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인간 언어는 말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이 입으로 발화하는 말소리는 강아지가 짖는 소리와 같은 동물의 소리나 바람이나 천둥과 같은 자연계의 소리, 자동차 소음과 같은 기계의 소리와는 다른 점이 있다. 우리가 책상을 치는 소리를 흉내 낼 때 ‘쿵, 탁’ 등으로 표현하지만 이 두 개만을 비교해 보더라도 초성, 중성, 종성이 모두 다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책상을 치는 소리에서 자음이나 모음이 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말소리는 다르다. 언어마다 조금씩 차이는 나지만 공통적인 것은 자음과 모음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음과 모음을 남녀의 차이 또는 동서의 차이와 같이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도 있으나 자음과 모음은 실제 서로 깊은 상관성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말소리가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소리끼리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색의 혼합에서 주황색과 보라색은 서로 다른 색이지만 공통적으로 빨간색을 가지고 있고, 보라색과 녹색은 공통적으로 파란색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소리의 세계도 마찬가지여서 몇 개의 기본적인 원소로 된 소리가 있고 그 기본적인 원소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소리가 있다. 그리하여 공통적인 원소가 있는 두 소리는 가까운 소리가 되고, 공통적인 원소가 없는 소리는 별로 관계가 없는 소리가 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말 발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1)
다만, 이 글은 전문적인 논문이 아니므로 설명이나 용어의 선택에 있어 기존의 것들과 다를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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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음의 발음
인간 언어에는 모음이 두 개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언어는 세 개 이상의 모음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한국어는 이중 모음을 제외하면 10개의 단모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음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말의 ‘ㅏ, ㅣ, ㅜ’와 비슷한 것들이다. 이 세 개의 소리는 인간이 낼 수 있는 모음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을 가진 소리들로, 색의 삼원색과 같이 소리의 삼원음이라 할 수 있다. 즉, 대부분의 나머지 모음들은 이 세 모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첫째, ‘ㅔ’와 ‘ㅐ’는 ‘ㅏ’와 ‘ㅣ’가 결합하여 나는 소리이다. ‘ㅏ’보다 ‘ㅣ’의 색깔을 더 많이 넣어 결합하면 ‘ㅔ’가 되고 'ㅣ'보다 ‘ㅏ’의 색깔을 좀 더 많이 넣으면 ‘ㅐ’가 된다. 이 차이를 기술적으로 말하면, ‘ㅔ’는 ‘ㅣ’를 발음할 때처럼 입을 많이 벌리지 않고 발음하는 소리인 반면, ‘ㅐ’는 ‘ㅏ’처럼 입을 크게 벌려 발음하는 소리이다. 이 두 소리는 모두 같은 원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많다. 따라서 쉽게 같은 소리로 발음될 수 있는데 그것이 현대 국어에서 두 소리를 구별하여 발음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한편,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네가’를 [니가]로 발음하고, ‘베개’를 [비개]로 발음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ㅔ’ 모음에는 ‘ㅣ’ 모음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둘째, ‘ㅗ’는 ‘ㅏ’(또는 ‘ㅓ’)와 ‘ㅜ’가 결합하여 나는 소리이다. 영어에서 ‘Australia, auto, autumn, daughter, because’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a’[ㅏ]와 ‘u’[ㅜ]가 결합하여 우리말의 [ㅗ](발음 기호로는 [ɔ])와 같이 발음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2)
이 말은 영어에서 ‘-au-’를 무조건 ‘ㅗ’처럼 발음한다는 것은 아니다. 글자 그대로 [-au-]로 발음할 수도 있지만 만약 두 소리를 합쳐서 하나의 소리로 발음하면 우리말의 ‘ㅗ’처럼 발음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sauna’는 [사우나](발음 기호로는 [sáunə])로 발음할 수도 있고, [소나](발음 기호는 [s:nə])로 발음할 수도 있다. 라틴어에서 [au-]로 발음되던 ‘káusa’(thing)이나 ‘paupere’(poor)가 스페인어로 가서는 ‘kósa’와 ‘póbre’로 바뀌어 발음되는 것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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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말에서는 ‘ㅓ’와 ‘ㅜ’가 결합하여 [ㅗ](발음 기호로는 [o])로 발음된다. ‘밥 좀 줘’, ‘여기 둬’, ‘고기 구어(∼궈) 먹자’와 같은 말을 ‘밥 좀 [조]’, ‘여기 [도]’, ‘고기 [고] 먹자’라고 발음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3)
젊은 층에서 연인들 사이에 “나 아파!”라는 말을 애교스럽게 “나 아포!”라고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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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말의 ‘ㅗ’([o])는 ‘ㅏ’보다는 ‘ㅜ’의 성격이 강한 소리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고, 밥 먹고, 별로야’와 같은 말을 [그리구], [밥 먹구], [별루야]와 같이 발음한다.
셋째, ‘ㅓ’ 모음은 이론적으로 볼 때 ‘ㅏ’와 ‘ㅡ’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ㅏ’보다는 ‘ㅡ’ 모음의 성격이 강한 소리이다. 이런 이유로 ‘어른, 더럽다, 정말, 거짓말, 없다’와 같은 말을 [으른], [드럽다], [증말], [그짓말], [읎다]처럼 발음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넷째, ‘ㅡ’ 모음은 음성학적인 면에서 아무런 특징을 가지지 않은 모음이다. 즉, 이 소리는 마치 투명한 유리와 같아서 다른 색깔의 소리와 만나게 되면 자신은 사라지고 전적으로 다른 소리의 색깔을 그대로 비춰 준다. 이런 이유로 ‘쓰(다), 크(다), 뜨(다), 모으(다)’와 같이 ‘ㅡ’ 모음으로 끝난 말 다음에 ‘-아서/어서’와 같은 말이 결합하면 ‘써서, 커서, 떠서, 모아서’ 등과 같이 발음된다. 그리고 ‘strike’와 같은 외래어나 외국어를 들을 때, ‘s’와 ‘t’ 사이, ‘t’와 ‘r’ 사이, 그리고 마지막 ‘k’ 다음에 마치 ‘ㅡ’가 있는 것처럼 들리거나, 한글로 표기할 때 ‘스트라이크’와 같이 ‘ㅡ’를 넣어서 쓰는 것도 ‘ㅡ’ 모음이 갖는 투명한 성질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중 모음은 두 개 이상의 단모음이 결합하여 나는 소리이다. 그런데 그 결합이 단모음의 경우와는 다르다. 단모음의 결합이 두 개의 단모음을 합쳐 제3의 소리를 만드는 것이라면, 이중 모음에서의 결합은 순차적 결합이다. 따라서 두 소리 모두 자신의 소릿값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언어에서 이중 모음의 두 소리 중 하나는 ‘ㅣ’ 또는 ‘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소리들은 다른 모음에 미끌어지듯이 합류한다는 음성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활음(glide)이라 한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ㅕ’와 영어의 ‘young’은 앞 소리가 ‘ㅣ’(발음 기호로는 [j] 또는 [y])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어의 ‘ㅟ’와 영어의 ‘window’는 앞 소리가 ‘ㅜ’(발음 기호로는 [w])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영어에서는 ‘boy’나 ‘cow’처럼 ‘ㅣ’나 ‘ㅜ’ 소리가 뒤에 올 수도 있는데, 한국어에서는 ‘ㅢ’를 제외하고는 그런 경우가 없다.
이중 모음에 대해 우리 한국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와’와 같이 ‘ㅗ’를 앞소리로 갖는 이중 모음이다. 이 소리를 글자 모양대로 ‘ㅗ + ㅏ’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ㅗ’ 속에 들어 있는 ‘ㅜ’가 ‘ㅏ’와 결합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다만, 한글이 음양오행설에 입각하여 창제되었기 때문에 양성 모음인 ‘ㅏ’와 음성 모음인 ‘ㅜ’의 결합인 ‘’는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보기에 매우 미련하고 험상궂은 데가 있다.’는 의미를 가진 ‘우악살스럽다’라는 말의 준말이 ‘왁살스럽다’라는 사실에서 ‘와’가 ‘ㅜ + ㅏ’의 결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수도인 ‘콸라룸푸르’나 남미의 국가 이름인 ‘에콰도르’를 각각 ‘쿠알라룸푸르’와 ‘에쿠아도르’라고도 발음하는 데서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3. 자음의 발음
이제 자음에 나타나는 말소리의 특징을 바탕으로 자음의 발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간단히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한국어 19개의 자음을 간단한 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설명의 편의상 관련이 있는 활음도 함께 제시하도록 한다.
<표 1> 한국어 자음 체계 1
발음 위치
발음 방법 |
입술소리 |
혀끝소리 |
구개음 |
연구개음 |
목청소리 |
장애음 |
ㅂ, ㅍ,
ㅃ |
ㄷ, ㅌ, ㄸ
ㅅ, ㅆ |
ㅈ, ㅊ,
ㅉ |
ㄱ, ㅋ,
ㄲ |
ㅎ |
비음 |
ㅁ |
ㄴ |
|
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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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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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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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음 |
ㅜ([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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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j/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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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입술소리의 특성
지금 우리가 말하는 ‘물[水], 불[火], 풀[草]’과 같은 말은 세종 대왕 때에는 ‘믈, 블, 플’이었다. 즉, ‘ㅡ’ 모음이 ‘ㅜ’ 모음으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ㅁ, ㅂ, ㅍ’과 같은 입술소리 가 있을 경우에 주로 나타났다. 그리고 현대 국어에서 ‘춥다, 덥다, 아름답다, 밉다’와 같은 말에 ‘-어/아’를 붙이면 각각 ‘추워, 더워, 아름다워, 미워’와 같이 된다. 여기서 ‘워’에 있는 ‘우’는 어디서 온 것일까? 또 하나의 예를 보자. 한국어로 강아지 짖는 소리는 ‘멍멍’인데 이 말은 ‘멍+멍’이다. 영어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여 ‘bow’를 두 번 써서 나타낸다. 그렇다면 ‘bowbow’가 되어야 할 텐데 실제로는 ‘bowwow’이다. ‘b’가 우리말의 ‘우’와 비슷한 ‘w’로 바뀌었다. 왜 그럴까? 또 이가 흔들리는 것을 영어에서는 ‘wobble’과 같은 말로 표현하는데 젖니가 빠질 때의 영어권 아이들은 그것을 ‘bobble’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경우는 ‘w’가 ‘b’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예는 한국어와 영어뿐만이 아니라 많은 언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위의 몇 가지 예를 통해 우리는 입술소리가 ‘ㅜ’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들 자음이 ‘ㅜ’와 같은 구성 원소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ㅂ’과 같은 소리가 다른 소리로 바뀐다면 (물론 안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우’[w]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4)
단, 입술소리 뒤에 ’ㅁ, ㄴ‘과 같은 비음이 올 경우에는 같은 입술소리 비음인 [ㅁ]으로 발음된다. ’앞문[암문], 집는[짐는]‘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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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사실, 즉 자음과 모음이 서로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입술소리가 같은 자음인 혀끝소리로 변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그것은 공통적인 구성 원소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아파’가 ‘아포’로 발음되는 것을 보면 ‘ㅍ’에 들어 있는 ‘ㅜ’가 뒤에 오는 어미 ‘-아’와 결합하여 ‘ㅗ’로 발음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2. 혀끝소리의 특징
우리말에서 ‘걷다, 묻다, 듣다, 깨닫다’ 등과 같은 ‘ㄷ’ 불규칙 활용 용언의 어간에 ‘-어/아’와 같은 어미를 붙이면 각각 ‘걸어, 물어, 들어, 깨달아’와 같이 발음된다. 즉, ‘ㄷ’이 ‘ㄹ’로 바뀐다. 한편, ‘설+달, 술+가락, 이틀+날’과 같은 말은 ‘섣달, 숟가락, 이튿날’처럼 되어 ‘ㄹ’이 ‘ㄷ’으로 바뀐다. 한편 영국 영어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미국 영어에서는 ‘water, city’ 등과 같은 말을 [워러], [시리]와 같이 발음한다. 즉, ‘t’가 우리말의 ‘ㄹ’처럼 발음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중국(또는 홍콩)의 영화배우로 유명한 ‘주윤발(周潤發)’의 영문 이름은 ‘Chow Yuen Fat’이다. 우리는 ‘발’이라고 ‘ㄹ’로 발음하는 것을 영어 표기에서는 우리말의 ‘ㄷ’이나 ‘ㅌ’에 해당하는 ‘t’를 쓴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ㄷ, ㅌ, ㄸ’와 같은 소리가 ‘ㄹ’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혀끝소리 안에 ‘ㄹ’이라는 구성 원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혀끝소리를 쪼개면 그 속에 ‘ㄹ’이 들어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말의 ‘ㄷ’ 불규칙 활용 용언이 예외 없이 ‘ㄹ’로 바뀌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단, 혀끝소리 뒤에 ’ㅁ, ㄴ‘과 같은 비음이 올 경우에는 같은 혀끝소리 비음인 [ㄴ]으로 발음된다. ’옷만[온만], 걷는[건는]‘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3.3. 구개음의 특징
우리말에 구개음화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굳이, 같이’ 등과 같은 말의 발음이 [ㄷ]이나 [ㅌ]으로 발음되지 않고 [ㅈ]이나 [ㅊ]으로 발음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개음화는 항상 ‘ㅣ’ 모음(또는 ‘ㅣ’ 계열 이중 모음)이 있을 때 일어난다. 즉, ‘굳어, 같아’와 같은 경우에는 그대로 [ㄷ]과 [ㅌ]으로 발음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가 외래어를 차용하여 쓸 때 대부분은 ‘스트라이크’와 같이 ‘ㅡ’ 모음을 사용한다. 그러나 ‘college, sponge, bench, lunch’ 등과 같이 구개음인 경우는 ‘ㅡ’ 모음이 아닌 ‘ㅣ’ 모음을 사용하여 ‘칼리지, 스펀지, 벤치, 런치’ 등과 같이 발음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구개음과 ‘ㅣ’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구개음 안에 ‘ㅣ’라는 구성 원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구개음화의 경우에는 ‘ㄷ, ㅌ’이 ‘ㅣ’ 모음을 받아들여 ‘ㅈ, ㅊ’으로 변하고, 외래어 발음의 경우에는 구개음 안에 들어있는 ‘ㅣ’가 밖으로 나와 모음으로 실현된 것이다.
한국어의 구개음은 발음되는 위치의 면에서 볼 때 혀끝소리와 연구개음의 중간에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혀끝소리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낮, 낯’과 같은 말의 발음은 [낟]과 같이 혀끝소리로 발음되고, 뒤에 비음이 올 경우에도 ‘낮만[난만], 쫓는[쫀는]’과 같이 혀끝소리 비음인 [ㄴ]으로 발음된다.
연구개음은 이론적으로 논란이 많이 될 수 있고 또 한국어에 예가 많지 않아 구성 성분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도록 한다. 다만, 연구개음은 자음의 대표적 성격을 가져 가장 많은 인간 언어에 나타난다는 사실만 밝히도록 한다. 그리고 이 소리는 뒤에 비음이 오면 같은 위치의 비음인 [ㅇ]으로 발음되는데, ‘국민[궁민], 속는[송는]’ 등이 그 예가 된다.
3.4. 한국어 자음 동화
한국어에는 앞 글자의 받침과 뒤 글자의 첫 자음이 만나면 소리가 변하는 자음 동화가 있다. 자음 동화는 겉으로 보기에 순행 동화, 역행 동화, 상호 동화 등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의 표를 더욱 간단하게 하여, 받침에 발음될 수 있는 소리만으로 재구성한 아래의 표를 이용하면 매우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표 2> 한국어 자음 체계 2
발음 위치
발음 방법 |
입술소리 |
혀끝소리 |
연구개음 |
장애음 |
3 |
ㅂ
(ㅍ) |
ㄷ
(ㅌ, ㅅ, ㅆ) |
ㄱ
(ㅋ, ㄲ) |
비음 |
2 |
ㅁ |
ㄴ |
ㅇ |
유음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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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
|
한국어는 위의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받침에 오로지 7개의 소리만 발음이 가능하다.(참고로, 괄호 속의 소리는 받침에서 ‘ㅂ, ㄷ, ㄱ’으로 발음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한국어는 앞 자음이 뒤 자음보다 강한 소리면 안 된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이 규칙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원리와 같다. 이제 한국어의 자음 동화에 대해 다음의 규칙을 세워 설명하도록 한다.
규칙 1: |
‘앞 자음 ≦ 뒤 자음’이
되어야 한다. |
규칙 2: |
<규칙 1>을 준수하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소리의 변동이 일어난다. 소리의 변동은 앞 자음을 같은 위치에서 한 단계 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
몇 가지 예를 보도록 하자.[설명의 편의상 소리의 강한 정도(즉, 강도)를 숫자를 이용하여 나타내어 가장 강한 소리인 장애음을 3, 그다음 강한 비음을 2, 가장 약한 유음을 1로 한다.]
첫째, ‘임금’과 ‘국민’의 경우이다. ‘임금’의 경우는 앞 글자의 받침 ‘ㅁ’이고 뒤 글자의 첫 자음이 ‘ㄱ’인 ‘비음 + 장애음’인 반면, ‘국민’의 경우는 그 반대인 ‘장애음 + 비음’이다. 전자의 경우는 앞 자음보다 뒤 자음이 더 강한 2 < 3이어서 자음 동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앞 자음이 뒤 자음보다 더 강한 소리이기 때문에 위의 <규칙 1>을 위반하게 되어 반드시 소리의 변동이 일어난다. <규칙 2>에 따르면 이 경우 앞 자음을 같은 위치에서 한 단계 내리게 되어 있으므로 ‘ㄱ’을 같은 위치의 한 단계 아래의 소리로 내리면 [궁민]과 같이 [ㅇ]이 되어 <규칙 1>이 요구하는 바를 지킬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국민’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집만, 걷는’ 등과 같이 ‘장애음 + 비음’으로 된 모든 경우에 적용된다.
둘째, ‘진리, 심리, 궁리’와 같은 ‘비음 + 유음’의 경우를 보자. 이 경우에 ‘진리’는 역행 동화가 일어나 [질리]로 발음되는 반면, ‘심리’와 ‘궁리’는 순행 동화가 일어나 각각 [심니]와 [궁니]로 발음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음운 현상에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동화 방향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겉으로 보기에 ‘심리’와 ‘궁리’가 순행 동화의 적용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에 국한된 것이고 한국어 자음 동화는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앞 자음이 변하는 역행 동화를 원칙으로 한다. 먼저 ‘진리’의 경우를 보면 앞 자음이 뒤 자음보다 강한 2 > 1의 관계이다. 이 경우는 <규칙 1>에 어긋나므로 소리의 변동을 겪게 된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리의 변동은 앞 자음을 한 단계 내리면서 이루어지므로 ‘ㄴ’을 한 단계 내린 [ㄹ]로 발음되어 [질리]와 같은 발음이 된다. ‘심리’와 ‘궁리’의 경우도 앞 자음이 뒤 자음보다 강하다는 점에서는 ‘진리’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들도 소리의 변동을 겪게 된다. 문제는 앞 자음을 한 단계 내리는 데 있다. 그것은 같은 위치에 1의 강도를 갖는 소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규칙 1>을 지키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뒤 자음을 한 단계 올리는 수밖에 없다. 결국 [심니], [궁니]와 같이 발음된다. 여기서 ‘찰나’와 같은 발음은 왜 [찰라]처럼 자음 동화가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왜냐하면 ‘ㄹ-ㄴ’은 ‘유음 + 비음’으로 <규칙 1>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말에서 ‘ㄹ-ㄴ’은 <규칙 1>과 관계없이 무조건 발음이 불가능한 두 자음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놀 + 는, 불 + 니, 아들 + 님’ 등과 같은 말에서 ‘ㄹ’은 탈락하게 된다. 만약 어떤 이유로 ‘줄넘기, 달나라’ 등에서와 같이 ‘ㄹ’이 탈락하지 않을 때에는 불가피하게 자음 동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 경우의 자음 동화는 <규칙 1>과는 관계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동일한 ‘유음 + 비음’의 구조를 가진 ‘설마, 열무’와 같은 말이 자음 동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압력, 국력’과 같은 말을 통하여 ‘장애음 + 유음’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경우는 흔히 말하는 상호 동화가 일어나는 구조이다. 이 경우에는 앞 자음이 3이고 뒤 자음이 1이어서 <규칙 1>을 어겨 소리의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 소리의 변동은 앞 자음을 한 단계 내리는 것이므로 일단 장애음을 같은 위치의 비음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비음으로 만든 다음에도 여전히 <규칙 1>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유음의 위치로 한 단계 더 내릴 수도 있겠지만 내려도 해당하는 소리가 없다. 따라서 할 수 없이 뒤 자음을 한 단계 올려 발음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이들의 발음은 각각 [암녁]과 [궁녁]이 되고, 같은 원리로 ‘몇 리’는 [면니]가 된다.
한국어 자음 동화는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매우 단순한 원리에 의해 일어난다. 그런데 문제는 외래어 또는 외국어 발음이다. 사람들은 ‘on line’과 같은 발음을 [온나인]으로도 발음하기도 하고, [올라인]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이 경우, 위의 규칙을 따르면 ‘진리’에서와 같이 [올라인]으로 발음하는 것이 옳을 것 같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말에서는 ‘ㄴ-ㄹ’의 경우 뒤에 오는 ‘ㄹ’을 [ㄴ]으로 발음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생산량[생산냥], 입원료[이붠뇨]’ 등과 같은 말이 그 예가 된다. 이 두 가지 발음의 차이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진리[질리]’처럼 한 단어로 인식하는 경우에는 앞 자음을 바꾸어 발음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생산 + 량, 입원 + 료’와 같이 ‘ㄴ’으로 끝난 단어 다음에 ‘ㄹ’로 시작하는 다른 말이 붙는 경우에는 뒤 자음을 바꾸어 발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on line’의 발음은 이것을 한 단어로 인식하느냐 두 단어의 결합으로 인식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외래어의 발음에서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outlet’과 같은 말이다. 이 단어를 보통 [아울렛]이라고 발음하는데 과연 우리말 발음에 맞느냐 하는 것이다. 이 원리를 따르면 ‘good luck’도 [굴럭]이 되는데 우리말의 경우 ‘몇 리’는 [멸리]가 아닌 [면니]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4. 맺는말
우리가 화학을 공부해 보면 개별 원소가 있고 물질은 그 원소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원소들을 결합시킨다 하더라도 어떻게 결합시키느냐에 따라 다른 물질이 된다. 말소리도 이와 유사하다. 하나의 원소로 구성된 말소리도 있고, 몇 개의 원소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말소리도 있다. 그리고 말소리의 친소 관계는 서로 공통적인 구성 원소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하여 공통적인 구성 원소가 있는 두 소리는 가까운 소리가 되고, 공통적인 원소가 없는 소리는 별로 관계가 없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하나의 소리가 다른 소리로 변하여 발음될 때 그 구성 원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인 소리 변동의 법칙이다. 위에서 본 한국어의 발음이 이와 같은 사실을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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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언어 음운론을 위한 모음 연구, “이중언어학” 25, 이중언어학회. |
허용(2004), |
한국어 자음 동화에 대한 지배 음운론적 접근, “언어와 언어학” 34, 한국외국어대학교 언어연구소. |
허용·김선정(2006), |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발음 교육론”, 박이정. |
허웅(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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