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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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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료장수의 실종, 그리고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
이미애∙방송작가
얼마 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평생을 구두 깁는 일에만 바쳐 온 구두 수선의 달인을 취재한 일이 있었다.
다 닳고 해지고 떨어져 마침내 밑창까지 실종된 신발도 마술처럼 뚝딱 새것으로 환골탈태시킨다는 신의 손!
그때 그 이야깃거리(아이템)의 소제목과 예고 문안을 뽑다가 신기료장수라는 말을 했더니 후배 작가들이 아주 낯설고 아주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 신기료? 그게 뭔데요? 일본 말이에요? 사투린가? 신기루????
나는 어이가 없어서 신기료장수를 왜 몰라 여기저기 떠돌며 신을 깁는 사람 있잖아 하며 핀잔했고, 후배들은 아예 작당을 한 것처럼 똘똘 뭉쳐 신기료장수라는 말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며 나를 아예 구닥다리 노인 취급하듯 했다.
더 이상 신발을 기워 신는 궁상맞은 일 같은 건 하지 않는 풍요의 시대를 사는 탓일 거라고 그냥 피식 웃어넘기기엔 왠지 입맛이 씁쓸했다. 단지 쓸쓸히 사라진 단어 하나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시나브로 잃거나 잊어 가는 것이 어디 신기료장수 같은 말 뿐일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세상이 전 같지 않다고들 한다. 사람 사이가 데면데면해지고 이웃은 물론 한 핏줄에서 태어나 한 지붕을 이고 사는 가족 사이에조차 끈적거리는 찰기가 동나 버린, 살맛 없는 시대라고들 한다. 어떤 이는 내가 한동안 이런저런 실화들을 모아 다듬고 살붙여 만들었던 속의 그 눈물 나게 따뜻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주인공들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인물로, 지금은 공룡처럼 멸종된 족속이라고 단정 짓기도 한다.
오로지 눈뜬 이웃들을 위해 자신들에겐 한 점 필요조차 없는 외등을 매일 밤 켜 두는 달동네 눈먼 부부,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게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밤, 비 새는 지붕 위에 올라가 날이 새도록 우산을 들고 있었던 아버지, 그리고 제 몫의 점심이었던 우유 한 병을 배고픈 고학생에게 아낌없이 나눠 준 아이와 훗날 그 아이의 엄마가 큰 병에 걸려 입원하자 거액의 병원비를 그날의 그 우유 한 병으로 이미 받은 셈이라며 동그라미 하나만을 청구한 의사……. 그 모두가 오래된 옛날이야기에 박제된 천사일 뿐 요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맞는 말인지 모른다. 아니 멸종은 아니더라도 천연기념물만큼이나 보기 드물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좀 우기고 싶다. 소위 요즘 애들이 다 몰라도 엄연히 신기료장수가 존재하듯 어느 개그 프로그램에서 “요즘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하면 어김없이 “왜 없어?” 하는 반박과 함께 등장하는 ‘만사마님’처럼 여봐란듯이 눈앞에 들이대고 아래위로 흔들어 줄 날개 없는 천사들의 명단을 줄줄 외고 있으니 걱정을 마시라고 좀 뻐기고 싶다.
내가 가진 그 명단 아닌 명단, 어쩌다 무슨 무슨 잡지라며 각박해진 세상을 다독거리고 쓸쓸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따뜻한 이야기 좀 써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마다 우려먹는 이야기 목록엔, 전라도 김제 땅 어느 들마을의 ‘학성강당’이라는 서당의 이야기가 끼어 있다.
이른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공자 왈 맹자 왈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대쪽같이 곧은 성품의 칠순 노스승이 좌로 가라 우로 가라 사람 사는 도를 가르치는 학당…….
전국 각처에서 글을 배우러 찾아와 사랑채 점거하고 눌러 사는 젊은이가 서른 남짓 되고 학교가 파하는 시간이면 근동의 코흘리개들이 또 서른 명 남짓 사자소학 옆구리에 끼고 그곳을 드나든다.
그렇게 몇 수십 년을 해 왔으니 요샛말로 동창회라도 열면 사오천 명 모이는 건 일도 아니라는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고린 땡전 한 푼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얄팍한 기술 하나만 배우려 해도 돈 없인 안 되는 세상에 하물며 인간사 근본을 일러 주는데 공짜라니. 아무리 공짜 밝힘증이 있는 요즘 사람이라도 얼른 납득하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듣고 나면 과연 큰 스승은 다르구나 싶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학문이란 본디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발견하는 일일진대 제 발로 와서 제 속의 것을 찾아가는 이들에게 어찌 수업료를 받는단 말인가?”
써 놓고 보면 두 줄도 채 안 차는 쉬운 말이지만 초지일관 그리하기는 쉬운 일이 결코 아닌데 학성강당은 살림이 아무리 어려워도 선생의 그 참뜻을 굳게 지킨다.
그러니 단기간에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신식 공부와는 애당초 그 속도부터가 전혀 다른 이른바 슬로 스쿨인 셈이다.
그곳에 가면 바지저고리에 도포 자락 휘날리며 큰 강회부터 강당 식구 먹고 사는 일까지 대소사를 두루 다 챙기는 젊은 선비 한 분을 만나게 된다.
그는 한학은 물론 지리와 의학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달하고도 스스로를 풍신난 사람이라고 한껏 낮춘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라고도 일컫는다. 땡볕에 그을린 농사꾼처럼 거무튀튀한 피부에 작달막한 키 팔자걸음……. 그 자신의 말대로 외모는 보잘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일찍이 그처럼 아는 게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전라도 사투리를 그처럼 주꾸미 고추장 구이같이 매콤짭짜름하게 구사하는 이를 만난 적이 없고 그처럼 천지 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도 겸손한 남자를 본 적이 없다고도 말한다. 풀과 나무에 대해, 우주의 생성과 운행 원리에 대해, 인간의 몸에 대해 농사와 역사, 풍수지리에 대해 그는 백과사전처럼 풍부한 얘깃거리를 지니고 있다. 물론 그는 도인은 아니다. 천기를 누설하는 역술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 그에게 ‘퀵 서비스’를 받으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사람, 군수 선거에 나갈 거라는 사람, 병든 사람, 뻥튀기처럼 값이 뛸 땅을 사고 싶다는 사람, 아들 하나 낳는 게 소원이라는 사람······. 모두들 당장 한 수 가르쳐 달라고 손을 내민다.
그때마다 그가 하는 말이 있다.
밥 굶는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따듯한 밥을 퍼 준 일이 있느냐고, 세상의 많은 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손은 남에게 밥 퍼 주는 손이라고, 세상의 모든 덕 가운데 최고의 덕은 밥으로 쌓는 덕이라고······.
꼼수도 묘수도 통하지 않는 길을 뚫는 건 그뿐이라고 말이다.
역시나 슬로 스쿨의 선비다운 구닥다리 가르침이라고 귓등으로 들을지 모른다. 밥 한 그릇 퍼 준다고 장관 되고 군수 되면 누군들 못 하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몇 마디 짧은 말 속엔 너나없이 어렵다고들 푸념만 하는 세상에 나보다 더 아픈 사람 더 시린 사람과 가진 것을 나누며 살자는 바람이 들어 있다. 힘겨울수록 어려울수록 사람들 마음자리만은 태평양처럼 좀 넓어졌으면 하는 소망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학당엔 요즘 세상에서 실종돼 버린 것들이 참 많이도 모여 있다. 큰 어른의 헛기침 소리, 군불 때는 연기, 새벽 4시의 글 읽는 소리, 머리에 쪽 지고 밥상을 차리는 며느리, 부모 앞에선 머리를 조아릴 줄 아는 아이들, 술 익는 향기, 그리고 복닥대는 사람 냄새…….
그런 구시대의 아련한 유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곳이야말로, 어쩌면 우리들의 신기료장수가 아닐까? 구두를 기워 신을 일이 없어진 세상, 그래서 신기료장수라는 단어가 국어사전 갈피에 고이 잠든 이 부유한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지독한 빈곤감과 박탈감에 휘청대며 살아내느라 누더기가 된 우리들의 마음 신발을 기워 주고 때워 줄 신기료장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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