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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상담소 제도 정착을 위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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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국어기본법과 그 시행령
국어상담소 제도 정착을 위한 제언

김태환∙덕성여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I. 머리말

  국어상담소라는 제도가 도입되는 배경에는 아마도 어떤 위기의식과 불안, 불만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인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한국어를 모국어로 습득하고, 의무 교육을 통해 한국어로 말하고, 읽고, 듣고, 쓰는 능력을 훈련받는다. 또한 국민의 상당수가 대학에 진학하여 고등 교육을 받으며, 대학생들도 교양 과정에서 대부분 대학 국어, 작문 등의 과목을 필수로 이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제 일반인을 상대로 한 일종의 국어 교육 기관이 추가로 설치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국어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한국어 구사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맞춤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고, 무엇이 문법적으로 맞는 말이고 무엇이 말이 안 되는 것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감각을 갖춘 사람도 흔치 않다. 학자들이 번역서를 내면서 역자 서문에 “난삽한 번역문을 우리말답게 고쳐 준 편집부에 감사드린다.”라고 태연히 쓰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국어 교육에도 불구하고 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국어 교육에 큰 결함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랜 국어 교육에도 불구하고 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문제는 국어 교육의 개혁과 내실화를 통해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일반인을 상대로 한 교육 기관을 추가로 설립하는 것이 과연 어떤 실효성이 있겠는가? 기존의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겠는가?
  물론 학교 국어 교육의 개선과 국어상담소 제도의 도입이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학교 교육을 개선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일반인을 상대로 한 국어 교육 기관도 생긴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문제가 방치된 상태에서 후자를 추진하는 것은 본말의 전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국어상담소 제도의 도입 문제는 학교 교육을 포함하여 국어 교육 전반의 맥락 속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상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오랜 학교 국어 교육의 효과가 어떠한 이유로 만족스럽지 못한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 교육은 어떤 방향을 추구해야 하는지, 그리고 학교 교육을 보완하는 국어상담소와 같은 일반인 대상 교육 기관의 역할은 무엇인지 논의해 볼 것이다.


II. 받아쓰기와 구구단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공부하면서 가장 신경 쓰게 되는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받아쓰기와 구구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받아쓰기를 통해 맞춤법을 익히고 구구단을 통해 기초적인 계산 능력을 습득하게 된다. 이 두 가지는 장차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초기 단계에서부터 철저히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의 결과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사람들은 초등학교 때 외운 구구단을 평생 잊어버리지 않는다. 설사 초등학교 때 미처 다 외우지 못해 선생님에게 야단맞았던 아이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곱셈을 할 줄 알게 된다. 구구단을 외운다는 것은, 곱셈을 모르는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곱셈을 할 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받아쓰기를 통한 맞춤법의 습득 역시 동일한 의미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받아쓰기 시험을 늘 다 맞던 아이들조차 더 이상 받아쓰기를 하지 않는 초등학교 고학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맞춤법을 점점 모르게 되고, 글을 점점 더 부정확하게 쓰게 된다. 그러니 받아쓰기를 잘 못하던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학생들이 쓴 글자 하나하나, 띄어쓰기 하나하나가 엄격하게 점검되는 시험은 받아쓰기 이후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받아쓰기 훈련을 마친다는 것은 더 이상 맞춤법에 세심하게 주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학생은 받아쓰기를 마침으로써 맞춤법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 교육의 효과가 반감되는 것은 당연하다. 구구단의 경우, 교육과 현실은 일치한다. 하지만 맞춤법의 경우에는 교육과 현실이 분열되어 있다. 맞춤법은 이론일 뿐이고 받아쓰기라는 인위적 공간에서만 엄격히 지키면 되는 그런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현실을 통해서도 무언가를 배운다. 맞춤법을 부정확하게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그것이 국어 교사나 출판사 교열부의 전문적 지식으로 간주되는 현실 속에서, 받아쓰기의 과정을 모두 통과한 아이들은 그 과정에서 배운 맞춤법의 초보적 지식을 급속히 잊어버리고 만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철저히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망각되어 버리는 것이다.


III. 비상 기관으로서의 국어상담소

  건물 벽에 붙은 안내문에서 흔히 ‘출입을 삼가합시다’와 같은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삼가다’가 기본형이므로, ‘삼가합시다’가 아니라 ‘삼갑시다’라고 써야 한다. 왜 이런 오류가 널리 퍼졌을까? 아마도 ‘삼가 명복을 빕니다’와 같은 표현에서 보듯이 어근과 동일한 형태의 부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삼가다’가 ‘삼가’라는 독립된 단어에 ‘하다’라는 어미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오해가 생겨난 듯하다. 심지어 ‘삼가 합시다’라고 띄어 쓰는 사람도 있다.
  이런 오류를 근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삼갑시다’가 옳은 표기임을 철저히 가르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삼가합시다’라는 표기가 범람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사람도 반복해서 잘못된 표기에 노출되면 동일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 교육의 강화와 함께 현실에서의 교정 작업도 이루어져야 한다. 일반인들에게 ‘삼가다’가 올바른 표기임을 알리고 ‘삼가하다’로 되어 있는 표지판을 수정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학교에서 배운 것이 제대로 현실을 통해 확인되는 구조, 즉 교육과 현실의 일치 구조가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러한 구조가 정착되고 나면, 오류는 점차 예외적인 현상이 될 것이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은 불필요해질 것이다. 학교에서 제대로 배웠다면 나중에 혼란을 겪을 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이와 정반대다. 학교에서 철저히 가르치지 않고,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유포되어 있는 오류를 답습하는 악순환의 과정이 계속되고 있다. 교육이 탄탄하지 못하다 보니, 일단 누군가의 착각으로 오류가 발생하면 그것이 급속히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비단 ‘삼가다’라는 동사 하나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국민의 전반적인 국어 구사 능력에 문제가 있다면, 우선 학교 교육이 개선되어야 하고, 이와 동시에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 이때 학교 교육의 목표는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 문법에 맞는 정확한 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사회에서도 통용되는 규범으로 정착될 때까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국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면 일반인 교육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상의 논의로부터 우리는 국어상담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국어상담소 제도의 도입은 학교 내 국어 교육의 내실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큰 실효성이 없을 것이다. 해마다 학교에서 정확한 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학생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상담소의 운영이 과연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이 제도를 통해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오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의 상담소와 상담원이 필요할 것이다. 그럴 만한 재원과 인력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이다. 또한 정확한 국어 구사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맞춤법과 어법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현실에서, 스스로가 상담이 필요하다고 자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학교 국어 교육이 근본적으로 개선된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국어상담소는 한시적으로 존재 의의를 가질 것이다. 학교 국어 교육이 강화된다고 해도, 현재의 혼란스러운 국어 환경을 방치한다면 교육의 효과는 반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어상담소의 효과적인 운영을 통해 현실을 정확한 국어 사용의 이상에 최대한 근접시켜야 한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사회에서도 그대로 지켜져서 교육과 현실 사이에 조화로운 관계가 성립할 때까지 국어상담소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국어상담소는 모든 상황이 정상화될 때까지만 존속하는 비상 기관인 셈이다.


IV. 무엇을 할 것인가

  국어상담소라고 하면, 우선 국어 구사에 어려움을 느끼는 개인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신청하여 상담을 받는 형식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형식의 상담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밖에 혜택이 돌아갈 수 없고 사회적 파급 효과도 크다고 할 수 없다. 국어상담소의 설립 취지가 국어 문화 전반의 개선에 있다면, 이러한 형식의 상담으로는 기대한 바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국어 환경의 난맥상을 바로잡는다는 큰 목표에 접근하기 위해서 어떤 일들이 이루어져야 할까? 적절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국어상담소의 틀을 넘어서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때, 다음과 같은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국립국어원과 국어 및 국어 교육 관련 기관들이 주체가 되어 맞춤법에서 문법, 좋은 문체에 이르기까지 이해하기 쉽고 정확한 국어를 구사하는 데 실용적인 지침을 제공할 표준적인 지침서(매뉴얼)를 편찬해야 한다. 이 지침서는 기존의 어문 규정집보다 훨씬 더 자세한 내용을 포함해야 하고, 원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도 구체적인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띄어쓰기에 관한 현행 맞춤법 규정은 지나치게 소략하여, 그것에 의지하여 제대로 띄어쓰기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시중에 몇 종의 띄어쓰기 관련 참고 서적이 나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띄어쓰기 용례들만을 제시하고 있어서 띄어쓰기의 원리를 이해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원리를 모르는 채 그 많은 사례들을 다 외우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띄어쓰기 문제는 결국 ‘우리말은 단어별로 띄어 쓴다’는 대원칙으로부터 무엇을 하나의 단어로 볼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귀착된다. 그렇다면 단어의 구성에 관한 일정한 문법적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띄어쓰기를 위해 필수적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원리와 사례의 적절한 결합으로 이루어진 국어 사용 지침서는 한편으로 학교 국어 교육에서 교재로, 혹은 교재 개발의 기초로 활용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국어상담소의 상담 지침서로, 혹은 일반인 교육 프로그램을 위한 교재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국어 지침서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실용주의 정신을 들고 싶다. 실용주의 정신이란 모든 어문 규정과 원칙의 궁극적 목표가 원활한 의사소통에 있다는 신념이다. 좋은 우리말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외래어와 한자어를 무조건 배격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순 우리말로 대체하려는 태도, 우리말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모든 표현 방식을 부정하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말이나 표현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최종 기준은 그것이 의미를 알기 쉽고 간명하게 전달해 주느냐의 여부에 있다. 외래어나 한자어에 대한 판단도 이 원칙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외래어나 한자어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널리 사용되고 친숙해진 표현을 굳이 ---때로는 생소하기조차 한--- 순 우리말로 바꿀 이유는 없다고 본다. 수동태는 우리말답지 않으니 써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수동태를 사용한 표현 방식이 영어와 같은 서양 언어에서 온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할 일은 아니다. 수동태 역시 때로는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위해, 혹은 글의 매끄러운 흐름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말다움’이라는 어떤 고정 불변의 속성은 없다. 듣거나 읽어서 무리가 없이 잘 이해되는 말이 곧 우리말다운 말인 것이다.
  ‘우리말다움’의 신화에 집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은 국어의 특성을 잘 살린 좋은 문체를 확립하는 작업이다. 예컨대 한국어에서는 영어의 경우와 달리 주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문장을 하나의 주어와 그것에 대응되는 하나의 술어로 구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한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주어가 지나치게 많이 생략되어 의미가 모호한 문장들,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는 문장들을 너무나 자주 접하게 된다. 필자는 하나의 문장이 주어와 술어로 구성된다는 것이 문장 쓰기의 대원칙으로 확립되어야 하며, 예외적으로 주어의 생략이 가능한 경우들에 대한 유형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이 국어 사용 지침서 속에 담겨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바람직한 표준적 문체를 확립하기 위해 연구해야 할 문제는 많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알기 쉬운 겹문장(복문)을 구성하기 위한 방법 같은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둘째, 학교에서는 국어 사용 지침서를 기초로 하여 어렸을 때부터 맞춤법과 문법, 좋은 문체에 대한 정확한 감각을 기를 수 있도록 학생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학생들은 맞춤법과 문법을 단순히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기 위한 필수적 도구로서 익혀야 하고, 작문 활동을 통해 맞춤법의 오류, 비문법적인 문장, 부적절한 표현을 고쳐갈 수 있는 기회를 ---비단 초등학교 저학년 때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가져야 한다.
  셋째, 사회의 국어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관이나 단체가 올바른 국어를 사용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다양한 제도가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 방송사와 신문사의 국어 사용 실태를 평가하여 그 결과를 공표한다든가, ‘신뢰할 만한 국어를 사용하는 출판사’를 선정한다든가(이는 특히 아동, 청소년 대상 도서의 경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닐 것이다), 학술진흥재단의 학술지 평가 기준 가운데 하나로 ‘학술지가 제대로 된 교정, 교열 원칙에 따라 편집되었는가’와 같은 항목을 포함시킨다든가 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제도가 도입된다면 국어에 대한 상담이나 조언을 요구하는 수요는 상당히 증가할 것이다. 이때 국어상담소는 국어와 관련된 평가를 받아야 하는 기관이나 단체들을 상대로 사전 평가를 실시해 주고 상담을 제공하기도 하고, 각 기관이 필요로 하는 국어 관련 인력의 양성을 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학교 국어 교육의 강화와 함께 교사를 위한 상담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국어상담소의 몫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단순히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국어상담소가 생긴다고 해서 우리의 국어 환경이 급격히 개선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학교 국어 교육을 포함한 다른 주요 제도들이 큰 폭으로 개혁되지 않으면 국어상담소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질지도 모른다.


V. 글을 맺으며

  우리는 지금까지 국어상담소가 의미 있는 국어 교육 기관으로 자리 잡기 위해 어떤 제도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하는지 살펴보았다. 이 글의 논지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교육받은 국민의 상당수가 올바른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이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무엇보다도 학교에 있다. 그러므로 지금 시급한 것은 학교 국어 교육의 혁신이다. 국어상담소와 같은 일반인 대상 교육 기관은 학교 교육의 성공을 보조하는 한시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 국어 교육의 혁신이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학교 교육의 단단한 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채 설립되는 일반인 대상 국어 교육 기관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