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숙·한양여대 교수
I. 들어가는 말
지난 2008년도 1월 29일 새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 실천 방안’은 대대적인 교원 확충과 교육과정 개편, 그리고 교육환경의 변화를 담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정규 영어교육에 획기적인 변화를 예고하였다. 인수위원회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누구나 기본 생활영어가 가능하게 하고, 사교육 없이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정책목표를 설정했다. 또한 “부모의 소득 격차와 지역 간 격차가 영어학습의 격차로 이어지지 않도록 농어촌 지역과 대도시 저소득층 지역에 우선 지원하겠다”며 “향후 5년간 약 4조원을 투입해 범부처적인 사업으로 추진하겠다”고도 밝혔다. 이 프로젝트는 발표되자마자 교육담당자들과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들을 포함한 대다수 국민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러나 영어교육의 효율성 제고는 물론 부모의 사회자본과 문화자본의 격차가 영어교육의 양극화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하는데 주력하겠다는 매우 바람직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 실천 방안’은 구체적인 집행계획이 제시되었다 뒤바뀌는 사례도 잇따랐다. 예컨대, 영어 과목은 물론 다른 과목까지 영어로 수업하는 ‘영어몰입교육’정책은 국민적 우려와 저항에 직면하여, 인수위원장의 이른바 ‘아륀지’ 발언에 따르는 구설수와 함께 발표된 지 일 주일 만에 백지화되는가 하면, 인수위원회의 사회교육문화분과위원회 간사가 영어능력 평가시험에 대해 “2015학년도부터 도입되는 말하기, 쓰기의 경우는 합격, 불합격으로만 평가하겠다”고 밝혀 등급제로 실시하겠다는 방침을 수정한 예가 대표적이다.
현실적으로 엄존하는 영어능력에 대한 요구, 이에 부응하고자하는 조기유학 열풍이나 치솟는 사교육비에 대한 범국민적 우려와 고통 등을 생각해볼 때, 영어 공교육에 4조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될 정책적 변화는 일단 환영받을 만도 하지만, 이에 대한 반응은 그러나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대체적으로 정책 취지나 기조에는 공감을 하면서도, 세부 정책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분분하여, 일선 교사들은 영어로 하는 수업의 현실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가 하면, 학생과 학부모들은 바뀌게 될 평가제도에 대한 불안감이나 잦은 정책 변화 일반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하였고, 모든 사람이 다 영어를 잘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영어교육의 목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정반대의 입장을 밝히고 나서서 이념논쟁으로 확대되는 경향마저 보인 바 있다1)
. 교총은 논평을 통해 “영어교사 심화연수 제공, 교원 양성기관, 영어교육과정 개편, 예산 확보 등의 구체적인 실행방안이 나온데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한 반면, 전교조는 “교육 불평등과 소모적인 입시 경쟁교육, 교육의 계층화를 심화시키고 학부모의 사교육 부담만 가중시킬 것”이라 하여 교육계 내부에서도 찬반양론이 대립되었다.
이에, 영어 공교육 논란과 관련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논평처럼, “과거의 관습이 있고 자기의 이해를 따지고 하니까 반대와 저항은 의례 있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닐지라도, 다시 그의 언급대로 “국가의 미래를 위해” 비판도 하고 반대도 하면서 이 프로젝트를 수정 보완하여, 성공적인 영어교육을 이끌어내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가 아닐까 한다. 이 글은 그러한 관점에서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 실천 방안(이하,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과 관련하여 부각된 몇 가지 문제점에 주목하고 이에 대해 간략하게 논의해보고자 한다.
II. 관련 논점: 무엇이 문제인가?
1. 비판과 논의와 대안들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인수위원회의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교육 내용을 개선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먼저 영어로 수업 가능한 교원의 확충을 위해 ‘영어전용교사’ 자격증제도를 도입하고, 현직 영어교사 심화연수를 실시하며, 교원 양성기관 영어교육 여건을 개선하고, 다양한 배경의 ‘영어전용보조교사’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영어 교육과정의 개편에 대한 내용인데, 이는 먼저 초등학교 영어수업을 주당 3시간으로 늘리는 한편, 중·고교의 말하기·쓰기 교육을 강화하며, 영어교과서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동시에 다양화를 통한 질적 제고를 꾀하고, ‘국가 영어능력평가’시험을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마지막으로 교육환경과 관련하여서는, 어린이 영어도서관을 확충하고, 영어전용교실, 영어체험센터 구축을 지원하며 정규수업 외 영어프로그램을 확대하고, 방송·인터넷 등의 활용으로 영어 친화적 학습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프로젝트 발표 이후 이들 실천 방안에 대한 각계의 반응이나 평가 중, 교과서의 질적 개선에 관한 방안이나 영어 친화적 교육환경을 구축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방안은 어떤 기조의 정책이 입안된다 할지라도 마땅히 보강되어야 할 교육 인프라에 속하는 것으로서, 효과적인 영어교육 (특히, 우리나라처럼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경우에 더욱) 바람직한 지원체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강화 방안에 대한 논의나 비판은 주로 교육내용의 질적 변화를 예고하는 영어전용수업 및 이를 담당할 교사의 양성 및 활용 체계, 교육과정 개편과 관련된 세부 방안, 그리고 평가제도의 변화에 집중되었다.
먼저 교육의 담당자와 대상이 되는 교사와 학생들의 우려와 논의는 충분히 예상되는 바와 같이 대략, 아직 모국어능력도 정비가 안 된 학생들에게 실시할 영어전용수업의 타당성 및 현실성, 영어 전용수업 준비에 따르는 교사 확충, 교사들의 부담감 및 재교육 필요성, 학습자들의 수준별 차이에 따르는 수업 진행의 어려움, 2013년도부터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배제될 영어 과목 평가를 대체할 국가 영어능력 평가제도에 대한 타당성 등에 대한 것으로 요약된다. 증가되는 영어 구사력 요구에 대한 피로감이나 거부감이 학생들 사이에서 표출되는가 하면, 이와 더불어 학부모는 이와 같은 강화된 방안이 영어전용수업 시행, 회화능력 신장과 평가제도의 전환에 방점을 찍음으로 인해, 이에 미리 대비하는 사교육이 오히려 추가로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사교육이란, 특히 근래에는, 본질적으로 학습자 간에(특히 최종적으로 대학입시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목적에서 다분히 비롯되었을 뿐 아니라, 사교육을 통한 무한 경쟁과 뿌리 깊은 선행학습의 관행을 감안한다면, 이 같은 우려는 충분히 예견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상의 우려를 비롯하여 여타의 교육론적 논의와 비판 및 발전적 대안 제시도 그간 교육·연구단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영어 공교육 강화방안 발표 직후 바로 이튿날, 전교조 대변인은 “인수위원회가 수요와 공급, 규제 완화의 시장 논리만을 적용해 전국 3만 여명의 영어교사에게 불안감과 소외감을 유발하고 있다”면서 “지금이라도 시장 중심의 교육정책을 버려야 한다”고 새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반면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기본적으로는 긍정적인 평가를 전제한 뒤, “그러나 기존 영어교사와 구별되는 ‘영어전용교사제’는 영어교사 양성·자격·임용 체계에 혼란을 줄 것이므로 학교 현장에 무리 없이 적용되도록 ‘영어전용강사’, ‘영어전용기간제교사’ 등으로 명칭을 바꾸고, 새 정부가 과욕을 보이기보다는 5년 동안 영어 공교육의 기초를 다진다는 자세로 추진”할 것을 주문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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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지난 3월 14일에 이화여대에서는 ‘영어 공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영미문학회 및 전국영어교사모임 등이 공동 주최한 학술대회에서도 새 정부 영어교육 정책에 대한 우려가 다각도로 표명된 바 있다. 먼저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외국인과의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수준의 영어구사력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는 인수위의 목표는 현재 730시간에 불과한 초·중·고의 영어 시간을 두 배로 늘린다 하더라도 교실 밖에서 영어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비현실적으로 높은 목표로서, 다시금 사교육 조장의 우려가 있으므로 기대수준을 낮출 필요가 있다”는 견해와 더불어 “조기교육의 효과도 미지수”이며, 더 중요한 문제는 “일상회화 구사능력보다도 전문분야에서 상당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라는 지적(서울대 이병민 교수)이 대두되었다. 또한 “영어공교육 강화를 위해 영어교육 전공자와 영어전공교수 등이 전문적 식견과 영어교육의 노하우를 일선 중고교 현장에 전달해야할 것”과 “원어민 강사의 효과도 검증 대상”이라는 견해, 그리고 특히 “대학의 영어교육목표는 일상회화 중심이 아닌 고급 학술영어가 되어야한다”는 견해(서울대 김명환 교수)가 피력되었다. 영어몰입교육에 관해서도 “외국어몰입교육은 매우 특수한 언어적 환경에서 실시되는 고비용 구조의 교육프로그램으로서, 자칫 모국어에 대한 존중심을 해치거나 영어를 글로벌 언어로 받아들이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주장한 견해(인하대 강지수 교수)도 있었다. 또한 평가와 관련하여, “우리 현실에서 고등학교의 영어교육을 정상화하려면 수능에서의 영어 과목은 존속시키되, 강화된 교육과정을 보다 충실하게 반영하도록 하고, 국가공인시험은 입시와 연계하지 말고 성인들의 영어능력 평가에만 반영해야 한다”3)
이상 이화여대 학술대회 내용은, Naeil News, 2008. 3. 17 보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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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등의 주장이 있었다.
이어 4월 25일에는 교육과학기술부의 후원 아래 한국응용언어학회를 비롯한 12개 영어교육관련 학술단체가 주최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는 이제껏 제기된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에 대한 우려와 관련하여, 초·중등 영어교육의 목표에 대한 반성적 고찰 및 영어수업의 증대가 초래하는 현실적 문제점에 대한 진단, 이에 수반되는 교원 양성 및 연수 및 지원에 관한 세부 정책 등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새 정책 보완 및 집행에 참고할만한 이론적·현실적 진단과 제언들이 많이 나왔다4)
글로벌영어교육학회 외(2008).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에 관한 심포지엄 자료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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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정부의 새로운 교육 방안에 부합하여 발 빠르게 정책 수립과 실행계획을 발표한 지방자치단체의 움직임도 눈길을 끈다. 서울시교육청은 최근 ‘서울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 추진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이르면 올해부터 서울 지역에 신규 임용되는 영어교사가 1년 간 시교육청이 실시하는 영어 심화연수나 국내·외 장기연수를 이수한 10년차 내외의 교사 가운데 선발된 지정된 선배 교사에게 수업 컨설팅을 받도록 하는 한편, 영어교사의 경력을 4단계로 구분하여 ‘연수 이력 데이터’를 구축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모든 국민적 관심과 논의와 비판, 그리고 제안들을 검토해보면, 최근 발표된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이 참으로 많은 논제와 어려움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표출된 많은 이견과 비판적 견해들을 조율하고 더 바람직한 발전적 대안을 모색하여, 국민과 국가가 원하는 영어 공교육의 최대치를 수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필자는 이에 새 정부의 영어 공교육 강화방안이 정책목표 수립과 교육 방법론 채택과 관련하여 노정시킨 문제점 몇 가지를 간략히 지적해보고자 한다.
2. 영어학습의 의미와 목표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누구나 기본 생활영어가 가능하게 하고, 사교육 없이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정책목표는 영어 공교육 강화방안의 핵심적 명제이다. 또한 초등학교 영어수업을 주당 3시간으로 늘리는 한편 중·고교의 말하기·쓰기 교육을 강화하고, 교사 확충을 위해 1조 7천억원의 국고지원을 통해 영어 과목을 위한 영어 전용 교사 2만 3천명을 2013년까지 신규 채용한다는 방침은 이 목표 달성을 위한 가장 핵심적인 실천 방안으로 꼽힌다. 여기에는 합격·불합격만으로 판정하는 국가공인 영어시험 실시라는 평가의 변화도 수반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일견 매우 획기적이고도 전향적인 정책과 실천 방안으로 보이지만 실은 한국에서의 영어교육에 대한 철학적·교육론적 성찰의 부족을 다분히 노정하고 있다.
먼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누구나 기본 생활 영어가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사실 새로운 교육 목표는 아니다. 이미 2009학년도 중·고교 신입생부터 적용될 제 7차 중등학교 영어과 개정 교육과정(교육인적자원부 고시 제2007-79호)에 따른 영어교육의 목표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영어를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의사소통 능력을 기른다. 아울러, 외국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여 우리 문화를 발전시키고 외국에 소개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새 정책의 요지는 영어교육의 실제를 개선하여 이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방법론적인 제고를 꾀하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방향은 옳다고 본다. 또한 사교육 없이도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한다는 야심찬 계획은 이미 고교 졸업생의 약 85%가 대학에 진학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공교육 강화 방안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목표로 들리지만,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누구나 기본 생활영어가 가능하게”되는 수준의 영어란, 영어의 기능별 영역과 그 숙달도(proficiency)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영어와는 큰 괴리가 있다. 그렇다면 기본 의사소통능력 달성은 영어 공교육의 최저 기대치이고, 그 이상을 달성하여 사교육 없이도 대학 진학이 가능한 교육을 최대 목표치로 잡는다는 것인가? 그렇게 이해를 한다 해도 이는 당락으로만 결과가 제시될 것이라는 국가 공인 시험 도입의 취지와는 상충한다. 이미 새 정부는 대학 입시 자율화를 정책으로 채택한 바 있는데, 전문적인 학술 영어를 읽고 쓰고 소화해야하는 대학교육을 위해 변별력 없는 시험 결과만 가지고 대학이 학생들을 선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학습자에게 이중적인 학습 동기와 별도의 노력을 요구하게 된다. 새 정부의 공교육 강화 방안은 다소 혼란스럽다. 이제껏 여러 비판과 논의가 있어왔으나 새 정부 정책이 가장 보완해야 할 부분은 무엇보다도 한국에서의 영어학습이 갖는 사회문화적 함의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공교육 강화 정책 실행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과정과 노력, 그리고 교육방법론에 대한 이해의 보강이라고 본다.
새 정부 정책은 우선 이른 바 ‘영어몰입교육’ 정책의 입안과 후퇴에서 교육론적 인식의 부족을 노정시켰다. 영어몰입교육이란 무엇인가? 널리 알려진 대로 몰입교육이란 1960년대 중반 주민들의 대부분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캐나다의 퀘벡(Quebec)주에서,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학생들에게 외국어인 프랑스어를 가르치고자 처음 실시된 프로그램이며(Genesee 1987), 이후 차츰 다양한 목표언어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중언어교육(bilingual education)의 한 형태로 자리잡아가게 된 언어교육 프로그램을 일컫는다(Cummins 1996). 이미 국내에서도 몇몇 학교가 자율적으로 이 를 시행하여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의 영어학습 열기와 영어몰입교육의 도입이 ‘세계화’, ‘시장주의’, ‘개인 및 국가 간 무한경쟁’ 등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세계정세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박휴용, 2006)는 지적을 상기해볼 때, 친시장주의적인 새 정부가 영어몰입교육에 관심을 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정책 입안에 앞서 이 프로그램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선행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이 프로그램의 공교육 도입과 관련하여 최근 박휴용(2008)이 자세히 고찰한대로, 현재 미국에서 이중언어교육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 잡은 몰입교육의 가장 주된 동기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소수언어사용자에 대한 배려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학생들과의 통합 교육, 그리고 학업성취에 있어서 기회균등과 다문화적 소양의 배양에 있다. 한국에서 시도되는 프로그램은 박휴용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것과는 달리, 언어학적 차이점이 큰 영어를 대상으로(언어독립모형), 모국어를 이미 습득한 상태에서(순차적), 비교적 늦은 나이에 영어몰입학습을 경험하는 것(만기적)으로, 한국적 상황에서 그 학습효과를 단언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사회문화적·정치경제적·언어교육적 관점에서 여러 문제를 내포할 수 있다고 한다5)
. 더구나 영어가 지배적인 미국사회에서조차 공교육 내에서 영어교육을 의무화하려는 시도나 그에 따른 영어몰입프로그램을 일선학교에 도입하고자 했던 과정에는, 언어교육상의 필요성이나 효과의 논의에 앞서 그 타당성에 대한 사회문화적·정치적 합의가 우선시되었다고 하는데, 새 정부의 정책발표에는 그 같은 과정이 생략되었다는 것이 필자가 보기에는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영어몰입교육정책은 대대적인 우려와 저항에 부딪혀 이내 철회되고 말았지만, 그 저항의 근본 원인은 우리가 다시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는, 수많은 요인이 관계되는 언어학습에서 목표언어에의 노출 효과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아닌가라는 학습이론적 측면에서의 회의, 현실적으로 학습자가 안게 될 인지적 부담이나 늘어날 학업 분량, 교육 담당자들의 수업 부담이나 관련 인프라 구축 등에 대한 부담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항에 직면한 정책입안 담당자들이 몰입프로그램의 가능성이나 효용을 설득시키거나 어떤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려는 노력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는데, 이것은 단지 국민 의사의 존중인가 아니면 그렇게 막대한 예산 집행의 계획까지 수반한 새 정책에 대한 신념 부족인가. 혹 몰입프로그램의 본질을 기존 외국어교육에서 직접교수방식(direct method)이 좀 발전된 형태 정도로 안이하게 인식하여, ‘영어구사력 증대 필요=영어노출의 기회 증대 필요=영어몰입교육’으로 귀결된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영어몰입교육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관련하여 또 하나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영어가 우리 사회에서 갖는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함의에 대해 새 정부 측이 드러낸 인식 부족이다. 몰입프로그램에 대한 저항에는 반드시 아직 준비되지 않은 학습자와 교사의 부담감만이 주요 원인이었을까. 필자의 견해로는 그 저변에는 영어의 확장으로 대변되는 언어적 제국주의(English linguistic imperialism)(Phillipson, 1992)에 대한 우려 역시 뿌리 깊이 깔려있다고 본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영어에 대한 태도에는 애증이 교차한다. 오늘날 제 1의 국제어로서 영어가 지니는 지위나 위세, 그리고 그 유용성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다. 한국의 초·중등 영어교육목표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은 원론적인 ‘의사소통도구의 습득’이나 ‘문화교류의 토대 마련’과 같은 외국어교육목표의 당위성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도 별로 없다. 굳이 여러 학자들의 이론(예컨대, Bordieu, 1991) 을 빌지 않더라도 영어는 이미 국제교류는 물론 사회의 각 영역에서 확고부동하게 문화자본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론에 앞서 이를 온 몸으로 실감한 많은 기성세대가 과열된 사교육과 조기유학으로 자녀들을 내몰며 그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는 반대편에는 또한 ‘누구나 영어를 다 잘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라는 식의 인식과 저항도 엄존한다. 이 같은 인식은 절대적 양의 지식이나 선진 기술에 대한 접근이 영어를 통해 가속화되고, 영어를 통한 다양한 문명이나 문화에 대한 이해 역시 세계화 시대에 개인의 지적·문화적 역량의 상승에 일조한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매우 안이하게 들릴 수도 있다6)
물론 이 같은 주장은 영어교육(넓게 보아 외국어교육 일반)의 당위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라 보다는 궁극적으로는 한국의 현실에서 대학입시를 향해 치닫는 초·중등교육 과정에서의 과중한 학습과 경쟁이 몰입교육으로 인해 배가될 것이라는 우려에 기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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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또한 “영어에 투자를 많이 하면 영어실력은 당연히 올라가겠지만, 영어만을 위한 그러한 투자가 과연 합리적인 선택인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며 “영어를 꼭 써야하는 사람 말고는 모국어 실력만으로도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데 중요하다”7)
시정곤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견해, 2008. 2. 19 뉴스메이커 762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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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견해도 상존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이 같은 인식의 기저에는 굳이 ‘민족주의’라는 거창한 이념을 들이댈 것도 없이 일반 국민이 현실 속에서 체감하는 ‘팩스아메리카나’나 소위 ‘coca-colonizaiton'에 대한 경계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영어가 이미 영·미인들의 손을 떠난 지 오래 되었고, 기본적으로는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라는 사회언어학적 사실은 아직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인식된 것 같지 않고, 따라서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영어교육이란 Pennycook(1994)의 언급대로 영어학습자의 주체적 사고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고에 도움이 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거나, 외국어를 통한 문화교육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남의 입장이 되어보게 하는 일(Kramsch, 1983)이라는 등의 명제에 대한 차분한 성찰은 어느 쪽 입장의 사람들에게도 기대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상의 갈등적 상황과 인식은 꼭 10년 전에, 당시로서는 매우 돌발적이고 급진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져 엄청난 파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소설가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1998)에 대한 논란의 와중에서 아주 명백히 감지된 바 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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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영어 공교육의 목표를 설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학적, 언어교육론적 고려 이상의 성찰을 요구한다. 그러나 새 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은 영어에 대한 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의 사회적·문화적·교육적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고, 국민적 합의에 도달하고자 하는 논의나 과정도 생략해버렸다는 데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지금이라도 논의를 더 활성화하고 중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능력을 어떻게 가르치고, 이에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며, 예산은 얼마가 소요될 지는 그 다음의 문제이며, 일단 목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 다음의 후속 정책 입안과 집행은 훨씬 설득력 있고 추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강애진(2008)에 따르면 영어 공교육이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나라들은 우선 국민들의 영어능력 향상이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사회 전체의 동의를 얻어 프로그램이 개발·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싱가포르, 핀란드, 노르웨이, 이스라엘, 터키, 말레이시아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영어구사력의 증대가 국가 생존과 관련되어 있는지의 문제부터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생존의 문제까지는 아니라도 국가경쟁력 제고와 어느 만큼의 상관관계가 있는지 입안에 앞서 추산이라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즉, 고취된 영어구사력이 과연 얼마만큼의 물질적·정신적 이득을 가져다줄 것인가에 대한 실질적 계산 - 비용과 이득의 분석(cost benefit analysis) - 은 언어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해야할 국가의 임무다. 이득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 조건 형성에 들어가는 비용을 넘지 못한다면, 혹은 이득이 비용을 초과해도 당장 우리가 그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거나 감당할 뜻(사회적 합의)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각에서 볼 때, 새 정책이 포함하는 향후 5년 간 4조 원, 영어전용교사 2만 3천명 채용에 1조 7천억 원, 2009년부터 매년 3000명의 교사 채용과 6개월 내지 1년 간 연수 등의 숫자는 막연하고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이와 더불어 국가적 차원에서 알아보아야 할 일 또 한 가지는 과연 우리가 국가 운영이나 경쟁력 제고를 위해 필요로 하는 영어구사력은 분야별·직능별·언어기능별로 어느 정도이며, 어느 정도의 인원이 요구되는지에 대한 추산이다. 이는 마치 범국가적으로 요구되는 교사나 의료 인력의 요구에 의해 사범대나 의대의 정원을 조정하는 일과도 같다. 이를 통해 영어교육의 목표와 내용이 다양한 트랙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는 인적 자원의 효율적 양성과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뿐 아니라, 날로 다양해지는 개인의 영어학습 동기나 목표에도 부합하는 길이다. 예컨대, 중·고교를 졸업하고 지방 소도시에 거주하며 작은 상점을 운영하며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과는 직접 대면할 일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개인과, 외국인을 대면할 일은 별로 없어도 영어 원서로 신 농사기법을 터득할 필요가 많은 농부, 그리고 장차 무역업이나 국제적 외교무대에서 일을 하고자 하는 개인에게 요구되는 영어능력은, 언어기능의 종류와 숙달도 면에서 결코 같은 수 없을 것이다. 공교육은 이들이 다양한 학습 동기와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과정 트랙을 제시해주는 방향으로의 최대공약수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누구나 다 영어를 잘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공교육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누구나 기본 생활영어가 가능하게 하고, 사교육 없이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것 이상의, 범국가적 차원에서의 다각적이고 진지한 고민과 연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정부 측이 “부모의 소득 격차와 지역 간 격차가 영어학습의 격차로 이어지지 않도록 농어촌 지역과 대도시 저소득층 지역에 우선 지원하겠다”고 하여, 영어자본에 의한 사회 양극화의 해소 의지를 밝힌 것은 공교육의 사명을 십분 이해한 것으로 보아 적극 찬동하고 지지한다.
III. 맺는 말
이 글은 최근 새 정부 인수위원회에 의해 제시된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에 대하여, 많은 논제 중에서도 주로 교육 목표 설정에 관해 간략히 고찰을 해 보았다. 기왕에 시작된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이 제대로 방향을 잡고, 국민적 합의하에 최소한의 시행착오를 거쳐 궁극적으로 성공을 거두려면, 비단 정책 입안자나 교육 담당자, 영어교육 이론가 뿐 아니라 학습자와 학부모까지 전 사회의 구성원이 사안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드높이고 중지를 모아야할 것이다. 앞 절에서 논의 되었듯이 외국어교육, 특히 한국에서의 영어교육이란, 개인의 행복은 물론 국가의 미래와도 밀접하게 연관된 교육적 행위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정치적이고 또한 경제적인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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