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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알고 있는 어원 몇 가지(3)

조항범∙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이 글은 평소 많이 쓰고 있는 단어나 관용 표현 가운데 그 어원을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대상으로, 그 잘못된 어원을 수정하고 바른 어원을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우리는 앞선 글들에서 ‘가랑비, 가시내, 가시버시, 고릿적, 까치설, 노털, 도루묵, 짱개집, 환장’의 어원을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앞선 글과 같은 방법으로 ‘갈보, 샛강, 시집, 억지 춘향(이), 영계, 자린고비’를 대상으로 그 어원을 밝혀 보고자 한다.


2

2.1. 갈보

  ‘갈보’는 웃음과 몸을 파는 여자이다. 홍등가나 기지촌(基地村) 등지에서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여자가 ‘갈보’이다. 미군에게 몸을 팔며 기생하는 여자를 한자 ‘양(洋)’을 덧붙여 특별히 ‘양갈보’라 칭한다.
  먹고살기 위해 몸을 판다고는 하지만, 몸을 파는 일은 여자에게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여자를 ‘똥갈보’라 하여 더욱 비하한다. ‘갈보’도 비천한데, ‘똥’까지 들어간 ‘똥갈보’는 더욱 비천하다.
  그런데 ‘갈보’라는 단어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잘 쓰이지 않는다. 이 ‘갈보’를 대신한 말이 한자어 ‘창녀(娼女)’나 ‘매춘부(賣春婦)’이다. ‘갈보’가 함축하는 천박한 의미를 조금이나마 순화하기 위해 ‘창녀(娼女)’나 ‘매춘부(賣春婦)’라는 한자어를 선택하여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즘은 이들도 잘 쓰이지 않고, 그 대신 ‘직업여성’이라는 애매한 단어가 주로 쓰인다. ‘창녀(娼女)’나 ‘매춘부(賣春婦)’가 주는 원색적 의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가치중립적인 단어를 새롭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갈보, 창녀, 매춘부, 직업여성’은 몸을 판다는 점에서 다름이 없다.
  그럼 ‘갈보’는 어디에서 온 말인가? 이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한자 ‘蝎婦(갈부)’ 또는 ‘蝎甫(갈보)’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어 왔다. 웃음과 몸을 파는 여자가 남의 재물을 빨아먹기를 빈대가 피를 빨아먹듯 한다고 하여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蝎婦’ 또는 ‘蝎甫’는 그 의미를 고려하여 붙인 취음자(取音字)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어원 설은 전혀 믿을 수 없다.
  또 하나 널리 퍼져 있는 설은 ‘갈보’가 스웨덴 태생의 미국 여배우 ‘가르보’에서 왔다는 것이다. ‘가르보’는 아름다운 용모와 빼어난 연기력으로 1920∼1930년대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던 여배우이다. 이 여배우가 맡은 배역 가운데에는 웃음과 몸을 파는 타락한 여인네의 역할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무슨 영화의 가르보 같은 년” 식으로 입에 자주 올리다가, 급기야 ‘가르보’를 웃음과 몸을 파는 천한 여자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것이 변하여 ‘갈보’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 또한 잘못된 설명이다. ‘갈보’는 ‘가르보’라는 영화배우가 활약하기 이전부터 쓰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갈보’와 음이 유사한 한자어 ‘蝎婦’를 떠올리듯, 음이 유사한 ‘가르보’를 떠올려 적당히 꾸며낸 것이다.
  그렇다면 ‘갈보’의 어원은 알 수 없는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갈보’의 어원이 무엇이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물론 ‘보’는 그렇게 낯설지 않다. ‘뚱보, 먹보, 바보, 심술보’ 등에 보이는 접미사 ‘-보’와 같이 ‘어떤 것을 몹시 즐기거나 어떤 것의 정도가 심한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갈’이다. 이 ‘갈’을 ‘교체하다’라는 뜻의 동사 어간 ‘갈-’로 보고, ‘갈보’를 ‘이 사내 저 사내 자꾸 바꾸기를 잘하는 여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갈보’가 다수의 남자를 상대로 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인데, 그렇다고 그러한 특성을 토대로 단어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먹보, 울보, 째보’ 등과 같이 동사 어간에 접미사 ‘-보’가 결합된 단어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갈보’의 ‘갈’도 동사의 어간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갈보’와 같은 의미로 ‘갈’이라는 단음절 단어가 쓰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보면 ‘갈’이 동사 어간보다는 명사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물론 ‘갈’이라는 단어도 사전에만 올라 있지 실제 용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갈보’에는 ‘양갈보, 똥갈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왜갈보’도 있다. ‘왜갈보’는 ‘몸을 파는 일본 여자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어서 ‘양갈보’나 ‘똥갈보’와 성격이 좀 다르다. ‘양갈보’나 ‘똥갈보’는 모두 한국 여자인데, ‘왜갈보’는 일본 여자이기 때문이다.


2.2. 샛강(-江)

  ‘환경’은 삶의 모체와도 같은 것이다. ‘환경’이 병들면 우리의 삶은 피폐해지고 결국 생명을 잃고 만다. 주변 환경을 본래 그대로 보존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작금의 환경은 말이 아니다. 하늘이든, 땅이든, 물이든 온전한 환경은 하나도 없다. 공기는 온통 오염 물질로 뒤덮여 있고, 땅은 온갖 쓰레기로 썩어가고 있으며, 강물은 오ㆍ폐수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이러니 마음대로 숨을 쉴 수도, 농작물을 먹을 수도, 물을 마실 수도 없다.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환경 파괴’를 눈감아 준 결과로 이렇게 된 것이다.
  환경 파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반작용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환경 단체가 수없이 결성되어 환경 파괴의 감시자 노릇을 하고, 영향력 있는 기관에서 ‘환경 운동’을 수시로 펼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미 파괴된 환경이 원상 복구될 리는 없지만, ‘감시’와 ‘운동’이 더 이상의 파괴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환경 운동’에는 늘 ‘표어’가 따라 붙는다. ‘표어’의 호소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숲을 가꾸자’, ‘물은 생명이다’, ‘샛강이 살아야 큰 강이 산다’ 등이 우리에게 익숙한 표어들이다. ‘숲을 가꾸자’라는 표어는 그야말로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푸르게 하자는 내용이고, ‘물은 생명이다’라는 표어는 우리가 물 부족 국가이니 물을 아껴서 쓰자는 내용인데, 물을 깨끗이 보존하자는 내용도 담겨 있다.
  ‘샛강이 살아야 큰 강이 산다’는 한 언론 기관에서 내세운 표어이다. 이 표어는 언론의 위력을 실감할 정도로 널리 퍼져 환경 운동의 대표적 표어처럼 쓰인 적이 있다. ‘샛강’과 ‘큰 강’을 대비시키고 ‘살다’라는 강렬한 의미의 술어를 동원함으로써 표현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 표어는 결국 ‘큰 강이 거느리는 작은 물줄기부터 살려 큰 물줄기를 살리자’는 취지이다. 이 표어에서 ‘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물줄기’는 ‘샛강’으로, ‘작은 물줄기가 흘러드는 큰 물줄기’는 ‘큰 강’으로 표현하고 있다. ‘큰 물줄기’가 ‘큰 강’으로 표현된 것은 문제가 없지만 ‘큰 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물줄기’가 ‘샛강’으로 표현된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샛강’이 이 표어에서 의도하는 대로 강의 원줄기가 거느리고 있는 지류(支流)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샛강’은 어떤 의미인가? ‘샛강’은 ‘강의 본류에서 갈라져서 가운데에 섬을 이루고, 다시 하류에서 본류에 합쳐지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샛강’은 큰 강의 일부이지 그 강이 끼고 있는 여러 물줄기가 아니다. 서울의 여의도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한강의 본류가 여의도라는 섬을 만나 두 갈래로 나뉘는데, 강폭이 좁은 쪽이 ‘샛강’이 되는 것이다. 이 ‘샛강’은 한참을 지나다가 한강 본류와 만나 다시 큰 강을 이룬다.
  ‘샛강’이 이와 같은 의미라면 ‘샛강이 살아야 큰 강이 산다’라는 표어 속의 ‘샛강’은 그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표어는 잘못된 것이다. 이 표어는 ‘시내가 살아야 큰 강이 산다’ 정도로 바꾸어야 의미가 그런대로 통한다.
  ‘샛’의 의미만 살펴보아도 ‘샛강’이 어떤 강인지 알 수 있다. ‘샛강’은 ‘사잇강’이 줄어든 말이다. 물론 ‘사잇강’은 표준어가 아니다. ‘사잇강’은 ‘사이’와 ‘강’ 사이에 사이시옷이 개재된 어형이다. ‘사잇길’이 ‘샛길’로, ‘사잇문’이 ‘샛문’이 되듯이, ‘사잇강’이 ‘샛강’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샛’을 포함하는 단어에는 ‘샛강, 샛길, 샛문’ 이외에도 ‘샛눈, 샛방(방과 방 사이에 있는 작은 방), 샛서방(남편이 있는 여자가 남편 몰래 관계하는 남자), 샛장지(방과 방 사이의 칸막이한 장지)’ 등 아주 많다. 이들에서 보듯 ‘샛’은 ‘사이에 있는 작은 것’을 지시한다. 이에 따라 ‘샛강’은 ‘섬과 뭍 사이에 있는 작은 강’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작은 강이기 때문에 대체로 물살이 급하고 아주 세다. 그리고 물소리도 크다. 그래서 “샛강 물소리 멎을 때 북촌(北村) 마님 빈대떡 주무르듯(매우 바쁜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속담도 생겨난 것이다.


2.3. 시집

  결혼한 여자들에게 ‘시집’은 어떤 곳인가? 아무리 세월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여자들에게 ‘시집’은 어렵고 불편한 곳임에 틀림이 없다. ‘시’ 자만 나와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주부가 많다고 하니 ‘시집’ 스트레스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무렇게나 해도 크게 흠이 되지 않는 ‘친정집’과 분명 다른 곳이 ‘시집’인 것이다.
  여자가 ‘시집’ 스트레스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 시댁 식구들이 세상을 모두 떠난다면 몰라도 시집 식구들과 관계를 맺고 사는 한 ‘시집’ 스트레스는 운명처럼 따라 다닌다. 스트레스를 더 받고 덜 받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시집’ 스트레스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운 며느리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시집 사람이 되고 싶어도 실제로는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시집’은 그만큼 심정적으로 거리감이 있다.
  여자가 갖는 ‘시집’에 대한 거리감은 이미 ‘시집’이라는 단어 속에 내재해 있다. 바로 ‘시’가 그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면 ‘시’는 어떤 의미인가? ‘시’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시’를 포함하는 단어를 대충 나열해 보자. ‘시집’을 비롯하여, ‘시아비, 시어미, 시부모, 시동생, 시아주버니, 시앗’ 등 아주 많다.
  그런데 이들에 보이는 ‘시’는 중세 국어에서는 ‘싀’였다. 말하자면 ‘시집’은 ‘싀집’, ‘시아비’는 ‘싀아비’, ‘시어미’는 ‘싀어미’ 등이었다. 그러므로 ‘시’의 의미 기능을 찾는 것은 결국 ‘싀’의 의미 기능을 찾는 것과 같다.
  ‘싀’의 의미 기능을 확인하는 데 ‘시앗’이라는 단어가 유용하다. ‘시앗’은 ‘남편의 첩’이라는 뜻인데, 이는 ‘*싀갓’에서 변한 말이다. ‘*싀갓’이 ‘싀앗’을 거쳐 ‘시앗’이 된 것이다. 지금은 ‘첩’이라는 단어에 밀려나 잘 쓰이지 않고, “시앗 싸움에 요강 장수”, “시앗 죽은 눈물이 눈 가장자리 젖으랴.”와 같은 속담 속에서나 확인할 수 있다.
  ‘*싀갓>시앗’은 ‘남편의 첩’이라는 뜻이니 ‘본처(本妻)’와 대립된다. ‘*싀갓>시앗’의 ‘갓’이 ‘처(妻)’를 뜻하는 단어이므로 그에 선행하는 ‘싀>시’는 ‘본(本)’과 대립된다. ‘본(本)’과 대립되는 개념은 ‘부차’, ‘간접’, ‘소원’ 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싀>시’는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 ‘관계가 소원한’ 정도의 의미를 띤다. 이에 따라 ‘*싀갓>시앗’을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 처’로 해석할 수 있다. ‘본처(本妻)’와 비교하였을 때 첩(妾)은 본처보다는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고 심리적으로 좀 거리가 있는 처이기에 이러한 해석에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싀’를 ‘*[新]’의 변형으로 보고 ‘*싀갓>시앗’을 ‘새롭게 얻은 처’로 해석하기도 하고, ‘시앗’의 ‘시’를 ‘外’의 뜻으로 보아 ‘바깥에서 들여온 여자(妻)’로 해석하기도 한다. 심지어 ‘시’를 한자 ‘媤’로 보아 ‘남편 집의 여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그만큼 ‘싀’의 해석은 어렵다.
  ‘시앗’의 ‘시’가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이라는 뜻이라면, ‘시어미’와 ‘시아비’는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 어머니와 아버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시부모는 내 부모가 아니고 남편의 부모이니 분명 심리적 거리가 있는 인물들임에 틀림이 없다.
  아울러 ‘시집’은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 집’으로 해석된다. 나서 자란 ‘친정집’과 비교하면 혼인 관계로 맺어진 ‘시집’은 본질적으로 이차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 시집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을 ‘시’를 이용하여 표현한 것이 ‘시집’이라는 단어이다. 그래서 ‘시집’이라는 단어에 이미 심리적 거부감이 내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시’가 ‘새[新]’에서 변한 것으로 이해한 뒤 ‘시집’을 ‘새로운 집안’으로 해석한다. ‘시집’을 시집온 여자가 새롭게 참여한 가정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집’에서 ‘시집’이 나올 수 없고, 시어른이 사는 ‘시집’을 ‘새롭게 이룬 가정’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어원 설은 잘못된 것이다.
  또 한편 ‘시’를 한자 ‘媤’로 보아 ‘시집’을 ‘시가 쪽 집안’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媤’는 한국에서 편의상 만든 한자이기 때문이다. ‘시집’ 등에 쓰인 ‘시’의 어원이 불분명해지자 여인이 늘 마음을 써서 시부모를 섬겨야 한다는 뜻을 담아 ‘계집 女’ 변에 ‘생각 思’를 결합한 ‘媤’ 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시’를 한자 ‘媤’로 간주하면서 ‘시집’을 ‘媤家, 媤宅’ 등의 한자로 바꾸어 쓰고 있다. 그러나 ‘시집’은 ‘새로운 집안’도 아니요, ‘시가 쪽 집안’도 아닌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 집안’일 뿐이다.


2.4. 억지 춘향(이)

  ‘억지’라는 단어는 다른 단어와 결합하여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데 아주 적극적이다. ‘억지감투, 억지공사, 억지농사, 억지다짐, 억지떼, 억지소리, 억지웃음, 억지투정, 억지힘’ 등에서 보듯 ‘억지’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단어가 꽤나 많다. 얼마나 ‘억지’를 쓰는 세상이었으면 ‘억지’를 이용한 단어가 이렇듯 많이 만들어졌을까. ‘억지 춘향(이)’도 그와 같은 부류의 하나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억지 춘향(이)’은 단어가 아니라 관용구로 쓰이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큰사전』(1957)에서만 해도 ‘억지 춘향(이)’을 ‘억지춘향이’라는 한 단어로 다루고 있어, ‘억지 춘향(이)’을 ‘억지’ 계열의 단어로 묶어서 다루어도 별문제는 없다.
  그러면 ‘억지 춘향(이)’은 어떤 뜻인가? “그렇게 억지 춘향으로 붙들어 앉혀 놓아 봤자 금방 다시 도망갈 터인데…….”, “그 일에 맞지도 않는 사람을 억지 춘향으로 시켜 봐야 뭐 하나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지.” 등에서 보듯 이 표현은 ‘억지로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이 억지로 겨우 이루어지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렇듯 이 표현의 의미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의 유래에 대해서는 즉답을 내리기가 어려운 처지이다. 사실 확인이 곤란한 몇 가지 유래 설이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가능성이 희박한 유래 설부터 소개해 보자.
  첫째는 ‘춘양목(春陽木)’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춘양목’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의 높은 산 지대에서 자라는 소나무이다. 이 소나무에서는 좋은 향기가 나서 ‘春香木(춘향목)’이라 부르기도 한다. 속이 붉고 단단하며 껍질이 얇아 건축재나 가구재로 아주 제격이다. 그리하여 나무 장사하는 사람들이 일반 소나무를 ‘춘향목’으로 속여 파는 일이 잦았다. 일반 소나무를 억지로 ‘춘향목’이라 우겨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억지 춘향(이)’이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춘양목’을 ‘춘향목’이라 불렀다는 증거도 없고, 또 ‘억지 춘향목’이 아니라 ‘억지 춘향’으로 나타난 이유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므로 이 설은 받아들이기가 곤란하다.
  둘째는 ‘춘양(春陽) 역’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춘양 역’의 ‘춘양’ 역시 ‘춘양목’으로 유명한 경북 봉화군 춘양면을 가리킨다. 영동선이 개설될 때, 본래는 ‘방전(춘양면 입구 삼거리)’으로 직선 설계되어 있어 ‘춘양’으로는 철로가 나지 않게 되었는데, 한 자유당 국회의원이 억지로 우겨서 철로를 춘양 시내로 우회시킨 일이 있었다. ‘춘양’이 예로부터 봉화읍에 버금가는 이 지역의 중심지라는 점이 노선 변경의 이유였다고 한다. 춘양 역에 보관된 역사(驛舍) 일지에도 “철도 부설(1955년) 당시 자유당 원내 총무가 방전으로 직선 설계된 것을 춘양 시내로 변경시켰다는 설이 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춘양 역’이 국회의원의 힘으로 억지 변경된 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억지로 철도 노선을 ‘춘양’으로 바꾼 사실에서 ‘억지 춘양(이)’이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춘양’이 우연히「춘향전」의 ‘춘향’과 음상(音相)이 유사하고 또 ‘춘향’이 변 사또에게 억지 수청을 강요받았다는 점이 연상되어 ‘억지 춘향(이)’으로 변했다고 본다.
  ‘억지 춘향(이)’이라는 표현이 ‘억지 춘양’에서 나왔다는 설은 의외의 힘을 갖고 있다. 아마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실이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춘양 역’ 설이 유효하려면 ‘억지 춘향(이)’이라는 말이 ‘춘양’ 역 개설 이후부터 쓰였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억지 춘향(이)’이라는 표현은 적어도 ‘춘양’ 역 개설 이전부터 쓰여온 것으로 보인다. 영동선 철도가 1955년에 부설되는데, 그 이태 뒤에 완간된『큰사전』(1957)에 ‘억지춘향이’라는 단어가 당당히 올라와 있는 것을 보면, ‘억지춘향이’라는 표현이 적어도 1957년에는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던 단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춘양’ 역 개설과 함께 만들어진 표현이라면 바로 사전에 오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억지 춘향(이)’은 ‘춘양’ 역 개설과는 무관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셋째는「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이’의 수청과 관련하여 유래했다는 설이다. 잘 알다시피 ‘춘향이’는 이 도령이 한양으로 떠난 뒤 변 사또로부터 온갖 회유와 협박을 당한다. 억지로라도 춘향이가 수청을 들게끔 변 사또가 온갖 협박을 가한 것이다. 그 모진 핍박에도 불구하고 ‘춘향이’는 일편단심으로 절개를 지킨다. 그래서 ‘춘향이’ 하면 변 사또의 억지 수청을 거부하고 절개를 지킨 열녀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억지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이 표현이 줄어들어 ‘억지 춘향(이)’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억지 춘향(이)’이라는 표현은 옛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이 옛 문헌에 나타나기만 하면 그 유래에 대한 구구한 설명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2.5. 영계(-鷄)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쓰는 말 가운데 ‘영계’가 있다. 이는 나이가 어린 이성(異性)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남성 쪽에서 쓰면 ‘나이 어린 여성’을, 여성 쪽에서 쓰면 ‘나이 어린 남성’을 가리킨다. 비교적 나이 어린 이성(異性)을 성적(性的)인 상대로 생각하고 쓰는 말이기에 속된 의미가 배어 있다.
  그런데 이 ‘영계’라는 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히(?) 여성들은 쓰지 못하였다. 젊은 여성이 성적으로 매력이 있는 젊은 남자를 대놓고 ‘영계’라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제 세상은 달라져서 젊은 여성들도 성적으로 호감이 가는 어린 남성을 얼마든지 ‘영계’라 부를 수 있다. “어, 영곈데, 한번 꼬셔 ‘꼬시다’는 비표준어이며 이것의 표준어는 ‘꼬이다’이다. 볼까?”와 같이 야하고 속된 소리를 남녀를 불문하고 아무 데서나 거리낌 없이 하는 시대가 되었다.
  ‘영계’라는 말이 처음부터 성적으로 호감이 가는 나이 어린 이성을 가리키는 데 쓰인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룸살롱’과 같은 고급 술집에 출입하며 웃음과 몸을 파는 젊은 여성을 오입쟁이 남정네들이 그렇게 불렀다. 이 ‘영계’라는 말이 ‘룸살롱’을 벗어나 나이 어린 여성을 가리키게 되고, 급기야는 나이 어린 남성까지 가리키게 된 것이다.
  ‘룸살롱’과 같은 술집에서의 ‘영계’는 단순히 ‘성적으로 매력 있는 여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관계를 맺으면 회춘(回春)할 수 있는 ‘아이기생’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술집 여자가 “저, 영계죠?”라고 아양을 떨면 자신이 ‘성적으로 매력이 있지 않느냐’는 의미가 아니라 ‘성적 상대자로 괜찮지 않느냐’는 의미가 된다. 몸을 팔 수 있다는 적극적인 의사가 없다면 ‘영계’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술집 밖에서 젊은이들이 쓰는 ‘영계’라는 말이 거슬리는 것이다. 아무리 술집 밖이라 하더라도 술집 안에서 쓰일 때 갖는 음습한 의미가 모두 가셨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말은 젊은 남녀를 불문하고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그럼 이 ‘영계’라는 말은 어디서 온 것인가? 일부 젊은이들은 ‘영’을 영어 ‘young’으로 이해하고, ‘계’를 한자 ‘鷄’로 보아 ‘젊은 닭’으로 해석하려 든다. 그런데 이렇듯 영어와 한자가 결합하여 한 단어가 만들어지는 것도 어색하거니와 ‘젊은 닭’이 어떤 닭인지가 분명하지 않아 ‘영계’를 ‘young + 鷄’의 구조로 보는 것은 이상하다. 물론 ‘노계(老鷄)’라는 단어가 있으니 ‘젊은 닭’을 뜻하는 단어도 있을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정작 그와 같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영’을 ‘young’으로 본 것은 ‘노계(老鷄)’의 ‘老’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의미상으로 ‘老’에 ‘young’이 대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계’가 ‘젊은 닭’은 아니지만 ‘닭’의 한가지임은 분명하다. ‘영계’의 의미를 고려해 보면 이는 ‘연계(軟鷄)’에서 온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사전에도 잘 지적되어 있다. ‘연계(軟鷄)’는 한자 뜻 그대로 ‘아직 성숙하지 않아서 어리고 무른 닭’이라는 뜻이다. 병아리보다 조금 큰 닭이 ‘연계’이다. 약으로 쓰인다고 하여 ‘약계(藥鷄), 약병아리(藥---)’라고도 한다. 삼계탕에 들어가는 닭을 연상하면 된다.
  ‘연계’가 ‘영계’로 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는 자주 목격되는 자음 동화 현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연계’가 ‘영계’로 변하면서 생겨난 의미가 위에서 언급한 ‘술집의 젊은 아가씨’이다. 젊은 아가씨와 관계하면 양기(陽氣)가 회복된다는 고정관념이 몸을 보(補)하는 데 제격인 어린 닭을 떠올려 그 아가씨들을 ‘영계’라 부른 것이다. 술집에서 막 노는 노라리라고는 하지만 여성을 ‘보신 음식’으로 전락시키다니 여성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내력을 안다면, 아무리 간 큰 남성이라 하더라도 어찌 쉽게 젊은 여성을 향해 ‘영계’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무리 모자란 여성이라 하더라도 어찌 스스로를 ‘영계’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영계’로 불리는 상대 여성은 화를 내기는커녕 마냥 좋아한다. ‘영계’가 지니는 ‘젊다’라는 의미만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기는 ‘영계’로 불리는 상대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젊은 여성이 “너, 아직 영곈데 뭐.” 하고 추켜 주면 싫어하는 젊은 남성이 하나도 없는 듯하다. 이것이 ‘영계’의 함정인 것이다.


2.6. 자린고비(--考妣)

  ‘재물’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재물을 많이 갖고 있다 하여도 그것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하루아침에 잃을 수 있고, 아무리 가진 것이 없다 하여도 열심히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큰 재물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재물’은 돌고 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재물’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니 ‘내 것’이라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어디 이렇듯 너그러운 마음을 갖기가 쉬운가. 한번 ‘재물’을 탐하게 되면 끝이 없고, 재물을 얻었다 하면 내놓을 줄 모르는 것이 보통의 인간이다.
  베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재물’을 움켜쥐고 있는 것과 그것을 아끼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재물을 오랫동안 보존하려면 아껴야 하지만, 필요할 때에는 선뜻 내놓아 남을 도울 줄도 알아야 한다.
  평생 모은 재산을 장학 기금으로 내놓거나 불우 이웃을 돕는 데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남을 돕는 데에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이러한 사람이 훨씬 많다. 이 같은 부류의 사람들 중에는 남에게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지나치게 인색하여 빈축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른바 ‘자린고비’가 많은 것이다. ‘자린고비’는 다라울 정도로 인색한 사람이어서 늘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럼 이 ‘자린고비’는 어디서 온 말인가? ‘자린고비’의 어원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충청도 충주 지역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재물을 많이 모았지만 인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인색하였는가 하면, 자기 부모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지방 종이를 불살라 버리는 것이 아까워 이 지방을 기름에 절여 두고두고 쓸 정도였다. 부모 제사일 경우에는 ‘考妣(고비)’라고 적힌 지방을 쓰게 되는데, 이 지방을 기름에 절였다 하여 ‘절인고비’라고 했으며, 이것이 변하여 ‘자린고비’가 되었다.
  ‘자린고비’라는 말이 충주 지역에 사는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의 인색한 생활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충주 자린고비’, ‘충주 결은 고비’라는 표현이 쓰이는 것을 보면 ‘인색한 것’과 ‘충주’라는 지역이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린’을 ‘절다’(땀이나 기름 따위의 더러운 물질이 묻거나 끼어 찌들다)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는 없다.
  ‘충주 결은 고비’라는 표현이 쓰이고, 또 ‘결은’이 얼마든지 ‘자린’으로 변할 수 있어서 ‘자린’은 ‘결은’의 변화형으로 보아야 하지 않나 한다. ‘결은’은 ‘겯-’의 활용형이다. ‘겯-’은 ‘기름 따위가 흠씬 배다’라는 뜻이다.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오면 ‘결어, 결은, 결으니’ 등으로 불규칙 활용을 한다. ‘결은 고비’의 ‘결은’은 ‘결은신(기름을 발라 흠씬 배게 한 가죽신)’에 쓰인 ‘결은’과 같은 것이다.
  문제는 ‘고비’이다. ‘고비’가 과연 ‘돌아가신 부모’를 뜻하는 ‘考妣’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고비’를 ‘高蜚’라는 실존 인물로 보기도 하고, ‘옛날 비석’을 뜻하는 ‘古碑’로 보기도 하나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들보다는 ‘考妣’로 보는 것이 훨씬 그럴듯하다. 물론 이 ‘考妣’ 뒤에는 ‘지방(紙榜)’이라는 말이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보아야만 ‘기름이 배다’라는 뜻의 ‘겯-’과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름이 밴다고 할 때 그 대상은 종이인 ‘지방’이다. 이렇게 보면 ‘결은 고비 (지방)’는 ‘기름이 밴 부모 지방’ 정도의 의미가 된다.
  ‘지방’은 매년 제사 때마다 붓으로 다시 써서 쓰는 것이 보통이다. 제사가 끝난 뒤에는 ‘축문’과 함께 태워 버린다. 불태워 버려야 하는 ‘지방’을 아까워서 다시 쓰는데, 그것도 오래 쓰기 위하여 기름에 결어 쓴다는 것이다. 좋게 보면 절약이지만, 절약이라 하더라도 너무 지나치다.
  이로써 ‘결은 고비’가 ‘인색함’을 보여 주는 표현임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아울러 ‘결은 고비’는 그와 같은 인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지시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색한 사람을 뜻하는 대표적 표현을 들라 하면 ‘결은 고비’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결은 고비’는 ‘충주’라는 지명과 어울려 주로 ‘충주 결은 고비’로 쓰인다. ‘충주 결은 고비’는 그 구성 표현 중의 하나인 ‘결은 고비’가 ‘자린고비’로 변하여 한 단어로 굳어진 뒤에는 ‘충주 자린고비’로 더 많이 쓰인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자린고비’는 바로 이 ‘충주 자린고비’에서 ‘충주’가 생략된 말이다. ‘충주’ 고을에 정말로 인색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지 자못 궁금하다.


3.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갈보’의 어원을 한자 ‘蝎婦’, ‘蝎甫’ 또는 미국 여배우 이름 ‘가르보’에서 구하기도 하나 믿을 수 없다. 물론 아직 ‘갈보’의 어원이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갈’은 단독으로도 쓰이는데, 그 어원이 분명하지 않다. ‘-보’는 ‘먹보, 바보, 심술보’ 등에 보이는 ‘-보’와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2) ‘샛강’을 강의 원줄기가 거느리고 있는 지류(支流)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샛강’은 큰 강에 있는 섬과 뭍 사이에 있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3) ‘시집’에 대해서는 ‘시’를 ‘*[新]’의 변형, 한자 ‘媤’ 등으로 보아 ‘새롭게 이룬 집안’, ‘시가 쪽 집안’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는 ‘싀’로 소급하고 이는 ‘관계가 먼’이라는 의미를 띠어, ‘시집’은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은 집안’으로 해석된다.
  (4) ‘억지 춘향(이)’의 어원에 대해서는 ‘춘양목(春陽木)’ 설, ‘춘양(春陽) 역’ 설, ‘춘향이’ 설 등이 있다. 이 가운데에서는 ‘춘향이’와 관련된 설이 가장 믿을 만하다. ‘억지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5) ‘영계’에 대해서는 영어 ‘young’과 관련시켜 ‘젊은 닭’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영계’는 한자어 ‘연계(軟鷄)’에서 변음된 어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연계’에서 변한 ‘영계’가 ‘성적으로 호감이 가는 어린 여성’을 가리키게 된 것은 ‘연계’가 보신용 닭이기 때문이다.
  (6) ‘자린고비’의 어원을 ‘기름에 절인, 고비(考妣)라고 적힌 지방’으로 설명하기도 하나 믿을 수 없다. ‘자린고비’는 ‘결은고비(--考妣)’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결은고비’는 ‘기름이 밴 부모 지방’(=‘기름에 결은 부모 지방’) 정도로 해석된다.


|참고 문헌|

김민수 외 편(1997), “우리말 語源辭典”, 태학사.
안옥규(1989), “어원사전”,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조영언(2004), “한국어 어원사전”, 다솜출판사.
조항범(1997), “다시 쓴 우리말 어원 이야기”, 한국문원.
조항범(2004),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1, 2)”, 예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