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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기∙문학평론가, 연세대 국문과 교수, 우리말로 학문하기 회장


1. 제국의 말, 남의 말ㆍ글 죽이기 책략

      1) 몇 가지 끼워 넣는 이야기

  아주 오래전 이야기 하나 : 20여 년 저편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 강의실에서는 마침 아일랜드 신부이며 국문학전공의 케빈 오록이라는 학생과 몇몇 한국인 대학원 박사 과정 학생들이 시 문학사 강의를 듣고 있었다. 강의 담당 교수는 청록파 시인 혜산 박두진 교수였다. 마침 발표를 준비한 학생은 케빈 오록 신부. 그가 준비한 것은 아일랜드 시 문학사와 한국 시 문학사를 비교 연구한 내용의 발표문이었다. 그는 자기 고국 아일랜드와 한국의 역사는 매우 비슷한 꼴로 제국주의 폭력의 피해를 심하게 입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근 600여 년 동안 영국으로부터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 온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말과 글인 아일랜드 말·글을 거의 다 잃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실수로 한마디 했다. 한국은 왜 그렇게 끊임없이 한글 쓰기를 주장하느냐 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주장은 7, 8년 전 일본 동경에 갔을 때도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일본 지식인에 의해서 들었던 말이었다. 그는 도무지 한글 쓰기에 그처럼 열을 내는 한국인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의 맛을 들였던 일본 지식인이야 가해자로 자기들이 가했던 가해 사실을 숨기려는 이상한 야만 심리 상태를 가진 궤변으로 떠들 수가 있어, 천박해 보였지만, 그런대로 악당들의 논리이거니 하고 비웃는 논쟁으로 넘겼지만, 피식민지 국가로 600여 년 동안이나 별의별 수모를 다 견디며 살던 아일랜드 지식인이 한 말은 지극히 상식을 뛰어넘는 발언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게 도무지 무슨 해괴한 말이냐고 나는 반박하였다. 세계는 지금 노벨상도 영어나 기타 유럽 말·글로 된 것만 해당시키고 있지 않느냐? 그는 이런 이상한 논리로 자기주장을 펼쳐 보였다. 무기 상품으로 돈을 벌어 세계에다 파는 기업에서 막대한 돈을 들여 평화니 문학의 최상이니 하면서 평화 이념을 퍼뜨리는 상업적 시상 행위가 무슨 그리 대단한 도덕적 규범인 양 지껄이는 것을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고 반박하였었다. 풍마우(風馬牛)!
  내 반박에 박 교수는 내 편을 들어 주었다. 우리가 노벨상을 받는 것은 우리 말·글로 쓰인 작품이어야 한다는 나의 반박! 몇 년도였나? 노벨상을 받았던 아이작 싱거가 한 인터뷰 기사에서 자기는 자기 고국의 말인 이디시 말로 끊임없이 작품을 쓰고 있다고 했다. 영어권이나 불어권, 독어권 들의 말 글로 읽히는 그의 작품들을 그는 자기 말·글로 꼭 남기고 싶다고 했다. 제국주의의 맛을 들였던 몇몇 나라는 자기들 말로 전 세계를 휩쓸기를 바라는 마음이 숨어 있다. 천박한 야만 심리의 일종!
  또 하나의 끼움 말 : 1938년부터 왜정 군부 육군성 악당들은 한국(당시는 조선국)의 중등학교에서 조선어 쓰기를 제도적으로 막았다. 이 당시를 초등학생으로 공부하였던 나의 스승 이어령 선생이 겪은 학교에서의 행티는 그야말로 꼴불견이었다. 다음 해(1839년)에는 조선인 이름을 왜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하면서 이광수 따위의 왜정 지식 밀정들을 시켜 이름 바꾸기의 필요성을 널리 떠들고 다니게 하였다. 그 당시 이광수가 쓴 글들을 읽으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져 부끄러움을 참을 길이 없다. 꼴에 선각자, 지식인이라고들!
  세 번 째 끼움 말 : 최근에 한국의 각 대학교에서는 강의를 영어로 진행할 경우에 상당한 혜택을 준다는 공문을 버젓이 교수들에게 보낸다. 이런 일들은 이미 서울을 찬양하는 문구에 ‘Hi Seoul’이라고 군데군데 써 붙여 놓고는 영어 마을 조성이 마치 대단한 업적이나 되는 듯이 자의식 없는 정치 패들이 떠들고 다니는 일과 겹친다. 서울 시내버스에 붙여 놓은 영어 문구들을 자세히 보는 사람은 많지 않는 듯싶다. 그런데도 열심히 영어로 무엇인가를 써 붙인다. 왜들 이럴까? 물론 세계 모든 민족 사람들이 모두 미국 사람 닮기를 꿈꾸도록 미 제국주의자들은 자나 깨나 꿈꾸고 있을 터이긴 하다.
  이런 이상한 사회 풍경은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해 왔거나 그런 지식 바이러스에 물든 미국 지식 프랑켄슈타인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고로, 이런 관념 퍼뜨리기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것이 영어권 서양인들을 상대로 한 장사가 목적이라면, 그럴듯해 보이기라도 할 터인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미묘한 이유로 한국의 정치 패, 서울 시장 따위들은 앞장서서 영어 쓰기의 필요성 분위기를 만들어 놓는다. 그 결과 한국의 젊은 부부들은 자식을 낳자마자 영어 발음을 잘할 수 있도록 아예 혀부터 수술을 한다고 은밀하고도 공공연하게 돈들을 아끼지 않는다고 떠든다. 이렇게 떠드는 장삿속도 만만치가 않은 효과를 더한다. 이 현상이란 곧 자기를 버리는 만쿠르트(기억을 완전히 잃은 노예=키르기지아 작가 아이트마토프가 “백 년보다 긴 하루”에서 만든 말)식 천격의 극치 현상이라고 나는 읽는다. 아이를 밴 다음 미국에 건너가 미국 시민권을 따 돌아오는 저들, 돌아버린 천격 한국인들을 어쩌면 좋을까? 너도 나도 영어 교육에 열 올리는 이 시대 한국은 미국식 영어 이념 바이러스 숙주들이 떠드는 소음으로 가득 찬 나라이다.
  

      2) 한국의 미국식 지식인

  한국에서 지식인 반열에 들려면 일단 영어를 쓰는 것이 기본처럼 되어 왔다. 몽골 제국이 고려 때 이 나라를 짓누르고 있었던 적이 있다. 왕권을 장악하기 위해 아예 고려 왕자들로 하여금 몽골의 왕녀를 아내로 삼게 하여 몽골식 씨 갈이를 시도한 적이 아주 오래전에 있었다. 이때에도 고려 지식 분자들은 너도 나도 몽골 말과 글을 배워 쓰려고 나대었었고 혓바닥 수술까지, 아마 그랬을까?, 웃기는 짓거리들이 온 고을에 퍼져 나갔었다지 아마!
  약소국가의 운명이거니 하라고들 체념 섞어 중얼거리지만, 그래서 지금 몽골 말씀은 지금 어디서 잠자고 있나? 한때 로마가 세계를 휘젓고 나대던 시절에 세계, 그거야 유럽 전역이지만, 라틴 말로 말하고 글 쓰는 일로 지식인들이 돌 머리깨나 굴렸더랬다. 그러나 그 라틴 말 글들은 지금 어디서 잠자고 있는지? 가진 이들의 지식 독점 꼴이었던, 한때 일반인들이 모르게 글을 써야 했다던, 각국 의과 대학생들에게만 가르치고 있었던 형편이지만, 요즘은 그것이 영어로 바뀌었고, 경우가 나아져 대학 병원 의사들이 한글로 쓰는 경우를 나는 확인한 적이 있다. 지식 민주주의가 일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제국주의 책략이란 이처럼 유행처럼 솟아올랐다가 사라지는 그런 질병이나 아닐 것인지?
  1446년 조선조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들어 ‘어린 백성이 날로 씀에 편안케 할 따름’이라는 뜻을 세워 글자를 만들어 펼친 지 벌써 560년이나 된다. 한때 엄청난 문학적 열정으로 60, 70년대 지식사회를 풍미하였던 문학 평론가 김현은 그의 야심적인 저술 ������한국문학사������서론 부분에서 한국이야말로 신라 때 향가 이래로 별로 세계에 내세울 만한 문화적 업적이 없다고 썼다. 과연 그럴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머리깨나 좋다고 자랑하던 사람들이 자기를 버리고 자기 속에 든 위대성을 잃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를 요즘 자주 보는데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광수나 김현이 다 그런 부류의 지식인 아니었나? 자기 것은 없는 것으로 치부하여 업신여기고 자기에게 관대하지 못한 백성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포위 관념에 휘말리는 노예(만쿠르트=mankurt)들일 뿐이라고 나는 읽는다.
  미국의 각 대학교는 전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젊은이들에게 미국식 영어 이념을 주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한국 대학교를 구성하고 있는 미국 대학 유학생 출신 비율을 보면 이 영어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실감케 한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하여 이른바 명문 대학교의 미국 유학생 출신 학자들이 주류를 이룬다. 90퍼센트가 넘는 서울대학교 미국 유학생 출신 교수 점유율을 어떻게 풀이해야 옳은가? 한국의 대학교는 그 자체로 학문을 완성시킬 아무런 학문적 축적이 없는 셈이다. 어느 해 서대문 지역 한 대학교 총장은 공공연하게 자기 대학교에서는 미국의 일류 대학교 출신 학자들로 충원하였다고 자랑하였다.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대학 당국자들, 그들이야말로 미국식 지식 바이러스에 감염 중독된 천격의 교육자라고 나는 단정한다. 모든 교재가 미국 것 아니면 학문이나 교육이 이루지지 않을 것처럼 한국 대학교의 방향은 고정되어 있다. 이렇게 고정되어 온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는 그런 대학 총장들 자신이 미국에서 공부하여 자기 지식 고향이 곧 미국에 있음을 잘 드러내 보여 주는 미국 지식 프랑케슈타인이라는 것. 이것은 미국이 한국에 와서 반세기 기간 손 댄 여러 가지 지식 바이러스 주입 정책에서 가장 성공한 교육성과의 하나이다. 프랑스가 제2차 전쟁이 끝나고 나서 국제 금융 회사에서 돈을 꾸어다 가장 먼저 한 것이 세계의 젊은이들을 프랑스에 받아들여 프랑스 문화를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이런 사정에 비하면 미국의 경우는 보다 효율적이고도 교묘한 정책으로 성공한 것이다. 위에서 내가 쓴 키르기지아 작가 친기즈 아이트마토프가 쓴 “백 년보다 긴 하루” 속의 만쿠르트 이야기는 요약하면 이렇다.
카자흐스탄 스텝 지역에는 여  러 종족들이 모여 산다. 악독한 츄안츄안 족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을 완벽한 노예로 만들기 위해, 머리를 빡빡 깎은 다음 새로 잡은 낙타 젖가슴 가죽을 벗겨 머리에 딱 맞게 씌우고는 사막 햇볕 아래 묶어 둔다. 그러면 머리칼이 자라 가죽을 뚫지 못하고 자기 머리 속으로 파고든다. 이 고통을 닷새까지 참고 살아남는 사람이 있다. 그런 강인한 사람, 이미 기억을 잃은 이런 인간을 키르기스 사람들은 만쿠르트라고 부른다. 가장 힘든 일을 마음 놓고 시켜 부릴 수 있는 튼튼한 노예, 오직 주인의 명령만 알아듣는 가장 좋은 노예, 만쿠르트! 오늘날 현대 교육을 받는 많은 사람들이 실은 모두 이런 만쿠르트라는 주장이 이 작품 속에는 들어 있다. 미국에서 교육받고 고향에 돌아온 많은 한국의 학자들이 실은 이런 만쿠르트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둘째, 이런 만쿠르트들에게 교육을 받은 나 같은 지식인 족속들. 이들 또한 은연중에 미국은 지상 천국이며 가장 과학이 발달하여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나라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들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 한국의 교육 정책 입안자들을 포함하여 각종 관청, 특히 대기업 회사에 배치되어 입만 열면 미국의 성공 사례가 줄줄이 이어진다. 과연 미국은 이 지상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앞선 나라일까? 나는 그들이 요즘 세계 각국에 퍼붓는 폭탄 세례는 말할 것도 없고, 초기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가 살기 시작하면서 그곳을 그들이 발견한 신대륙이라는 말로 세계에다 퍼뜨린 행적부터 수상하게 여긴다. 도대체 그곳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인디언 원주민들은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나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떠벌리는 미국식 지식인들을 보면 꼭 몬도가네의 기이하고도 처절한 괴물, 그런 괴물들이 판치는 세상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너도나도 미국식 영어 이념에 중독된 만쿠르트들은 도처에서 활개를 치며 무슨 건물이나 공간을 치장하든 저절로 영어로 도배를 하려는 심보로 가득 차 있는 실정이다. 덩달아 한국의 각 대학교에서는 강의를 영어로 하라, 심지어 한국 문학조차도 영어로 강의를 하라는 따위의 우스꽝스러운 강요가 알게 모르게 자행된다. 그러니 자기 조상들이 만들어 쓰던 가장 과학적이고도 편리한 말·글인 한글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덧붙여 영어 공용론이 솔솔 풍겨 나오게 되는 풍조가 서서히 우리들 몸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2. 우리말로 학문하기

  2000년도부터 한국의 각 분야 대학교수들은 ‘우리말로 학문하기’라는 모임을 만들어 6년째 이 모임에서 열띤 토론을 벌여 왔다. 외국어 대학교 철학자 이기상 교수를 중심으로 해서 모인 이 모임은 백종현, 최봉영, 최상진, 유재원, 임재해 교수 등 자기 학문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우리, 학문적 글쓰기가 지닌, 외래어 문제로 엄청나게 뒤틀려 있음을 깨우친 분들이 마음을 합쳐 보기 시작한 것이다. 꽤 컸던 열정의 우물이 지금은 좀 오그라들어 보이지만 아직 그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이 모임을 찾아다니면서 내가 느낀 것은 우리나라 학문의 말하기와 글쓰기 말씀들 대부분이 중국 한자식이거나 일본식 한자 말씀들이라는 것이었다. 건축 용어는 말할 것도 없고 법률 용어, 철학 용어, 각종 생활 정보를 알리는 말씀들이 이런 알쏭달쏭한 말씀들로 채워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철학 용어인데 여기에는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 말씀들이 겹쳐 복잡한 말·글의 뒤섞임이 타래로 뭉쳐 있다. 이 문제는 철학자들이 스스로 깨우쳐 그 새로운 자기 길을 찾으려는 뜻이 드높은지라 앞으로 이 문제들이 서서히 해결되리라는 것이 나의 기대이고 꿈이다. 우선 이 모임의 심각함이 어떤 식인지를 간단하게 예를 들어 보이면 이렇다. 차(茶) 문화를 정리하는 책, 이진수의 ������다의 이해������라는 책에 보면 저자는 차의 식물학적 분류 항목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차나뭇속으로 분류하는 학자들은 차나무 꽃은 집단화서(集散花序)로 1∼3개의 꽃을 가지고 있으며 꽃받침은 5개로 오랫동안 남아 있으나 동백나무 꽃은 꽃자루가 없고 한 개씩 정생(頂生) 또는 액생(腋生)하며 꽃받침은 나선형으로 중복되어 탈락하는데, 이러한 차이 때문에 차를 동백나무와 같은 속으로 분류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백나뭇속 가운데서는 희산다화(姬山茶花 : Camellia Sasanqua)는 옆액에서 꽃이 2∼3개 나오며 꽃받침이 오래 남아 있다. 또한 이엽산다화(二葉山茶花)는 꽃이 가지 끝에 2개씩 붙어 있으며 오랫동안 남아 있다. 또한 이엽산다화는 꽃이 가지 끝에 2개씩 핀다.”
―이진수, 『꼬레알리즘』, 2005, 위 책, 44∼45쪽.
  다산 정약용이 쓴 차에 대한 책에도 차를 설명하는 말씀 옮김에는 우리 본디 말이 잘 어우러져 있다. 그러나 그 학문적 이름이나 풀이 가운데는 한자 말을 모르면 도무지 알기 어려운 말씀들이 즐비하다. 집단화서, 정생, 액생, 희산다화, 이엽산다화 따위 말씀들은 위 글 읽기를 주춤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런 경우를 각 분야 학문 쪽으로 눈길을 펼치면 그야말로 문제가 산더미처럼 부풀어 오른다.
  학문의 속성이 본래 그런 것이라는 의견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식물이나 문화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이야말로 어느 한 나라 말씀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차피 그 쪽 학문이 보편적인 말씀에 우리가 함께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을 100퍼센트 참작한다 하더라도, 우리말로 학문하기를 주장하려는 쪽은 가능한 우리말로 된 것, 특히 본디 말로 만들어 쓸 수 있는 말은 그쪽으로 쓰거나 옮겨 놓아야 한다는 것이 이 문제에 눈뜬 학자들의 뜻임을 나는 진작 알고 있었다. 칸트의 이성 철학 이야기도 이성(理性), 오성(悟性), 감성(感性) 따위로 옮긴 것은 일본인들이 엄청난 고심 끝에 만들어 공용어화하였다 하더라도 보다 쉽게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앞으로 우리가 맡아 고심하고 갈고 닦아 차근차근 본디 말 학문 말씀으로 옮겨 나아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따짐, 앎, 느낌 정도의 뜻으로 뭉쳐 있는 저 거창한 철학 말씀이 보다 더 알기 쉬운 우리말로 풀어도 충분할 만큼 한글 말씀의 폭이 높고 깊다는 점을 우리는 믿어야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명사, 대명사, 수사, 형용사 따위가 이름씨, 대이름씨, 셈씨, 어찌씨로 쓰게 될 뻔하다가 그 기회를 놓친 경우나, 삼각형, 사각형 따위가 세모꼴, 네모꼴, 사다리꼴(특이하게도 이 경우만 수학과에서는 한자말로 쓰이지 않는다)과 아직도 다투고 있는 점, 비강골절형병을 코휨병 등으로 해부학 교실 쪽에서 바꾸어 가고 있는 점 등,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할 일들은, 분명한 명분과 마땅한 구실이 꿰어져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문제는 영어 이데올로기의 거센 바람이다.
  

3. 마치는 말

  어느 시대에나 그때를 덮어씌우는 덮인 관념이 있다. 이 관념은 힘이고, 물질이며, 문화, 상품, 폭력이어서 사람들을 옭아매는 덫이다. 그 시대는 그 시대에 맞는 물품이 있다. 서양으로부터 흘러들어 온 모든 물품은 그 이름과 쓰는 법, 그 역사, 독자성, 질적 함량과 문화적 특수성 따위가 함께 묻어온다. 그러므로 이 물품을 쓰는 사람은 거기 붙어 든 모든 말씀에 익숙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물품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것이 지극히 어려운 나라 꼴[形局]로 되어 간다.
  1798년 5월 9일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는 15척의 선대에 1척 군함, 12척의 프리깃 함, 수많은 소형 선박(2개의 소형 쾌속 전투함으로 구포를 장착한 배)과 작은 범선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였다. 120개의 대포로 무장한 지휘선의 이름은 ‘오리앙’이었다. 장교들의 숫자가 많았던 군대에 약 3만 8천 명의 병사와 1만 명의 선원들을 싣고 이집트로 향한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은, 나폴레옹이 공여하겠다고 공언한, 공화정 상품을 싣고 출항한 침략이었다. 만크루트들이 집권한 당대 이집트 정부는 독재와 부조리로 가득 차 있으니 공화정으로 이 나라를 바로잡아 주겠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억지 주장이었다. 167명의 젊은 학자들을 데리고 간 이 침략에서 나폴레옹은 3년 동안 수많은 이집트 문화재를 깡그리 훑어다가 이후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박물관에 이 유물들을 보관하면서 오늘날까지 엄청난 장사로 재미를 보고 있다(로베르 솔레 지음, 이상빈 옮김, 『나폴레옹의 학자들』, 아테네 출판사, 2003년, 31∼355쪽 참조). 영국이 자랑하는 대영박물관이 있는 영국은 또한 어떠한가?
  모든 제국주의자들은 이렇게 남의 것으로 재미를 보는 악당들이 주축을 이룬 폭력배 집단 이름이다. 그런 그들 중심의 공동체란 거기서 이익과 행복을 챙기는 난폭하고 천한 민족이거나 국가이다. 이 재미를 들인 악당들은 이런 악행의 맛을 결코 잊지 못한다. 지금 미국은 민주주의라는 상품으로 세계 시장에 장사하는 국가이다. 이 상품을 거절하면 무조건 무기로 위협하고 돈으로 위협하며 가진 술수와 책략과 폭력을 다 동원하여 물건과 관념을 판다. 천박한 무도덕과 비윤리의 썩은 냄새가 지금 온 세상을 진동시킨다.
  이런 상품에 묻어 들어온 영어 말 쓰기는 근본적으로 그 나라가 써 오던 말과 글을 저해하거나 못쓰도록 힘을 꺾는다. 오늘날 한국이 처한 입장이 바로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고 나는 믿는다. 어느 해였나? 아주 오래전 어느 서양인 친구가 내게 한 말이 떠오른다. ‘너희 나라는 참 이상하다. 도대체 유엔이 너희와 무슨 그런 커다란 뜻이 있다고 유엔의 날을 공휴일로 정해 기리면서 막상 너희들과는 떼려야 뗄 수도 없고 그렇게 큰 뜻을 지닌 “한글날”은 공휴일에서 제거해 버리느냐? 웃긴다’는 것이 그의 말 요지였다.
  만쿠르트의 특징은 자기 존재의 뿌리를 잊는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고 배반할 수도 있으며 그런 일에 대한 아무런 자의식이 없다. 그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기억이 곧 양심이라고 단정한 아이트마토프나 한국의 많은 작가들은 이 기억의 창고를 찾아 쉼 없이 헤맨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염치를 잃은 인간은 이미 자기 존재의 값을 내팽개친 인격이어서, 오래전부터 한국 사회에서는 그들을 인간 쓰레기로 보아 왔다. 오늘날 엄청난 영어 이념이 우리를 덮어씌운 채 그 숙주들이 발호하고 있지만 모두 유행에 지나지 않을 그런 마파람으로 나는 읽는다. 우리 정신을 내보일 수 있는 위대한 유산 한글, 그것을 만든 날을 기리는 한글날이 다시 복원되어 숨통을 트는 것으로 읽고 오늘 나는 긴 한숨과 함께 우리가 사는, 따끔거리는 가시밭, 삶 판을 서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