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주·한국방송공사(KBS)
아나운서
KBS 아나운서실에는 90여 명의 아나운서가 일하고 있다. 이 사실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대개 놀라는 표정으로 “그렇게 많아요?”라며 되묻는다. TV에 나오는 몇몇 아나운서와 스포츠 중계, 라디오 뉴스 진행 아나운서를 생각하면 한 30명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추측하는데, KBS는 TV 채널 3개에 라디오 채널 7개를 가지고 있다. 하루에 방송되는 뉴스 프로그램만 해도 100개 가까이 된다. 사람이 많고 일도 많아 새벽 3시 30분에 출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밤 1시 30분에 퇴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아나운서가 모여 밥이라도 한 끼 먹으려면 약속 시간을 새벽 2시에 정해야 할 정도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때도 철야근무자 1명은 빠지게 되니 아나운서 전체가 완벽하게 근무 시간을 피해서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없는 것이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매일 별별 일이 많이도 일어난다. 모 아나운서의 스토커가 방송국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어 007 작전으로 그 아나운서를 피신시키는가 하면, <6시 내고향>을 진행하는 아나운서 덕에 현지에서 직배송된 싱싱한 과일로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팬들이 보내오는 꽃바구니로 아나운서실은 늘 은은한 향기가 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 겪는 일 가운데 참 골치 아픈 것이 바로 전화받는 일이다. 요즘은 모두 휴대전화를 갖고 있어 개인적인 전화는 많이 줄었지만 팬이라며 아나운서를 찾는 전화, 택배로 물건이 왔다는 알림 전화, 우리말 상담 전화 등 종류도 다양하다. 또한 초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방송국 안에서 일하는 사람부터 학교 선생님들까지 전화를 하는 계층도 각양각색이다. 이 글에서는 전화 상담-엄밀하게 말하자면 상담이라기보다 ‘공영방송이 그래도 되느냐.’는 훈계를 담은 항의 전화를 사례로 해서 우리말 사용의 현실을 살피고자 한다.
1. 대한민국은 우리나라이다
“그 사람 박사 맞아요? 박사가 ‘저희 나라’라니. 쯔쯧……. 우리말 공부 좀 하라고 하쇼.”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람을 재는 자신만의 자를 가지고 있다. 구두를 닦는 사람은 앞에 가는 사람의 구두 뒤축만 보고도 그 사람의 성격과 경제적 능력까지도 가늠한다고 하던가…….
아나운서인 나는 사람의 음색과 표준어 사용 정도 등을 보고 그를 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제아무리 장동건이나, 전지현 같은 잘생긴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도 쇳소리가 난다거나 사투리 억양이 있는 경우, 그 사람에 대한 호감이 반으로 줄어든다. 100점에서 졸지에 50점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나운서들의 아내나 남편, 아이들까지도 대개 미성에 다듬어진 표준어를 구사한다.
몇 년 전에 그만둔 한 선배의 남편은 심한 쇳소리를 갖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많이 사용되기 전, 그는 아나운서실에 전화를 걸어 자기 부인과 통화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심하게 쉰 목소리로 ‘아무개 씨 좀 바꿔주세요.’하면 전화를 받은 동료 아나운서들 가운데 열이면 아홉이 그를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이거나, 심한 편집증 환자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는‘안 계십니다.’ 하고 끊어 버렸던 것이다.
시작이 길어졌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언어는 그 사람을 나타낸다. 음색이 조금 거칠어도, 또박또박 명확하게 발음하고, 표준어를 구사하며, 바른말을 골라 써야 한다.
방송에 나와 “아빠가 너무나 자상하세요.” 하며 자신의 남편 자랑을 하는 주부를 볼 때, “저희 나라는 아직 경기 회복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는 대학 교수를 볼 때 속으로 혀를 차게 된다. 주부 대상 아침 방송의 진행자는 출연자를 앞에 두고 “남편을 아빠라 부르지 말라”, ‘남편’ 혹은 ‘애들 아빠’로 부르라고 입이 아프게 가르치고 있다.
‘저희 나라’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왜냐하면 대개 식자층에서 이런 말을 쓰기 때문이다. 유명 대학의 교수, 무슨 경제 연구소 소장, 이런 사람들이 ‘저희 나라’라고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말하는 전문적 지식의 진위까지 의심이 된다.
남에게 자신을 낮추기 위해 쓰는 것이 ‘저’, ‘저희’ 등의 말이다. 다른 회사 사람에게, 다른 학교 사람에게, 남의 집 식구에게 쓰는 말이 ‘저희 회사에서는’, ‘저희 학교는’, ‘저희 식구는’ 이런 말이다. 말을 듣는 사람도 우리나라 사람이고, 말을 하는 당사자도 한국인인데 왜 저희 나라인가? 물론 겸손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덕목이다. 하지만 나라에 관한 한 낮춰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대한민국은 우리나라이다.
2. 직원이 사장실 전화번호도 몰라?
오전 9시 30분쯤 사무실 구석 자리에서 전화 벨소리가 울리는데 그쪽에 사람이 없어 돌려받았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50대 남자 같은데 받자마자 “KBS에서 방송 그렇게 해도 돼요? 공영방송 KBS가 말이야, 핸드폰이 뭐야? 핸드폰이……. 핸드폰 맞아요?” 하며 톤을 높였다. 그래서 “네, 핸드폰은 틀리고 휴대전화가 맞지요.” 하며 응대를 했다. 그러자 그분은 한 톤을 더 올려 “그렇지? 그런데 왜 TV에 나오는 아나운서들 하나같이 핸드폰이야? 공영방송에서 그래도 돼?” “네, 저희도 주의를 시키는데 워낙 일반적으로 많이 쓰기 때문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누가 핸드폰이라고 했나요?” 그러자 프리랜서로 방송하는 방송인의 이름을 대는 것이다. 그래서 “네, 그분은 프리랜서라서 저희가 따로 교육을 시키는 제도가 없습니다. 대신 제가 오늘 그분을 만날 일이 있으니 휴대전화로 고쳐 말하도록 선생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아니 그 사람 말고도 핸드폰이라고 하는 사람은 죄다 방송을 못 하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돼?” “예, 저희 아나운서실에는 그런 권한이 없어서……. 시청자 상담실로 그 내용을 강하게 전하시지요.” “아니야, 사장 좀 바꿔요. 사장한테 직접 말하게.” “네, 여기서는 연결이 안 되거든요. 교환에서 사장실을 연결해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자꾸 이리 걸라 저리 걸라 하는데 사장실 직통이 몇 번이야?” “제가 사장실 전화번호는 모르는데요. 교환으로…….” “아니, 직원이 사장실 전화번호를 몰라? 당신 KBS직원 맞아?” “선생님은 동사무소 동장 전화번호 압니까?”
모 방송인의 ‘핸드폰’ 발언으로 시작해서 동장 전화번호까지 참 어처구니없게 전화가 이어졌는데 전화를 걸어온 50대 아저씨의 분노(?)는 정말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이런 시청자 열 명만 있어도 혼탁하게 쓰이는 우리말이 조금은 바로 잡히지 않을까?
‘휴대전화’라는 한자식 표현은 맞고 ‘핸드폰’이라는 일본식 조어는 왜 틀리냐고 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휴대전화는 영어로 ‘모바일 폰(mobile phone)’이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영어를 가지고 자기네가 알아듣기 쉽게, 이해하기 쉽게 ‘hand(손)’에다 ‘phone(전화)’을 붙여 말을 만들었고, 핸드폰이라는 말이 ‘모바일 폰’보다 훨씬 쉬워 두루 쓰이게 된 것이다.
한자어에서 비롯됐지만 ‘휴대하다’는 말은 표준어다. ‘전화’ 또한 표준어이다. 그러니 휴대전화는 완벽하게 표준어고 또한 휴대전화의 외래어는 ‘모바일 폰’이다. ‘휴대폰’, ‘핸드폰’은 얼치기 말, 잘못된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진짜보다 얼치기를 좋아하니 어쩌겠는가? 일일이 쫓아다니며 입을 막을 수도 없으니, 이렇게 앉아 대신 욕이나 먹을 수밖에…….
3. 국어사전은 어디에
사실 띄어쓰기는 나도 가끔 헷갈려 옆에 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컴퓨터 교정도 보곤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 너그러운 편이다. 그러나 정말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며 당장 쫓아가 고쳐주고 싶은 경우가 있으니 바로 아는 체하며 목에 힘주느라 한자성어를 쓰지만, 쓰는 족족 틀리는 사람이다.
“에~, 오곡백화가 만발한 이 계절에~”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지 어쩌겠습니까?”
무슨 축사라든가 인사말을 하는 기관장들이 가을에 많이 쓰는 말이 바로 ‘오곡백화’이다.
오곡백과(五穀百果)가 맞는 말이다. ‘오곡(五穀)’이라는 것은 ‘쌀, 보리, 콩, 조, 기장’의 다섯 가지 곡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또 다른 뜻으로는 모든 곡식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오곡’은 ‘온갖 곡식’을 뜻하는 것이고, ‘백과(百果)’라는 말은 여러 가지 과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오곡백화’라고 쓰는 바람에 뒤에 ‘만발한~’까지 붙어버린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평양 감사’ 또한 너무도 당연하게 쓰이고 있는데 이 역시 많이들 잘못 쓰고 있다. 속담에 나오는 ‘감사’라는 말은 조선시대 지방의 경찰권과 사법권 그리고 징세권 같은 행정상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각 도(道)의 지방 장관을 일컫는 말로 ‘관찰사’라고도 부르는 직책이다. 조선시대에도 ‘평양’은 ‘도(道)’가 아니라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도시였으니 ‘평양 감사’라는 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평안도를 다스리는 직책이었으니 줄여서 ‘평안’이 맞는 것이다. 아마 ‘평양’과 ‘평안’이 발음이 비슷하다 보니 혼동한 것 같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공연히 문자를 쓰려다 망신당하지 말고, 알아보고 제대로 쓰자. 그런데 국어사전은 가지고 계신가요?
4. 입 운동 좀 합시다
사람은 누구나 이왕이면 편하고자 한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움직이는 것 그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특별한 목적-승부를 위해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살을 빼기 위해서, 친교를 위해서 등등의 목적이 있다. 몸 자체를 힘들고 피곤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걷고 일부러 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말을 하는 데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가능하면 입이나 입술, 혀, 어금니, 턱을 덜 벌리고 움직여 발음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대통령’을 발음할 때, 실제로는 ‘데통령’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ㅐ]보다는 [ㅔ]가 입을 좀 덜 벌리고 혀를 움직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나운서 중에도 혀와 입이 그냥 굳어버려 [ㅐ] 발음을 영 못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말의 표현 중에 이렇게 발음하기 어려운 모음을 틀리게 발음하는 경우가 여럿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날을 ‘쇠털같이 많은 날’이라고 일컫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새털같이 많은 날’로 잘못 쓰고 있다. 새의 털도 분명 헤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의 터럭’을 의미한다. ‘쇠’ 발음이 어려우니 뜻이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쉽게 발음할 수 있는 ‘새’가 돼 버린 것이다. 또한 글씨를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써놓은 모양을 ‘개발새발 그리다’라고 하는데, 고양이의 발과 개의 발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괴발개발 그리다’가 맞다. 한편 TV 사극에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선비의 등에 어김없이 얹히는 보따리, 그것은 ‘개나리봇짐’이 아니라 ‘괴나리봇짐’이다. ‘괴’의 발음을 입과 혀가 편한 쪽인 ‘개’로 바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편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 모두의 본능이다. 그러나 말에서만은 조금 수고를 하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우리말이 몇몇 모음이나 격음의 흔적만 남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5. 아는 척은 그만
“‘모하메트’가 도대체 누굽니까? 제가 중동 지역에서 십수 년 살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이슬람 성인인 그 사람을 정확하게 표기 하기 어렵지만 원음에 가깝기는 ‘무함마드’예요. ‘모하메트’ 그 촌스러운 말 듣 기 싫어요. 외래어표기법 그거 없애야 합니다.”
외래어표기법은 최근의 ‘오륀지’ 파동까지 참으로 오랫동안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이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원음주의’인데 이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그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곳에서 일정 기간 살다 온 분들이다. 이분들의 주장은, 그곳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발음하지 않으며, 그렇게 말하면 누구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분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바로 외래어표기법의 목적이다. 외래어표기법은 우리나라 사람끼리 서로 통하기 위해 정한 규범이다. 왜 현지인들의 귀를 의식해야 하는가? 물론 현지에서 쓰이는 음에 가깝게 하고자 노력은 하지만 규칙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끼리 통할 수만 있다면, 커피(coffee)가 촌스럽다고 ‘커히’로 해야 하나? 아니 ‘커퓌’? 이것도 아니고 ‘커휘’? 어딘가 어색하다. 그래서 아예 법을 없애자는 주장도 있다. 사실, 법이라는 것은 꼬박꼬박 지키기 어렵고 불편해서 ‘좀 안 지키면 안 되나.’ 하는 심리가 사람에게 있기에, 지키도록 강제하려고 만드는 것 아닐까? 저절로 다 잘 지키면 법은 있을 필요가 없다. 지키면 충돌도 막고 좀 더 많은 사람이 편해지니까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모범을 보여주는 것인데, 내가 못 지키고, 지키고 싶지 않으면 나쁜 법이고 그러니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혼동의 바다에서 건져주기 위해서라도 외래어표기법은 꼭 필요하다. 아무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면 발음에서 맘껏 보여주시라. 혀를 굴리든지, 입술을 깨물든지, 발음은 표기보다 허용이 가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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