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춘· 고려대 문과대 교수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다시 읽는다. 1954년 1월 1일 서울신문에 처음 연재된 이 소설은 우리 소설사상 맨 처음 10만 부 판매를 돌파한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어 있다. 대학교수 부인이 이웃집 대학생과 춤바람이 나고, 대학교수가 미군 부대 타이피스트와 연애를 한다. 이런 이야기는 곧 장안의 화제가 되어 신문은 날개 돋친 듯이 팔리고, 또한 문학의 도덕성 문제를 놓고 격한 논란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그만큼 이 소설이 사회적으로 첨예한 문제를 다루었다는 뜻이다. 춤바람, 미군 부대, 타이피스트, 연애, 우선 이런 말들이 새로운 유행어로 떠돌고, 또한 부정적인 의미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해방 이후 미군과 소련군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6․25와 함께 미군들이 이 땅에 주둔하면서, 우리 사회는 거센 양풍(洋風)에 휩쓸려야 했다. 한복이 양장으로 바뀌고, 춤은 댄스가 되어 남녀를 교란시키고, 건전해야 할 남녀 간의 어울림은 한낱 천박한 연애가 되어 가정을 파괴하였다. ‘자유부인’들의 그 자유가 방종으로 전락하자 전후 한국 사회는 급격한 타락상을 보인 것이다. 작가는 그 타락한 세태를 꼬집기 위해 「자유부인」을 썼다고 한다. 자유의 언어와 방종의 언어들이 그렇게 생겨났다.
“우리 집 양반은 돼지고기도 싫고 닭고기도 싫고 쇠고기도 꼭 너비아니라야 맛있게 잡숫잖아!”
‘너비아니’로부터 이 글을 시작해야겠다. 대학교수 부인으로 완고하게 안방을 지켜오던 가정주부 오선영 여사가 처음 화교회(花交會) 출입을 나선다. 오랜만에 만나보는 여학교 동창들은 반가운 정을 나눌 새도 없이 남편 자랑, 사는 자랑을 하느라고 바쁘다. 위 문장은 그 가운데 은행 중역 부인의 자랑에 해당하는 일부분이다. 그보다 먼저 세무서 직원 마누라가 자기 남편 자랑을 하느라고 한바탕 송이버섯을 들먹거렸었다. 그러자 이번에 중역 부인이 너비아니를 들고 나온 것이다. 남편 값을 높이는 데는 아무래도 송이버섯보다는 쇠고기가 낫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녀들의 남편은 세무서 직원이고 은행의 중역이었다. 그녀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 남편을 자랑할 때, 그러나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곧 흉이 된다는 것을 그녀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무엇이 흉인지 자랑인지도 모르고 자랑만을 일삼다가 결국 흉물이 되어버리는 인간 혹은 여인의 어리석음을 작가는 꼬집고 싶었는지 모른다.
너비아니란 ‘칼로 저미어 양념을 해서 불에 구운 쇠고기’를 일컫는다. 요즘 시중에서 즐겨먹는 ‘양념 숯불구이’가 그쯤 해당되는 말이지만, 너비아니는 너비아니대로 요즘도 많이 통용되는 말이다. 하긴 요새는 생등심의 ‘생’과 같이 양념을 하지 않고 ‘그냥’ 구워 먹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이때 ‘생’은 ‘날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양념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안심, 등심, 목심, 채끝, 양지머리, 홍두깨살 등등, 요즈음은 그 부위에 따라 이름도 각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가격도 비싸지 않거니와 누구나 즐겨 먹을 수도 있는 형편이다.
이에 비하면 1954년 당시 ‘너비아니’는 무척 희귀한 고기였다. 가격도 비싸거니와 쉽게 구해먹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너비아니를 ‘은행 직원들이 주인 양반 식성을 알고 넌지시 구해주기’도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단골 정육점에 ‘돈 십만 원을 미리 대놓고 배달을 시켜먹는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는다. 작가는 바로 그 허영된 세태를 꼬집고 싶은 것이다. ‘돼지고기도 싫고 닭고기도 싫고 쇠고기도 꼭 너비아니라야’라는 말이 그대로 허영된 세태를 반영한다. 요즘 시중에서는 쇠고기보다 닭고기를 좋아하고, 닭고기보다는 돼지고기를 더 선호한다고 한다. 그 시절 돼지고기와 오늘의 쇠고기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서로 맞먹으려고 하는 것 같아 세상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광우병 때문에 수입 쇠고기가 말썽이고, 조류 인플루엔자 때문에 닭고기가 수난을 겪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쇠고기가 말썽이구나, 생각해보는 것이다.
1954년 처음 「자유부인」이 연재되기 시작했으니까, 이 땅에 ‘자유부인’은 그해 처음 태어난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54년 전 일이고, 올해 나이는 54세가 되는 것이다. 그때 오선영 여사의 작중 연령은 35세였다. 2008년 올해로 89세가 되는 셈이다. 89세의 노할머니가 54년 전 35세적 자유부인을 돌아보는 감회가 어떠할까, 「자유부인」의 언어들을 통해 그 당시 사회를 읽어보기로 한다. 그해 35세이던 가정주부 오선영이 스스로 가정주부이기를 포기하고 ‘자유부인’을 선언하였다. 자유부인의 나이 한 살이 되는 것이다.
댄스는 나 같은 노인은 안 되겠지?
자유부인은 이와 같이 양춤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과 함께 탄생하는데, 그때 양춤은 우리에게 그냥 ‘춤’이 아니라 ‘댄스’였다. 새로 들어온 미국 문화를 여과 없이 통째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6․25 이후 우리 사회에 유입된 외래어는 대부분 이와 같은 선망과 호기심에 힘입어 태어났다. 그리고 그 ‘댄스’라는 말을 처음 입에 담을 때 그녀는 그녀 자신을 ‘노인’이라고 불렀다. 갑자기 새로 접하는 미국 문화를 젊은 문화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나 같은 노인은 안 되겠지?’라고 스스로 자신 없어 하는 물음을 던짐으로써 거꾸로 댄스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그것은 그 선망을 향해 던지는 도전장이기도 하다.
옷을 원피스로 갈아입고. ……어디선가 레코드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고, ……오여사는 불현듯 댄스 생각이 간절하였다. ……음악이 자기를 부르는 것만 같았고,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댄스만은 배워야 할 것 같았다.
1954년 당시 오선영이 직면한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미국식 현대화가 물결쳐 들어오던 시기였다. 그동안 인습의 새장 속에만 갇혀 지내던 오선영이 그해 1월 1일 마침내 자신의 완고함을 털어버리고 ‘자유부인’을 선언한 것이다. 갓 태어난 자유부인에게 세상은 온통 호기심 가득한 욕망의 거리였다. 욕망은 허영심을 자극하고, 허영심은 자유를 빙자하고, 자유는 방종으로 이어지고, 세상은 그런 식으로 자꾸만 혼탁해져 가는데, 작가는 그 방만한 자유를 꼬집기 위해 「자유부인」을 집필한다고 하였다. 그 당시 「자유부인」에 대한 작의(作意)는, ‘봉건주의 사회에서 자유 민주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가정적인 혼란상과 사회적인 부패상을 소설로 그려 봄으로써, 참된 민주주의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데 있었다. 다음에 열거하는 댄스와 관련된 숱한 외래어들도 그 점에서 오선영의 화려한 욕망을 꼬집는 말임에 틀림없다.
트로트/브루스/탱고/왈츠/지르박/룸바/스텝/퀵트로트/수로우,스로우,퀵퀵!/코오라탄스텝/크로샤스스텝/댄스파티/스커트/스웨터/샌들/원피스/핸드백/스타일/플레어외투/세트/와이셔츠/넥타이/퍼머넨트/포마드/마스코트
오선영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그녀가 전후 미국 문화를 향유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곧 자유를 누린다는 말과도 같다. 전통적인 가정에서 질서와 규범을 존중하며 살아온 그녀가 자신의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편입되고자 할 때, 자유는 그녀를 변명하고 옹호해주는 전폭적인 논리가 되어주었다. 작가는 그 점을 비난하고 싶어 한 것이다. 오선영의 자유도 작가의 눈으로 보면 방종에 해당한다. 오선영이 자유를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이해하고 실천하려 할 때, 작가는 오선영이 그것을 향유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 점에서 「자유부인」이 전후 혼탁한 세태를 꼬집기 위한 것이라면, 오선영은 그 작가에게 꼬집히는 대상이 되고만 셈이다. 이때 자유는 꼬집는 의미의 언어와 꼬집히는 의미의 언어로 구분되기도 한다.
오선영, 그에게 있어 대문 밖은 자유의 세계였다./자유라는 화장품으로 마음조차도 화장을 하는/진실한 자유라는 것은 거리를 걸어 다니는 여자들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서울 안에 살면서도 서울의 밤거리와는 너무나 인연이 멀었던 자신을 깨닫고/아내라는 명목으로 부엌에서 노예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에 세상은 몇 세기쯤 진보를 한 것만 같았다./그것은 무혈혁명이고 평화혁명이었다.
꼬집는 의미로서, ‘자유부인’의 자유는 일단 ‘대문 밖의 세계’와 ‘대문 안의 세계’로 구분된다. 또는 ‘얼굴’과 ‘마음’처럼 겉과 속으로 대비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대문 밖의 세계는 ‘거리’와 ‘서울’과 ‘세상’으로 대치되고, 대문 안의 세계는 ‘여자들의 마음’과 ‘서울의 밤거리’와 ‘부엌에서 노예 노릇’으로 대치되었다. 그 ‘안’과 ‘밖’을 넘나드는 자유가 곧 민주주의라고 오선영은 믿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봉이 그녀로 하여금 자유를 선언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무혈혁명’이고 ‘평화혁명’이다. 오선영은 자신의 민주주의를 시대의 요구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찾아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그녀의 자유를 작가는 방종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룻밤 외박쯤 무슨 중대사이랴, 각오만 하면 그 다음은 무제한으로 전개되는 자유의 세계였다./눈을 뜨면 양심의 구속을 받게 되지만, 눈만 감으면 그 다음은 자유의 세계였다./취직도 좋고, 댄스도 무방하다. 그러나 가정을 파괴하고 나서 무슨 빌어먹을 민주해방이란 말인가./오직 <나의 집>만이 유일한 자유의 세계요, 행복의 보금자리라고 생각되었다./진정한 자유가 자기 집 안방에 있는 줄을 모르고 거리에서 찾아보려고 했기 때문에,
꼬집히는 의미로서, ‘하룻밤 외박’과 ‘무제한으로’와 ‘눈만 감으면’과 ‘댄스도 무방하다’ 등은 대문 밖의 세계에 해당된다. 예컨대 방종의 언어들이다. 자유가 잘못되어 파생된 언어들이다. 이제 그녀에게 대문 안의 세계는 없었다. 다만 돌아가야 할 후회의 공간으로 ‘나의 집’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자기 집 안방’은 이미 그녀가 버리고 나온, 돌아가지 말아야 할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시 ‘안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잘못된 자유가 그녀를 ‘거리’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그녀로 하여금 거리에서 다시 안방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도록 종용한 자유는 어느덧 꼬집힘을 당할 수밖에 없다.
미국 문화의 유입이라는 점에서, ‘자유부인’이 근대와 현대의 교차 지점에 서 있음은 앞서 설명했거니와, 묵은 언어와 새로운 언어가 혼재하던 시기에 작가가 의도적으로 새로운 언어에 집착을 보인 것은 이 소설이 거둔 큰 성과였다. 작가의 노력에 힘입어 「자유부인」은 이와 같이 젊고 활기찬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근대소설이 일본의 한반도 진출과 때를 같이 하여 탄생하였고, 그것이 일제 36년 내내 그 시대가 제약하는 언어 상황 속에 살아야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해방이 되고, 전쟁을 겪고, 미국이 상륙하고, 그것은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함께 겪은 근대소설의 경험과는 현격하게 다른 현대소설의 체험이었다. 해방된 지 십 년 만에 정비석의 「자유부인」이 그 일을 해낸 것이다. 임무에 걸맞게 작중인물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도 한글과 관련된 인물을 선택하였다. 장태연 교수는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한글학자였다. 이 점에 대해서도 작가는 이 소설이 ‘봉건주의 사회에서 자유 민주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가정적인 혼란상’을 그리려고 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그 때문에 남녀 주인공도 ‘사회의 정신적인 지표인 대학교수 부부라야 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세태 꼬집기라는 주제를 위해서라도 대학교수는 적절한 설정이지만, 여기에 한글학자를 곁들이고 보니 작가의 의도가 더욱더 뚜렷해지는 것을 알겠다.
장 교수는 동저고리 차림이었다. 직장에 나가니까, 출근할 때는 양복을 입겠지만 집에 와서는 늘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더러는 한복 두루마기 차림으로 출근할 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그만큼 한복과 양복을 겸하여 입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글학자이자 대학교수인 장태연은 유난히도 그의 한복 차림이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장 교수는 동저고리 바람으로 밥상머리에서 조간신문을 읽고 있다.
‘동저고리’란 남자가 입는 저고리를 일컫는다. 저고리는 저고리라도 대부분 조끼를 받쳐 입기 때문에 그것은 ‘조끼 딸린 저고리’ 또는 ‘조끼’ 자체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동저고리는 ‘동옷’과 같은 말이다. 동옷을 한자로 쓰면 ‘胴衣’가 되는데, 동의(胴衣)의 그 ‘胴’은 팔, 다리, 머리 부분을 뺀 몸의 등걸, 즉 ‘몸통’을 의미하는 한자이다. 소매가 없이 몸통만 남은 옷, 그래서 ‘동의’는 조끼란 말이 된다. 그러나 이때 ‘동저고리 바람’은 저고리 없이 그냥 조끼만 걸친 상태는 아닐 것이다. 집 안이라고는 하지만 안방에서조차 맨몸에 조끼만 걸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은 ‘두루마기를 입지 않고 갓을 쓰지 않은 상태, 말하자면 방안에서 그냥 저고리에 조끼를 받쳐 입고 있는 차림새’일 뿐이다. 의관을 정제하지 않고도 가장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정복 차림, 그것이 곧 ‘동저고리 바람’이다. 저고리에는 대개 겹저고리가 있고 핫저고리가 있다. 핫저고리란 ‘솜’을 두어서 만든 저고리로서 겨울옷을 일컫는 말이고, 겹저고리란 솜을 빼고 다만 홑에 안을 넣어서 겹으로 만든 저고리로서 봄가을로 입는 옷을 일컫는다. 그때가 마침 가을인 것을 보면 장 교수의 동저고리는 겹저고리였을 것이다. 그 ‘동저고리’에 ‘바람’을 붙여 쓰는 것이 흥미롭다. ‘동저고리 바람’의 ‘바람’은 ‘몸에 차려야 할 것을 차리지 아니하고 그냥 나서는 차림 또는 행색’을 의미한다. 뜻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 ‘바람’ 앞에는 대개 남녀 간의 의상과 관련된 말들이 붙는 것을 보게 된다. ‘동저고리 바람에 고무신을 신은 채’라든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파자마 바람으로’ 등이 그래서 나온 표현들이다. 이밖에도 ‘바람’의 쓰임새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유별났던 것 같다.
댄스 바람이 우리 집 안방에까지 불어 들어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생들은 시험을 본다는 바람에 한동안 왁자지껄 떠들었지만,
남편이 요새 바람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십만 원이라는 돈을 댓바람에 빌려주던 과거지사와,
‘댄스 바람이 안방까지 불어 들어왔다’는 그 ‘바람’은 우리가 일상에서 늘 접하는 ‘기류의 움직임’ 바로 그것이다. 전에는 없던 미국 춤의 열기가 뜨거워지자 세태 인심에도 기류 변화가 일었고, 그 기류가 미국 문화로 비유되어 우리 집 안방까지 불어 닥쳤다는 말이다. ‘시험을 본다는 바람에’의 ‘바람’은 ‘무슨 일의 결에 따라 일어나는 기분’을 나타낸다. 미리 작정한 일이 아니라, ‘얼떨결에 그만’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셈이다. ‘남편이 바람이 났다’는 그 ‘바람’은 어떤 ‘들뜬 마음이나 짓’을 의미하고, ‘댓바람에 돈을 빌려주었다’는 그 ‘바람’은 앞에 ‘댓’자가 붙어 원래 바람의 의미가 사라진 경우이다. ‘신바람’이 신나는 바람이라고 해서 ‘댓바람’이 대나무 바람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일에 당하여 맨 첫 번으로’라는 뜻이다. ‘댓바람에 돈을 빌려주었다’는 그 말은 그래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당장 빌려주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자유부인」의 언어들은 이와 같이 작가의 세심한 배려와 선택에 힘입어 적재적소에 배치되고 활용됨으로써 저마다 생명력을 발휘하였다. 독창적이면서도 낯설지 않게 실감을 불러일으키는 개념들, 그것이 정비석의 소설적 언어이고, 그 언어에 힘입어 「자유부인」은 화려하게 빛나는 것이다.
솜반대기같이 하얀 구름/아주 개차반/초아흐레 으스름 달빛/소리판도 좀 많이 가져오구/치맛귀에 바람이 풍겨 넘실/쇠고기, 닭고기 같은 육부치는 말할 것도 없고/머리가 쑥새둥지 같이 어지럽게/코빼기를 비춰야지!/여름살이 옷이 세 벌씩이나/그의 버르장머리가
‘솜반대기’의 ‘솜’은 ‘목화씨에 달라붙은 물질로서 흰 광택이 나고 부드럽고 가벼운 섬유질’이다. 여기에 ‘반대기’는 ‘가루를 반죽한 것이나 삶은 푸성귀 같은 것을 편편하고도 둥글넓적하게 만든 조각’이다. 전혀 다른 두 사물이 결합하여 ‘솜반’이라는 새로운 사물이 탄생하는데 ‘솜반대기’는 솜반의 속어이다. ‘솜반’은 ‘솜돗에 펴서 잠이 자게 만든 반반한 솜의 조각’을 말한다. 내친 김에 보충 설명을 하자면, ‘솜돗’은 ‘솜반을 짓는 데 쓰는 돗자리’로서 ‘솜조각을 그 위에 놓고 펴서 두르르 만 다음에 잠이 자게 밟는 것’이고, ‘잠’은 ‘여러 겹으로 된 물건이 떠들썩하게 부풀지 않고 가라앉은 상태’를 의미한다. ‘솜반대기’란 말 하나만 가지고도 이렇게나 많은 단어의 이합집산이 가능하다니, 정비석의 언어 구사가 여간 창의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개차반’은 ‘개가 먹는 차반 즉 똥’이란 뜻으로 ‘행세를 더럽게 하는 사람’에게 욕으로 하는 말이다. 이밖에도 ‘초아흐레’, ‘소리판’, ‘치맛귀’, ‘육붙이’, ‘쑥새둥지’, ‘코빼기’, ‘여름살이’는 모두 일상에서 자주 듣는 말들이지만 사전에도 실리기 어려울 만큼 창의적인 조어(造語)에 가깝다.
장태연 교수의 연구 영역인 ‘철자법 간소화 문제’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하고 끝을 맺어야겠다. 다시 「자유부인」의 시작 부분을 조금만 소개하자면, 장태연 교수는 그때 한글학자였다. 때마침 ‘철자법 간소화 문제’에 대한 문교 당국의 담화가 발표되었다. 장 교수는 지금 그 담화문이 게재된 신문을 읽고 있는 중이다. ‘육이오 동란이 일어났다는 신문 호외에도 놀랄 줄을 모르던 그였지만, 한글에 관한 일이라면 일 단짜리 신문기사에도 천하가 뒤집히는 듯한 중대성을 느끼는 사람’이 장태연 교수이다.
이때 ‘철자법 간소화 문제’란, 당시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거리가 되고 있던 ‘한글簡易化方案’이라는 실제 사건이었다. 이른바 1954년의 ‘한글波動’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사건의 전말을 들어보면 이러하다. 1953년 4월 ‘현행 철자법의 폐지와 구식 기음법(記音法)의 사용’이라는 총리 훈령이 발표된다. 물론 반대의 여론에 부딪쳤고, 그러자 정부는 문교부 국어심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풀어쓰기를 채용하라’고 결론을 짓는다. 이어 대통령의 지시로 1954년 7월 3일 ‘한글簡素化案’이 공포되는데, 내용은 ‘ㄱㄴㄹㅁㅂㅅㅇㄺㄻㄼ’의 10받침만 쓰던 1921년 ‘언문철자법’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언어정책이 1921년으로 환원한다는 건 퇴보를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한글簡素化案’은 치열한 반대에 부딪쳤고, 이에 ‘한글 간소화방안 이유편’을 발표하게 된다. 문제는 국회로까지 비화되고, 국회는 토의와 공청회를 계속하기에 이른다. 대통령은 강행하겠다는 뜻의 담화를 발표하고, 정음파는 대한언문화연구회를 발족하는 등 혼미가 거듭된다. 1955년 9월 마침내 민중이 원하는 대로 하라는 뜻으로 대통령이 명령을 철회하고, 사태는 학자들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설명한 대로 「자유부인」은 1954년 1월 1일부터 그해 8월 6일까지 신문에 연재된 기록을 갖고 있다. 문교부의 ‘한글簡素化案’이 같은 해 7월 3일 공포되고 국회 공청회를 벌이는 등 사태가 심각해졌으니까, 그리고 보면 「자유부인」의 ‘철자법 간소화 문제’도 그해 한글파동과 맞물려 벌어진 실제 사건임에 틀림없다. 「자유부인」에서 이 사건은 ‘문화파동’으로 불리고, 똑같은 모습으로 장태연 교수는 국회 공청회에 나가 반대 발언을 연출한다. 그 당시 많은 한글학자들처럼 장 교수도 ‘철자법간소화안’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여기 장태연 교수의 반대 발언을 요약해 본다.
첫째, 이번 간소화 안은 문법을 무시한 점이 잘못이다. 문법을 무시하고 어간과 어미의 구별을 깨뜨려 놓았다. 머리와 몸뚱어리와 팔다리를 구분하지 않고 한데 뭉쳐놓은 꼴이다. 말은 법에 따라 배우고 깨우치는 것인데, 법을 무시하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외워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렇게 되면 일생을 배워도 제 나라 말을 다 배우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그건 간소화가 아니라 오히려 복잡화이다.
둘째, 말과 글은 대중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체이다. 따라서 그것은 과학적으로 연구를 거듭한 연후에 대중의 지지를 얻어서 실시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간소화 안은 몇몇 사람이 그것을 맘대로 뜯어고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언어의 생리와 생명력을 무시한 ‘언어의 학살 행위’이다.
「자유부인」이 연재 시작부터 끝까지 당시 정부에서 시행하는 국어정책과 때를 같이 하여 쓰여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대중의 지지를 얻지 않고 만들어진 관제 국어정책에 대하여, 작가는 소설로써 그 잘못을 비판하고 바로잡고자 했기 때문이다. 「자유부인」이 이와 같이 작가의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사랑에서 나온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새로운 미국 문화의 범람으로 인하여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혼재하던 시기에 정비석은 유난히 새로운 언어에 집착하였다. 그것이 대중소설이니, 부도덕한 소설이니 하는 논의는 접어 두고라도 그가 구사한 전후 한국 사회의 새로운 언어들, 그것들을 채집하고 활용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소설이 거둔 성과는 지대하다.
참고 문헌
정비석, 「자유부인」, 서울: 고려원, 1985.
김민수, 「국어정책론」, 서울: 탑출판사, 1984.
이희승, 「국어대사전」, 서울: 민중서관,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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