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어를 기록한 문헌의 역사가 짧고 한국어와 기원을 같이한 친족 언어들 또한 적어서 그 어원 연구가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져 왔음을 지난번에 지적한 바 있다. 그리하여 종래의 한국어 어원 연구에서 연구 대상이 된 것이 복합어·파생어와 차용어에 국한되다시피 했음을 말하였다. 특히 국내 학자들의 연구에 이런 경향이 강했던 것이다.
지난번에는 ‘불고기’에 대하여 짧게 논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써야겠다는 생각을 품어 왔었는데, 이런 비근한 예도 어원 연구에서 얘깃거리가 됨을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 젊은 세대의 독자들 중에는 과연 그럴까 하는 의아한 느낌을 가지기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이들이 앞으로 이 말에 대한 탐색을 더 하게 되었으면 하는 은근한 바람도 내 마음 한편에 있었다.
이번에는 차용어의 한 예를 들어 간단히 논해 보려고 한다. 일본어 차용어라면 대개는 20세기 전반(前半)을 떠올릴 것이다. 그 기간에 많은 일본어 단어가 한국어에 차용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20세기 이전에 차용된 예들도 더러 있어서 어원학자의 눈길을 끈다.
2.
내가 ‘승기악탕’(勝妓樂湯)이란 이름을 처음 본 것은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였다.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원저를 정양완(鄭良婉) 교수가 역주한 책(보진재, 1975) 82면에 ‘승기악탕’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정 교수의 현대역은 다음과 같다.
(1) 살찐 묵은 닭의 두 발을 잘라 없애고 내장도 꺼내 버린 뒤, 그 속에 술 한 잔, 기름 한 잔, 좋은 초 한 잔을 쳐서 대꼬챙이로 찔러 박오가리, 표고버섯, 파, 돼지고기 기름기를 썰어 많이 넣고 수란(水卵)을 까 넣어 국을 금중감 만들 듯하니, 이것이 왜관(倭館) 음식으로 기생이나 음악보다 낫다는 뜻이다. |
내가 언제 이 글을 읽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10년이 더 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이 내용보다 ‘승기악탕’에 붙인 정 교수의 주(註)였다.
(2) 일본 스끼야끼를 말한다. 이 글의 설명처럼 하도 맛있어 기생이나 음악보다 낫다는 뜻이라 하였으나 일본어 ‘스끼야끼’의 와전(訛傳)된 사음(寫音)임. 들에서 쟁기에 고기를 구워 먹은 데서 온 이름. |
‘왜관’ 음식이라 하였으니 일본 음식임을 짐작할 수는 있었으나 이 주를 보기 전에는 ‘승기악(탕)’이 ‘스끼야끼’(스키야키 鋤燒)’의 차용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차용어가 들어오면 그 어형이 한국어에 동화되게 마련이다. 심한 경우에는 아주 한국어 단어처럼 바뀌어 버리기도 한다. 민간 어원설(民間語源說, folk etymology)의 작용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승기악(탕)’은 이런 경우의 한 극치를 보여 준 것으로 느껴졌다. 분명히 ‘승기악탕’이라 썼고 그 뜻을 “기악도곤 낫다 말이니라”라고 했으니 옛 사람들이 이 이름을 이렇게 해석했음을 분명히 보여 준 것이다.
우선 내 옆에 있는 사전들을 뒤져 보았는데 한글학회의 「큰사전」(4권, 1957)에 ‘승기악탕(勝妓樂湯)’이란 표제어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3) 쇠고기 잰 것을 남비 바닥에 깔고, 진장을 발라 구운 숭어 토막을 담고, 그 위에 온갖 채소와 고명을 굵게 썰어 얹고, 왜된장에 끓인 음식. |
이 풀이는 위에서 본 (1)의 내용과 사뭇 다른데, 이 뒤에 간행된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1992), 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1999) 등은 이 풀이를 그대로 베껴 놓았음을 볼 수 있다. 정작 궁금한 것은 「큰사전」이 어디서 이런 내용을 따왔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 요리에 관한 여느 책이나 글일 것으로 짐작만 하고 있을 뿐, 확인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렁저렁하는 사이에 세월만 흘러갔는데, 내게 다시 ‘승기악탕’이란 말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 것은 이가환(李家煥)의 「정헌쇄록」(貞軒ꝯ錄)이었다. 이의 번역이 임형택 교수를 비롯한 몇 분의 노력으로 이루어져 「민족문학사연구」(통권 30, 31호, 2006)에 실린 것이다. 나는 이런 잡지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는데 임 교수가 고맙게도 보내 주어서 읽을 수 있었다. 임 교수는 이 글 속에 ‘고구려어음’(高句麗語音)이란 항목이 있어, 내 생각이 나서 보낸 것인데, 이 글에는 이 밖에도 내 눈길을 끄는 항목들이 여럿 있어서 이 글을 읽는 동안 내내 깊은 흥취에 빠졌었다.
그중에서도 ‘승기악탕’에 관한 부분은 10여 년 전 이 이름을 처음 대했던 때의 신기한 느낌을 되살아나게 하였다. 아래에 번역한 글을 옮긴다.(통권 31호, 458∼459면)
(4) 또 한번은 공적인 자리에서 어떤 귀인이 음식을 내놓는데, 육류 · 해산물 · 조류(羽毛) · 조개류 · 소채류 · 버섯류 등 무릇 음식 재료라고 하는 것들을 골고루 넣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장(醬) 종류 또한 특별한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물어보았더니 왜국에서 들어왔으며 이름은 ‘승기락탕(勝伎樂湯)’이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요행히 핑곗거리가 있어서 먹지 않았다. 뒤에 어느 친구의 집에서 이 음식을 만나게 되었는데, 둘러앉아서 먹는 사람들이 모두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어서 나 혼자 남다르게 하는 것이 싫어 마지못해 그것을 입에 대었다. 오늘에 이르도록 꺼림칙한 마음이 남아서 마치 고기 배 속에 낚싯바늘이 든 것 같았다. |
이 글을 통해서 저자가 생존한 18세기 후반에 이 음식이 일부 상류 계층 사이에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주로 어느 지역이었는지가 궁금한데 그것을 알 수 없음이 아쉽게 느껴졌다. 그리고 저자가 왜 이 음식 먹기를 꺼리고 피하였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점도 아쉽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 음식의 이름을 ‘勝伎樂湯’이라고 표기한 것, 그것이 왜국(倭國)에서 온 것이라 했음은 소중한 증언으로서 그 가치가 인정된다. 번역문에서 ‘승기락탕’이라고 한 것을 보고 나는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가능성에 부딪혀 잠시 당황하였으나 역시 ‘樂’은 ‘악’으로 읽음이 온당하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 글에서 나는 이 음식 이름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었다는 느낌을 얻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동양학연구소(단국대학교)에서 펴낸 「한국 한자어 사전」(1992)의 ‘勝’자(권1, 642면)을 펴 보았다. 그 첫머리에 있는 「해동죽지」(海東竹枝)의 ‘승가기(勝佳妓)’, 「송남잡지」(松南雜識)의 ‘승가기(勝歌妓)’라는 음식 이름도 ‘승기악(탕)’과 한가닥 닮은 데가 있는 듯해서 흥미로웠지만, 그 다음의 ‘승기야기(勝技冶岐)’에 이르러 내 눈은 아주 얼어붙고 말았다. 여기에는 「해행총재」(海行摠載)에서 인용한 글이 실려 있었는데 이것이 내 아둔했던 생각을 깨우쳐 준 것이었다. 이 글은 「해행총재」에 수록된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游錄)」 끝에 있는 「문견잡록(聞見雜錄)」에서 볼 수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의 「고전국역총서」, 「해행총재」 권2, 40-41면). 한문으로 된 글을 번역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5) 찬품(饌品)은 삼자(杉煮)로써 아름답다 하는데 어육과 채소 등 온갖 것을 섞어 쓰고 술과 장을 쳐서 푹 익힌 것이다. 우리나라의 잡탕(雜湯) 종류와 비슷하다. 예전에 한 떼의 왜인들이 삼나무 아래서 비를 긋고 있었는데 심히 배가 고파 음식 먹을 생각이 나서 각자 가지고 있던 것을 한 그릇에 합하여 넣고 삼나무를 때어 끓였는데 그 맛이 제법 좋아 이로써 이름을 삼게 되었다. 그곳 방언으로 삼나무를 ‘승기(勝技)’라 하므로 ‘승기야기(勝技冶歧)’라 부르게 된 것이다. ‘야기(冶歧)’는 ‘煮(자)’의 와음(訛音)이다.1)
와음(訛音)이라 한 것은 훈(訓)을 잘못 말한 것이다. ‘煮’ 자의 훈은 일반적으로 niru이지만, 예전에는 yaku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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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에 전해 온 이 음식 이름에 관한 속전(俗傳)을 기록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승기’와 ‘야기’에 대한 해석이다. 특히 ‘승기’가 삼나무를 가리키는 일본어 단어임을 지적한 것이 내 눈길을 끌었다.
이 설명은 일본어에 우리가 오늘날 흔히 알고 있는 sukiyaki(스키야키)와는 다른 sugiyaki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나무(杉)를 가리킨 일본어 단어는 sugi인 것이다. 그래서 내 주변의 일본어 사전들을 펴 보니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일본어 사전 「광사원」(廣辭苑 kōjien, 제2판 1969)에서 두 단어의 풀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6) suki-yaki(鋤燒). 쇠고기 · 닭고기 등에 파 · 두부 등을 곁들여서 끓인 냄비 요리. 유신(維新) 전에 아직 짐승 고기를 먹는 것을 싫어하고 꺼렸을 때에 가래(鋤, suki)에 얹어서 구워 먹은 데서 온 말이다.
(7) sugi-yaki(杉燒). 삼나무의 얇은 판자로 짠 상자에 어육 · 야채 등을 넣고 흰 된장 국물을 채워 넣고 불에 쬐어 익힌 요리. 삼나무에서 밴 향기를 상완(賞翫)함. 뒤에는 삼나무 판자 위에 어육을 놓고 불을 피워 구운 요리를 말한다. |
이로써 (5)에서 삼나무를 말한 것이 근거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2)
여기서 (5)와 (7)의 설명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할 수 있으나 자세한 논의는 피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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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통하여 ‘승기야기’, ‘승기악(탕)’이 sukiyaki가 아닌 sugiyaki의 차용임을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일본어의 이른바 탁음(濁音, dakuon, 유성 자음)에 관한 고찰에 의해서도 증명되는 사실이어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실은, 처음 저 위의 (1)과 (2)를 읽고 나서 내 머리 한 구석에 의문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일본어의 suki를 ‘승기’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첩해신어」(捷解新語)에 대한 연구에서 일본어의 모음 간의 탁음 b, d, g의 발음이 ‘ㅂ, ㄷ, ㄱ’에 ‘ㅁ, ㄴ, ㅇ’을 앞세운 표기로 이루어진 사실이 알려져 왔으며 이것은 일본어의 옛 발음을 잘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예) oyobi(及) ‘오욤비’(1.18),
tada-ima(唯今) ‘단다이마’(1.9),
isogi(急) ‘이송기’(4.19) 등.3)
「첩해신어」 영인본(일본 경도대학 국문학회, 1957)의 ‘해제’(21∼24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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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집석」(方言集釋)의 일본어 발음 표기도, 엄격하지 않아 예외가 더러 있으나, 이와 같은 방법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 ‘脣 입시울ㅇ구짐비루’(1.16),
‘眼淚 눈ㅅ믈ㅇ나민다’(1.16),
‘眼珠 눈망울ㅇ마낭고’(1.16) 등.
이들은 각각 kucibiru, namida, manago의 발음을 표기한 것이다.4)
「왜어유해」(倭語類解)는 이들과는 달리 ‘ㅂ, ㄷ, ㄱ’ 앞에 ‘ㅁ, ㄴ, ㅇ’을 병서(竝書)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예) ‘脣 입시울슌ㅇ구지루’(上16),
‘淚 눈물루ㅇ나미’(上20),
‘眸 눈망울모 마나’(上16)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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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을 알고 있은 나로서는 ‘승기악(탕)’의 ‘승기’는 suki의 반영으로는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의문이 sugiyaki의 확인으로 비로소 풀리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이 일본어 단어 sugi(杉)가 「방언집석」(4.20)에 ‘杉木 잇개 나모ㅇ승기노기’, 「왜어유해」(하28)에 ‘杉익개삼ㅇ스’라 표기되었음을 볼 때5)
이 예들에 보이는 ‘잇개나모’, ‘익개’에 대해서는 정약용(丁若鏞)이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삼나무(杉)는 ‘젓나무’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못 ‘익가나무’라 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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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의문이 있을 수 없음을 결론짓게 된다.
3.
차용어 연구는 대개는 무미건조한 것이 보통인데, ‘승기악(탕)’의 경우는 예외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 어형부터 흥미를 끄는 점이 있거니와 어원학자로서 특히 큰 매력을 느낀 것은 그 일본어의 원말에 대한 추적 작업을 행하여 새로운 결론을 얻은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차용어 연구에 있어서도 사소한 의문점이라도 덮어 두지 말고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일본어의 경우는 상당히 친숙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광복 이전에 중등 교육을 받은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일본어를 제법 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언어의 연구나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내 연구에 필요하여 일본어의 역사적 연구에 관심을 가져왔는데, 그 어려움이 여간 크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껴 왔다. 특히 세부적 사실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새롭게 깨달을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한다. sugiyaki(杉燒)의 경우도 이렇게 해서 요행 새롭게 깨닫게 된 한 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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