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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무서운 시간』 자세히 읽기

이상섭∙연세대학교 명예 교수, 평론가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무서운 시간」 전문)
  지난 호에서 자세히 다룬 바와 같이1) 「이적」에서 윤동주는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라고 썼었다. 자기를 무겁게 잡아당기는 “여념”들을 모두 물결에 씻어 버려 가볍게 될 터이니 “당신”은 자기를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 위를 걷듯 물위로 걸어갈 수 있게 불러 달라는 것이다. 즉 그는 어떤 부름을 기다렸던 것이다.
  기독교인은 하느님이 어떤 일을 하라고 자기를 부르신다고 믿는다. 사람이 평생 성심성의로 할 일, 즉 평생 직업을 기독교에서는 “소명(召命)”이라고 하는데, 이는 “부름받은 사명”이란 말이다. 우리는 이 개념에서 기독교적 냄새를 없애고 “천직(天職)”이라고 옮겨서 쓰기도 한다. 서양말로는 “콜링(calling)” 또는 “베루프(Beruf)”이니 우리말로는 그냥 “부름”이라 옮겨도 좋겠다.
  「이적」을 쓸 때만 해도 윤동주는 머나먼 만주에서 “경성”의 연희 전문 문과 1학년생이 되어 있어서 장래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즉 그는 어떤 “부름”에 응답할 기분이었다. 그런데 1941년 2월 7일, 3학년 마지막 무렵 방학 중에 만주 용정 본가에 돌아온 그가 자신이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음을 통렬히 느끼면서 지은 「무서운 시간」에서 그 어떤 “부름”에 응답하기를 거부한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그는 어떤 부름을 들은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그 부름에 응하기를 거부한다. 그냥 얌전히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퉁명스럽게 힐문하는 투로 거부하는 것이다.
  어떤 부름일까? 우선 당시에 조선 청년에게 “독립 운동”을 권유하던 은밀한 부름이라고 해석해 보자. 이는 특히 만주 출신 청년들이 뿌리치기 어려운 당위적 부름이었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죽음의 길도 됨을 거의 누구나 의식했을 것이다.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고 공부에 정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지만 당위의 명분은 언제나 강압적이었다. 그의 고종 사촌으로 연희 전문 동창인 송몽규는 바로 그런 부름에 응답하여 독립군 모병에 응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부름에 그는 강하게 거부한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처럼 강력한 부정으로 이끄는가? 이 시를 자세히 읽어 보자. (그러나 3년 뒤 그는 끝내 그런 부름에 응한 것으로 일본 법정의 판결이 나서 옥사하였다.2) )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아직도 호흡이 남아 있는 자기를 구태여 불러 가지 말라는 것 같다. 그러지 않아도 곧 멈출 “호흡”을 미리 불러 가지 말라는 것이다. “가랑잎”은 보통 가을에 말라서 떨어지는 잎, 즉 낙엽을 뜻하는데 왜 윤동주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이라고, 이른 봄철을 말하고 있는가? 그가 낱말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여, 아니다. 우리는 “가랑잎”의 정확한 뜻을 더 잘 알아볼 필요가 있다.3) 큰사전에 보면 “가랑잎”은 “갈”이라고도 하며 “갈”은 다시 “떡갈나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랑잎”은 “떡갈나무 잎”이라는 말도 되겠다. 우리 산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떡갈나무는 그 넓은 잎이 가을에 바짝 말라도 안 떨어지며 한겨울에도 바람에 부딪쳐 서걱서걱 스산한 소리를 내면서 그대로 붙어 있다가 이른 봄에 새잎이 나오면서 떨어진다. 윤동주가 이 시를 지은 때는 2월이니 늦겨울, 그러니까 떡갈나무의 마른 이파리들이 떨어지면서 파란 새잎이 돋아날 새봄을 내다볼 수 있는 때이겠다. 한참 뒤에 그가 「별 헤는 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누렇게 마른 떡갈나무 잎을 떨구고 그 자리에 파란 새잎이 돋아 나올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마른 가랑잎은 나무에 붙어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이 그의 호흡도 극도로 위축되긴 했어도 채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스스로 미리 끊지는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종교적 의미의 재생이나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앞으로 곧 피어날 새잎에 비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떨어질 묵은 가랑잎에 비한다. 새잎은 밝고 넓은 하늘 향하여 손짓하듯 활짝 피지만 ---푸른 떡갈나무 잎은 활짝 편 손바닥처럼 생겼다--- 그는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다시 말하면 묵은 가랑잎 같은 나를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이 그에게 절대적 기준이 됨을 그의 「서시」에서 읽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라는 그의 염원은 우리 모두의 귀에 쟁쟁하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하늘이 거부되고 오로지 절망의 어두운 좁은 공간(“그늘”)만이 주어져 있다. 여기에 그의 시에 자주 나오는 밀폐된 공간으로서의 “방”의 이미지가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방은 하늘의 정반대의 공간이다. 방은 구속이요, 하늘은 자유다.
  그는 자유를 “마음껏 손을 뻗어 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손을 들어 표하는 것은 회의 같은 데서 찬성 또는 반대 의사를 표하는, 매우 일상적인 행위다. 그러나 손을 들어 의사를 표할 수 있는 당연한 기본적인 자유가 당시의 그에게는 거부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하늘을 마음대로 손을 뻗어 뜻을 말할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으로 심상화하고 있었다. 몸뿐 아니라 정신의, 영혼의 손을 마음대로 뻗어 생각을 나타낼 수 있는 자유는 이른바 자유세계에 사는 사람에게도 저절로 주어지는 특권은 아니다. “하늘”이 아니라면 그를 불러갈 만한 어떤 공간도 없다는 것이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일이 마치고”는 “일을 마치고”의 잘못인 듯하지만 대사전에 보면 “마치다”는 “끝이 나다”라는 뜻의 자동사도 된다.4) 지금 우리에게는 좀 낯설지만 윤동주에게는 자연스러운 용법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일을 마친다는 말인가? 긴긴 겨울 동안 억지로 나무에 붙어 있는 가랑잎처럼 그냥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 그의 무의미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가랑잎은 새잎이 돋아나면 “서럽지도 않”게 저절로 떨어진다.5) 그런 가랑잎처럼 그냥 있어도 죽을 목숨인데 구태여 나를 불러내어 괴롭고 무서운 죽음의 길로 몰아가지 말라는 절규인 듯하다.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위대한 명분을 가진 소명이라도 무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부름이 반드시 독립 운동에 참여하라는 부름이라고 한정할 수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아마도 그것과 뒤섞여서 종교적 의미의 소명,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이상을 향한 결단에 대한 요청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절망하고 있는 그에게는 괴롭고 버겁기만 한 소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를 부르지 마오.
  하고 잘라 말한다. 이렇게 부르는 소리가 있는 순간은 “무서운 시간”이며 이 무서운 부름에 무섭게 잘라서 거절해야 하는 것이 윤동주의 무서운 운명이다.
  이 시는 절망의 늪에서 아프게 외치는 윤동주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가랑잎”이 손바닥 같은 싱싱한 떡갈나무 잎을 뜻하는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정반대로 앙상한 겨울 가지에 붙어 있는 바싹 마른 잎을 뜻한다는 사실을, 기막히면서도 무섭게 이용하여 이처럼 무서운 시를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