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 현대 시사에 있어 ‘소월시학’이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비중은 그의 시가 아직도 수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다거나 아니면 그가 천재적 시인의 풍모를 지닌 시인이었다든가 하는 신화성에만 기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소월이 이 땅 현대 시사의 초기 시단 형성 과정에서 다른 어떠한 시인보다도 뚜렷하게 개성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가 이 땅에서 전통적인 한국적 리리시즘 미학을 현대적으로 발굴하고 구축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에 보다 중요한 의미가 놓인다.
소월 김정식(1902∼1934)은 이 땅 현대 시사에 있어서 시집
『진달래꽃』(매문사, 1925) 한 권으로 불멸의 위치에 놓이게 된 이 땅 근대 문학사의 대표적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시단 활동은 1920년에 그가 「낭인의 봄」 등 5편을
『창조』 5호에, 「먼후일」외 4편을 『학생계』 1호에 발표함으로써 시작된다. 이후 그는 1934년 12월 작고하기까지 전통적인 민족적 서정과 민중 정감을 빼어난 가락으로 형상화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 주었다. 아직까지도 소월 시는 가장 아름답고 친근한 현대 시의 한 전범으로서 민족인의 가슴속에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으로 생각된다.
1. 진달래꽃 사연
해마다 봄이 오면 생각나는 시가 한 편 있다. 「진달래꽃」이 그것이다. 시 하면 김소월이고, 소월 하면 떠오르는 게 「진달래꽃」이기에 언제나 봄이 오면 소월과 「진달래꽃」이 그리워지는 까닭이리라. 겨울 동면과 동토의 결박에서 풀려나서 조국의 산천 어디에서나 무르피어 울긋불긋 시심을 일깨워주는 연분홍 진달래꽃, 그 꽃은 우리 민족에게는 영원한 추억의 꽃이자 그리움의 꽃이고 애달픈 희망의 꽃이기에 언제나 새봄을 선구하면서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데 진달래꽃은 우리 시사에서 몇 가지 상징의 영역을 포괄하고 있어서 관심을 환기한다.
①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寧邊의 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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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날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詩人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냘핀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 하루아침에 비비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중략…)/ 진달래꽃은 봄의 선구자외다/ 그는 봄의 소식을 먼저 전하는 예언자이며/ 봄의 모양을 먼저 그리는 선구자외다/ 비바람에 속절없이 지는 그 엷은 꽃잎은/ 선구자의 불행한 수난이외다// 어찌하야 이 가난한 시인이/ 이같이도 이 꽃을 붙들고 우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선구자들 수난의 모양이/ 너무도 많이 나의 머리 속에 있는 까닭이외다./(…하략…)
―박팔양, 「너무도 슬픈 사실」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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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 한 잎 두 잎 따먹은 진달래에 취하여/ 쑥바구니 옆에 낀 채 곧잘 잠들던/ 순이의 소식도 이제는 먼데// 예외처럼 서울 갔다 돌아온 사나이는/ 조을리는 오월의 언덕에 누워/ 안타까운 진달래만 씹는다//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
―조연현, 「진달래꽃」 전문 |
소월의 「진달래꽃」은 현대 시에서 진달래꽃을 노래한 한 원형이자 고전 시가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현대 시의 한 전범이기도 하다. 그만큼 애달픈 정한의 꽃이면서 오랜 그리움과 추억을 노래한 꽃으로서 한 대명사 격인 작품이라 하겠다. 근년엔 이 시에 나타나는 미래시제와 가정법에 유의하고, 이 시 창작에 영향을 미친 예이츠 「하늘의 융단」(김억 번역, 「꿈」, 「태서문예신보」, 1918)이 적극적인 사랑의 하소연이라는 점에 비추어 이 시를 정한의 노래가 아니라 애절한 사랑 고백 또는 적극적인 사랑의 하소연으로 해석하는 경향(졸고 「존재론과 저항 의식」,
『생명ㆍ사랑ㆍ자유의 시학』, 동학사, 1998)이 두드러진다.
박팔양의 시는 「봄의 선구자 진달래를 노래함」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다. 표면적으로는 말 그대로 봄에 가장 먼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진달래를 노래한 것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이 땅의 해방과 독립, 자유와 평화를 찾기 위해 분투하다가 사라져 간 이름 없는 민초들 또는 선구자들을 형상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진달래꽃으로 봄을 표상하면서, 그 속에 이 땅 역사의 봄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다가 숨져 간 수많은 의인ㆍ역사 또는 ‘사회주의 투사’(『조선문학사』, p. 215)를 암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순수 문학적인 표상성을 사회ㆍ역사적 문맥으로 결합ㆍ상승시킨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조연현의 진달래꽃에는 이 땅 고달픈 역사와 민중의 삶이 얼비쳐 있어서 관심을 환기한다.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이라는 시구 속에는 온갖 굶주림과 고난 속에서 어기차게 살아온 민족적 삶의 온갖 간난과 민중적 삶의 고달픔이 서려 있는 것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실상 “그런데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황금찬, 「보리고개」 부분)라는 시가 있지 않던가. 새봄맞이 설레는 환희는 잠깐이고 해마다 되풀이 되는 춘궁기의 몸서리쳐지는 가난과 주림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다간 이 땅 민초들의 애절한 절규가 담겨 있다는 말이 되겠다.
이렇게 보면 진달래꽃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에게는 마치 ‘아리랑’의 사연이 그러하듯이 온갖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이 얼크러져 있는 민족의 꽃이며 민중의 꽃으로서 대표적인 표상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소월의 시에서 ‘즈려’라는 시어가 자주 논란이 되곤 한다. 그것은 대체로 ‘가볍게 눌러’라는 정도의 뜻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그러한 용례는 파인 김동환의 시에서 “영변에 피는 꽃은 빨간 진달래꽃/ 즈르 밟힐까 저워 산기슭엔 안 피고/ 멀리 날릴까 바람 부는 날도 고개 숙이지요”(「각시」)에선 ‘즈르’로 나타난다. ‘즈려/즈르’는 소월ㆍ파인의 고향인 ‘평안/함경’의 차이일 뿐 다같이 ‘눌러/눌려’의 뜻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엔 중국 연변 동포 시인인 김파의 “멀리 쪽빛 물결 밟으며/ 수줍게 걸어오는 햇님/ 장미 수건 즈려 쓰고/ 웃으며 웃으며 옵니다”(「해돋이」 부분)라는 시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즈려/즈르’는 평안ㆍ함경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지역말인 것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지역말, 즉 방언을 적극 활용한 데서 소월의 뛰어난 시어 감각이 드러나는 것이며, 이보다 10년 후배인 동향 출신 시인 白石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방언의 적극 계발과 활용으로 인해 소월의 민족적 주체성과 자부심 및 평등 정신이 높게 평가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2. 「산유화」와 존재론의 시
소월 시에는 무수한 식물 이미저리군이 등장함으로써 그의 시가 식물적 상상력에 크게 의지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특히 꽃은 그의 시에서 소재 혹은 제재로서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사랑의 표상이 아니라 좀 더 깊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① 죽으면? 죽으면 도로 흙되지.
흙이되기前, 그것이 사
사. 물에물탄것 그것이 살음.
서름. 이는 맥물에 돌을 살믄셈.
보아라 갈바에 나무닙한아!
―「죽으면?」(『학생계』, 1920. 7.) |
② 산에는 픠네
치픠네
갈 봄 녀름업시
치픠네
산에
산에
픠는츤
저만치 혼자서 픠여잇네
산에서우는 적은새요
치죠와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지네
치지네
갈 봄 녀름없시
치지네
―「산유화」 |
먼저 이 시에는 삶, 인생에 관한 본질로서 삶과 죽음에 관한 성찰이 담겨 있어 주목을 환기한다. 인간이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기에 그것은 시간 위의 존재이고, 삶이란 설움의 연속이라는 것, 그러기에 허무하고 고독한 것이라는 삶에 관한 근본 성찰이 담겨 있는 것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실상 이러한 고독과 슬픔, 허무와 죽음으로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은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하다못해 죽어달래가 올라」, 「금잔디」, 「초혼」, 「돈과 밥과 맘과 들」, 「생과 돈과 死」 등 수많은 시편들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시 ②는 「진달래 」과 함께 소월의 대표 시 중의 하나로서 꼽힌다. 그만큼 소문난 작품이지만 그에 대한 깊이 있는 해명은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동리의 「청산과의 거리가 제시된 작품」이라는 견해(『문학과 인간』, 백민문화사, 1948)가 대표적인 한 예일 뿐, 보다 진전된 해석이 제시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이 시는 제목부터 보다 섬세한 주목을 필요로 한다. 그냥 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산유화, 즉 산에 핀 꽃으로서 ‘산’과 ‘꽃’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꽃이 피어 있는 환경으로서의 자연을 말하는 동시에 생명 있는 존재로서의 꽃을 함께 표상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생명의 원리와 자연의 원리를 함께 노래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첫 연은 꽃이 피어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산, 즉 자연의 질서 내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평범한 사실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자연의 질서란 바로 ‘갈 봄 녀름업시’라는 구절처럼 계절의 변화이자 순환의 원리를 의미한다. 자연의 원리는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 즉 흐름과 변화의 원리를 바탕으로 전개되며, 그 위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생명(꽃)의 원리 또한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산에는 픠네/치픠네/갈 봄 녀름없이/치픠네’라는 구절 속에는 산과 꽃, 즉 자연과 생명이 공간적 질서와 시간적 질서의 결합 위에 놓여 있으며, 그것은 순환의 원리에 근거한다는 깨달음이 제시되어 있다.
둘째 연에는 자연과 생명의 공간적 존재성이 형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먼저 ‘산에/산에’와 같이 산의 독립적 존재성을 강조한다. 한 행에 배치해도 될 것을 별개의 두 행으로 나누어 행갈이를 한 것은 율격의 생동감을 유발하는 동시에 세상이 무수한 존재의 병렬 또는 어우러짐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점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산이 표상하는 별개의 존재성, 즉 단독자적 존재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라는 말이다. 아울러 ‘픠는츤/저만치 혼자서 픠여잇네’라는 구절도 마찬가지이다. 자연 위에 살아 있는 것의 표상으로서의 꽃, 또는 인간의 객관적 상관물로서의 꽃들이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다는 사실은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궁극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개체적 존재성 또는 실존의 거리, 운명의 거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과 청산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 꽃과 꽃, 인간과 인간, 즉 모든 존재들이 숙명적으로 지니고 있는 실존 상호 간의 거리이자 단독자적 존재 원리이고 운명의 거리를 표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서 지상 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서로 ‘혼자 있음’, ‘떨어져 있음’이라는 단독자로서의 존재 원리를 기초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아울러 ‘저만치 혼자서’라는 구절은 시인 소월의 시적 자아가 세계와 맞부딪쳐서 깨닫게 된 고절감(孤絶感)의 반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연에서는 다시 생명 있는 것들 내에서의 상대적 존재성이 제시된다. 꽃과 새의 관계 설정이 그것이다. 꽃과 새는 다 같이 산속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생명 있는 존재로서의 상대성을 지닌다. 꽃은 식물적 존재성의 표상이고 새는 동물적 존재성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꽃은 운명적인 속성을, 새는 자유 존재의 표상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꽃과 새는 식물성과 동물성, 구속성과 자유성을 함께 포괄하고 있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상징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아니면 생명 있는 것들의 원리가 식물과 동물, 지상과 공중, 음과 양 등과 같이 상대성 원리를 지닌다는 점을 암시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넷째 연은 다시 첫 연과 호응되면서 시의 주제를 제시한다. 이 시는 기본적으로 기승전결이라는 4연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1연에서의 꽃이 피는 행위는 다시 4연에 이르러서 꽃이 지는 사건으로 마무리된다. 꽃이 핀다는 것과 다시 진다는 사실은 생명의 원리이자 존재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순환 원리와도 연결되며, 생(生), 노(老), 병(病), 사(死)라고 하는 인생 법칙과도 상통한다. 따라서 이 시는 산에서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통해서 꽃이 지닌 생명의 법칙을 바라보고, 이것을 계절의 순환 원리라는 자연의 법칙으로 연결하고, 다시 이어서 만남과 떠남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원리로서 받아들여서, 마침내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원리, 그리고 나아가서는 생성과 소멸이라는 만상의 존재 원리를 투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 「산유화」의 다층적 해석의 가능성은 ①꽃-피고 짐(생명의 원리), ②자연-4계의 순환(자연의 원리), ③사랑-만남과 헤어짐(사랑의 원리), ④인생-태어남과 죽음(인생의 원리), ⑤삼라만상-생성과 소멸(존재의 원리)로서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청산과의 거리’를 노래한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라 ‘꽃의 법칙 → 4계·자연의 법칙 → 사랑의 법칙 → 인생의 원리 → 존재의 원리’라고 하는 삼라만상의 존재상을 밝혀 주는 ‘존재론의 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시에는 꽃의 생명 원리, 자연의 순환 원리를 통해서 존재의 현상과 본질을 객관적으로 투시하는 통찰력과 예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물로서의 생명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본래 모습을 객관적으로 통찰하고 그에 회귀함으로써 인생의 본래 모습과 그 가치를 탐구하고자 하는 존재론적인 노력이 이 시의 근본 취의로 해석된다.
3. 소월 시와 현실 인식
소월 시에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와 같이 소박한 전원시 또는 동시적(童詩的)인 경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예전에 밋처 몰낫서요」,「원앙침(鴛鴦枕)」,「애모(愛慕)」 등과 같이 달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애틋한 사랑의 노래도 많이 발견된다. 아울러 「삭주구성(朔州龜城)」, 「길」 등의 향토적 서정시나 「부모」,「부부」 등 가족주의적인 시, 그리고 「접동새」, 「비난수하는 맘」 등과 같은 설화적인 민속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다양하면서도 정감이 넘치는 전통 서정시의 세계를 아기자기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한 전통 서정시의 세계와 함께 그의 시에는 또한 현실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나 노동 사상 및 저항 의식이 발현되어 주목을 끈다. 그의 시 속에는 「옷과 밥과 자유」나 「남의 나라 땅」 등의 경우와 같이 당대 현실의 불모성에 대한 울분이나 저항 의식이 분출되어 관심을 끈다.
① 도라다보이는 무쇠다리
얼결에 워건너서
숨그르고 발놋는 남의 나라
―「남의 나라 」
|
② 공중에 떠다니는
저기 저 새여
네 몸에는 털있고 깃이 있지.
밭에는 밭곡석
논에 물베.
눌하게 익어서 수그러졌네.
楚山 지나 狄踰嶺
넘어선다.
짐 실은 저 나귀는 너 왜 넘니?
―「옷과 밥과 자유」 |
시 ①은 압록강 철교를 모티브로 하여 일제 강점하 고통스러운 민족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재발견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 주어 주목을 환기한다. 특히 ‘숨그르고 발놋는’이라는 표현 속에는 온갖 불안 의식과 강박 관념 그리고 위기의식에 떨며 살아가는 일제 강점하 민족적 삶의 슬픈 표정성이 잘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시 ②는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생명권과 생존권 및 생활권, 그리고 인격권을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어서 주목을 환기한다. 이 시에서 옷과 밥이란 그야말로 먹고 입고 자는 것으로서의 생존권 또는 생활권을 표상한다. 인간이 지상에 발붙이고 살기 위해서는 의식주로서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에서 자유의 문제에 대한 성찰을 제시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생존권, 생활권도 중요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주체성과 존엄성은 자유권과 평등권, 즉 인격권을 확보하는 데서 지켜질 수 있다는 날카로운 인권 의식 또는 현실 인식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나귀, 짐과 같이 지상의 굴레를 상징하는 소재와 대조되어 나타나는 새와 날개의 표상성은 바로 이러한 자유에 대한 지향성과 갈망을 포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4. 노동 사상과 극복의 정신
아울러 다음 작품은 소월 시에서는 매우 색다른 모습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민중적인 생명력 또는 노동 의식을 보여 주기도 하며, 아울러 당대의 빼앗긴 현실에 대한 울분과 저항 의식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우리두사람은
키놉피가득자란 보리밧, 밧고랑우헤 안자서라.
일을필(畢)하고 쉬이는동안의깃븜이어.
지금 두사람의니야기에는 치필
오오 빗나는태양은 나릿이며
새무리들도 즐겁은노래, 노래불러라.
오오 은혜여, 사라잇는몸에는 넘치는 은혜여,
모든은근스럽음이 우리의맘속을 차지하여라.
세계의튼 어듸? 자애(慈愛)의하늘은 넓게도덥혓는데
우리두사람은 일하며, 사라잇섯서,
하늘과태양을 바라보아라, 날마다 날마다도,
새라새롭은환희를 지어내며, 늘 갓튼우헤서.
다시한번 활기잇게 웃고나서, 우리 두사람은
바람에일리우는 보리밧속으로
호믜들고 드러갓서라, 가즈란히가즈란히
거러나아가는깃븜이어, 오오 생명의 향상(向上)이어.
―「밧고랑우헤서」 |
이 시는 배경과 분위기에서부터 소월 시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많은 시가 저녁 혹은 밤이 배경으로 되어 있으며 꽃, 새, 달, 비, 눈물, 낙엽, 무덤 등 하강적·비관적 분위기로 가득 차 있음에 비추어 이 시는 밝고 건강한 색조로 충만되어 있는 것이다. 한낮이 배경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감성보다는 이성, 체념보다는 극복 의지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보리밭을 시의 배경으로 한 것은 보리 자체가 역경을 헤쳐 온 이 땅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의 한 표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는 건강한 노동 사상과 대지 사상(大地思想), 그리고 정오 사상(正午思想: pénsée de midi)이 서로 합치된 작품에 해당한다. ‘일을 필하고 쉬이는 동안의 깃븜이어’, ‘우리두사람은 일하며, 사라잇섯서’, ‘호믜들고 드러갓서라, 가즈란히가즈란히’라는 핵심 구절들은 자연의 생명력과 인간의 노동 의지가 하나의 노동 사상으로 고양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거러나아가는 깃븜이어, 오오 생명의 향상이어’라는 결구는 노동을 통한 삶의 극복과 상승 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대지의 사상, 노동의 철학이야말로 소월 시에서 흔히 지나쳐버리기 쉬운 면이 아닐 수 없다. 실상 이 땅 험난한 역사를 슬기롭게 극복해 온 정신적 저력이 바로 이러한 강인하고 굳센 노동 사상에 뿌리를 둔 민중적 생명력일 것이라는 점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 시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함께 20년대 민중시의 한 전범이 될 수 있으리라.
나는 꿈꾸엇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즈란히
벌의하로일을 다맛추고
석양의 마을로 도라오는을,
즐거히, 가운데.
그러나 집일흔 내몸이어.
바라건데는 우리에게 우리의보섭대일땅이 잇섯드면!
이처럼 도르랴, 아츰에점을손에
새라새롭은탄식을 어드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몸은 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반짝임은, 별비치아득임은.
물결 올나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엇지면 황송한 이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압페는
자츳가느른길이 니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거름,한거름.보이는 산비탈엔
온새벽 동무들 저저혼자……山耕을 김매이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보섭대일이 잇섯드면」 |
바로 이 점에서 소월 시는 비관적인 현실 인식과 저항 의식이 표출된다. 일제 강점하에서 우리 민족은 누구나 집과 옷과 밥, 그리고 혼과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상화의 시구처럼 ‘남의 땅/빼앗긴 들’에서 혼과 인간적 존엄성을 모두 박탈당한 채 ‘다리를 절며 하로하로를 걸어가는’ 불구의 모습인 것이다.
인용한 예시에서는 농토(「보섭대일 」)를 빼앗기고 유랑하는 민족의 참상이 ‘동이랴, 남북이랴/내몸은 가나니, 볼지어다’로서 제시되어 있다. 대략 기승전결 네 단락으로 짜인 이 시는 낭만적 아이러니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첫 연에서 즐거운 노동의 꿈이 환상적으로 창조되었다가, 2연에서 그것이 돌발적으로 무너지고, 3·4연에서 쓰라린 당대 현실의 모습이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집일흔 내몸이어/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보섭대일이 잇섯드면’과 같이 집과 땅을 모두 빼앗기고 유민(流民)으로 떠돌아야 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에 대한 탄식과 함께 깊은 울분이 담겨 있다. ‘집 잃은 자, 농토를 빼앗긴 자’로서의 우리는 ‘옷과 밥과 자유’를 빼앗기고 동토(凍土)의 현실을 살아가는 비참한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구절 속에는 당대 식민지 현실에 대한 부정 의식과 항거 의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가느란길’을 따라서 ‘한거름, 한거름’ 나아가려는 향상의 의지가 발현되며, 이것이 다시 ‘온새벽 동무들 저저혼자……산경을 김매이는’과 같은 노동의 정신으로 고양된 것은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집 잃은 자, 땅 빼앗긴 자로서의 민족적 울분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향상의 의지가 노동 사상과 결합됨으로써 민족의식과 저항 의식을 강력하게 현실 의식으로 분출한 데서 소월 시의 또 다른 진면목이 발견된다.
이 점에서 소월 시의 애상이 단지 개인적인 상실 체험에서 비롯되며, 그의 시가 단순 서정시에 불과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자연 발생적인 정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생각하는 측면, 의식적인 철학적 측면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소월 시의 심층에는 이 땅의 험난한 역사와 현실을 반영하면서 그 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현실 극복의 정신이 강력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5. 민족어의 완성을 향하여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시적 상상력에 있어서도 풍부하고 다양한 면모를 보여 주었지만 시어를 적극 발굴하고 문맥에 알맞게 잘 활용함으로써 시인의 근본 사명이라 할 민족어의 완성을 위해 진력한 공적도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그의 시편들에는 조어(개인시어)는 물론 방언, 고어, 은유어, 상징어 등 참으로 많은 시어들이 다양하고 심도 있게 구사됨으로써 민족어ㆍ민중어 사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① 물구슬의 봄 새벽 아득한 길
하늘이며 들 사이에 넓은 숲
젖은 향기 붉읏한 잎 위의 길
실그물의 바람 비쳐 젖은 숲
나는 걸어가노라 이러한 길
―「꿈길」 부분
구만리 긴 하늘을 날라 건너
그대 잠든 품 속에 안기렸더니,
애스러라, 그리는 못한대서,
―「구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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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시집와서 3년
오는 봄은
거츤벌 난벌에 왔습니다
거츤벌 난벌에 피는 꽃은
졌다가도 피노라 이릅디다
소식없이 기다린
이태 3년
―「無心」 부분
山새도 오리나무
우헤서 운다
山새는 왜 우노, 시메山골
嶺 넘어 갈라고 그래서 울지.
―「山」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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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도르랴, 아츰에 점을손에
새라 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대일 땅이 있었더면」 부분
山바람 소리
찬비 듯는 소리
그대가 세상 苦樂 말하는 날 밤에
순막집 불도 지고 귀뚜라미 울어라
―「귀뚜라미」 전문 |
①에서는 ‘이슬’을 ‘물구슬’로 비유하고 ‘붉은’을 ‘붉읏한’으로, ‘애달프고 슬프다’를 ‘애스러라’로 변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또한 가느다란 모습을 ‘실그물’로 상징함으로써 시어의 섬세한 계발과 조탁에 힘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②에서는 ‘거츤벌 난벌’로서 광야 또는 먼 들판을 지시하고, 우(위), 시메(두메) 등 고어를 활용함으로써 시의 예스러운 맛 또는 고전 정서를 환기해 준다.
③에서는 보섭(보습), 점을손(저녁무렵, 夕)이나 순막집(외딴 주막집) 등과 같이 방언 또는 고어를 활용하여 향토적 정서와 민중적 정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간략히 들어본 몇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소월 시에는 참으로 많은 고어와 방언, 그리고 개인 시어 및 비유ㆍ상징어가 적극적으로 다양하게 활용됨으로써 시인의 궁극적인 사명이 민족어 완성의 길을 향해 열려 있으며 열려가야 한다는 하이데거(M. Heidegger)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 소월은 현대 시사 초기 형성 과정에서 역동적인 상상력과 풍부한 시어 감각을 다양하면서도 개성적으로 구사함으로써 바람직한 시의 본도를 일러 주고 시인의 사명을 일깨워준 점에서 오랫동안 민족의 가슴속에, 시인들의 심혼 속에 살아 빛과 향기를 더해 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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