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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말을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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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방언 이야기 |
이기갑∙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우리가 사는 고향의 말과 삶
도시 생활을 주로 하는 현대인에게 고향은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이상향이다. 저녁 해가 설핏하게 질 때면 서쪽 하늘은 금빛으로 물들고, 이런 해거름 참에는 얼룩빼기 황소가 실개천가에서 나지막한 소리로 느린 울음을 울곤 하던 곳, 정지용의 시가 아니더라도 그곳은 언제나 넉넉하고 포근한 어머니 품속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한 고향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가고, 더불어 그곳에서 나누었던 정다운 말들 또한 없어져 가는 것이 현실이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변화인 것이다.
말은 세상과 더불어 변화한다.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퍼 올리던 시절, 물을 ‘긷다’라는 말은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집집마다 수도가 놓여 우물을 찾을 필요가 없어졌고, 그에 따라 두레박을 사용해서 물을 긷던 풍경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물은 더 이상 길러 오는 것이 아니라 수도꼭지를 틀어 받는 대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물을 ‘틀다’거나 ‘받다’는 말이 널리 쓰이면서 물을 ‘긷다’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어휘 목록에서 사라져 갔다. 이 짧은 글에서 우리는 이처럼 세태의 변화와 함께 사라져 가는 전라남도 방언의 몇몇 어휘들을 더듬어 보려 한다. 삶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생겨난 말이지만, 이제는 말을 통하여 거꾸로 그 옛날의 삶의 모습을 되찾아 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돌아보면서, 잠시나마 고향의 옛 풍경과 인정을 되새겨 보려는 것이다.
2. 소와 더불어 사는 삶
요즈음에는 경운기로 논이나 밭을 갈지만, 옛날에는 이러한 힘이 드는 일은 소가 도맡아 했으므로 소야말로 집안의 가장 큰 재산이었다. 그래서 ‘쇠앙치’(=송아지)라도 한 마리 있는 집은 애지중지 보살피는 것이 큰일이었다. 여름이면 ‘깔’(=꼴)을 베어다 먹이고, 겨울이면 ‘소구시’(=구유)에 쇠죽을 하나 가득 퍼 주어야 했다. 쇠앙치가 없는 집은 남의 집 암소를 빌려다 두 해 가까운 세월을 길러 주고, 이 암소가 낳은 쇠앙치 한 마리를 얻어서 제 것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이때 얻은 쇠앙치를 ‘씨압소’라 한다. 때로는 남의 암소를 길러서 장에 가서 팔고 이때 얻은 이익을 원 주인과 나누는 ‘갈라 묵기’(=갈라 먹기) 방식을 따르기도 한다. 씨압소를 얻든지 아니면 갈라 묵기를 하든지 간에, 없는 사람은 그저 남의 집 소라도 ‘보지란허니’(=부지런하게) 키우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세월이었던 것이다.
쇠앙치가 두 해 정도 자라 ‘어숭내기’(=중소)가 되면 이제 길을 들여야 한다. 소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너무 크면 제 고집이 세어져서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의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어숭내기 시절이 소를 길들이는 데는 적당한 시기인 것이다. 길을 들일 때에는 제대로 된 쟁기를 달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거운 돌을 쟁기 대신 달고 훈련을 시킨다. ‘이라’라고 하면 앞으로 가고, ‘꾀삐’(=고삐)를 당기면서 같은 소리를 외치면 오른쪽으로 간다. 왼쪽으로 갈 때는 ‘자라’, 멈출 때에는 ‘와’라고 소리쳐 익히도록 한다. 어숭내기가 자라 큰 소가 되면, 암소와 수소를 구별해 부르는데 특히 커다란 황소를 ‘부사리’ 또는 ‘뿌사리’라 부른다. 지역에 따라서는 ‘뿌락지’나 ‘뿌락대기’와 같은 말도 쓰는 수가 있다. 부사리 한 마리 있는 집은 수월하게 제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쁜 농사철에는 남의 농사일까지 거들어 줄 수 있었으니, 부사리야말로 한 집안의 든든한 재산이요, 주인의 덕망까지 높여 주는 충실한 머슴이었던 셈이다.
3. 머슴과 함께 하는 삶
부사리와 같은 큰 소를 기르다 보면 주인 혼자 힘으로는 벅찰 때가 많다. 그래서 소에게 먹이는 ‘깔’(=꼴)을 베는 일을 도맡아 하는 ‘깔땀살이’(=꼴머슴)를 두기도 하고, 아니면 다른 머슴들이 덤으로 소를 먹이기도 한다. 머슴은 일하는 능력에 따라 새경을 받는데 일 년에 ‘나락’(=벼) 한 섬이면 ‘상머심’(=상머슴)을 둘 수 있고 그 반값이면 ‘중머심’(=중머슴)을 둘 수 있었다고 한다. 머슴의 계약 기간은 대체로 일 년인데, 그래서 어느 집 머슴이 착실하고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 서로 데려가려는 스카우트 경쟁이 심하였다. 마치 오늘날의 프로 운동선수와 같은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머슴 측에서 보면 새경의 많고 적음만이 주인집을 결정하는 기준은 아니었다. 주인의 인품이나 인심 등 돈 이외의 조건들이 많은 작용을 하였으니, 대개 돈을 쫓아 팀을 옮기는 프로 선수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 잘하는 머슴의 경우, 선택권은 주인이 아닌 머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섣달이 되면 새로운 머슴과 주인의 계약이 이루어진다. 주인은 소망대로 일 잘한다고 소문난 머슴을 얻은 터라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다. 머슴 또한 새로운 주인과 함께 일 년을 살게 되었으니 여간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지는 이날, 주인은 새 머슴과 이웃을 불러 ‘뒤엄쌍’을 차려 한 상 대접함으로써, 이웃에게 새 머슴을 소개하고 집에 들어온 새 머슴을 축하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도 머슴이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인 ‘뒤엄’(=두엄) 만드는 일을 생각하면서 ‘뒤엄쌍’과 같은 말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4. 논에 의지하는 삶
논에서 짓는 나락 농사는 밭농사와 달리 유달리 많은 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해 농사의 성패는 얼마만큼 논에 물을 담아 놓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저수지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비가 많이 오는 여름 한 철에나 물이 ‘우허니’(=우르르) 흐를 뿐, 보통 때에는 ‘보또랑’(=보)에서 흐르는 작은 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웃보’(=위에서 막은 보)를 막아 버리면 아래 논은 ‘뻬싹’(=바싹) 마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위아래 논 임자끼리 ‘물쌈’(=물을 대기 위한 싸움)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모심을 날이 다가오면 윗논 임자가 곤하게 잠든 틈을 타서 밤물을 대느라 잠을 건너뛰기가 다반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애당초 보또랑과 거리가 멀어 밤물마저 댈 수 없는 ‘하늘바래기’(=천수답)는 어쩔 수 없이 하늘의 처분만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쟁기로 ‘흑벡뎅이’(=흙덩이)를 잘게 부수면서 논을 간 뒤, 여기에 물을 대고 ‘써우레’(=써레)로 논을 고르게 되면, 이제 모를 심어야 한다. 모는 못자리에 ‘씬나락’(=볍씨)을 뿌려 키우는데, 못자리에서 모를 뽑아 논에 심는 일을 흔히 모내기라 부르지만, 실은 못자리에서 모를 ‘찌고’(=뽑고) ‘숭구는’(=심는)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오늘 모 찔랑가?’라거나 ‘오늘 모 숭굴랑가?’라고 물으면 곧 ‘오늘 모내기하려나?’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모를 숭군 지 두 달쯤이 되면 논의 가장자리, 물이 고인 곳을 관리하여 물이 빠지도록 하는데, 이를 ‘풋도구 친다’고 하며, 다시 벼를 베기 전에 한 차례 더 논의 가장자리를 마르도록 ‘도구를 쳐야’ 하는데, 이것은 논의 가장자리가 말라야 베어 놓은 벼를 널어 둘 수가 있기 때문이다. ‘도구 친다’의 ‘도구’는 첫 음절이 길게 발음되어서 절구를 뜻하는 ‘도구통’과 같은 형태를 지닌다. 아마도 이 두 낱말은 표준말의 ‘돌(石)’과 같은 기원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도구 친다’는 말은 곧 논 가장자리의 돌들을 치워서 물이 잘 흘러 빠지도록 하는 일을 가리키는 셈이다. 가을철 도구 칠 계절에는 덤으로 ‘웅구락지’(=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었다. 이때가 되면 금빛 웅구락지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한여름 농사일에 힘들었던 사람들에게는 귀중한 보신의 먹을거리였던 것이다.
5. 아낙네의 고단한 삶
소를 기르고 농사일을 담당하는 것은 주로 남자들이지만, 여자들이라고 해서 한가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처럼 필요한 것을 돈으로 사서 쓰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집에서 만들고 손수 해 먹던 시절이었으니, 여자들은 ‘한시반시’(=한시라도) 쉴 틈이 없었다. 그 바쁜 중에서도 ‘끄니’(=끼니)마다 나락이나 보리를 일일이 찧어서 밥을 했다고 하니 그 수고가 어떠했을 것인지 짐작조차 어려운 것이다. 스위치만 누르면 식구가 먹을 분량만큼의 쌀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나락을 도구통에 넣고 ‘도구질’(=절구질)을 하여 ‘나락껍덕’(=벼 껍질)을 벗겨 쌀을 만들었던 것이다. 보리 역시 마찬가지로 찧은 뒤, ‘학독’(=확)에 넣고 ‘폿독’(=손에 쥐고 갈 만한 정도의 작은 돌. ‘폿’은 ‘팥’의 방언형)으로 갈아서 밥을 지었으니 요즘 여자들이 어찌 이런 일들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것뿐인가? 모든 옷은 장에 가서 사 입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 입었다. 밭에 ‘미영’(=목화)이나 삼을 갈아서 실을 잣거나 삼고 이로부터 베를 짜서 ‘미영베’(=무명)나 삼베를 얻은 뒤, 이 베로 하나하나 옷을 지었다. 지은 옷은 ‘푸답’(=푸새. 옷 따위에 풀을 먹이는 일)을 한 뒤에, ‘따듬똑’(=다듬돌, 다듬잇돌)에 얹어 놓고 ‘따드미빵맹이’(=다듬잇방망이)로 ‘따듬질’(=다듬이질)을 한 뒤에 ‘대루’(=다리미)로 다려 입었다. 특히 동정 부분은 ‘윤디’(=인두)로 지져서 맵시가 나게 하였다. 그래서 남정네 입성은 곧 그 집 아낙의 손끝이 얼마나 ‘매시로운지’(=솜씨가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했다.
요즘에는 대마초 때문에 삼을 심는 일이 조심스럽지만, 옛날에는 논에 삼을 심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삼은 베어서 잎을 쳐 내고, 나머지는 묶어서 ‘삼굿’에 넣어 쪄야 한다. ‘삼굿’이란 개울가에 파 놓은 ‘구덕’(=구덩이)을 말하는데, 삼굿에 ‘독’(=돌)을 ‘하빡’(=가득) 넣은 뒤 불에 달구고, 달군 독에 물을 부어 김이 생기면 그 생긴 수증기로 삼을 찌는 것이다. 그래야 삼 껍질이 쉽게 벗겨지기 때문이다. 삼의 껍질을 벗기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닌 데다가 그 양이 만만치 않으니 더욱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삼 껍질을 벗긴 뒤에 생기는 ‘저릅대’(=겨릅. 껍질을 벗긴 삼대)를 얻기 위해 서로 벗기려고 하였으므로 그러한 경쟁이 삼 주인으로서는 싫지 않은 일이다. 저릅대는 위와 아래의 끝 부분은 잘라서 버리고, 가운데의 반듯한 부분만을 따로 물에 넣어 둔다. 저릅대는 가벼우므로 묶어서 돌로 눌러 놓아야 되는데, 이렇게 한 달여를 물에 담근 뒤 볕에 바짝 말리면 ‘무저릅’ 또는 ‘무지릅’이 되는 것이다. 이 무저릅은 땔감으로 쓰기도 하고, 때로는 밤길을 밝히는 등불의 역할도 한다. 가로등이나 손전등 같은 것을 생각하기 어려웠던 때라 밤길을 나다닐 때에는 무저릅대 몇 개를 가지고 다니면서 불을 붙여 쓰곤 했던 것이다. 벗긴 삼은 잘게 찢어 서로 이어 삼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찢은 삼 끝을 ‘도패’(=톱)로 ‘돞아야’(=톺아야 톺다: 삼을 삶을 때, 짼 삼의 끝을 가늘고 부드럽게 하려고 톱으로 눌러 긁어 훑다.) 한다. 도패로 삼 끝을 눌러 긁고 훑어서 부드럽게 해야 삼끼리 쉽게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밥하고 길쌈하는 일 못지않게 여자들은 술 빚는 솜씨도 좋아야 했다. 제사나 혼인 등 큰일을 치르기 위한 술은 따로 사지 않고 집에서 직접 빚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쌀로 ‘꼬실꼬실한’(=고슬고슬한) ‘꼬두밥’(=고두밥)을 지은 뒤 여기에 누룩 가루를 넣어 물과 섞어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놓고 십여 일이 지나면 술이 익기 시작한다. 여기에 ‘용쉬’(=용수)를 넣어 맑은 술만을 거르면 ‘청주’가 되고, 청주를 거르고 남은 찌꺼기로는 막걸리를 만든다. 한편 청주를 거르지 않고 익은 술 전부를 증류하여 소주를 ‘내리기’(=고기)도 하였다. 이때 소주를 내린 뒤 남은 찌꺼기를 ‘쇠주 아래기’(=아랑주) 또는 ‘아랭이’라 하는데, ‘질쌈’(=길쌈)하던 아낙네들이 모여 이 아래기를 먹고 피곤을 풀기도 했던 것이다.
6. 이승의 삶을 버리고
이처럼 힘겹게 살아가던 인생도 삶이 다하면서 이승을 떠나게 되는데, 전라도 말에서는 이런 경우 ‘시상 베린다’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세상을 뜬다고 하면, 세상을 떠난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세상을 베린다고 했을 때에는 ‘에이, 이 놈의 몹쓸 세상’ 하면서 이승의 고단한 삶을 던져 버리는 의도적인 느낌이 강하다. 지금이야 부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화나 신문 심지어는 전자 우편 등이 이용되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이 일일이 집을 방문하여 부고장을 돌려 알렸다. 부고를 받은 이는 죽음을 알리는 흉한 소식인지라 부고장을 집안에 들여 놓지 않고 대문이나 ‘다무락’(=담), 또는 ‘후타리’(=울타리) 등에 꽂아 놓곤 하였다.
어느 집에 초상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달려들어 서로 돕는 것이 우리들의 옛 풍속이었다. 동네마다 ‘유친계’(=위친계)가 있어 부모의 초상이 나면 서로 일을 나눠 맡기도 하고 ‘생이’(=상여)도 함께 매곤 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장의사가 모든 일을 맡아서 해 주지만, 옛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하나하나 거들어 주었는데, 시체를 담는 ‘널’(=관)을 마련하는 일부터 그러하였다. 늙으신 부모를 모시는 자식들은 미리미리 널을 준비해서 집안 한쪽에 보관해 두는 수도 있지만. 널이 갖는 흉한 느낌 때문에 이를 꺼려하는 수가 많았으므로, 막상 초상이 나면 동네 사람들이 가까운 산에 가서 ‘솔낭구’(=소나무)를 베어서 널을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초상을 치르는 한쪽에서는 널을 만드는 톱질과 대패질이 함께 이루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망자의 집안 형편에 따라 널의 두께, 나무의 종류도 달라진다. 부유한 집안이면 두꺼운 나무에 옻칠까지 칠해진 널을 사용하지만, 그렇지 못한 형편이라면 그저 얇은 판자면 족하였다. 이런 얇은 널을 ‘빈재기’라 부른다. 그런데 망자에 따라서는 빈재기도 미처 준비할 형편이 되지 못하는 수가 있다. 이럴 때에는 대를 삼으로 엮어 만든 ‘대발’이 이용되었다. 시체를 대발로 싸서 지게에 얹어 운반하였는데, 이렇게 운반하는 송장을 흔히 ‘대발송장’ 또는 ‘지게송장’이라 한다. 아마도 이승을 떠 저승으로 가는 길이 가장 험한 경우가 이런 경우일 것이다. 대발송장이나 지게송장은 당연히 생이를 얹지 못하지만, 빈재기 널을 쓰는 경우에도 생이를 얹어 운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생이야 돈이 웬만큼 있는 집안에서 쓰는 것이고 보면, 가난한 집에서는 생이 없이 널 그대로 운구하는 수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널을 하얀 한지로 싼 뒤, 끈으로 묶어 두세 사람이 운반하였는데, 이를 ‘힌등’이라 하였다. 화려한 꽃생이는 온 동네 사람의 배웅 속에 거리제를 지내고 마을을 떠나게 되지만, 대발송장이나 지게송장 그리고 힌등은 마지막 가는 길의 초라함 때문에 변변한 거리제조차 지내지 못하고, 혹은 사람들이 잠든 밤을 타서, 혹은 동네의 뒷길을 따라 저승의 길로 향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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