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홍·문학평론가 ·
경희대 교수
요즘 즐거움이나 위안을 찾아 우리 현대시를 읽거나 읽으려고 하는 분이라면 오히려 피곤함과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즘의 많은 시가 지나치게 요설적이고 난해하며, 때로 수식이 과다하여 허풍 또는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는 모습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새로움을 추구하며 시도하는 모더니즘의 낯설게 하기 기법이 오히려 식상하고 진부한 느낌을 주는가 하면, 주의ㆍ주장이 요란하여 중압감을 주거나 화장이 짙어서 경박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뒤집어 말해서 요즘 시에는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깊고 고요한 사색이라든가 맑은 예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뜻이 되겠다. 그런 가운데 올해 제20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작인 김초혜의 시집
『사람이 그리워서』는 고요한 명상과 깊은 사색, 그리고 오늘을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 맑은 지혜와 통찰을 보여주고 있어서 관심을 환기한다. 말하자면 60~70년대 민중시를 넘어서, 다시 80~90년대 해체시, 실험시 전성시대를 지나서 오늘날 21세기에 도달한 현대시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소중한 한 방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1. 흐름의 시학, 시간의 존재론
먼저 그의 시에는 흐름으로서의 삶, 즉 시간의 존재론이 지속적으로 표출된다. 비교적 소박하고 단순한 것 같은 표현 속에 철학적인 탐구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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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빨리 흐르라고
떠밀지 않아도
낙엽 한 잎 띄우고
강물은
사정없이 흐른다
―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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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한 생애
일출과 일몰 사이
그리워 그리워서
모란은 지고
시간이 온 그때부터
시간의 끝인 그때까지
이렇게 자꾸만 서러운 것은
모란이 지는 탓만은 아니리
― 「짧은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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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세월에 치여
육신의 수레는 낡고 헐어도
마음길은
붉은 꽃으로
천리를 간다
― 「오늘」 |
우선 그의 시는 시어가 그리 많지 않으며 수사가 별로 없고 형태 또한 소박ㆍ단순한 것이 특징이다. 인용시들에서 보듯이 시행이 짧고 연이 간단명료하며, 전체적인 시 형태 또한 간결하다. 그만큼 시적 사유와 상상력의 전개에 있어 과욕을 부리지 않고 침묵의 시학, 여백의 미학을 지향하고 있다는 뜻이 되겠다. 그러면서도 내용 면에서는 넓이 그리고 깊이를 확보하고 있어 만만치 않은 시적 저력을 느끼게 해 준다.
먼저 시 ①에서는 삶의 본질을 ‘흐른다’라는 동사와 ‘낙엽’, ‘강물’로서 꿰뚫어 본다. 누가 떠밀지 않아도 강물은 흘러가기 마련이다. 시간 그리고 인생 또한 그렇지 않은가? 강물의 흐름,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낙엽처럼 피었다가 시들어 사라져 가는 것이 바로 삶의 모습이며, 생명 있는 것들의 본질이라는 뜻이 되겠다. 그야말로 시간 속에서 태어나 시간 위를 강물처럼 흐르며 살아가다가 시간 밖으로 사라져 가는 생의 본성을 꿰뚫어 본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강물은/ 사정없이 흐른다”라는 결구로서 생명 있는 것들, 나아가서 만상에 있어 시간의 존재론을 탐구하고 있는 것은 의미 있는 통찰이라고 할 것이다.
시 ②에서는 이러한 시간의 존재론이 더욱 선명하게 제시된다. 그것은 한 생애가 “일출과 일몰 사이”에 피었다가 지는 안타까운 모습이며, 그러기에 그것은 본질적인 면에서 슬픈 것, 허무한 것이라는 운명론적 인식이 제시된 것으로 이해된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이나 해가 뜨고 지는 것이 모두 만상의 이치이고 우주의 섭리라는 시간적 존재론을 형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삶은 그리움과 서러움이라는 양면성, 갈등성과 모순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그러기에 시 ③에서는 육신의 길과 정신의 길이 분리되어 인식된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육신의 길은 유한한 것이지만 마음의 길, 정신의 길은 그것을 뛰어넘어 존재하며, 영원 속에 존재할 수 있다는 존재론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이 근본적으로는 생물학적 존재이지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참뜻은 순간 속에서 영원을 살고, 영원성 속에서 참의미와 가치가 드러날 수 있다는 확신을 제시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환기한다.
2. 생명: 피고 짐, 나고 죽음이 결국 하나
그렇다! 모든 생명, 나아가서 모든 존재는 현상적으로는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지만 그 본성은 만법귀일, 즉 모두가 하나로 귀일된다. 불교적으로 보면 불성(佛性)이고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영생(永生)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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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햇볕이
봄꽃을 피우고
봄의 꽃이
겨울의 햇볕을 고이게 하듯
봄이 오고 봄이 가고
한때는 그도 산 사람이었고
언젠간 나도 죽은 사람이다
― 「생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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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핀 꽃도
나중 핀 꽃도
모두 다 지는 꽃이라
그대가 어제 피운 꽃 한 송이
오늘은 내게 와서 지고 있다
― 「편지」 |
인용시들에서 그것은 꽃이 피고 지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시인은 꽃이 피고 지는 모습 속에서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으로서 사랑의 법칙을 읽어내고, 다시 나고 죽는 것으로서 인생의 원리를 파악하고, 나아가서 생성되면 소멸하는 것으로서 만상의 원리 또는 대자연의 이법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겨울의 햇볕이/ 봄꽃을 피우고/ 봄의 꽃이/ 겨울의 햇볕을 고이게 하듯”과 같이 모든 것은 우주의 크나큰 인과율에 지배되는 것이며, 그러기에 “봄이 오고 봄이 가고/ 한때는 그도 산 사람이었고/ 언젠간 나도 죽은 사람이다”와 같이 삶과 죽음,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가 한가지라는 생사일여(生死一如),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말 그대로 모든 생명은 삶 앞에서 평등한 것이며 모든 존재자는 높낮이가 없이 평등한 것이어야 한다는 불교적인 세계관을 극명하게 표출하고 있는 데서 이 시의 의미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만큼 많지 않은 시어와 간결한 시 형태, 그리고 단순ㆍ소박한 이미지와 상징으로서 삶의 본성을 꿰뚫어 보고 존재론적 초월을 이루고자 하는 데서 김초혜 시의 넓이와 깊이가 담보된다는 뜻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먼저 핀 꽃도/ 나중 핀 꽃도/ 모두 다 지는 꽃이라”와 같이 태어나는 자나 죽어가는 자, 산 자나 죽은 자 모두가 자기 앞의 생, 유한하고 허무한 것으로서 목숨 앞에 평등한 것이고 죽음 앞에 평등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고 대자연의 크나큰 섭리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3. 사랑 또는 삶, 소유인가 존재인가?
그의 시집에는 삶의 핵심이자 원동력으로서 사랑에 관한 성찰이 집중적으로 제시돼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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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그대가
그림 속의 불에
손을 데었다 하면
나는 금세
3도 화상을 입는다
마음의 마음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화상을 입는다
― 「마음 화상(火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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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소리를 내면 깊은 강이 될 수 없다
―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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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서로 의지하지만
소유하지 못하기에
가까이 다가가도
처음대로의
간격은 남는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밝을 때는 밝음을 더하고
그리울 때는 그리움을 더하며
― 「동반자」 |
사랑이란 무엇이던가? 생명이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표징이며, 생명을 생명답게 만들어주고 움직일 수 있게 해 주는 근원적인 우주 에너지가 아니겠는가? 이 점에서 김초혜의 시는 현대시사에서 사랑 시학의 한 전형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연전에 인구에 널리 회자되던 베스트셀러 시집
『사랑굿 1ㆍ2ㆍ3』 연작시가 그 실제적인 예가 될 수 있으리라. 인용시들에는 사랑의 본성과 원리가 잘 표출돼 있어 눈길을 끈다.
먼저 시 ①에서 사랑은 ‘마음의 마음’으로 제시된다. “그대가/ 그림 속의 불에/ 손을 데었다 하면/ 나는 금세/ 3도 화상을 입는다”라는 첫 연에는 사랑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고 삶의 원동력이기에 그것은 모든 우주만물의 운행 원리이고 대자연의 섭리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누가 화중지병(畵中之餠), 경화수월(鏡花水月)이라고 했던가? 사랑은 세상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원리이고 지배하는 섭리이기에 그것은 그림 속의 불에도 데일 수 있고 화상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폭발력과 연소력을 내재한다. 아울러 “마음의 마음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화상을 입는다”와 같이 삶을 지배하고 이끌어 가는 근본 에너지로서 작용하는 것이며, 마음의 마음, 즉 생명의 본질이자 생의 에센스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분명하다. 사랑은 현실적인 삶의 추동력으로서 생의 에너지인 동시에 생명의 정수이고 진실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시 ②에서 사랑은 이미 만들어진 것, 완성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만들어 가는 것, 형성돼 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담겨 있다. 아울러 그것은 외면이나 현상에 머물거나 그것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생의 아스라한 깊이, 즉 본질과 연결되어 내면화되고 심화돼 가는 데에 참뜻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 ③에서는 삶이 그러한 것처럼 사랑의 본성이 근원적인 면에서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놓여지며, 양이 아니라 질에 놓여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림 속의 떡을 먹을 수 없고, 거울 속의 꽃을 꺾을 수 없듯이, 물속의 달 또한 누가 건져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물에 비친 달, 즉 월인(月印)을 해인(海印)이라 하고 나아가서 마음의 마음, 즉 심인(心印)이라고 하지 않던가. 삶이, 사랑의 참뜻이 바로 ‘마음의 마음’, 즉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있으며 그것을 참되게 누리는 일에 놓여진다는 점을 확실하게 강조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4. 세태 풍자와 인간 회복을 위하여
그의 시가 끊임없는 자아성찰을 통해 삶의 내면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가치 있는 삶의 길을 추구하는 까닭에 그의 시에는 세속적인 삶 또는 상투적인 삶에 대한 풍자로서 비판 정신이 지속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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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지성과 재능은
넘쳐납니다
양심과 도덕이
모자랍니다
― 「이 세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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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남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의로운 일에는 눈을 감는다
어른 아이 없이 물질로 대한다
남을 속이는 지략을 몸에 익힌다
어제의 친구도 적이 될 수 있다
― 「부자가 되는 방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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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먹기만 하고
잠만 자는 사람
교과서나 개괄서만 읽고
경외심이 없는 사람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이웃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
남을 가엾다 여기면서
자신이 가여운 것을 모르는 사람
― 「장애인」 |
다소 어눌하다거나 지나치게 단순․소박한 것으로 여겨지는 그의 시에는 오늘 이 시대의 삶에 대한 날카로운 자기비판 또는 섬세한 풍자가 여러모로 제시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시 ①에는 오늘의 현실적 삶이 지식과 지성, 기술과 재능은 넘쳐나지만 양심과 도덕, 윤리와 감성이 모자라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만큼 기계화, 자동화, 물량화, 상품화, 기능화로 나날이 인간적인 따뜻함을 잃어가고 비정화해지는 세태 현실을 풍자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시 ②도 마찬가지이다. 날로 심각해지는 비인간화, 비인격화, 물량주의화의 현실 속에서 이해타산과 권모술수에만 길들여져 가는 오늘의 삶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눈앞의 이익을 얻는 일이라면 쉽게 등 돌리고 배신을 일삼는 세태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에 해당한다.
시 ③에서는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에서 가치 있는 일이고 바람직한 방법인가 하는 데 대한 고뇌를 드러낸다. 무위도식하는 사람, 삶에 대한 외경심이나 진지함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사람, 제대로 나와 남을 사랑하지도 참되게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 그리고 인간에 대한 자비심과 연민을 느끼며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장애인이라고 치부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 회복, 생명 회복을 강조하고 있는 까닭이다. 「꼴불견 세상」, 「세상은 요지경」, 「정치가」, 「어떤 우화」 등 여러 편의 시에서 이러한 세태 비판 또는 현실 풍자가 지속되고 있음을 본다.
그러기에 그의 시는 천심(天心)으로서 본래의 인간성, 또는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순수한 것으로서 동심(童心)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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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만큼 먹고
잘 만큼 잔다
태어날 때의 마음
그대로 자란다
어린이는 만물의 어버이
― 「천심」 |
이러한 천심으로서 본원적 인간성의 회복, 동심의 강조야말로 오늘날 온갖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서 삼독(三毒), 그리고 과도한 집착과 애착, 원착(怨着)으로서 삼착(三着)에 찌들어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참된 인간성 회복과 생명성 회복을 요구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겠다.
사실 이러한 인간성과 생명성 회복 및 실현을 위한 몸부림이야말로 이 땅의 시인들이 시를 쓰고 시적인 삶을 실천해 가려는 가장 분명하고도 소중한 이유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소리 높여 현실 비판이나 사회참여를 외치지 않는다 해도 이미 그 속에 만뢰일묵(萬雷一黙)으로서 침묵의 함성이 담겨 있다면 그것이 바로 바람직한 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5. 마음의 형태, 또는 일체유심조
따라서 김초혜의 시는 세상만사, 인간의 온갖 영위가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는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로서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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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이
어디라 없이 피어난
한 송이 꽃이라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가는 하루의
일이고
세월의 흐름을 잊고
입 벌려 웃으니
남도록 봄이 온다오
― 「마음먹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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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거나
꽃이 아니거나
바람이거나
바람도 아니거나
지우거나
그려내거나
천만 가지 마음의 형태다
빛이거나
어둠이거나
― 「마음의 형태」 |
그렇다.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경지에서 보면 세상일은 모두 하나의 꽃, 즉 세계일화(世界一花)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남녀노소, 빈부귀천 등 세상의 온갖 차별상을 넘어서서 바라보면, 세상 즉 우주는 그윽한 한 송이 꽃으로 볼 수도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가는 하루의 일”일 수밖에 없는 오도(悟道)와 달관의 경지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세월의 흐름을 잊고/ 입 벌려 웃으니/ 남도록 봄이 온다오”라는 결구에서 보듯이 마침내는 시간과 공간도 넘어선 깨달음의 경지에서 ‘참 나’를 깨치고 ‘참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 자명하다. 말 그대로 마음 하나 어떻게 먹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질과 인간의 가치가 판별될 수 있다는 뜻이 되겠다.
그렇게 본다면 “꽃이거나/ 꽃이 아니거나”라든가 “바람이거나/ 바람도 아니거나” 하는 온갖 분별심, 차별상도 넘어서게 되고 마침내 “지우거나/ 그려내거나// 천만 가지 마음의 형태다”라고 하는 참다운 깨달음의 세계 속으로 다가가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빛이거나/ 어둠이거나”와 같이 속세의 온갖 미혹과 차별상의 세계를 넘어서서 정신의 집중과 통일을 얻게 되고 마침내 화엄의 정신세계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6. 맺음말: 참 나를 찾아서ㆍ고요와 울림의 시학
따라서 그의 시편들은 이번 시집에서 하나의 연화장 세계로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지난해의 시집
『고요에 기대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모습을 보여 준 것으로 이해된다. ‘고요의 시학’이 깨달음의 세계로 심화되면서 ‘울림의 시학’을 이루어 가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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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와 사이가 좋아지니까
사소한 것도 아름답다
나이를 못 따라가면
후회와 탄식이 쌓이고
너무 앞질러 가면
길잡이를 잃는다
― 「진정한 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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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제 보니
고요함 속에서
꽃이 피고
꽃이 지는구나
― 「연꽃 노을」 |
그렇다! 시력 40여 년 인생 6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또 시집
『떠돌이별』, 『사랑굿 1ㆍ 2ㆍ3』, 『어머니』,
『섬』, 『세상살이』, 『그리운 집』,
『고요에 기대어』 등 여러 시집들의 온갖 번민과 오뇌를 넘어서서 이윽고 시인은 “나이와 사이가 좋아지니까/ 사소한 것도 아름답다”라는 관조와 달관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아, 이제 보니/ 고요함 속에서// 꽃이 피고/ 꽃이 지는구나”처럼 시의 개안, 인생의 개안(開眼)을 성취해 가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된다.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이고, 시를 읽는 궁극적인 의의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그것은 ‘참 나’를 발견하는 길이고 온갖 정신의 난관들을 극복하고 초월해 가면서 교감과 조응으로서 정신의 구원, 사랑과 평화의 길에 이르고자 하는 안간힘이라고 말해 볼 수는 없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김초혜의 시 세계는 이제 하나의 절정기에 이르면서 동시에 새로운 도전과 모색을 시도해 나아가야 하는 하나의 운명적 시점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시가 시인 스스로는 물론이고 그의 시를 읽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희망, 구원과 평화를 심어 줄 수 있는 보다 더 넓고 높은 세계로 나아갈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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