해 애쓰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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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자 : 전택부(서울 YMCA 명예총무)
질문자 : 장승욱(작가)
때 : 2006년 8월 17일
곳 : 전택부 선생 자택
장승욱 : 선생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건강하시지요?
전택부 :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 여기저기가 다 아프죠. 혈압 때문에 약을 먹는데, 약을 먹으면 힘을 못 쓰겠어요. 오늘 뉴스에서 강원룡 씨 부음을 들었어요. 나보다 두 살 아래지만 가까운 친구였는데. 이렇게 친구들이 하나씩 가는 걸 보면 다음은 내 차례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요.
장승욱 : 돌아가신 친구들 중에 누가 가장 생각나십니까?
전택부 : 가까운 친구들이 반체제 운동을 많이 했어요. 문익환 씨도 옛날부터 가까운 친구죠. 나보다 세 살 아랜데, 일본서 공부할 때는 내 후배였고. 장준하 씨도 나보다 세 살 아래 후배인데 그 사람이 자꾸 권해서 내가 ꡔ사상계ꡕ 초대 주간을 맡기도 했지요. 그 사람들 다 착한 사람들인데 나와는 운동의 방법이라고 할까 그런 면에서 약간 생각들이 달랐어요. 그 사람들이 자꾸 생각납니다.
장승욱 : 건강을 유지하시는 비결이 무엇인지요?
전택부 : 규칙 생활을 하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죠. 그리고 나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죽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심 같은 것이 없어요. 죽으면 죽지, 가게 되면 가지 하는 그런 낙천주의지요. 그저 신앙인으로서 늘 감사하면서 내 할 일만 하면서 살려고 해요. 돈이나 명예를 따라다녀 본 적이 없으니까 걱정할 것도 없고 내 마음이 가리키는 대로 살아가고 있어요. 다행히 아직까지 구미를 잃지 않아서 식사도 거르지 않고 있고.
장승욱 : 평생 한글 운동에 헌신하신 분으로서 한글날을 앞두고 감회가 남다르실 줄 압니다. 한글 운동에 뛰어드신 계기가 있습니까?
전택부 : 광복 전에 일본에 유학하고 있을 때부터 한글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그렇다고 한글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거나 전공한 것은 아니고 한 개인으로서 한글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사랑했던 것이죠.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땐데, 미나미 총독이란 자가 우리말을 다 없애고 교과서도 다 없애고 하면서 우리말 말살 정책을 폈어요.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저놈을 죽이고 나도 죽자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누구나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는 법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총을 쏠 줄 아나요, 안다고 한들 권총이 어디 있나요. 아무런 방법이 없으니 그냥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한복을 입고 도쿄 번화가를 다니면서 요즘 말로 일인 시위를 하고 그랬죠. 그렇게 화병이 나서 다 죽게 되었는데, 이번엔 또 학병에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거요. 그래 이 핑계 저 핑계 대서 학교를 중퇴하고 돌아왔어요. 돌아와 얼마 있으니 해방이 됐죠. 그때는 다 죽은 목숨인 줄 알았는데.
해방 직후에는 아직 우익이니 좌익이니 하는 구분이 없었고, 공산당도 그때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고, 우선 치안 유지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죠. 또 9월이 되면 학교를 열어야 하는데 선생이 우리말을 압니까, 무슨 교과서가 있습니까. 답답한 상황이었어요. 우리 집이 원산 근처였는데, 어느 정도 치안이 자리 잡히니까 날더러 한글 강습을 해 달라고 합디다. 그때 나는 한글 학회(조선어학회) 회원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고 그저 일개 시민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건지 한글학자로 알려져 있었단 말이에요. 어디 한번 해보자 싶어서 국민학교, 중학교 선생들을 모아서 1주일씩 강습을 하고 끝나면 또 다른 지역으로 돌아다니면서 강습을 하고 그렇게 한 두 달 반쯤 했어요. 그러니까 그땐 모두 처음 듣는 소리거든. 그때 뭐 홀소리나 닿소리 같은 말이 있었나요. 그저 ‘가갸거겨고교구규’ 그러기나 했지 기역 니은 디귿은 몰랐거든. 선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이게 세상에서 으뜸가는 문자다 자랑했죠. 교과서도 교본도 없이 내 마음대로 가르쳤는데 그래도 인기가 아주 높았어요.
그러다 생각해 보니 혼자서 이렇게 개인적으로 하는 것보다 조선어학회 본부 같은 곳에서 교본을 만들어 나눠 주면 좋겠다 싶어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때 서울은 해방됐다고 난리야. 저마다 한몫 잡을 생각만 했지 조선어학회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실망하고 그냥 돌아섰어요. 우리 형이 원산에 계셨는데 내가 가니까 너 집에 못 간다, 소련 헌병대가 널 잡으려고 찾다가 없으니까 네 친구들까지 다 붙들어갔다, 너 있는 데를 대라고 고문한다더라 그럽디다. 그래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그때 우리 안사람이 친정에 가서 애를 낳았는데 그것도 보지 못한 채 변장을 하고 함흥까지 갔다가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러니까 내가 탈북자인 셈이죠. 그런데 그때 강습을 받았던 사람에게서 방금 전화가 왔어요. 선생님 모습이 기억난다고. 나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내가 그때 한복을 늘 입었대요. 그러면서 한글날이 국경일이 된 것을 축하한다고 그럽디다.
장승욱 : 말씀하신 대로 한글날이 국경일로 승격됐습니다. 많이 기쁘셨죠?
전택부 : 말로 다할 수가 없지요.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진 것이 ’90년이었던가요? 그때부터 한글 학회나 외솔회 같은 한글 관련 단체들이 엄청나게 싸웠죠. 15년쯤 전이에요.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날더러 위원장을 하라고 해서 힘겨운 일을 맡게 됐어요. 나는 한글 학회 회원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안 되겠다, 싸워야겠다 생각했어요. 우리의 말과 글이 홀대받는 것을 보고 너무나 기가 막혀서 목숨 걸고 싸워 보자고 마음먹었지요. 옛날 세종대왕이 그랬듯이, 또 일정 때 조선어학회 선열들이 그랬듯이, 아무리 화가 나고 기가 막혀도 주먹 한번 휘두르지 않고 오랜 참음과 관용, 오랜 설득과 정신력으로 싸웠습니다. 그렇지만 참 어려웠어요. 전국의 몰지각한 사람들과 싸워야 하지, 경제인들은 노는 날이 많다고 반대하지, 그래서 국회에서 부결이 되기도 하고. 그래도 낙심하지 말자, 계속해야 된다 다짐하곤 했지요. 그래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이 승전보를 집에 혼자 앉아 있다가 듣고 감격해서 벌떡 일어나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불렀습니다. 지난 1월 19일에 국회에서 ‘한글날 국경일 제정 축하 모임’이 열렸는데, 의원들도 많이 나오고 동지들도 모인 그 자리에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건 내 생각이 관철돼서 그렇다기보다는 민심이 그렇게 되게 만든 것입니다. 국회의원 몇 사람이 힘쓰고 전택부가 뭘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민심에 의해, 하늘의 뜻에 의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승리는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7천만 겨레 모두의 것입니다.
장승욱 :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었으니 이제 한글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실 계획이신가요?
전택부 : 한글 학회를 비롯해 한글 운동, 국어 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모두 하나로 뭉쳐서 우리말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해야겠지요. 한글날이 국경일 되기 전까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고 ‘우리의 소원은 한글날 국경일이오’를 외치고 다녔어요. 그런 내용으로 책도 내고 했는데, 그것이 이뤄지고 나니까 새로운 소원이 생겼어요. ‘우리의 소원은 훈민정음으로 국제 표준 공용 문자를 만드는 일이오.’ 요즘은 이렇게 외칩니다. 두고 보세요. 꼭 이렇게 될 겁니다. 지금 세계에서는 고유의 말이 있어도 문자가 없는 민족들이 다 죽어가고 있어요. 문자가 없으니까 죽는다는 말이에요. 언어는 바로 생명인데, 그러니까 언어를 살리는 일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에요. 지금 기독교 단체들이, 기독교 교회나 교파에서 공식으로 외국에 선교사를 보낸 것이 천 명이 거의 됩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전한다는 그 목적만 있지 그 방법은 별로 좋은 것 같지가 않아요. 우리 훈민정음, 한글을 가지고 지금 죽어가는 약소민족들이 문자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문맹 퇴치를 하는 것, 이런 운동은 기독교 복음에도 관계되는 일이고, 인류의 역사에도 크게 이바지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장승욱 : 요즘은 어떻게 소일하고 계신가요?
전택부 : 밖에 나가서 활동은 못하지만 집에서 글은 더러 써요. 가끔 청탁이 들어오거든요. 청탁이 아니더라도 나 혼자서 생각나는 게 있으면 쓰지요.
장승욱 : 주로 어떤 글을 쓰십니까?
전택부 : 2008년 8월 31일이 한글 학회 창립 100주년이 되는데 한글 학회 이사장이 전화를 하더니 날더러 10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이 되라는 거요. 그래 펄쩍 뛰었지. 내가 다 죽게 된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느냐고, 이제 끝낼 때가 됐다고. 그래도 이사회에서 그렇게 결의를 했다고, 일 안 해도 좋으니 이름만 빌려 달라고 해서 내가 허락을 안 했어요. 회장을 하든 안 하든 간에 그 일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됐어요. 앞으로 우리나라의 한글 운동은 우리 한글을 전 세계의 표준 문자로 만들어서 문맹 퇴치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해서 인류 역사에 공헌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는 것을 자꾸 말하게 되고 글로도 쓰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외솔회가 한글날이 국경일 된 기념으로 글을 써 달라고 해서 「한류는 바람을 타고 한글은 쌍두마차를 타고」라는 제목으로 써서 보냈지요.
장승욱 : ‘쌍두마차’는 무슨 뜻입니까?
전택부 : 쌍두마차가 뭐냐면 국회에서 우리말을 사랑하는 국회의원 60여 명이 ‘한글 세계화 운동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나는 재야에 있는 ‘씨 모임’을 만들어야 된다고 했어요. 씨이란 말부터 설명을 하자면 유영모 선생이라고 계셨어요. 이분이 기인입니다. 수학의 천재요, 화학의 천재요, 역학의 천재이기도 했지요. 우리 한글을 참으로 사랑하셨는데 유난히 아래아 자를 많이 썼어요. 이 양반 글을 보게 되면 아래아 자 투성이거든. 내가 수필도 쓰고 그랬지만 아래아 자는 천지인(天地人) 가운데 하늘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양반은 하늘과 가까운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아래아 자를 많이 썼어요. ‘씨’도 함석헌 씨가 만든 말이 아닙니다. 유영모 선생이 쓰니까 그걸 가져다 쓴 것이지요. ‘씨’, 참 좋은 말입니다.
이번에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드는 과정에서 느낀 건데, 우리 국민들 중에는 국어, 우리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이 씨입니다. 씨은 일반 백성이고 보통 사람들이거든요. 힘은 없지만 이런 무명한 존재들이 모이면, 그것이 바로 천심이 되고 민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씨 모임이 만들어지면 국회의원 모임과 더불어 쌍두마차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유네스코가 만들어 놓은 국제 문맹 퇴치 프로그램, 말하자면 그것이 고속도로인데, 고속도로를 쌍두마차를 타고 달려가자 이겁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국제적으로 나가자, 아프리카까지 가서 한글의 우수함을 알리자, 이제부터의 싸움은 국내가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펼쳐진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명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장승욱 : 진정한 한글의 세계화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택부 : 아까 말한 ‘한글날 국경일 제정 축하 모임’을 갖기 전에 내가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 사무총장 이삼열 씨에게 전화를 했어요. 이런 일이 있는데 축사를 좀 해 달라고. 그런데 그 양반이 모임에 나와서는 나보다 한 술 더 떠서 우리 한글을 국제 표준 공용 문자로 삼아서 한글을 이용해 문맹 퇴치 운동을 펼치겠다고 아주 열성적으로 말을 합디다. 남들은 내가 시킨 게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닙니다. 분위기가 이렇게 잡혀 가고 있으니 이제 한글 학회 같은 데서 앞장서서 뒷받침을 해야 합니다. 뒷받침이란 게 별 게 있나요? 연구를 하고 힘을 모으는 것이지요. 유네스코에서도 이렇게 나오는데 신바람 나게 갈 수 있잖아요. 내가 「한글의 성서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쓴 일이 있어요. 성서신학적 입장에서 한글의 의미를 분석한 글인데, 미국에 사는 학자에게 보여줬더니 한글이 하늘 글자라는 것을 처음 발견했다고 합디다. 한글의 가능성은 이처럼 무한합니다.
장승욱 : 선생님의 좌우명이라고 할까요? 이것만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전택부 : 내가 열다섯 살 때부터 좌우명으로 결정하고 지켜 온 것이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우리 아버님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관북에서는 유일한 기독교 학교이자 민족 교육기관이었던 함흥 영생고등학교에 보냈어요. 아버님이 왜 그러셨는가 짐작해 보면 서양 문명을 빨리 받아들여야 일본인들에게 천대를 안 받는다 이런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 거기 가서 예수를 믿게 됐지요. 처음으로 성경을 읽다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구절을 만났어요. 그것이 그때부터 내 좌우명이 됐어요. ‘먼저’라는 말이 중요하지요. 돈 먼저 따지지 말고 명예 먼저 구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말을 내 평생을 통해 지켜 왔어요. 그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YMCA운동에 헌신했고, 이 나라, 내가 태어난 조국을 위해서는 한글 운동을 열다섯 살 때부터 평생 해 온 셈이죠. 이 두 가지만 하면서 살아온 것이 내 평생입니다.
장승욱 : 지금까지 한글 운동을 해 오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때는 언제인가요?
전택부 : 1954년에 한글 간소화 파동이 있지 않았어요. 이승만 박사가 현행 한글 맞춤법은 복잡하고 비과학적이니 옛날처럼 소리 나는 대로 쓰자는 억지를 부려 일어난 파동이었죠. 그때 내가 ꡔ사상계ꡕ 주간으로 있었는데, 이게 될 말이냐 싶어서 잡혀갈 각오를 하고 9월호를 한글 간소화 문제 특집호로 냈습니다. 「독립투쟁사 상에서 본 한글 운동의 위치」라는 제목의 특집으로 9월호 지면의 3분의 2 이상을 채운 겁니다. 그걸 보고 그랬는지 이승만 박사가 간소화 방안을 철회해서 사태가 마무리됐습니다. 그래서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 뜻밖에 절을 다 받아 보는 일도 있었지요. 그때까지 외솔 선생을 뵌 적이 없었어요. ꡔ우리 말본ꡕ이라든가 책을 통해서만 만났을 뿐이었는데, 9월 특집호가 나온 다음 어느 날 외솔 선생이 사무실로 찾아오셨어요. 그리고는 “전택부 선생이 어디 계신가요” 물어서 여자 사환이 저를 가리키며 저 분이라고 했겠지요. 제가 깜짝 놀라서 “아니 선생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저올시다” 하며 응대를 했더니 그 분이 다짜고짜 저를 밀어서 제 의자에 앉히지 뭡니까. 그러고는 책상 반대쪽으로 돌아가서 저에게 절을 하는 겁니다. 정말 대단한 어른이셨지요. 저보다 20년도 더 연상이신데…… 너무 놀라고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요.
장승욱 : 지금까지 많은 일을 이뤄 내셨는데,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전택부 : 나는 공부를 많이 한 학자도 아니고, 높은 직위를 누려 본 적도 없는 그저 보통 사람이다 보니 생각하는 사업이 있더라도 일을 해 나가자면 좀 외로워요. 그래 내가 우스갯소리로 나는 평생 정규군의 사령관은 못 되고 그저 언제나 의병대장이다 그럽니다. 그렇게 외로운 싸움을 해 왔다 이거죠. 그렇지만 의로운 싸움은 결국은 이긴다는 것을 나는 몸으로 체험했어요. 내가 뭐 이렇다 내세울 큰 일은 한 것이 없지만, 내가 싸우자고 나선 일에 있어서는 져 본 일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가 있지 않습니까? 20년인가 30년 전에 한국일보에 지하철을 놓는 데 지장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파헤쳐서 다른 데로 옮긴다, 아니면 아예 없애 버릴 것이라는 기사가 났어요. 그래서 내가 화가 났지. 내가 한국 기독교 교회사는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입니다. 거기 어떤 사람들이 묻혀 있는데 이런 짓을 하느냐 그 말입니다. 당장 기독교 신문사에 찾아가서 내게 지면을 허락해 달라, 이런 일이 있으니 내가 연재를 하겠다,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지 그걸 쓰겠다, 그래서 1년 반쯤 주간 신문에 연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지금은 공원이 되고 절두산 천주교 순교지와 함께 순례지가 됐어요. 그때 이렇게 될 걸 예상하거나 바랐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됐어요. 그래서 옳은 일을 위해서 싸우면 축복을 받게 된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장승욱 : 옳은 일인데도 실패한 경우는 없으셨습니까?
전택부 : 단 한번 실패한 경우가 인천 국제공항입니다. 그때 공항 이름을 짓기 위해서 국민을 상대로 공모를 하고 그랬지요. 우리는 세종공항으로 이름을 붙이기 위해 애썼는데 결국 성공하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 이름을 다시 바꾸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는 동지들이 있습니다. 그때 정부에서는 공항에 사람 이름을 붙이기 곤란하다는 이유를 댔는데 그게 말이나 됩니까. 인도에는 인디라 간디 공항이 있고, 프랑스에는 드골 공항, 미국에는 케네디 공항이 있지 않습니까? 이탈리아에는 다빈치 공항이 있고요. 대체 왜 안 되는가 말이에요. 우리가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이름을 쓰자고 하는 건데 그것을 깔보는 것이지요. 자존심을 좀 가졌으면 해요. 나는 늘 세종 하나만 팔아먹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두고 보시면 알겠지만 세종은 팔아먹을 수 있어요. 틀림없이 돈이 됩니다. 그리고 학자로서가 아니라 신앙인의 입장에서 한글 운동을 해 온 사람으로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종은 하늘이 이 나라에 보낸 세계적인 선지자라고.
장승욱 : 영어 조기교육 열풍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택부 : 영어를 배우겠다고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수 없지요. 다만 안 써도 괜찮은 경우에도 자꾸 영어를 쓰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은 바로 사람의 얼을 나타내는데, 말을 못 지키면 그게 바로 ‘얼빠졌다’고 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일반인들은 이런 의미를 잘 모르니까 교육자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텔레비전을 보니까 「우리말 겨루기」라는 것이 있던데 참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언어의 장단에 대한 문제들이 나오는 걸 보면 바로 이런 걸 해야 하는데 하고 감탄을 합니다. 요즘은 학교에서도 이런 교육을 전혀 안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우리말 겨루기」를 보면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우리말을 잘 알고, 또 사랑하고 있는지 감탄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희망이 있다, ‘씨’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장승욱 : 일부에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전택부 : 내가 글에도 여러 차례 썼지만,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말은 한 사람의 생명인데 우리가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미국 사람이 되겠어요 영국 사람이 되겠어요? 우리는 우리말을 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인데, 그걸 잊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자기 말을 놔두고 남의 말을 쓴다면 얼빠진 사람이 되고 만다 이 말이에요. 사람마다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장승욱 :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요를 들으면 한 문장은 우리말로 하고 한 문장은 영어로 하는 식으로 영어가 아주 많이 섞여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택부 : 얄팍한 장삿속에서 나온 것들이니까 조금씩 고쳐 나가야겠지요. 그런 면에서 국립국어원 같은 곳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어요. 한글 학회는 학자들의 모임이니까 아무래도 그런 일을 하기가 쉽지 않지요. 국민들을 지도하고 깨우치는 일을 국립국어원 같은 곳에서 적극적으로 해 주기를 바랍니다. 지금 한글 사랑하자고 만들어진 단체들이 참 많습니다. 단체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개인들도 많지요. 예를 들어 한글을 가지고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고, 한글을 가지고 춤을 추는 무용가들도 있고, 한글을 가지고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누가 시켜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 사람들과 단체들의 역량을 결집해야 합니다. 한글 학회를 비롯해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뜻을 모아 앞으로의 한글 운동을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꾸려 나가야 합니다. 나는 한글 학회 창립 100주년이 그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장승욱 : 마지막으로 국립국어원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전택부 :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다만 활동을 좀더 활발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우리말이 자꾸 오염되는 것을 막고, 나쁜 말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미리 예방 조치를 취했으면 합니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도 열심히 해 주었으면 합니다.
장승욱 : 오랜 시간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께서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2년 뒤에 있을 한글 학회 100주년 행사도 잘 치르시길 빕니다.
전택부 : 고맙습니다.
한글날 국경일 승격축하 말씀
전택부∙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 위원장
존경하는 한글 사랑 동지 여러분, 국회의원 여러분, 숙녀 신사 여러분, 공사 간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이 참석하여 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자리는 서로 노고를 치하하고 축배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지난해 12월 8일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하기 위한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드디어 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된 지 15년 만이오,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 국민 추진 위원회’가 생긴 지 5년 만의 일입니다.
그동안에 우리는 얼마나 애를 태웠습니까? 국회의원들은 국회에서, 교사들과 학자들은 학교와 학계에서, 일반 국민들은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서 추락된 한글날의 위상을 되찾기 위하여 싸워 왔습니다. 이 싸움은 처절한 전쟁이었습니다. 우리의 말과 글이 홀대받는 것을 보면 너무나 기가 막혀서 목숨 걸고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이제 끝나고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7천만 온 겨레 모두의 것입니다. 노는 달이 많다고 해서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 버렸던 몰지각한 관료들과 정치인들과 경제인들도 자기네 잘못을 뉘우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승리는 온 겨레 모두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승리는 폭력 시위나 때려 부수는 식의 승리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투쟁의 결과입니다. 옛날 세종대왕이 그랬듯이, 또 일정 때 조선어 학회 선열들이 그랬듯이, 아무리 화가 나고 기가 막혀도 주먹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오랜 참음과 관용, 오랜 설득과 정신력으로 싸워서 이긴 승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승리를 세계만방에 고하고 문화 강국으로서 우리의 위상과 자존심을 떨쳐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승전보를 집에 혼자 앉아 있다가 듣고 감격하여 벌떡 일어나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불렀습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숙녀 신사 여러분, 이제 우리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숨을 돌려야 합니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위원회’는 자진 해산됩니다. 나 같은 힘 없는 노병은 일선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그동안 나와 함께 싸워 주신 전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전쟁이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전쟁이 또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우리의 전쟁은 우리 자신을 살리기 위한 전쟁이었으나, 앞으로의 전쟁은 남들을 살리기 위한 전쟁입니다.
얼마 전에 한 외국 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 현재 지구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 수는 약 8800개인데, 그중 문자를 가지고 있는 언어 수는 그 삼분의 일도 못 된다고 합니다. 그나마 그것도 알파벳 문자와 한자 세력에 밀려서 2100년경이 되면 그 언어의 90%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언어가 소멸된다는 것은 곧 인간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인간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유 문자를 못 가진 약소 민족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영문 알파벳이나 한자를 빌려서 쓰는 민족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알파벳 문자와 한자처럼 쓰기 어렵고 비과학적인 문자는 없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영어의 A 자는 경우에 따라 ‘ㅔ,ㅣ’만 아니라 ‘ㅏ, ㅗ, ㅐ’로도 읽어야 하고, O자는 ‘ㅗ’만 아니라 ‘ㅏ, ㅜ, ㅐ’로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써 놓고도 읽지 않는 글자가 수두룩합니다.
그리고 중국어의 경우, 중국인들은 “지금 몇 시요?” 라는 것을 ”센자이 지 덴즁“하며 한자로 쓸 때에는 ‘現在畿點種’이라고 씁니다. 이 말을 한글로 쓴다면 26획만 그으면 되지만 한자로는 무려 63획을 그어야 합니다. 이렇게 쓰기가 어렵고 비경제적인 글자는 세계에 없습니다.
폐일언하고,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죽어 가는 인류의 언어를 살리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언어는 민주화 투쟁 현장에서 흔히 쓰이는 언론의 자유 같은 그런 정치적 학문적 언어는 아닙니다. 그보다 더 원초적인 언어입니다. 이를테면 엄마가 아기에게 자장가를 부르면서 하는 그런 언어입니다. 아기가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울부짖는 그런 원초적인 언어입니다. 이런 언어가 자꾸 죽어 가기 때문에 우리가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이미 유네스코(UNESCO)는 고속도로를 닦아 놓았습니다. ‘세종대왕 문맹 퇴치상’ 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유네스코가 미국이나 영국이나 프랑스나 중국이나 일본의 제왕 이름을 따지 않고 ‘세종대왕’을 가지고 문맹 퇴치상을 만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훈민정음은 인류 역사상 제일 쓰기 쉽고 배우기 쉽고, 28개 문자만 알면 무슨 말이든지 다 다룰 수 있는 국제적 문자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숙녀 신사 여러분, 우리 한글은 무기에 비하면 핵무기보다 더 강한 무기입니다. 이 무기를 가지고 우리는 유네스코가 닦아 놓은 고속도로를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어 승전보가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전해 오고 있습니다. 한글은 한자 전용 지역인 중국 대륙까지 야금야금 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한글은 한류를 타고 최고의 문화 상품으로 잘 팔리기도 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한글 사랑 동지 여러분, 새해를 맞이하여 더욱 복 많이 받으시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많은 공헌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06년 1월 19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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