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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 엽서처럼 돌아온 그녀 ―한국 소설과 우편 제도 |
김 철∙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선의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이 전기와 전신, 전화의 원리를 배우고 실습할 목적으로 38명의 유학생을 이끌고 중국 텐진[天津]의 기기국(機器局)에 파견된 것은 1881년 12월의 일이었다. 텐진에 도착한 김윤식은 놀라운 물건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것은 텐진에서 상해로 연결되는 중국 최초의 ‘전봇대’였다. 그의 일기인 “음청사(陰晴史)”는 처음으로 전봇대를 본 한 조선인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 이리하여 전선을 보았는데, 텐진에서 시작해서 상해까지 4천여 리에 이른다. 수십 걸음마다 지렛대 같은 것을 하나씩 세우고 구리 밧줄을 두 가닥으로 걸고 길가에 서로 이었다. 행인이 그 아래로 지나다니는데, 함부로 망가뜨리지 못하니 그 위엄이 가히 볼만하다.(自此見電線 起於天津 達於上海四千餘里 數十步立一桿 掛銅絲兩條 相續於路 行人由其下往來 無敢傷損 可見立規之嚴也.)
이 유학생들 가운데 상운(尙澐)이라는 학생이 특히 재주가 뛰어났다. 1882년 3월 22일 그가 소정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었을 때, 중국 당국은 그로 하여금 스물한 점의 전기 기계들을 지니고 귀국하도록 허락했다. 조선 최초의 전기 기사라고 할 그가 들고 온 짐 속에는 두 개의 ‘덕률풍(德律風 : Telephone)’이 들어 있었으니, ‘텔레폰’의 음을 빌리되 ‘덕을 펼치는 바람’이라고 멋지게 번역된 이 물건이 바로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전화기였다.1)
진기홍, 『한국체신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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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전화를 비롯한 우편 체신 제도의 확립이 근대 국가 건설의 핵심적 요소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철도와 함께 체신 제도는 근대 국가의 시공간을 하나의 시공간으로 균질화하는 가장 긴요한 수단이었으며 그것은 조선의 경우에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1884년 10월 17일에 발생한 이른바 갑신정변이 ‘우정국(郵征局’의 개국을 축하하는 피로연 자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 또한 우정국 총판(總辦) 홍영식(洪永植)이 ‘3일천하’로 끝난 이 정변의 주역이면서 동시에 한국 체신의 첫 장을 연 인물이라는 사실 등은 근대 국가의 건설과 우편 체신 제도와의 관계를 말해 주는 하나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와 홍영식의 피살로 인해 막 시작된 한국의 근대 체신 사업은 오랫동안의 공백기를 거치게 되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서울과 인천에 우편국이 개설되고 정기적인 서울·인천 간의 근대적인 우편 업무가 개시된 것은 갑신정변으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1895년에 이르러서였다. 말을 타고, 혹은 사람이 직접 들고 뛰어서 전하는 방식의 통신이 아닌, 전기 설비에 의한 전보(電報) 업무 역시 1896년에 서울, 평양, 개성, 의주 등에 전보국이 개설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편 한국에서 국제 우편이 가능하게 된 것은 ‘만국 우편 연합’에 대한 제국이 정식으로 가입하는 1900년 1월 1일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에 한국에서의 국제 우편은 일본의 우편망을 이용해야만 했다. 『한국체신사』는 ‘만국 우편 연합’에 가입하기 위한 고종의 비준서를 미국으로 우송할 때 일본 우편망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주한 미국 공사의 외교관 행랑을 이용해야만 했던 비화(秘話)를 전한다.2)
(물론 조선에서의 국제 우편은 이른바 한일 합방 이후 다시 일본 제국의 우편 제도 안으로 흡수되었지만 말이다.)
이렇듯 우편 제도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봇대를 보고 놀람을 금치 못하던 김윤식의 기록이 있은 뒤로부터 20여 년, 한국에서의 근대적 우편 체신 제도가 시작되고 자리 잡는 과정은 봉건 조선 왕조가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는 과정과 그대로 겹친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의 근대적 우편 체신의 역사는 19세기말∼20세기 초 조선을 둘러싼 일본,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의 이권 다툼 및 국내 여러 정파들 간의 권력 투쟁 등, 국제·국내 정치 질서의 어지러운 흐름들을 한눈에 보여 주는 하나의 역사적 단층인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적 우편 체신 제도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한국 근대의 여러 모습들을 깊숙이 들여다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한국 소설을 그런 관점에서 읽어 볼 수 있지 않을까?
1906년에 쓰인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루』는 국제 우편이 가능하게 된 구한말 사회의 한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인상적으로 그려 낸다.
- 우쓴 벙거지 쓰고 감장 홀바지 져구리 입고 가쥭쥬머니 머이고 문밧게 와셔 안중문을 기웃기웃며 편지바다드러가오 편지바다드러가오 두셰 번 소리거슨 우편 군라.
옥련의 편지가 “한국 평안남도 평양부 북문 내 김관일 실내 친전(親展)”으로 그 어머니에게 도착하는 장면의 묘사이다. 이 편지는 옥련이가 “미국 화성돈 ○○○ 호텔”에서 “광무 6년(1902) 칠월 십일일”에 부친 것인데 “부인이 그 편지 바더보던 날은” “팔월 십오일”이니 한달 남짓 걸린 셈이다.
위의 장면에서 “우편 군사”의 거동을 주의해 보자. 그가 쓴 벙거지에는 ‘우’(郵)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실제로 그 모습이 어떤 것이었을지 지금의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우 자(字)가 새겨진 벙거지를 쓰고, 검은 홀태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아마도 우편 행랑일 ‘가죽 주머니’를 멘 이 ‘우편 군사’는 여자들만 살고 있는 집의 ‘안중문’까지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서 ‘편지 받으라’는 소리를 친다. 새로운 제도의 착륙이 오래된 풍속의 딱딱한 지면(地面)과 부딪치며 일으키는 날카로운 마찰음은 다음과 같은 묘사를 낳는다.
- 왼 이 남의 집 안마당을 부루 들여다보아.
- 이 에 사랑양도 아니 계신 인 왼 졀문 연석이 양반의 안마당을 드려다 보아.
- (우편 군사) 여보 누구더러 이 년셕 져 년셕 오. 체젼부 그리 한 쥴로 아오.
- 어 말 죰 여봅시다 이리 좀 오시오.
- 나 편지 젼러 온 것 외에 아무것도 잘못것 업소.
여자들만 있는 양반집 안마당을 기웃거리는 ‘젊은 녀석’을 꾸짖는 풍속의 힘이 ‘체전부가 그리 만만한 줄 아느냐’는, 벙거지 쓰고 가죽 주머니 멘 ‘우편 군사’의 당당함 앞에서 여지없이 주눅 드는 모습을 이 장면은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이 ‘우편 군사’의 당당함이 ‘미국 화성돈’으로부터 오는 ‘서방님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옥련 어머니의 일상, 즉 태평양 건너 미국과의 국제 우편이 가능하게 된 새로운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렇듯 ‘평양성 북문 안의 게딱지 같이 낮은 집’에서 미국 워싱턴으로부터의 국제 우편을 받아 보는 조선의 한 여인을 그리는 1906년의 『혈의 루』 같은 소설이 있는가 하면, 1942년에 한설야가 일본어로 쓴 「피(血)」라는 소설에서의 다음과 같은 묘사는, 일찍이 영선사 김윤식이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던 ‘전선’이 여전히 어떤 서민적 일상 속에서는 불가사의한 그 무엇이기도 했던 것임을 보여 준다.
- 내가 아직 철없었던 시절,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지나가며 이 전선이 처음으로 생겼을 때 시골에 사는 아버지가 경성에 유학하고 있는 아들에게 구두를 보내려고 전선에 매달자 바로 경성에 있는 아들에게 도착하여 다음 날 보니 전선에는 낡은 구두가 매달려 있었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죽을 때까지 그 이야기를 진짜로 알고 있던 어머니는 내가 경성에 가 있던 5년 동안 수도 없이 전선을 바라보며 경성에 있는 아들 물건이 전선에 매달려 있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렸을 것이다.
‘덕률풍(德律風)’의 경우는 어떠한가? 공식 기록에 따르면, 덕수궁에 교환대를 둔 궁내부(宮內府) 전화가 가설되어 궁중과 정부의 각 부처 그리고 인천 감리서(監理署) 사이의 통화가 이루어진 것은 1898년의 일이다. 고종 임금이 김구의 사형 집행을 연기하라는 명령을 전화를 통해 인천 감옥으로 내려 보낸 것이 한국 최초의 전화 통화라고 흔히 말하는데, 그것은 백범 자신의 회고에 의한 것일 뿐 다른 전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는 순종 임금이 고종의 능에 직접 가지 않고 전화를 통해 곡(哭)을 했다는 것도 인구에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사실 여부야 어쨌든 ‘덕률풍(德律風)’이라는 이름과 썩 잘 어울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관용(官用)이 아닌 일반 전화가 처음으로 보급된 것은 1902년 서울·인천 간의 통화 업무가 개시됨으로써이다. 서울·인천 사이의 5분간 통화 요금이 50전(錢)이었던 전화는 1년 후인 1903년에 이르면 개성, 평양, 마포, 수원, 시흥 등 총 아홉 곳에 교환소가 설치된다. 그러나 물론 가입자는 극히 적어서 수원, 시흥과 같이 가입자가 단 한 명인 곳도 있었고 그나마도 외국 상인들이 주 가입자였다.3)
이때로부터 20년 남짓한 세월이 지나면 전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염상섭의 소설 『전화』(1925)가 그것을 잘 보여 준다. 소설은 ‘이 주사’의 집에서 이 주사의 부인이 받는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된다. 이틀 전에 전화를 가설하고 “전화가 왜 한 번두 안 오누?”하며 “걱정을 하다시피 은근히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던 이 주사의 집에 처음으로 걸려 온 것은 이 주사를 찾는 기생 ‘채홍이’의 전화이다. 남편을 찾는 기생의 전화를 받고 심사가 고울 리 없건만, ‘전화’라는 신기한 물건의 위력은 이 부인의 ‘강짜’를 누그러뜨릴 만큼 크다.
- “기껏 그 애를 쓰고 전화를 매어 노니까 온다는 전화가 그따위······”
- 하며 화를 내어 보았으나, 그래도 받고 싶은 전화를 받은 것이 난생 처음 해 보는 전화처럼 신기한지 생긋하는 웃음이 상큼한 콧마루 위로 지나갔다.
소설은 “전당을 잡히고 동서대취(東西貸取)를 하고 하여 가설료 삼백 원을 간신히 치르고” 가설한 전화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바탕의 소극(笑劇)을 그린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전화라는 물건은 이 소설의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고 감정을 조정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일종의 기계신(Deux ex Machina) 같은 것이기도 하다. 모처럼 남편과의 오붓한 시간을 즐기려는 참에 ‘김 주사’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요릿집으로 나가 버린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잔뜩 마음이 상한 부인에게 밤늦게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 부부가 전화로 이야기를 해 본 일은 처음이라 목소리가 반갑기도 하여 혼자 전화통에 대고 부끄러운 듯이 웃음도 절로 나왔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판이니 이런 때는 전화도 쓸모가 있다고 고맙게 생각하였지마는
“네모반듯한 나무 갑 위에 나란히 얹힌 백통(白銅) 빛 쇠종 두 개”는 부인에게는 원망을 일으키는 대상이기도 하고, 그 원망이 해소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남편과 기생의 은밀한 연락 수단으로만 쓰이는 전화는 “그 빌어먹을 전환지 난장 맞은 것인지 그 원수의 것이 없으면 행세가 껚인담! 입에 밥이 안 들어가던가? 저까진 나무통하구 쇠 방울 두 개가 무엇으루 삼백 원 탬이 되더람?” 하는 푸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만, 남편이 그 전화를 김 주사에게 오백 원에 넘겼을 때는 뜻하지 않은 횡재의 수단이기도 하다. 더구나 김 주사가 전화를 매매하면서 중간에서 돈을 이백 원이나 떼어먹은 것이 들통 나고, 마침내 그 이백 원마저도 되찾아 결국 삼백 원에 산 전화를 사백 원이나 붙여 칠백 원에 팔게 되었을 때, 부인에게 전화는 더 이상 애물단지가 아니라 황금 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전화를 향해 “원수의 것”이라고 짜증을 내고 전화 때문에 ‘바가지를 긁던’ 이 주사 부인의 전화에 대한 감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이렇게 묘사한다.
- “그럼 채홍이 집 김장은 김 주사가 해줬구려? 흥, 그래?”
- 인제야 안심이 되었다는 듯이 아내는 샐쭉 웃다가,
- “여보, 우리 어떻게 또 전화 하나 맬 수 없소?”
- 하고 옷도 채 못 벗고, 턱밑에 다가앉아서 조르듯이 의논을 한다.
- 남편은 하 어이가 없어서 웃기만 하며 아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본다.
1881년에 중국 텐진에서 전화를 처음 본 영선사 김윤식이 “귀를 기울여 들어 보니 대충 알아듣겠더라(側耳聽之 略可辨認).”라고 했던 그것은 1920년대의 식민지 경성의 일상생활에 이렇게 등장하고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 근대 국가 건설의 가장 긴요한 요소는 철도와 전신, 전화, 우편 등과 같은 새로운 교통과 통신의 수단이다. 철도는 근대 국가의 모든 영토를 철로로 연결한다. 국토는 철로에 의해서 하나의 균일한 공간으로 재편성되고 재배치된다. 새로운 도시들이 기차 역(驛)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기차의 도착과 출발을 위한 동일한 시간이 설정된다. 이 모든 것들은 집중화된 권력, 즉 국가에 의해 수행된다. 요컨대, 기차는 국가를 실어 나른다.
우편 제도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그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소통, 즉 사신(私信)의 영역에 국가가 완벽하게 개입하였음을 뜻한다. 근대 우편 제도 이전의 개인 사이의 서간(書簡)에 공적 권력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그것은 대부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전달을 통한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은밀한 것일 수 있었다. 근대적 우편 제도의 수립 이후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신(私信)은 사라졌다. 신속함을 보장하고 분실의 염려를 제거하는 대신에 근대적 우편 제도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통신을 국가 권력이 중개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모든 우편물은 국가만이 그 권리를 지니는 우표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데 그것은 1840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우표가 발행되면서부터의 일이다.
우표는 우편물 전달에 대한 요금을 선납(先納)하는 것인데, 근대 국가는 이 권리를 독점함으로써 개인 사이의 사신을 비롯한 모든 우편물에 국가의 모습을 새길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우표는 국가적 기념물이나 지도자, 국가적 상징들을 가시화함으로써 우표의 효력이 미치는 영역 내에서의 인구를 일체화한다. 국가는 모든 우편물의 중개자가 됨으로써 개인 사이의 소통에 이미 국가가 깊숙이 개입해 있음을 선언한다. 철도가 국가를 실어 나르듯이 편지도 국가를 실어 나른다. 물론 기차를 타거나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형태로.
근대적 우편 제도는 동시에 근대적 글쓰기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한다. 편지의 양식(樣式)이 그러하다. 그것은 일정한 규격의 봉투와 종이뿐만 아니라, 일정한 양식에 따른 편지 쓰기를 보편화한다. 받는 이, 보내는 이의 이름, 날짜 등등을 어디에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으로부터, 인사말의 종류, 격식이나 호칭 등등,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편지 쓰기의 양식은 학교 교육에서 「편지 쓰는 법」 같은 대중용 서적에 이르기까지 근대적 글쓰기를 규제하는 강력한 원천이 된다. 일정 규격의 봉투나 종이가 체신 업무의 효율을 위한 것이라면, 일정한 형태의 편지 쓰기 양식은 새로운 내면을 창안하고 규율하는 권위 있는 모델로 작용한다. 물론 그 뒤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국가이다.
이상(李箱)의 소설 『봉별기(逢別記)』(1936)는, 그의 다른 소설들도 다 그렇듯이, 이십 대의 나이에 세상과 인간의 끝을 보아 버린 한 청년의 참담한 내면의 기록이다. 이상은 어느 글에선가 “자살할 수도 없는 절망”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놀라운 표현은 절망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사람은 절망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말인데, 사실 그러하다. 자살하는 자는 자살만이 희망이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다. 죽어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 ‘자살할 수도 없는 절망’에 이른다. 이상의 소설은 주로 그런 상태에서 나왔다.
『봉별기』는 위악(僞惡)과 자학으로 범벅된 소설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 이면에서 드러나는 것은 살고 싶은 욕망과 속임 없는 인간 관계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다. 몇 번씩이나 그를 버리고 떠난 ‘금홍이’가 “하루 길일(吉日)을 복(卜)하여 왕복 엽서처럼 돌아왔다.”라고 그는 이 소설에 적었다. 이 참신한 표현은 물론 국가 권력 따위를 의식하고 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상만큼 편지 양식을 자주 이용한 작가도 흔치 않다. 가령 그의 최후의 걸작 『終生記』(1937) 같은 소설은 ‘정희’라는 여자와 오고 간 ‘속달 편지’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一千九百三十七年 丁丑 三月三日 未時’라고 자신의 죽은 시간을 미리 못 박고 쓴 ‘묘지명(墓誌銘)’이다. (그가 실제로 죽은 시간은 1937년 4월 17일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 -滿二十六歲와 三十個月을 맞이하는 李箱先生님이여! 허수아비여!
- 자네는 老翁일세. 무릎이 귀를 넘는 骸骨일세. 아니, 아니.
- 자네는 자네의 먼 祖上일세. 以上
十一月二十日 東京서
이 마지막 문장의 날짜는 물론 작품을 탈고한 시간을 명기하는 일반적 관습을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겠지만, 또 한편으로 이 작품이 유서 형식을 띄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편지 양식의 관습으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가 누구에게 보낸 편지일까? 한국 소설에서 흔치 않게 개인의 내면을 끝까지 드러내는 소설을 쓴 이상이 편지 형식의 글쓰기를 선호했던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근대적 글쓰기 제도와 소설과의 관련을 이상은 의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더 나아가 국가와의 관계는? 이런저런 의문들이 꼬리를 물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 줄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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