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항 한국방송공사(KBS) 전 아나운서 실장은 1961년에 KBS에 입사해 37년 동안 재직하며 정확한 국어의 구사와 유려한 말솜씨로 본인의 표현대로 언어운사(言語運師)와 언어운사(言語運士)로서의 책무를 다했다. KBS 한국어연구회 회장과 국어심의회 한글분과 위원으로서 국어 발전에 이바지한 바도 적지 않다.
유도 6단으로 민속씨름의 산파역이 되기도 했으며,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신인가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는 얼마 전 17년간의 준비 끝에 ≪김군에게 들려준 0의 행복≫이라는 노작(勞作)을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도 야구 중계방송 캐스터로서 마이크를 놓지 않고 있으며, 후진 양성에도 매진하고 있는 이규항 아나운서를 만나 씀바귀보다도 쓰고 호박보다도 덤덤한 그의 인생과 우리말 사랑에 대해 들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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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자: 이규항(한국방송공사(KBS) 전 아나운서 실장)
질문자: 장승욱(작가)
때: 2008년 7월 2일
곳: 봄온 아나운서 아카데미 |
장승욱: 아나운서를 지망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이규항: 1950년대 말에 장기범 아나운서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스무 고개>라고 하는 공개방송을 하셨는데, 그 <스무 고개>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개방송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였는데, 장기범 아나운서의 방송을 들으면 어떻게 저렇게 말이 음악 같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악도 보통 유행가가 아니라 그때 제가 좋아했던 <올드 블랙 조>나 <켄터키 옛집>, <오 솔레 미오> 같은 명곡에 못지않게 아름답다고 느꼈거든요. 제가 어느 정도 그분한테 반했는가 하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어떤 영화가 있었어요. 도둑질을 하고 도망 다니는 도둑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경찰이 어떻게 자기를 추적하는가를 알고 싶어서 항상 이불을 뒤집어쓰고 뉴스를 들어요. 거기서 장기범 아나운서가 뉴스를 방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범인 체포는 시간문제라고 낙관적인 견해를 표명했습니다. 이보다는 약간 긴데 어쨌든 1분 이내로 그분이 그런 뉴스를 녹음하셨어요.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그걸 들었는데 다시 듣고 싶어지는 겁니다. 옛날에는 영화가 일류 극장 상영이 끝나면 이류 극장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을지로4가에 있던 천일극장까지 가서 1분밖에 안 되는 그분의 뉴스 방송을 들으려고 영화를 다시 본 기억이 납니다. 이럴 정도로 제가 그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승욱: 요즘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하는 것처럼 준비하지는 못하셨을 텐데, 아나운서가 되기로 작정한 뒤에 어떤 준비를 하셨습니까?
이규항: 그때는 신문이 지금처럼 두껍지가 않았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이런 정도인데, 저의 교재는 신문밖에 없었어요. 아침에 신문이 오면 처음부터 끝가지 소리 내어 읽는 거죠. 그리고 장기범 아나운서나 당시 유명했던 최계환, 임택근 아나운서의 방송을 늘 들으면서 그것을 지침으로 삼았죠.
장승욱: 아나운서는 어떻게 해서 되신 건가요?
이규항: 원래 아나운서는 대학 4학년 이상이어야 응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려대 국문과 2학년 때,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거예요. 제가 사실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인데, 용기를 내서 KBS 아나운서실을 찾아가 당시 아나운서 계장이었던 장기범 선생을 뵈었죠. 제가 이러저러해서 꼭 아나운서가 되고 싶습니다 했더니 처음엔 펄쩍 뛰셨죠. 그래도 젊은 사람이 자꾸 우기니까 기특하게 보셨던지 그러면 4학년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봐야겠네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그때 스무 살이었습니다. 그래서 장기범 선생의 묵인하에 스물두 살, 4학년으로 나이와 학년을 올려서 시험을 봤습니다. 1958년의 일입니다. 운이 좋았던지 실기시험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을 올렸고 필기시험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거둬서 합격을 하긴 했는데 결국 들통이 났죠. 그때 장기범 선생이 심사위원장이었는데, 합격한 데 대해 축하를 해주시면서 대학을 졸업하면 내가 힘써서 특채를 하겠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래도 못 미더워서 당시 고려대 은사였던 정한숙 선생님을 모시고, 그때는 선생님들이 제자의 취직에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졌던 시절이었는데, 남산 중턱에 있었던 KBS 아나운서실을 찾아가서 장기범 선생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정한숙 선생님이 증인이 돼서 졸업하면 무조건 채용하겠다고 구두로 약속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그 장기범 선생이 1959년에 미국 워싱턴에 있는 VOA(미국의 소리)로 2년 동안 파견을 나갔어요. 그래서 저는 졸업을 하던 1961년에 다시 시험을 봤죠. 이렇게 시험을 두 번 봐서 두 번 합격을 하고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장승욱: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한마디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규항: 제가 동덕여대에 출강할 때 교재로 만든 책으로 ≪아나운서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한글로 제목을 붙이고 거기다가 언어운사(言語運師/士)라고 한자로 병기를 했습니다. 언어운사, 즉 아나운서는 스승 사(師) 자를 쓰면 국민의 국어교사로서, 또 선비 사(士) 자를 쓰면 언어의 테크니션으로서의 책무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아나테이너(아나운서와 엔터테이너의 합성어)를 비롯해 별 얘기가 다 나오는데, 어떤 경우든 아나운서가 엠시(MC)를 봤을 경우에는 가수나 코미디언 출신이 진행하는 것과 차이점이 있어야 한다, 즉 언어 표현에 차이점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장승욱: 그런 차이점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요?
이규항: 우리말에는 여러 가지 규범이 있는데, 그중에 장-단음 구별도 있습니다. 아나운서들은 사석에서도 발음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작년에 아나운서 선후배 모임이 있었는데, 그때 타이틀을 장-단음 기능 보유자 인간문화재 음주대회라고 붙일 정도로 장-단음은 아나운서들이 금과옥조처럼 모시는 언어의 규범입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말에는 장-단음 구별이 필요한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영어나 일본어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어나 일본어는 표기만 봐도 이것이 길거나 짧은 말인가를 알고 어떤 뜻인가도 알 수 있는데, 우리말은 말(言)과 말(馬)처럼 낱말 자체로는 구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말에는 이상하게도 이런 쌍둥이 말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눈(眼)/눈(雪), 전기(電氣)/전기(傳記), 상품(賞品)/상품(上品) 같은 것들이 있는데, 아나운서 세계에서는 7185쌍이 있다고 합니다. 곱하기 2만 해도 1만 5000단어 가까운데, 영어나 일본어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은 숫자입니다. 저는 아나운서 후배나 지망생들을 가르칠 때, 이런 장-단음에 특히 역점을 두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나운서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은 이런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승욱: 보통 사람들은 장-단음에 대해 거의 무신경한 것이 현실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규항: 글쎄요. 신경을 안 쓰는 사람들도 영어를 할 때면 신경을 쓰거든요. 미국에서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6학년 때까지 약 6~7년 동안 발음 위주의 언어 교육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50년이 넘었는데도 발음부호를 붙인 초등학교 교과서가 단 한 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건 참으로 슬프고 놀랍고 창피한 일입니다. 참고삼아 말하고 싶은 것은 세계 언어의 표기와 발음의 관계를 보면 영어, 프랑스어는 95퍼센트 이상 표기와 발음이 달라서 반드시 발음부호가 있어야 됩니다. 반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일본어 등은 표기 자체가 발음이에요. 그래서 그쪽 사람들은 발음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어 표기에는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음주의와 형태를 위주로 하는 형태주의가 있는데, 형태주의로 표기가 된 낱말들은 전부 표기와 발음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한국어의 경우 형태주의에 의해 표기된 낱말이 약 40퍼센트나 됩니다. 그런데 표기법은 있지만 발음법은 없습니다. 표기법으로 표준 낱말을 정하는 것이 외장 공사에 해당한다면, 표준 발음을 정하는 것은 내장 공사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어문 정책은 인테리어 공사가 안 된 부실 공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그 숱한 국어학자들은 오늘날까지 이런 문제에 무관심한 상태입니다. 보통 문제가 아니죠.
장승욱: 선생님께서는 언어 교통사고라는 표현을 쓸 만큼 요즘의 방송언어에 대해 못마땅해 하시는데,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시는지요?
이규항: 지금은 라이선스 시대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방송을 하는 사람의 경우는 보통 언중(言衆)들과는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방송인이 바로 국민의 국어교사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나운서 출신의 모 엠시가 있는데, 그 사람이 10여 년 동안 어떤 프로그램에서 바랍니다가 올바른 표현인데, 말끝마다 뭘 바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로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의 다 바라겠습니다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어요.
방송에 나올 사람들은 반드시 1차로 검증이 있어야 해요. 방송인으로서 갖춰야 할 요건이 있어요. 우선 발음이 보통 사람보다 좋아야 하고 또 목소리가 나쁘면 안 되죠. 그런 소질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운전을 하려고 해도 훈련과 연습을 통해 면허증을 받아야 하듯이 전 국민을 상대로 방송을 하는 방송인은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아나운서 출신 이외의 엠시들은 훈련이 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운전면허 없는 사람이 도로에 나와 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를 내는 것처럼 이 사람들은 '언어의 교통사고'를 내는 것이죠.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그러니 우리말이 다 망가지는 겁니다.
장승욱: 그러면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요?
이규항: 제가 극단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방송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매력이 있는가 하면 금방 유명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프로듀서는 제작을 해야 하는데 얼굴이 나오는 방송에 욕심이 나는 거예요. 기자들도 마찬가집니다. 방송 출신으로 정계에 나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방송을 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방송 욕심이 너무 지나쳐요. 할 사람이 해야 하는데…
방송을 하려면 첫 번째로 방송인으로서 방송할 자격이 있는가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합니다. 예를 들어 노래자랑에 나갈 때도 아무나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예비심사를 거쳐야 하지 않습니까?
장승욱: 아드님(이상협 KBS 아나운서)도 아나운서가 됐는데, 해보라고 권하신 건가요?
이규항: 제가 일단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좋아서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발음을 가르쳤습니다. 커가면서 보니까 인물도 그만하면 괜찮고… 그런데 정작 중요한 목소리는 변성기가 지나봐야 알거든요. 고1 때 변성기가 왔는데, 미성이고 성량도 풍부해서 아나운서를 해도 되겠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나운서 쪽으로 관심을 갖게 했지요.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에 겨우 붙었는데, 모르는 사람들은 저 때문에 됐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그때 일 때문에 도쿄에 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도와준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이 제 자식을 잘 봤는지, 그 양반 댁이 곤지암인데, 일주일에 한 번씩 곤지암에 데려다가 옛날 서당식으로 1년을 가르쳤답니다. 저는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합격하고 나서 아들이 사실은 이계진 선생님께서 1년간 가르쳐주셨다고 합디다. 그래서 합격하게 된 거죠.
장승욱: 지금까지 많은 프로그램을 하셨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지요?
이규항: 저는 후대 사람들이 저를 야구 전문 캐스터, 또 유도․씨름 전문 캐스터로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특히 민속씨름은 비씨름인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이디어를 내서 만든 것입니다. 의성 사람으로 김태성 씨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과 제가 민속씨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서 83년 4월부터 민속씨름 중계를 했는데, 씨름 중계 용어도 제가 개척하면서 하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유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대학교 때 유도선수였기 때문에 유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씨름과 인연을 맺게 된 거죠.
장승욱: 사람이니까 방송을 하다 실수도 하셨을 것 같은데요?
이규항: 제가 일찍이 차(茶) 생활을 했습니다. 면허가 없어서 차(車) 생활은 아직 못 해봤습니다만. 차에는 이뇨 작용이 있어서 차를 많이 마시면 화장실에 자주 가게 됩니다. 중계방송을 하는데 상황이 아슬아슬 드라마틱할 때, 그러니 더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 소리를 지르면 더 급해집니다. 그래서 해설자에게 그냥 맡겨두고 화장실로 달려간 적이 있습니다.
장승욱: 음반도 내셨는데?
이규항: 60년대에 나온 <네 잎 크로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제가 61년부터 아나운서 생활을 했는데, 그해 12월 말경에 모든 아나운서가 나와서 노래자랑을 했습니다. 그 특집방송 제목이 <아나운서 온 퍼레이드>였죠. 제가 원래 노래는 좀 했는데, 대학 시절에는 연-고대 대항 노래 부르기 대회 같은 데 고려대를 대표해 나간 일도 있습니다. 그때 제가 불렀던 노래가 팻 분의 <I'll Be home>이라는 노래였는데, 그 노래를 <아나운서 온 퍼레이드>에서도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선배들이 음반을 내보라고 권해서 한 30곡 취입을 했습니다. 문화방송 라디오 주제가도 부르고 했는데, 알려진 것은 <네 잎 크로바> 한 곡뿐입니다. 부끄럽지만 68년에 신인 남자가수상을 탔습니다. 제가 아나운서가 된 지 7, 8년쯤 되었을 때였는데, 아나운서를 계속할까, 가수를 해볼까 고민도 했지만, 그냥 아나운서의 길로 계속 갔습니다.
장승욱: 그 일로 혹시 후회는 안 하셨는지요?
이규항: 그런데 지금 그때 노래를 들으면 부끄러워요. 지금 노래를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도 같고. 요즘 패티김이니 양희은이니 하는 분들이 독창회를 여는 것을 보니 저도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저도 한 시간 정도 리사이틀을 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혼자만의 욕심이죠.
장승욱: 미남인데다 운동선수였고 노래까지 잘하셨으니 인기가 대단했을 텐데, 무슨 스캔들은 없었습니까?
이규항: 대체로 아나운서들은 스캔들이란 게 없어요.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여가생활은 거의 술입니다. 농담이지만, 술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 스캔들이 많더라고요. 저는 오로지 술에 몰입을 하는 술 전공이기 때문에, 술을 매개로 해서 술자리에서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를 좋아합니다.
장승욱: 요즘은 주로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규항: 제가 17년 전 우연한 기회에 불교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준비를 해왔습니다. 얼마 전에 겨우 작업을 마쳐서 출간했는데, 제목이 ≪김군에게 들려준 0의 행복≫입니다. 그 내용은 불교를 종교로 보지 않고 철학으로 본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그 깨달음의 모체가 0입니다. 보통 얘기하는 선이나 중도 사상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뚜렷하게 말씀으로 남긴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이심전심으로 제자 가섭에게 전했을 뿐입니다. 저는 이처럼 암호 같고 수수께끼 같은 선과 중도 사상을 밥맛과 수학의 0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풀어내려고 했습니다. 최근에 큰스님들께서 격려의 편지를 보내주셔서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장승욱: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이규항: ≪김군에게 들려준 0의 행복≫에 제 인생의 반쯤을 걸었습니다. 요즘엔 씀바귀가 맛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씀바귀보다 더 쓴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인 듯합니다. 또 호박이 맛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호박보다 더 덤덤한 인생을 살아왔구나 깨닫게 됩니다. 하여튼 그 책에 내 인생의 절반 정도를 쏟아 부었고, 나머지 절반을 다룬 수필집을 내려고 지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장승욱: 지금 핸드폰이 없으신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규항: 일부러 안 쓰려는 게 아니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입니다. 정년이 지나서 저에게 급히 연락할 사람도 없고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요즘 사람들은 편리 중독증에 걸린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데,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또 하나는 공공장소에서, 전철이나 버스 안이나 길에서나 핸드폰 때문에 시끄럽거든요. 그래서 제가 핸드폰을 안 갖는 것도 하나의 애국이다, 공공장소에서 시끄러움을 덜어주는 것, 이런 것도 애국을 하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승욱: 오랜 시간 귀에 쏙쏙 들어오는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규항: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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