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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의 에로티시즘

김 철∙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그날 저녁 무렵은 유난히도 무더웠다. 더우면 사람들은 해변에서나 집 안에서나 옷 벗기를 즐겨 한다. <중략> 대체 주인 양주는 이때껏 무엇을 하고 있나 하고 빈지틈에 눈을 대었다. 이 괴망스러운 짓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빈지틈으로는 맞은편 건넌방이 또렷이 보인다. 분녀는 하는 수 없이 방 안의 행사를 일일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숨을 죽였다. 피가 솟아 얼굴이 화끈 단다. 목구멍이 이따금 울린다. 전신의 신경을 살려 두 손을 펴고 도마뱀같이 빈지 위에 납작 붙었다.
  수돗물이 쏟아질 대로 쏟아져 목욕통이 넘쳐나는 것도 잊어버리고 분녀는 어느 때까지나 정신없이 빈지에 붙어 앉았다. 더운 김에 서리어서인지 눈에 불이 붙어서인지 몸이 불덩이같이 덥다.
  날이 지나도 흥분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세상도 있구나.’
  거기에 비하면 지금까지 겪은 세상은 너무도 단순하고 아무것도 아닌-방 안의 세상이 아니요 문 밖 세상 같은 생각이 든다. 가지가지의 경험을 죄진 것같이 여기던 무거운 생각도 어느결엔지 개어지고 도리어 자연스럽고 그 위에 그 무엇이 부족하였다는 느낌조차 들었다.
  관사의 광경은 확실히 커다란 꼬임이었다. 일시 잠자던 것이 다시 깨어나 이번에는 더 큰 힘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우물물을 퍼서 몸에 퍼부어도 쓸데없다. 한시도 침착하게 앉아 있을 수 없이 육신이 마치 신장대 모양으로 설레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이효석(李孝石)의 단편 「분녀」(1936)의 한 장면이다. 군청의 관사에서 식모일을 하고 있는 분녀가 주인 부부의 성교 현장을 문틈으로 엿보면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이 장면은 한국 소설에서 가장 노골적인 성적 묘사 가운데 하나로 손꼽힐 만한 것이다. 주인 부부의 성교 장면이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그 대신에, “두 손을 펴고 도마뱀같이 빈지 위에 납작 붙어”서 건넌방을 엿보는 분녀의 흥분 상태가 그려짐으로써, 그런 분녀를 다시 엿보는 독자의 성적 상상력은 극대화된다.
  그런 의미에서 「분녀」는 음탕한 소설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음탕함’을 실험하는 소설이다. 작가와 주인공과 독자를 잇는 연결 고리는 오로지 ‘음탕함’이다. 그 ‘음탕함’은 물론 남성-작가와 남성-독자가 공유하는 음탕함이다. 어떤 음탕함인가? 지금부터 그것을 살펴보자.
  「분녀」의 플롯은 ‘강간’(强姦)이다. 어머니와 동생이 함께 자고 있는 방안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는 장면으로부터 소설은 시작되어 여러 명의 남자들에게 겁탈 당하는 분녀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플롯을 이룬다. 첫 번째의 강간 사건에서 분녀는 “새까만 하늘이 부끄럽고 디딘 땅이 부끄럽고 어두운 밤을 대하기조차 겸연스”러웠다. 그러나 “분녀는 그렇게 눈떴다.” 두 번, 세 번 다른 남성들에게 겁탈당하는 ‘경험’을 통해 차츰 담대해지는 그녀의 몸과 마음을 작가는 집요하게 추적한다. 단옷날 그네뛰기에서 그네를 타고 하늘 높이 치솟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광경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마지막 힘을 불끈 내어 강물같이 후렷이 솟아나갈 때 벌판으로 달리는 눈동자 속에 문득 맞은편 수풀 속의 요절할 한 점의 광경이 들어왔다. 순간 눈이 새까매지고 허리가 휘친 꺾이며 힘이 푹 스러지는 것이었다.
  ‘왕가일까.’
  추측하며 재차 솟구며 나가 내려다보니 움직이지도 않고 그대로 서 있는 꼴이 개울 옆 수풀 그늘 아래 완연하다. 그 불측한 녀석은 참다못해 그 자리에 선 것이 아니요, 확실히 일부러 그 꼴을 하고 서서 이쪽을 정신없이 쳐다보는 것이다. 아마도 오랫동안 그 목적으로 그 짓을 하고 섰던 것이 요행 주의를 끌어 눈에 뜨인 것이리라. 거리에서 드팀전을 하고 있는 중국인 왕가인 것이다.
  ‘음칙한 것.’
  속으로는 혀를 차면서도 이상하게도 한눈이 팔려 분녀는 노리는 동안에 팽팽하게 당기던 기운이 왈싹 줄어들며 그네가 줄기 시작하였다.
  
  ‘강물같이 후렷이 솟아나가는’ 그네 위에서 ‘벌판으로 달리는 눈동자’가 포착한 ‘수풀 속의 요절할 한 점의 광경’이 무엇인지 작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네 타기에 대한 이 박진감 넘치는 묘사가 독자의 성적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분녀는 이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왕가와 은밀한 눈짓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넷줄을 놓치고’, ‘좀체 흥분이 사라지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왕가에게 겁탈을 당한 후의 분녀의 상태를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생각하기도 부끄러운 일이나 사실 왕가는 특별한 인간이었다. 사내 이상의 것이라고 할까. 그로 말미암아 분녀는 완전히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왕가를 보는 눈이 전과는 갑자기 달라져서 은근히 그가 그리운 날이 있었다. 피가 수물거려 몸이 덥고 골이 띵할 때조차 있다. 그런 때에는 뜰 앞을 저적거리거나 성밖에 나가 바람을 쏘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도무지 몸이 식지 않는 때가 있다.
  
  요컨대, 강간을 통해 그녀의 섹슈얼리티는 완성되었다. ‘여자는 강간을 원하고 그것을 통해 성적 쾌감에 눈뜬다’는 남성의 포르노그래피적 상상력은 1930년대 이효석의 소설에서도 이렇듯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효석의 소설은 거의 대부분 이러한 포르노그래피적 상상력에 의한 성적 심미화의 산물이다.
  한국인 거의 모두가 읽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메밀꽃 필 무렵」도 그렇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 소설에서 허 생원의 안타까운 사랑의 추억을 읽어 내지만, 한껏 낭만화된 그 하룻밤의 사랑은, 이효석의 다른 소설과의 비교를 통해 바라보자면, 무언가 수상쩍고 의심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소금을 뿌린 듯이 하얀 달밤의 메밀밭을 걸으며 허 생원이 회고하는 ‘성 서방네 처녀’와의 ‘물방앗간에서의 하룻밤 인연’은 이효석의 소설에서 반복되는 모티프, 즉 우연히 마주친 여성과의 급격한 정사(情事), ‘강간’을 연상시킨다.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 가는 일색이었지. <중략> 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는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중략> 그러나 처녀란 울 때 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 있을 때는 누그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난생 처음 보는 젊은 남녀가 (남자는 옷을 벗으려던 참이다) 한밤에 밀폐된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처녀는 ‘봉평 제일의 일색’이다. “처녀란 울 때 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라는 말로 남자는 자신에게서 일어난 강렬한 욕정을 암시한다.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허 생원과의 사건 이후 처녀와 그 가족들은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었다’고 회상하는 허 생원에게 친구인 조 선달이 “수 좋았지. 그렇게 신통한 일이란 쉽지 않어.”라고 대꾸하는 것은 그러한 일이 장돌뱅이들의 세계에서 희귀하지만 있을 수 있는 ‘운 좋은’ 일임을 암시한다. 난생 처음 만난 남녀가 순간적 격정에 사로잡혀 상호 동의하에 육체적 관계를 맺는 소설적 설정은 1930년대 한국 소설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 관계는 일방적일 것일 가능성이 크고 이효석의 소설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한다면 ‘메밀꽃 필 무렵’에 벌어진 사건의 진상은 무엇이었을까? 있었음 직한 사정들은 그러나 달밤, 메밀꽃, 물방앗간 등의 극도로 심미화된 효과로 인해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것이야말로 이효석의 작가적 장기(長技)였다. 이렇게 「메밀꽃 필 무렵」을 이효석의 다른 소설들과 연관시켜 읽을 때 그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 속에서는 뜻밖에도 난폭한 폭력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포르노그래피적 상상력의 또 다른 면모는 도시 지식인이 그려 내는 야성(野性)에의 환상이다. 분녀의 형상은 사실상 도시의 남성 지식인이 지닌 야성적 여성성에 대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분녀」와 같은 해인 1936년에 쓰여진 단편 「들」에서도 그 점은 잘 나타난다. 화자인 ‘나’는 서울의 학교에서 사상 관계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이다. “나는 책을 외듯이 벌판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외고 있다. 마음속에는 들의 지도가 세밀히 박혀 있고 사철의 변화가 표같이 적혀 있다. 나는 들사람이요 들은 내 것과도 같다.” 고향의 들판에 누워 느끼는 봄의 기운을 “알레그로가 지나고 안단테에 들어갔을 때의 감동”으로 묘사하는 이 도시 지식인이 지닌 ‘고향’과 ‘농촌’에 대한 이국(異國)정서(exoticism)는 여성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의 눈에 비치는 마을 처녀 ‘옥분’은 과수원 철망을 넘어 따먹고 싶은 ‘딸기’와도 같은 것이다. “누구의 과수원이든간에 철망을 넘는 것은 차라리 들사람의 일종의 성격이 아닐까.” 과연 딸기를 따러 과수원의 철망을 넘던 ‘나’는 옥분과 마주친다.
  
  “딸기 따 줄까”
  “무서워”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왜 그리도 나의 마음을 끌었는지 모른다. 나는 떨리는 그의 팔을 붙들고 풀밭을 지나 버드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입술은 딸기보다도 더 붉다. 확실히 그는 딸기 이상의 유혹이다.
  “무서워”
  “무섭긴”
  하고 달래기는 하였으나 기실 딸기를 훔치러 철망을 넘을 때와 똑같이 가슴이 후둑후둑 떨림을 어쩌는 수 없었다. 버드나무 잎새 사이로 달빛이 가늘게 새어 들었다. 옥분은 굳이 거역하려고 하지 않았다.
  양딸기 맛이 아니요 확실히 들딸기 맛이었다. 멍석 딸기, 나무 딸기의 신선한 감각에 마음은 흐뭇이 찼다.
  
  도시 지식인의 이국 취향적 시선이 발견하는 ‘고귀한 야만인(noble babarian)’으로서의 농촌과 농민의 형상은 1930년대 한국 소설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이다. 한국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기념비적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기영(李箕永)의 장편 「고향」(1933)도 그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고향」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성적 매력이 흘러넘치는 ‘방개’를 기억할 것이다. 씩씩하고 건실한 청년 인동이와 방개가 처음으로 육체관계를 갖는 다음 장면은 그 묘사의 간결함과 함축성에서 한국 소설의 에로티시즘을 대표할 만하다.
  
  시내강변의 모래톱에는 돌비늘이 무수히 반짝인다. 그들은 나란히 모래톱에 앉았다. 물소리가 쫄쫄! 풀벌레가 찍찍! 그런데 가는 바람은 부채질하듯 솔솔 분다.
  인동이는 물쭈리와 대꼬바리가 맞붙은 곰방대를 꺼내서 종이 봉지에 싼 담배 부스러기를 담아 물고 성냥을 그대었다.
  <중략>
  방개는 생글생글 웃으며 연기나는 물쭈리를 그대로 인동이 입에 넣어주었다.
  인동이는 별안간 정신이 얼떨떨해졌다.
  그는 담배를 끄고 나서 고만 그 자리에 방개를 껴안고 쓰러졌다.
  “아이 놔 얘! 가만 있어 좀···· 참 달두 무척 밝지!”
  
  도시의 남성 지식인-작가들이 발견하는 야성미 넘치는 농촌 여성의 섹슈얼리티. 식민지 한국 소설의 에로티시즘은 거기에 중요한 원천을 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위의 장면에서 보이는 방개의 저 천연덕스러운 말과 몸짓은 얼마나 생생하고 에로틱한가! 어찌되었든 이러한 묘사들이 한국 근대 소설과 한국어의 자산을 이루고 있음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근대 소설은 에로티시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근대적 개인은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우선시하는 존재들이며 소설은 그런 근대적 개인을 그리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성적 욕망의 분출이야말로 봉건적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들의 자기표현 방식이었고 근대 소설은 이런 현상을 다른 어떤 예술 장르보다 풍부하게 반영하였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의 전면적 표현을 목표로 하는 소설 양식에서 성적 묘사를 포함한 에로티시즘이 소설적 서사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도 이광수의 『무정』(1917)은 가히 선구적이다. 기생 영채가 월화와 함께 나누는 다음과 같은 동성애적 장면이 당시의 독자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영채도 이제는 남자가 그리운 생각이 나게 되었다. 못 보던 남자를 대할 때에는 얼굴도 후끈후끈하고 밤에 혼자 자리에 누워 잘 때에는 품어줄 누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나게 되었다. 한번은 영채와 월화가 연회에서 늦게 돌아와 한자리에서 잘 때에 영채가 자면서 월화를 꼭 껴안으며 월화의 입을 맞추는 것을 보고 월화는 혼자 웃으며 ‘아아, 너도 깨었구나-네 앞에 설움과 고생이 있겠구나’ 하고 영채를 깨워
  “영채야, 네가 지금 나를 꼭 껴안고 입을 맞추더구나” 하였다. 영채는 부끄러운 듯이 낯을 월화의 가슴에 비비고 월화의 하얀 젖꼭지를 물며 “형님이니 그렇지” 하였다.
  
  이 장면은 근대적 계몽(“아아, 너도 깨었구나”)이 개인의 성적 자각과 직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다시 말해, 영채와 월화가 서로 가슴을 비비고 입을 맞추며 ‘하얀 젖꼭지’를 무는 이 장면의 에로티시즘이야말로 이광수의 계몽주의를 표상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한국 소설을 근대적 에로티시즘과 연관하여 분석하는 연구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에로티시즘과 모더니티, 에로티시즘과 식민주의, 에로티시즘과 민족주의 등, 보다 깊고 세밀한 분석을 기다리는 연구의 주제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 글은 그러한 연구를 촉구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두서없이 나열해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가령, 채만식의 유명한 풍자 소설 『태평천하』에서의 다음과 같은 장면은 위에서 보았던 장면들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일흔두 살의 ‘윤직원’이 열네 살짜리 동기(童妓)를 데리고 벌이는 다음과 같은 ‘수작’은 에로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채만식 특유의 풍자와 해학의 시선이 인간의 성적 욕망을 어떻게 그려 내고 있는지, 그럼으로써 성의 묘사와 관련된 한국 소설의 목록이 얼마나 다채로울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다리 그만 치구, 이리 온?”
  하면서 턱을 까붑니다.
  아이는 발딱 일어서더니 발치께로 돌아, 윤직원 영감의 가슴 앞에 바투 앉고, 윤직원 영감은 물었던 담뱃대를 비껴놓고는 아이의 머리를 싸악싹 쓸어줍니다.
  “응…… 열늬 살이면 퍽 숙성히여!”
  “……”
  “야?”
  “예?”
  “으음…… 저어 거기서, 저어……”
  “……”
  “야?”
  “예?”
  “저어, 너……”
  “예에”
  “너 내 말 들을래?”
  “예에?”
  아이는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고는 눈을 깜작깜작합니다. 윤직원 영감은, 히죽 웃으면서 머리 쓸던 팔로 슬며시 아이의 목을 끌어안습니다.
  “내 말 들어라, 응?”
  “아이구머니!”
  아이는 마치 불에 댄 것처럼 화닥닥 놀라면서 뛰쳐 일어나더니, 그냥 문을 박차고 그냥 꽁무니가 빠지게 달아나버립니다.
  <중략>
  연애는 환장이니라(Love is blind)란다더니 옛말이 미상불 옳아, 이다지도 야속스레 윤직원 영감 같은 노인에게까지 들어맞기를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