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순화’가 뭡니까?
“순화가 뭡니까?” 하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우리는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야 한다. ‘순화’란 말이 일본에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건너가면 거기는 ‘순화’가 ‘純化’도 있고, ‘醇化’도 있고, ‘馴化’도 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어서 살펴보지만 어느 것이나 모두 알 듯 모를 듯하다. 우리네 삶에서 나고 자란 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쓰는 이들 여러 ‘순화’를 깊이 따지려 들면 다시 서양으로 건너가야 한다. 일본 사람들도 저희가 스스로 만들어 쓰지 않고 서양말을 뒤쳐서 쓴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으로 건너가면 거기는 또 이런 낱말이 훨씬 많이 있다. ‘purification’, ‘refinement’, ‘sublimation’, ‘idealization’, ‘acclimation’, ‘acclimatization’, ‘naturalization’ 같은 것들이 있다. 이것을 하나하나 살펴보지만 이들 또한 우리네 삶에서 나고 자란 것들이 아닌 까닭에 어느 것이나 모두 알 듯 모를 듯 하다. 다만, 일본 사람들이 이들 서양 낱말을 어떻게 세 가지로 뒤쳤는지는 알 만하다. ‘purification’을 ‘純化’로 뒤치고, ‘refinement·sublimation·idealization’을 싸잡아 ‘醇化’로 뒤치고, ‘acclimation·acclimatization·naturalization’을 뭉뚱그려 ‘馴化’로 뒤친 것임이 한눈에 드러난다.
그렇다면 “순화가 뭡니까?” 하는 물음의 대답을 일본에서 찾기보다 본고장인 서양에서 찾아야 본디 뜻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다. 그래서 서양 낱말들을 들여다보면 이들 낱말이 두 갈래임을 알 수 있다. ‘purification(깨끗해짐), refinement(가다듬어짐), sublimation(좋은 것으로 바뀜), idealization(온전하게 됨)’은 제자리에서 좋은 쪽으로 바뀌는 것을 뜻하고, ‘acclimation=acclimatization(새 환경에 맞추어짐), naturalization(자연에 어우러짐)’은 자리를 옮겨 새 자리에 어우러지느라고 바뀌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앞 갈래는 토박이말에 써야 어울리고, 뒤 갈래는 들온말에 써야 제격이다. 토박이말 가운데서 깨끗하지 못한 말을 깨끗해지도록, 가다듬지 않은 말을 가다듬도록, 온전하지 못한 말을 온전하게 되도록 하는 데에 앞 갈래를 쓸 수 있겠다. 들온말 가운데서 아직 우리말 환경(규칙)에 맞추어지지 못한 말을 맞추어지도록, 아직 우리말 자연(바탕)에 어우러지지 못한 말을 어우러지도록 하는 데에 뒤 갈래를 쓸 만하다.
이들 두 갈래에 마땅한 우리말은 뭘까? ‘가다듬기’와 ‘길들이기’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쓰는 토박이말에도 깨끗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하고, 올바르지 못한 말들이 수두룩하니 이런 것들을 깨끗하고 아름답고 올바르게 바꾸는 노릇은 ‘가다듬기’다. 다른 겨레의 말이 우리말 속으로 들어와 쓰이는 들온말 가운데 아직 우리말 규칙에 맞추어지지 못하고 우리말 바탕에 어울리지 못한 말들이 활개치고 있으니 이런 것들을 규칙에 맞고 본질에 어우러지도록 바꾸는 노릇은 ‘길들이기’다. 그렇다면 “순화가 뭡니까?” 하는 물음의 대답은 ‘순화는 토박이말 가다듬기와 들온말 길들이기를 싸잡아 이르는 말이다.’ 하면 된다.
2. 순화를 왜 합니까?
지난날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에 있는 글을 끌어들이느라 안간힘을 다했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면서 그런 세월로 들어섰다. 국학을 세워서 중국의 글을 배우고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저들의 말과 글을 배워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그 일에 앞장섰다. 그런 세월이 조선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일천삼백 년을 이어오면서 우리말은 온통 중국 글말로 채워졌다. 하늘땅은 천지가 되고, 밤낮은 주야가 되고, 똥오줌은 분뇨가 되고, 논밭은 전답이 되고, 아버지는 부친이 되고, 가시버시는 부부가 되고, 언니 아우는 형제가 되었다.
잇달아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며 일제가 침략해 들어와 저들의 말을 가르치는 일에 발버둥을 쳤다. 일본말을 ‘국어’라며 안방에다 모시고 우리말을 ‘조선어’라면서 뒷방으로 밀어 넣더니, 끝내는 우리말을 입에도 담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일본말만 쓰라고 다그쳤다. 그런 세월은 반세기로 끝이 났지만, 그것이 남긴 상처는 만만치 않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의 제목이 ‘전문 용어의 순화 방안’이다. 토씨 ‘의’만 빼고 나머지 낱말은 모조리 일본말이다. 토씨 ‘의’를 빼자고 했지만 알고 보면 그것조차 일본말 ‘の’를 그냥 뒤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2006년에 국립국어원에서 받은 글의 제목이 고스란히 일본말이니 일제 침략 반세기에 우리말이 받은 상처가 어떠한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을 누른 미군이 우리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와 자리 잡고 남북 전쟁에서 작전통제권까지 넘겨받으며 미국은 ‘피로 맺은 나라’가 되었다. 미국 말 잘하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쉽게 앉으니까 온 나라 사람이 미국 말을 배우려 안간힘을 다한다.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이른바 ‘원어민 교사’를 모셔도 모자라 아예 미국 말로만 살도록 ‘영어 마을’로 나라 안을 채우고, 손꼽히는 기업이 회사에서 사원들끼리 영어로만 말하게 한다. 초등학생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미국이 어려우니까 영어 쓰는 나라를 찾아 두루 세상을 뒤지는 판이다. 그러자니 잠은 ‘파라곤 아파트’에서 자고, 아침은 ‘서울 메트로’ 안에서 ‘밀크’로 때우고, 점심은 ‘롯데 호텔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로 건너고, 저녁은 ‘뉴욕 가든’에서 ‘샐러드’와 ‘비프스테이크’로 먹는다. 땅에는 ‘버스’, ‘트럭’, ‘택시’가 달리고, 하늘에는 ‘칼’과 ‘아시아나’가 날고, 바다에는 ‘보트’, ‘요트’, ‘페리’가 떠다닌다. 방송국이 앞장서 KBS니 MBC니 SBS니 하니까 기차도 KTX가 되고, 은행도 KB가 되고, 기업도 KT며 KT&G가 되고, 수도 서울도 Hi, Seoul이 되었다.
이렇게 중국, 일본, 미국에서 들온말을 우리말의 환경과 자연에 맞추어 길들이기는커녕 그렇게 들온말이 우리말을 짓밟고 안방을 차지하도록 받들어 모셨다. 그래서 ‘뜰’ 위에 ‘정원’ 있고, ‘정원’ 위에 ‘가든’ 있으며, ‘집’ 위에 ‘건물’ 있고 ‘건물’ 위에 ‘빌딩’ 있다. 토박이말은 하찮아서 밑바닥에 깔리고 한자말은 예로부터 토박이말에 올라타고 미국 말은 요즘 들어 맨 위에 올라앉았다. 이것이 지금 우리말에 비친 우리 정신의 모습이다. 이제는 우리가 세상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경제, 체육, 과학, 문화의 나라가 되었다면 거기 걸맞은 정신의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말을 가다듬고 길들여서 토박이말이 주인 노릇을 해야 참된 정신의 나라가 된다. 이것이 “순화를 왜 합니까?” 하는 물음에 내놓을 첫째 대답이다.
둘째는 까다로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함께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니까 말을 가다듬고 길들여야 한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는 한글을 스스로 깨치시고 마을에 큰일이 벌어지면 안방 일을 거의 이끌며 이웃의 믿음과 존경을 받고 사셨다. 그런데도 나는 자주 어머니 곁에서 텔레비전의 뉴스와 기상 예보를 통역해 드려야 했다. 얼마 전에는 유치원 다니는 손자를 옆에 태우고 순환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한글을 깨친 그 녀석이 “할아버지 급커브가 뭐예요?” 했다. 고속도로 담벼락에 빨갛고 커다랗게 써 놓은 ‘급커브 조심’을 읽고 던진 물음이었다. 길이 많이 굽었다는 말이라고 풀이를 해 주고 얼마를 가는데 또 “할아버지 서행은 뭐예요?” 했다. 많이 배운 사람은 한자든 일본 말이든 미국 말이든 걱정이 없지만 우리 어머니나 손자 같은 사람들은 그런 말들이 성가시고 답답하다.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말의 숲 속을 헤치며 힘겹게 살아가는 덜 배운 사람들의 인권을 지킬 수 있도록 말을 쉽게 가다듬어야 한다.
셋째는 남의 말을 따라가서 그 말로 살아가면 마침내 우리는 사라지고 만다. 세상에는 남의 말을 따라가며 살다가 저를 떠나 남이 되어 버린 겨레가 적지 않다. 고구려가 무너지고 요나라를 세웠던 거란 겨레나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웠던 여진 겨레가 중국말을 쓰면서 모두 중국 사람이 되었다. 북아메리카의 인디언이 미국 말을 쓰면서, 남아메리카의 마야와 잉카 겨레가 스페인 말과 포르투갈 말을 쓰면서 모두 저를 떠나 남이 되었다. 호주 원주민들이 영국 말을 쓰면서, 아프리카 수많은 겨레가 영국 말과 프랑스 말을 쓰면서, 인도가 영국 말을 쓰면서, 필리핀이 미국 말을 쓰면서 모두 저를 떠나 남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도 지금 미국 말을 쓰면서 나를 떠나 남이 되는 길로 들어서려고 한다. 나를 버리고 남이 되지 않도록 내 빛깔을 뽐내며 나를 더욱 드높이도록 우리말을 가다듬고 길들여야 한다.
3. 전문 용어가 뭡니까?
여기서 말하는 ‘전문’이란 본디 ‘저만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이다. 세상 어디서나 나라를 세운 임금은 하늘에서 내려왔다면서 여느 사람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런 뜻을 나타내느라 문도 따로 만들어 저만 혼자 드나들게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것을 마침내 ‘남들은 섣불리 드나들지 못하는 세상에 드나드는 노릇’이라는 뜻으로 쓰기에 이르렀다. ‘용어’란 ‘쓰는 말’이다. ‘쓰는 말’이라니? 쓰지 않는 말도 있는가? 쓰지 않는 말은 없으니 그저 ‘말’이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에 쓰는 말’이라는 뜻으로 일본 사람들이 이렇게 만들어 썼다. 그러면 ‘전문 용어’란 ‘여느 사람이 잘 모르는 노릇에 쓰는 말’인 셈이다.
알고 보면 본디 ‘여느 사람이 잘 모르는 노릇’이란 것은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얼마씩 남모르는 노릇을 하며 살아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같은 바다에서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해도 어부는 고기가 잘 잡히는 때와 곳을 저마다 남달리 알아차려 고기잡이를 한다. 같은 들판에서 농사를 지어도 농부는 씨 뿌리고 거름 넣고 김매는 때를 저마다 남달리 가늠해서 한다. 이처럼 너나없이 얼마씩은 남모르는 노릇을 하며 살아가므로 굳이 그런 노릇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글자를 만들어 쓰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글자는 조물주의 선물이 아니므로 누구나 저절로 쓸 수가 없다. 적잖은 시간을 바쳐서 배워야 쓸 수 있는데 살아남기 바쁜 사람들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 살아남을 걱정에서 벗어난 사람들만 글자를 배워서 남모르는 세상에 드나드는 노릇을 하게 되자 여느 사람에게는 글자로 적힌 것이면 모두가 ‘잘 모르는 노릇에 쓰는 말’, 곧 ‘전문 용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글자도 글자 나름이라 처음부터 스물 남짓한 낱소리글자(음소 글자)를 써온 유럽에서는 머지않아 여느 사람도 글자를 읽고 쓰게 되었다. 낱소리글자를 읽고 쓰면 그것은 곧장 입말이기 때문에 속내가 따로 감추어지지도 않아서 글자가 남모르는 세상을 지켜 주는 노릇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글자가 가로막지 않아도 또 다른 ‘전문 용어’가 생겨났다. 이것은 제 삶의 임자 노릇을 하지 못하고 남의 삶을 배워서 살자니까 생겨난 것이다. 먼저 희랍 사람들이 제 삶의 임자 노릇을 하면서 밝혀 놓은 세상을 그 밖에 유럽 사람들이 가져다 배우면서 그것은 저들에게 ‘전문 용어’가 되었다. 다음에 라틴 사람들이 제 삶의 임자 노릇을 하면서 밝혀 놓은 세상을 또 그 밖에 유럽 사람들이 가져다 배우면서 그것은 또 저들에게 ‘전문 용어’가 되었다. 라틴이 무너지고 이탈리아의 단테로부터 제 겨레말을 살려 쓰는 것이 제 삶의 임자 노릇을 하는 열쇠임을 깨닫기 비롯했다. 이런 깨달음이 퍼져 나가자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독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제 겨레말을 살리려 안간힘을 다하고 마침내 서유럽 여러 나라는 저마다 제 삶의 임자 노릇을 하니까 이제는 서로 ‘전문 용어’를 주고받으며 겨루는 사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 겨레는 고조선이 무너진 뒤로 지난 이천 년 동안 중국을 가져다 배우면서 ‘전문 용어’에 몹시도 시달렸다. 한자와 한문이 너무 어려워 여느 사람은 가까이 갈 엄두도 낼 수가 없었고, 그것을 배워서 쓰는 사람도 아주 적었으며(헐버트 박사는 19세기 말에도 조선에서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백에 둘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을 우리말로 길들인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가 없었다. 한자와 한문은 길들일 수 없는 공룡 같았으므로 이천 년 내내 거꾸로 우리말이 길들여지는 부끄러움을 겪었다. 15세기에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우리 글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를 만들었지만 이미 쌓아놓은 한자의 철옹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자로 적힌 ‘論藏’이나 ‘理氣’를 ‘논장’이나 ‘이기’라 적어서 읽고 쓴다 하더라도 거기 담긴 속내를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겨레에게는 한자와 한문으로 적힌 것이면 무엇이나 ‘전문 용어’가 되어서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전문 용어’와는 또 다른 멍에 노릇을 아직도 하고 있다.
조선 왕조가 무너지고 지난 백 년 동안 우리는 일본과 서양을 배워야 살아남는다고 아우성을 했다. 그러면서 앞쪽 반세기는 일본 말과 일본을 거쳐 건너온 서양 말이 여느 사람은 알아볼 수 없는 ‘전문 용어’로서 판을 쳤다. 그리고 뒤쪽 반세기는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의 말들이 곧바로 들어와서 여느 사람은 알아볼 수 없는 ‘전문 용어’로서 활개를 쳤다. 이처럼 일본과 서양에서 물밀듯이 들어와 하도 판을 치고 활개를 치는 바람에 여느 사람이 알아듣지 못해도 그것을 ‘전문 용어’라 여기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모든 교육 기관의 온갖 교과목이 그런 일본 말과 서양 말을 우리말로 받아들여 쓰도록 가르치느라 진땀을 빼면서 발버둥을 쳤다. 그래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제 그것을 말의 탓이 아니라 알아보지 못하는 그 사람의 탓이라고 여기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는 온통 전문 용어투성이 속에서 살아간다.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것을 밝히고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아내는 첨단의 학문이나 기술에서야 말할 나위조차 없는 것이지만, 누구나 모두 알아야 하고 살아야 하는 정치에도 전문 용어, 경제에도 전문 용어, 교육에도 전문 용어, 법률에도 전문 용어, 행정에도 전문 용어, 교통에도 전문 용어, 통신에도 전문 용어, 도서관에도 전문 용어, 박물관에도 전문 용어, 영화관에도 전문 용어, 은행에도 전문 용어, 병원에도 전문 용어……. 전문 용어 없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오죽 했으면 농사꾼이 농약 병에 적힌 말(전문 용어)을 몰라서 음료수인 줄 잘못 알고 마시고는 목숨을 잃었겠는가! 누구나 휑하니 알고 살아가야 할 일상어가 온통 전문 용어투성이다.
4. 전문 용어를 왜 순화합니까?
“전문 용어를 왜 순화합니까?” 하는 물음의 대답은 앞에서 “전문 용어가 뭡니까?” 하는 물음을 다루면서 변죽을 어지간히 울린 셈이다. 하지만 누리집에 있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도 “전문 용어를 왜 순화합니까?” 하는 물음에 한 가지 대답이 될 만해서 따왔다.(이 글에도 적잖은 ‘전문 용어’와 ‘전문 어투’를 쓰고 있지만.)
“예전에 비해 오늘날엔 세일즈맨이 쓰는 판매 어휘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거래상의 용어, 즉 전문 용어 때문이다. -줄임- 당신이 어떤 소비자에게 컴퓨터의 비트와 바이트에 관하여 말하는데 그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는 그 용어가 마음에 걸려 거기에만 헛되이 정신을 쏟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역시 그것을 설명해 달라고 섣불리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고객은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경우가 생각 외로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은 가지만 그것이 확실한지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당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중요한 점을 놓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은 그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고객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들린다면, 당신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하거나 소유하겠다는 그의 소망을 당신이 뭉개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고객을 평범한 일상용어로 설명해 주는 다른 세일즈맨에게 잃고 말 것이다. 어떻게 고객의 언어로 말할지를 배운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http://cafe.naver.com/tegi2123/129) |
물건을 팔려는 사람이 손님에게 ‘전문 용어’를 쓰면 손님은 ‘평범한 일상용어’를 쓰는 장사꾼을 찾아 떠날 것이라고 한다. 손님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손님이 하는 말을 그대로 말할 수 있도록 배우라고 한다. “전문 용어를 왜 순화합니까?” 하는 물음에 ‘장사꾼이 손님을 뺏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셈이다. 곱씹을 값어치가 있는 대답이다.
장사꾼과 손님 사이에서만 이런 충고가 먹혀들까? 대학 교수와 학생 사이라면 어떨까? 의과대학 학생이 교수의 강의를 듣고 학생 잡지에 글을 실었다고 한다. 거기서 학생은 제가 공책에 적어 놓은 교수 강의를 쉬운 우리말로 가다듬어서 싣고, 교수가 처음부터 이처럼 쉬운 우리말을 썼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푸념을 했다고 한다.(정인혁, 우리나라 의학계의 언어 순화, 세계의 문학 73)
“routinely하는 procedure를 skip하는 수가 있다.” → 흔히 하는 절차를 건너뛰는 수가 있다.
“abnormal한 pupil까지 있으면 mortality는 더 상승하는데 stroke 후 일 년까지 survive하면 mortality는 normal population과 같이 된다.” → 눈동자가 정상이 아니면 사망률은 더 높아지고 중풍 후 일 년까지 생존하면 사망률은 정상인과 같아진다.
이 학생의 푸념이 아직은 우리나라 의과대학에서 교수의 권위를 흔들 수 없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런 권위가 학생의 푸념을 못 들은 척할 수 있을까? 학생의 푸념이 참되다면 참되지 않은 것에 뿌리박힌 권위가 언제까지 버텨도 우리 사회가 못 본 체하고 있을까? 나는 벌써 사반세기 전에 이탈리아에서 의과대학 학생들이 전국을 마음대로 찾아다니며 좋은 교수에게 배우는 제도를 보았다. 사반세기 전에 이탈리아에서는 교수와 학생 사이가 앞에서 본 우리나라 장사꾼과 손님 사이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저들의 대학을 날로 새롭게 하는 지렛대나 열쇠가 된다면 우리가 언제까지 저들의 제도를 모른 체하고 있어야 할까?
남모르는 세상을 저들끼리만 드나드는 노릇, 곧 ‘전문’이 이제는 한갓 옛이야기다. 누구든지 그런 문으로 드나들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갖추는 세상이 활짝 열렸다. 남모르는 세상을 지켜 주고 막아 주던 담벼락들이 하나 둘씩 무너졌다. 한자와 한문도 한글에게 무너지고, 영어와 라틴어도 사전과 인터넷과 번역으로 손아귀에 들어왔다. 지난해에 벌어졌던 끔찍한 그 황우석 사건도 이런 세상의 모습을 우리 온 국민에게 생생하게 알려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앞서 가는 깊숙한 연구실 속의 일들을 온 나라 초등학생까지 들여다보고 배아 줄기 세포가 이러니저러니 하지 않았던가! 저들만 드나들던 세상에 우리 모두 드나들 수 있다는 사실을 너나없이 깨달았고 저들끼리 알던 세상을 우리 모두 알아야 한다고 믿는 세상이 열렸으므로 이제 ‘전문 용어’는 제가 스스로 길들어야 한다. ‘전문 용어’가 길들지 않고 버티면 사람들은 그걸 버리고 다른 데로 달려가고 마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그 어떤 ‘전문’도 여느 사람에게 버림받고 살아남을 수가 없는 세상이다. 오늘 찾아온 손님에게 팔지 못하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장사꾼의 신세와 오늘날 ‘전문’의 신세는 다를 바가 없다. ‘전문’도 살리고 세상도 살리는 길은 ‘전문 용어’를 길들여서 오만 사람의 품에 안기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디지털 세상의 모습이다.
5. 전문 용어를 어떻게 순화합니까?
5.1. 사람이 나서야 한다.
“어떻게 순화합니까?” 하는 물음에는 두 가지로 대답을 해야 한다. 하나는 ‘누가 하느냐’를 대답해야 하고, 또 하나는 ‘어찌하느냐’를 대답해야 한다. ‘누가 하느냐’에 정답은 ‘그 말을 아주 잘 아는 사람’뿐이다. 그 말을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가다듬고 길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누가 그 말을 아주 잘 아는가? 그 말을 ‘전문’으로 쓰면서 살아가는 질난이다. 그 말을 전문으로 쓰면서 살아가는 질난이라고 모두 순화를 할 수 있나? 아니다. 그 말을 아주 전문으로 쓰면서 살아가는 질난이 가운데서도 그 말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괴로워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나에게는 아쉬움이 없지만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답답하고 속상할까 하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나(또는 우리)만 안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더불어 알고 좋아해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그 말에 질난이면서 그런 괴로움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순화를 할 수 있을까? 아직은 아니다. 그 말보다 더 좋고 마땅한 말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우리말 질난이라야 한다. 그러면 드디어 순화를 누가 하느냐 하는 물음에 ① 그 말에 질난이면서 ② 순화를 하자고 안달을 하고 ③ 더 좋고 마땅한 말을 아는 우리말 질난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사람이 있나? 그 말을 전문으로 쓰면서 살아가는 질난이는 많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의 답답함을 헤아려 제가 질난이로 살아가는 말을 순화하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렇게 흔치 않은 사람 가운데서 또 더 좋고 마땅한 말이 무엇인지 아는 우리말 질난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세 가지 재주를 갖춘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세 가지 몫을 모두 해낼 수가 없다면 세 사람이 한 몫씩 나누어 맡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래서 전문 용어를 순화하는 일에도 나라가 나서는 것이다. 나라가 나서서 ② 순화를 하자고 안달하는 몫을 먼저 맡아야 한다. 전문 용어를 몰라서 속상하고 답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모두 더불어 살아야 할 국민, 곧 헌법에 적힌 대로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너나없이 전문 용어를 몰라 속상하거나 답답하지 않고 속 시원히 복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라가 나서서 먼저 ② (순화를 하자고 안달하는 몫)를 맡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① (그 말에 질난이)을 찾고, ③ (우리말에 질난이)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②와 ①과 ③이 함께 손잡고 나서야 한다.
5.2. 몫을 나누고 슬기를 모아야 한다.
알다시피 우리는 이미 전문 용어를 가다듬고 길들이려고 적잖이 애를 태우고 힘을 썼다. 그것은 일제가 침략했을 적에 우리말을 지키려 애쓴 분들이 광복을 맞이해 일어서면서 비롯했다. 우선 자라는 아이들이 알기 쉬운 우리말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려고 군정청 편수국이 교과서에 쓰이는 전문 용어를 가다듬었고 그런 일은 50년대 말까지 문교부 편수국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60년대에 들어서 문교부가 그런 일에 몸 바치는 사람들을 밀어내면서 끊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전문 용어를 우리말로 가다듬고 길들여야 한다며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과 모임은 이제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해부학회, 고고학회, 물리학회, 정형외과학회(이런 학회에 우리말과 우리 말꽃과 우리말 교육을 다루는 학회가 하나도 끼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부끄럽다), 총무처, 법제처, 감사원, 철도청, 산림청 같은 학회와 관청 안에 적잖은 사람들이 힘겨운 전문 용어 가다듬기를 쉬지 않았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들도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까지 만들어 여러 학문에 쓰는 전문 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해 보자고 슬기를 모으고 있다. 이런 세상의 흐름을 타고 나라에서도 국립국어연구원을 세웠고 다시 국립국어원으로 탈바꿈시키며 전문 용어 순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애태움으로는 걷잡을 수 없이 밀어닥치는 전문 용어의 홍수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적거나 사람들의 슬기가 모자라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저마다 나름대로 애쓰는 사람들을 서로 얽어서 커다란 힘을 내는 조직이 되도록 뒷받침하는 노릇이 서툴렀기 때문이다. 순화에 뜻을 지닌 전문 용어 질난이들이 온갖 부문에서 애를 태웠지만 그들의 어려움을 풀어줄 뒷바라지가 신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아쉬워하는 우리말 질난이를 찾아 손잡고 일할 수 있도록 맺어주지 못했다. 순화에 뜻을 지닌 전문 용어 질난이와 거기에 알맞은 우리말 질난이가 함께 손잡고 일할 수 있도록 동아리를 만들고 뒷바라지를 해 주는 일을 나라에서 제대로 맡아 해내지 못한 것이다.
국립국어연구원이든 국립국어원이든 나라가 나서서 스스로 전문 용어를 순화하려고 덤벼들기보다 갖가지 전문 용어를 순화할 동아리를 만들어 주고 뒷바라지를 했어야 옳다. 전문 용어를 가다듬고 길들이는 일은 그것에 질난이가 아니면 아무도 나서서 해 줄 수가 없고, 그것에 질난이는 또 우리말을 속속들이 몰라서 더 좋고 쉬운 말로 가다듬고 길들일 수가 없다. 나라는 나서서 이들 두 가지 몫을 해낼 사람을 찾고 그들을 하나로 엮어 주고 그들이 마음껏 일하도록 뒷받침하는 일들을 맡아야 한다. 이런 일과 그런 몫은 한 동안에 이루어 끝낼 수가 없는 노릇이므로 쉬지 않고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도와야 한다.
5.3. 토박이말을 찾아가야 한다.
전문 용어를 가다듬고 길들이려면 반드시 과녁을 세우고 겨냥을 해야 한다. 그 과녁은 말할 나위도 없이 ‘누구나 쉽게 또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전문 용어를 가다듬고 길들이려는 까닭이 바로 누구나 쉽게 또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또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 하지만 무엇이 그런 말인지를 가려내는 일 또한 쉽지 않다. 낱말 하나하나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쉽게 알아듣는지 또 얼마나 또렷하게 알아듣는지 물어서 가늠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 하는 일이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럴 수 없다면 길은 오직 하나다. 토박이말을 찾아가는 길뿐이다. 토박이말이란 우리 겨레의 피 속에서 움이 트고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말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또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 아무런 풀이를 달아 주지 않아도 곧장 느낌과 생각과 뜻으로 다가와서 품에 안기는 말이 바로 토박이말이다. 모든 전문 용어가 이런 토박이말처럼 여느 사람의 품에 안기는 말이 되는 것을 과녁으로 삼아 거기 맞도록 가다듬고 길들이는 것을 겨냥해야 한다.
우리가 삶의 임자로서 전문 용어를 스스로 만들어 내면 애초에 그것의 속살이 우리 정신 안에서 움트고 싹이 나서 자란 것이므로 그대로 토박이말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남의 삶에서 나고 자란 전문 용어를 받아들여 쓴다면 그것은 우리 토박이말에 겨냥하여 길을 들여야 ‘누구나 쉽게 또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된다. 남의 나라에서 들어온 전문 용어를 토박이말에 겨냥하여 길들이는 데는 어쩔 수 없이 단계도 있고 한계도 있다. 곧장 우리 토박이말을 찾아 바꾸어 쓸 수도 있고, 우리 토박이말의 핏줄에 어우러지는 새말을 만들어 쓸 수도 있고, 중국에서 들어왔으나 우리 토박이말에 온전히 길들여진 한자말을 쓸 수도 있지만, 당장은 도무지 길들일 수 없는 것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단계와 한계는 이미 전문 용어를 순화하느라 애를 쓰고 있는 여러 학회와 기관들의 경험 안에 드러나 있어서 우리는 거기 맞추어 알맞게 길들이는 능력을 지녔다. 열쇠는 ‘누구나 쉽게 또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과녁으로 삼고 토박이말을 겨냥하여 전문 용어를 길들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 그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돕고 뒷받침하는 몫은 나라, 곧 국립국어원이 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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