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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탄생 

  철∙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4th. Saturday, 寒
  At 10 a.m. called on Governor. He received me very kindly and said 迷惑デアッタラウ. Then he told me that he hoped that I would exert myself to the establishment of good understanding between the Koreans and foreigners on one side and the Japanese on the other. 歸路訪見山縣五十雄.

  9th. Thursday. 風雪
  午後母主感患委席. 四時後村上唯吉來訪하였기로 「富ノ道シルベ」를 純專飜譯하여 주기로 承諾하다. Received a letter from Helen.1)

   「애국가」의 작사자로 알려진 좌옹 윤치호(佐翁 尹致昊, 1865∼1945)는 그의 나이   18세가 되던 1883년부터 1943년까지 무려 60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이 방대한 분량의 일기는 그 자체로서 구한말과 식민지 기간의 중요한 역사적 사료이거니와,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말 그대로 그의 ‘에크리튀르’(écriture; 글쓰기)이다. 
  위의 인용문은 1916년 3월 4일과 9일의 일기 부분인데, 영어와 일본어, 한문, 한글 등이 뒤섞인 이 독특한 방식의 글쓰기는, 오늘날 ‘한국어 글쓰기’의 규범과 관행이 정착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험이 행해져야 했던가를 말해 주는 하나의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윤치호 일기』는 순 한문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임오(壬午) 11월 22일’의 첫 일기를 보자.

  壬午 十一月二十二日(晴, 寒, 卽明治十六年正月初一日也, 月)
  官省貧富貴賤無論, 皆堅國旗, 士女兒童, 無不新服花裝, 年始賀禮, 金銀靑紫滿路, 一層繁華, 而皆閉店遊步, 太平氣象.2)

  이 첫 일기는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쓰였다. 도쿄 시내의 새해 첫날 거리 풍경을 목격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이 조선 귀족에게는 이미 두 개의 시간대(時間帶), 즉 ‘임오(1882) 11월 22일’과 ‘메이지(明治) 16년(1883) 1월 1일, 월요일’이 공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일기는 비록 순 한문 문장으로 쓰이고 있으나 이미 그 출발에서부터 어떤 혼종성(hybridity)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윤치호에게는 제1 언어였을 이러한 순 한문 문장이 변화하는 것은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4년이 지난 1887년 11월 11일의 일이다. 그는 갑자기 한문 문장을 버리고 순 한글, 즉 ‘국문’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날의 일기는 다음과 같다.

  십이일(청, 입오일, F.) 각일과 여전이다. 오후 수신회 주회 여전다. 이날노붓터 일긔를 국문으로 다.3)

  이러한 순 한글 문체의 일기는 2년 남짓 계속된다. 1889년 12월에 그는 돌연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십오(청, 초칠, Sa.) 오전 오시의 이러 오눌붓터 영어로 일긔기 작중 그 연고 아국 말로넌 당시 각 일을 다 세세히 스기 어렵고 둘를 세세이 스기 어려운 고로일 궐넌 일 만아 일긔가 불과 일수와 음청을 긔록 이요 셋 영어로 일긔면 별 필묵을 밧구지 안고 넷 영어럴우기가 더 속고로 이리  4)

  ‘모든 사람이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함’이라는 한글 창제의 취지와는 정면으로 어긋나는 이러한 토로는 윤치호 같은 조선 지식인에게는 ‘아국 말’, 즉 한글이 매우 쓰기 불편한 문자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 한문을 제1언어로 하는 조선 사대부 계급에게 한글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에 적절하거나 풍부한 언어적 관행을 허용하지 않는 문자였던 것이다. 과연 윤치호는 그날의 영어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7th. (11th Moon. 15th.) Up at 5 a.m. My Diary has hitherto been kept in Corean. But its vocabulary is not as yet rich enough to express all what I want to say. Have therefore determined to keep the Diary in English.5)

  순 한글 문체로 사 년 남짓 일기를 쓴 후에, ‘Corean’은 어휘가 풍부하지 않아서 말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윤치호가 처한 언어적 환경은, 근대적 국민 국가(nation state)의 수립 과정에서 이른바 ‘국어’(national language) 혹은 ‘공용어’(official language)가 어떻게 결정되고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의미심장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한문, 한글, 영어, 일본어 등이 단순히 단어나 어휘가 아니라 통사 구조의 수준에서 뒤섞이고 혼재하는[가장 극단적인 경우, 가령 “the agitators are 辱ing me”(1919. 3. 4.) 같은 문장도 있다] 이런 형태의 글쓰기는 사실상 알고 보면 윤치호의 경우만은 아니었다. 이것이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윤치호 일기』는 봉건 체제의 붕괴와 함께 한문의 언어적 지배력이 상실되면서 그 언어적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기 위해 경합하는 다양한 언어들의 각축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이 각축에서 ‘한국어’는 어떻게 결정되고 ‘한국어 글쓰기’는 어떤 과정을 겪었는가?

  이 질문은 물론 이 짧은 글에서 간단히 논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방대한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위의 사례는 근대 한국어 역시, 다른 모든 근대 국민 국가의 ‘국어’가 그렇듯이, 처음부터 어떤 자명한 실체를 전제하고 성립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어(조선어)=한국의 국어’ 혹은 ‘한글=한국의 문자’라는 등식은 자명하거나 당연하게 성립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한국어(조선어)가 한국이라는 근대 국가의 ‘국어’가 되는 것은 인위적이거나 심지어는 우연적인 것이며, 이른바 한글 문체가 한국의 지배적이고 공식적인 문자 체계로 정립되는 것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을 19세기 후반 조선에서의 언어적 환경은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물론 조선의 경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근대 국민 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수립된 프랑스 공화국의 경우, 혁명 이전에 이른바 ‘프랑스어’를 말할 수 있었던 ‘프랑스인’은 전체 인구의 20퍼센트도 되지 못했다. 특정 지역의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언어를 ‘프랑스어’로 지정하고 그것을 프랑스의 ‘국어’로 규정하는 것은 ‘프랑스 공화국’의 성립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며, 그 결과 혁명 이후 50년 정도의 기간 동안 ‘프랑스어’의 사용자는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9세기 후반까지 ‘일본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그렇듯이, 일본 북부의 주민과 남부의 주민역시 언어적으로 소통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메이지 유신을 통한 일본 근대 국가의 수립 이후에 일본의 국어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는 자명한 사항이 아니라 큰 논쟁거리였다. 메이지 정부의 초대 학무 대신이었던 모리아리노리(森有禮, 1847∼1889)의 유명한 ‘영어 공용화론’은 이러한 배경 아래 제출된 것이었다.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 교수에 따르면, 모리의 영어 공용화론은 실제의 언어 현실을 무시한 지극히 비현실적인 발상으로서 실현 가능성이 전무한 공론(空論)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이 지닌 의미는 심대한 것이었다. 즉 그의 주장은 사람들이 으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일본어=일본의 국어’라는 등식에 뭔가 균열을 초래한 것이었다. ‘일본의 국어’는 ‘일본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 다른 언어로도 일본의 국어나 공용어를 삼을 수 있다는 발상을 함으로써 모리는 ‘일본어=일본의 국어’라는 자명해 보이는 전제에 의문을 제기한 셈이었다. 이 점에 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   『日本語の近代』 참조.
  봉건 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한문의 언어적 지배력이 상실되고 새로운 국민 국가의 건설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던 19세기 후반 조선에서의 상황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자력에 의한 국민 국가 건설에 실패하고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사정은 더욱 복잡한 것이 되고 말았다. 종래의 한문 문체와 국한문 혼용체, 한글 문체가 서로 각축을 벌이는 한편에서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 일본어와 문명개화의 이념을 등에 업은 영어까지 가세한 마당에서 근대 ‘한국어(조선어)’가 어떠한 형태로 귀결될 것인지는 사실상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한국어(조선어)’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자국어에 대한 자의식이 싹틈으로써 한국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식민지라는 매우 특수한 언어적 환경 하에서 이 자의식은 어떻게 전개되고 실현되었는가? 식민지 시기의 한국 소설은 그 문제를 생각하는 데에 더할 수 없이 풍성한 자료의 창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다양한 언어적 실험과 실천이 난무하는 식민지의 언어적 상황에서 이광수의   『무정』의 등장이 지니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무정』이 연재되기 시작하는 1917년 1월 1일 자 ≪매일신보≫의 지면은 이 소설이 그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그 형식에서도 매우 유별난 것임을 우선 시각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전체 지면이 국한문체와 전통 한문체로 빽빽하게 뒤덮인 가운데 순 한글체로 쓰인 소설   『무정』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마치 울창한 한문의 숲 속에서 홀로 자신의 탄생을 선언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일어난다. 
  물론 이미 1896년에 순 한글로 발행되었던 ≪독립신문≫의 존재를 상기한다면,   『무정』의 한글 문체가 그 자체로서 문제적인 것일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것이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소설’(Novel)이라는 서양의 글쓰기 양식을 일본 유학을 통해 접한 이래 그것을 필생의 업(業)으로 삼기로 작정한 이광수를 비롯한 한국 신문학 초창기의 작가들이 소설 쓰기를 순 한글체로 연결시킨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소설이라는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는 그들에게 순 한글 문체는 새롭게 발견해야 할 그 무엇이었지 결코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어져 있는 것은 오히려 일본어였다. 이광수의 첫 소설이 「戀か」(사랑인가?)라는 일본어 소설이었음은 그 사정을 잘 설명해 준다. 
  그러므로 이광수가 『무정』을 쓰면서 그것을 순 한글체로 적고 ≪매일신보≫가 그것을 126회에 걸쳐 연재했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이광수를 비롯한 신문학 초창기의 작가들이 소설은 반드시 순 한글로 쓰고 그 대신에 다른 장르의 글, 예컨대 논설이나 비평 같은 장르의 글을 쓸 때에는 국한문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 사건의 의미는 더욱 심대하다. 그렇다면, “Corean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표현할 만큼의 어휘가 충분하지 않다.”라고 하던 1889년의 윤치호로부터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소설이라는 양식을 순 한글의 ‘Corean’으로 쓰는 1917년의 이광수 사이에는 어떤 사정이 개입되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식민지 시기 한국 작가들에게 ‘조선어’로 글쓰기, 즉 순 한글 문체로 소설쓰기는 매우 빠르게 정착되었다. 다른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았어도, 소설에서만큼은 순 한글 문체의 지배가 일찌감치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순 한글=한국어(조선어)=한국(조선) 소설’의 등식은 소설 쓰기의 일천한 역사에 비추어 빠른 속도로 자리 잡았고 조금도 의심되지 않았다. 그 점에서 순 한글체 소설 쓰기야말로 식민지 안에서의 가장 분명하고도 확실한 자율적 영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36년 8월 잡지 ≪삼천리≫에는 ‘조선 문학의 정의, 이러케 규정하려 한다’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가 실려 있다. “조선 문학은 조선 ‘글’로,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에게 ‘읽히기’ 위하여 쓴 것”이라는 조선 문학의 일반적인 정의에 대하여 이 기사는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 12명의 견해를 묻고 있다. “조선 ‘글’로,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에게 ‘읽히기’ 위하여 쓴 것”이 조선 문학이라는 정의에 대해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는 문인은 물론 없다. 1932년에 <아귀도>(餓鬼道)라는 일본어 소설로 일본 문단에 데뷔한 장혁주도 단호히 자신의 작품은 조선 문학에 속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다. 이렇듯 조선 사람이 조선어로 쓴 것만이 조선 문학이라는 정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자명한 것을 새삼스럽게 묻고 있는 것일까? 그 자명성이 흔들리는 어떤 사정이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정은 무엇일까?
  알다시피 30년대 후반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가 이른바 내선일체 정책으로 전환하는 기간이다. 1938년 제3차 조선 교육령의 개정과 함께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른바 ‘내선공학’(內鮮共學)이 시행되고 ‘조선어’는 필수 과목에서 제외되었다. 한편 일상생활에서의 ‘국어(일본어)’ 사용에 대한 강요는 1940년과 41년에 걸쳐 조선어로 간행되던 신문과 잡지들이 폐간되는 것과 함께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어 글쓰기’는 심각한 위기에 처한다. ≪삼천리≫지의 특집 기사는 그러한 위기적 상황의 일단을 반영하고 있다. 자율적 영역으로서의 조선 문학은 그 존립의 근거를 위협받고 작가들은 일본어 글쓰기를 강요받는 상황이었다. 
  ‘조선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질문은 이러한 위기적 상황으로부터 나왔다. 30년대 후반 조선어 글쓰기의 위기적 상황에서 ‘조선어’와 ‘조선 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자의식이 생겨났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요컨대, 의심의 여지없이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던 ‘조선어’와 ‘조선 문학’의 정체가 새삼스럽게 문제시되었던 것, 여기에 이 역설의 본질이 있다. 이 역설은 ‘조선어’와 ‘조선 문학’에 어떻게 작용하였는가? 여기서는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응답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선 ‘국어(일본어) 전용’의 논리가 강조되던 당시의 상황을 반드시 ‘한국어(조선어)’의 전면적 말살기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실제의 사정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조선인이 조선어를 버리고 완전히 일본어를 사용하게 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할 것인가, 정말 그럴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되기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가, 조선 작가들이 조선어를 버리고 일본어로 작품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심지어는 전쟁터에 나간 조선인 병사가 일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 그에게 일본어 교육을 시키는 것이 낫겠는가, 아니면 조선어를 사용하는 부대를 따로 만드는 것이 낫겠는가 하는 논의에 이르기까지, 조선어를 둘러싼 유례없는 집중적 논의들이 이 시기에 벌어진다. 논의의 당사자들 역시 유례가 없을 정도이다. 총독부의 고위 관리, 특히 교육과 언어 정책을 관장하는 학무국장을 비롯해 많은 일본 작가들과 조선 작가들이 이 논의에 참여했다. 저마다 입장이 다르고 주장이 다르지만, 그것은 식민자의 언어와 피식민자의 언어가 서로 어떻게 충돌하고 교차하고 때로는 타협하는가를 보여 주는 풍부한 사례들이다. 
  널리 알려진 상식과는 달리, 일본어 사용이 강제되고 추진되고 있던 이 시기에 한편으로는 조선어 역시 정책적 차원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조선어 작품의 발표 지면이 사라지는 사태는 한편으로는 조선어 소설의 전작 장편 출판이나 이태준의   『문장강화』와 같은 조선어 교육 도서의 출간을 자극하기도 했다. 해방 직전까지도 조선어 장편 소설들의 출판은 계속되었다. 또 한편 이 시기에는 조선 작가들에 의한 일본어 작품들도 많이 생산되었다. 이것들은 ‘한국 문학’인가, 아니면 ‘일본 문학’인가? 혹은 그 어떤 것도 아닌가? 이 질문에도 지금은 대답할 수 없다. 다만 “조선 문학은 조선 ‘글’로,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에게 ‘읽히기’ 위하여 쓴 것”이라는 1936년 조선 문인들의 자기 정체성을 견지하는 한, 식민지 말기 조선 작가들이 일본어로 쓴 수많은 작품들은 암흑 속으로 잠기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 역시 해명해야 할 문제들을 안고 있는 문학 작품임에 틀림없다. “‘한국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동반하지 않는 한, 이 작품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한국 문학’이 안고 있는 어떤 근본적인 문제를 내장하고 있는 작품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30년대 후반으로부터 해방에 이르는 기간은 흔히 알려져 있듯이, ‘암흑기’나 ‘공백기’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어(조선어)’와 ‘한국(조선) 문학’의 다른 가능성들이 모색되고 수행되는 역동적이고 활력에 찬 시기일 수도 있다. 그 모색의 과정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학’은 어떤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또 다른 숙제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아무 의심의 여지없이 자명한 것으로 믿고 있는 ‘한국어’와 ‘한국 문학’이 바로 그러한 사태를 거쳐 탄생된 하나의 결과이며 흔적이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