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외국인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위상이나 언어 사용권의 순위가 전 세계 10위권에 드는 만큼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소위 ‘한류’라고 말하는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뿐만 아니라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고 또 이해하려는 외국인들이 갑자기 늘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1980년대 이후 정치, 사회적 민주화 과정에서 언론의 보도뿐만 아니라 대학의 대자보라는 소통 방식이 주로 한글로 이루어졌다. 곧 한글로 된 정보와 소식을 신속하게 공유한 덕택으로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촉진될 수 있었다. 특히 초고속정보망이 확대되면서 질 높은 지적 정보가 빠른 속도로 축적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속도로 늘었다. 한국의 민주화와 급속한 경제 부흥의 밑바탕에는 이러한 우리의 의사소통 수단인 ‘한글’의 힘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한글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바로 한국의 경제적 힘과 비례한다. 중국에서 한때 영어와 일본어를 배우려는 학생이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보다 월등하게 많았지만 최근 들어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어 능력이 있는 사람이 취업하면 월급을 더 많이 주기 때문이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외국인들의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나 외국 진출 한국기업체에 현지인 고용이 늘어나는 현상이 또한 한국어 학습의 열기가 고조되는 주요한 이유이다. 월드컵,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를 여러 차례 치르면서 공연 예술 분야와 정보 통신(IT) 분야의 기술적 협력으로 이루어 낸 영상, 음반, 공연 예술 등 문화 전반이 다른 선진국을 능가할 만큼의 수준 높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외국 진출 기업이 점차 늘어나고 또 현지 취업 외국인의 숫자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는 국내 노사 환경의 문제와 임금 인상 등의 요인으로 외국으로 진출하여 외국 노동력을 활용하는 산업 기반의 변화가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외국으로 진출한 기업의 수는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특히 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한 기업에서 현지 노동자를 고용하는 경우 한국어를 습득하고 있는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으며, 이들의 임금 경쟁력이 일본 기업이나 미국 기업보다 한국 기업이 유리하기 때문에 현지 노동자들은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잘사는 한국을 방문해서 멋진 쇼핑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코리언 드림까지 합친다면 한국어를 배우려는 이들은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지난 20세기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 우리의 언어를 강탈당할 위기에 직면했던 경험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상당한 나라들은 그들의 말과 문자를 침탈당하는 위기를 경험하였다. 지금도 필리핀이라는 나라는 영어를 공용어로 삼고 자신의 언어인 타갈로그(Tagalog)어는 방치하고 있다. 그 결과 민족이나 국가적 통합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식민 언어 정책과 자본 강국의 약탈 언어 정책에 가장 큰 희생을 경험한 아시아와 우리나라의 지난 경험을 되돌아본다면 지금 찾아온 한국어의 열풍을 쉽게 한국어를 이식시키려는 언어 정책으로 대응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한국의 문화와 상대 국가의 문화를 서로 존중하는 문화 상호주의적 관점에서 한국어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정부나 학계 모두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한국어 학습의 열풍이 불어 닥치기 이전에는 재외동포재단이 재외 동포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을, 국제교류재단이 한국학 전공자를 대상으로 한 한국어 교육을 전담해 왔으며, 이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은 비교적 수준 높은 한국어 문법 중심의 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 기업체에 취업을 꿈꾸는 현지 인력이나, 한국 가요를 배우기 위해 한국 영화를 즐기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려는 이들에게는 당연히 회화 중심의 한국어 문화 교육이 필요하다.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수요자층이 변했다. 유학생이나 재외 동포 중심의 한국어 교육에서 일반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교육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새로운 환경 변화에 대처하는 정책의 개발과 정부의 재정 지원 및 확보 계획이 달라져야 하고 또 학계에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효율적인 교육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표준 교과 과정, 교과서, 교원 양성을 위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국외 한국어 교육에서 쌍방의 문화를 존중하는 문화 다원주의적 방식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특히 우리의 한국어 교육은 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소통을 위한 방식으로 한국어와 몽골어, 한국어와 중국어, 한국어와 베트남어, 한국어와 태국어를 상호 존중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우리의 문화를 적절하게 통섭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도우는 문화 친선의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과서가 달라져야 한다. 영어권 화자를 교육 대상자로 하는 한 종류의 교과서를 여러 언어로 번역한 수준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한 이를 지도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최근 문화관광부 김명곤 장관이 올해 추진하려는 역점 사업 중 하나로 전 세계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세종학당’을 설립하겠다는 계획과 목표를 발표한 바 있다.
쌍방의 문화를 존중하는 문화 다원주의를 기초 정신으로 하는 세종학당 사업은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외국인들이 많은 나라 특히 한국 기업이 많이 진출한 아시아를 중심으로 재외 한국문화원을 거점으로 삼아 5년간 100곳의 세종학당을 만들어 나가는 사업이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국어기본법에 따르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교육은 한국어 교원 양성을 담당하는 문화관광부의 소관 업무임이 분명하다. 국내 국어 교육과 국내 유학을 온 외국 대학생들의 국어 교육은 교육인적자원부에서 그리고 재외 동포나 외국 고등학교 및 대학교의 한국어 전공에 대한 지원은 부처를 가리지 않고 정부 전체가 해야 할 일이다.
지난 세기는 문화의 중심이 존중받는 시대였다. 21세기는 변방 문화, 주변 문화가 중심 문화와 더불어 존중받는 시대이다. 우리나라도 서울 중심의 표준어만 대접받던 시대에서 제주도 방언, 전라도 방언, 함경도 방언, 경상도 방언 등 각 지역의 방언이 대접받는 시대가 되었다. 영어나 일어가 지배하던 식민 언어 정책이 남긴 폐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최근 우리나라 충북대학교에 설립된 바 있는 중국의 공자학당이 전 세계에 500여 군데에 설립될 예정이며, 일본의 국립국어연구소에서도 일본어 학습당을 수백 군데 설립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들 나라에서 추진하는 언어 정책이 언어 전쟁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자국 언어의 경쟁적 확산의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단호하게 이를 저지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세종학당과 같은 설립 이념과 목적을 취하지 않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적, 국가 경쟁적 관점에서 언어 정책을 편다면 아시아는 다시 불행의 소용돌이 속으로 진입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면에서도 세종학당의 문화 다원주의적 교육 방식은 이들과 분명하게 다를 뿐만 아니라 훨씬 설득력이 높다 할 것이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의 말과 글자가 소멸되는 위기의 시대를 벗어나 쌍방의 문화와 언어를 존중하는 문화 다원주의를 기초로 하는 세종학당은 어떤 모습의 학교인가? 세종학당은 아시아의 새로운 가치를 구현하고 이를 이끌어 가는 매우 주요한 교육 기관이 될 것이다. 또 세종학당은 문화 침략이나 자본 약탈의 수단이 아닌 쌍방 문화를 서로 존중하는 학습 공간으로 재외 한국문화원이나 현지 대학교와 협력하여 특성화된 한국어 교육과 한국 문화의 진흥을 위해 노력하는 기관이 되는 동시에 쌍방의 문화를 교류하는 접합점이 될 것이다.
아시아를 주도하는 나라 가운데 중국과 일본은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를 침략했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이제 한국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내면적 소통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세종학당은 문화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화합의 모델이 될 것이다.
알파벳은 본디 중동 지역 셈족의 문자였지만 유럽으로 건너가 로마자가 되면서 서구의 표준 문자가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자로 입증된 한글을 한국의 것으로만 묶어 둘 것이 아니라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의 보존과 발전에도 이바지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문자를 잃어버린 아시아 제국의 한글의 보급은 절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보편 문자(universal letter)로서 자질을 갖춘 한글을 소멸 위기에 처한 소수 언어권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한글 저작권 공유 운동을 벌일 것을 제안한다.
끝으로 국어 사용 환경이 급변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디지털 시대의 언어 규범에 대한 새로운 대응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최근 온라인상에서 유행하는 문자 파괴의 현상을 극복할 방법은 단순히 언어 규범의 파괴를 막자는 방어적인 언어 책략을 취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를 수용하면서 더 높은 단계의 어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대안을 마련해 나가는 것이다.
둘째, 다국어 번역과 통역을 지원하는 웹 사전을 개발해야 한다. 영어의 위력은 엄청나다. 지방 정부 도처에서 영어 마을 설립을 앞 다투어 진행하고 있다. 영어 교육을 목적으로 외국 유학과 연수에 쏟아 붓는 돈을 어림잡아 계산해도 천문학적 액수가 된다. 평생을 영어 편지 한 장 쓸 필요도 없는 이들에게까지 유아 영재 영어 교육이 과연 필요한 것인지? 앞으로 기계 언어 자동 인식과 자동 번역 기술이 발전되면 국립국어원에서는 다국어의 번역과 통역을 지원하는 웹 사전을 개발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런 웹 사전이 개발되면 국민의 영어 교육에 대한 부담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전 편찬 사업의 기본 방향은 단계적으로 규범의 내용을 잘 다듬어진 규범 사전에 담아내는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사전편찬실이라는 기구를 새로 설치하여 <표준국어대사전>을 단계적으로 보완 수정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전인 옥스포드 사전의 수준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시소러스(분류 어휘집, 분류 어휘표)나 온톨로지(개념의 명세화, 어휘 의미망) 기법을 활용한 사전 기술의 기반을 구축하여 21세기 미래형 ‘국어 종합 웹사전’으로 발전시켜 나갈 기반을 구축할 것이다.
셋째, 정부 부처가 솔선하여 국어 사용 환경을 개선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어책임관 제도의 활성화와 함께 국립국어원 누리집(홈페이지)의 국어책임관 사랑방(커뮤니티)을 더욱 활성화하여 운영할 계획이며, 이를 통해 국어 정책과 어문 규범 관련 정보를 신속히 제공할 것이다. 또한 정부 각 부처 소관 전문 용어의 정비와 표준화를 추진하기 위해 ‘국가 전문 용어 표준화 센터’를 설치하여 운영할 계획이다.
넷째, 국민의 국어 사용 능력이 전반적으로 저하되고 외래어·외국어 등의 무분별한 남용으로 국어 사용 환경도 날로 악화되어 가고 있다. 국민들의 국어 사용 능력 증진과 공문서, 공공 기관의 정책 홍보 용어 등 공공 언어의 표현 개선을 위해 국립국어원에서는 ‘국어 전문 교육 과정’을 확대 운영하는 한편, 각급 공무원 교육 훈련 기관에 국어 강좌를 개설하도록 관계 기관에 협조를 요청하였고, 일반 국민 대상으로는 ‘온라인 국어 교양 강좌’를 개발하여 운영할 것이다. 문화관광부는 국민의 국어 능력 향상과 창조적인 언어생활의 정착을 위하여 ‘국어 능력 검정 시험’을 실시하고 있다. 앞으로 각급 국가 기관의 협조를 얻어 공무원 특별 채용 시험이나 승진 시험의 전형 자료로 활용하는 일 등 국어 능력 검정 시험 제도의 활용성을 증대하는 방안을 단계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다.
2007년 3월 31일
국립국어원
원장 이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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