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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순화는 국어 풍요가 되어야 한다

이남호ㆍ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1

  우리말의 우수성은 널리 인정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적어도 겉으로는, 우리말에 대한 자부심과 큰 사랑을 보여 준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도 하고, 외래어 및 외국어의 범람을 걱정하기도 하면서 국어 사랑이 곧 나라 사랑임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국어에 대한 자부심은 그 근거가 막연하고, 국어에 대한 사랑은 그 태도가 불성실한 것 같다. 일상생활 속에서 실제로 우리말이 대접받는 모양새들을 보면, 우리말은 천덕꾸러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자는 주장에는 펄쩍 뛰지만, 영어 조기 교육은 당연시하고 아이들의 혀 수술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우리말은 논리에 어긋나거나 규범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정치가나 교수들에서부터 어린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말을 제멋대로 하고 글을 함부로 쓰면서, 우리말을 사랑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의 실천은 열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열정만으로 부모의 병을 낫게 하고, 자식의 됨됨이를 올곧게 하고, 조국의 번영을 기약할 수는 없다. 사랑이 바라는 궁극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의외로 냉정한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라는 말은 사랑에 필요한 냉정함을 강조한 속담이다. 우리말 사랑이나 그 실천으로서의 국어 순화 운동도 마찬가지다. 우리말에 대한 열정적 사랑이 물론 바탕이 되어야겠지만, 그와 아울러 냉정한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막연하게 우리말이 최고라 여기는 것이나 옹졸한 국수주의가 국어에 대한 지순한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은 지혜로운 사랑의 방식이 아니다.


2

  우선 한국어가 정말 우수한 언어인가에 대해서 냉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국내외 학자들이 인정하는 한국어의 우수성은 문자 체계의 우수성 혹은 제자 원리의 우수성일 것이다. 한글의 제자 원리가 매우 과학적이고, 아름답고 효율적인 질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자랑할 만하다. 그러나 섬세한 차이나 깊이 있는 사유 또는 감각적인 다양함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아직 빈약하며, 언어를 정확하고 아름답고 세련되게 사용할 수 있는 수월성 그리고 그런 점을 존중하려는 언어 환경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한국어의 현실이 아닌가 한다. 달리 말하면, 한국어는 하드웨어는 훌륭하나 소프트웨어는 빈약한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한글이 지닌 표현의 역사 또는 소프트웨어 개발의 역사가 보잘것없다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우리말은 수천 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지만,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거의 전적으로 한문으로 표기되었다.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지적이고 관념적이고 공식적인 내용은 한문으로 표기되었고, 극히 사적이고 일상적인 내용만이 드물게 국문(한글)으로 표기되었다.
  한글이 우리말의 적극적인 표기법이 된 지는 불과 1세기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일제 강점기의 굴곡을 거쳐 50여 년 전부터 비로소 한글은 표기 수단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확보했다. 이러한 대강의 역사만 생각해 보더라도, 고급한 지적 사유나 세련된 감각 그리고 미묘한 마음 상태나 정황 등을 표현해 내는 능력을 갖추기에는 그 표현의 역사가 너무 일천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나라의 언어가 얼마나 다양하고 강력한 표현력을 지닌 우수한 언어인가를 판단하려면 그 언어로 쓰인 저술의 수준과 방대함을 살펴보면 된다. 특히 훌륭한 문학 작품을 많이 산출한 나라의 언어는 그만큼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지닌 지적 유산 가운데서 한글로 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대부분이 20세기 이후의 것이며, 문학 분야는 그나마 유산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다. 오늘날 우리말이 이만한 면모를 지니게 된 것도 근대 이후, 적극적으로 한글로 글을 써 온 훌륭한 선배 문인들의 공이 크다. 그러나 여타 선진국의 언어들과 비교할 때, 한글로 쓰인 저술들의 질과 양은 빈약하고 그 전통은 일천하다. 높은 지성과 세련된 감성은 안정된 문화적 환경에서 나온다. 근대 이후 우리 사회는 그런 문화적 세련을 추구할 여유가 없었고, 따라서 그런 것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 노력도 적었다. 한글은 그만큼 이 세상의 온갖 것들을 표현해 본 경험이 적은 것이다. 대륙 간 미사일과 달에 갔다 오는 우주선을 만든 오랜 경험을 가진 나라의 과학 기술력과 소총과 자전거를 만든 경험밖에 없는 나라의 과학 기술력이 차이가 나듯이, 위대한 사상가와 시인들을 많이 가진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언어의 표현력에도 큰 차이가 난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데 가장 필요한 지혜와 노력은, 폭넓고 고급한 표현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지혜와 노력일 것이다. 표현력이야말로 언어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것이며 나아가 한 민족의 지적 문화적 수준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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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흔히 국어 순화라는 말로 우리말을 잘 가꾸어 나가자, 또는 좋은 언어로 발전시키자는 국어 사랑의 실천적 의지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희승 편 국어대사전에 보면, 순화(醇化)라는 말의 뜻은 “잡스런 것을 떼어 버리고 계통 있고 순수한 것으로 만듦.”이라고 되어 있다. 또 국어 순화라는 항목에는 “비속한 말이나 저열한 유행어 등을 삼가게 하고 바르고 아름다운 말을 사용하게 하는 일.”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러니까 ‘국어 순화’라는 말은 우리말에서 비속한 말이나 불순한 말들을 줄여 나간다는 뜻을 강하게 지닌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국어 순화 운동은, 비속어 쓰지 않기와 순수 우리말 즐겨 쓰기에 치중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속어 쓰지 않기와 순수 우리말 즐겨 쓰기는 국어의 발전을 위한 노력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국어를 순화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은 국어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국어는 깨끗이 사용하고 아껴서 사용하면 되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국어는 살아서 움직이는 한 나라의 바탕 문화이다. 그것은 사용하기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혼란에 처하기도 한다. 국어는 우리나라의 바탕 문화이어서, 국어를 잘 발전시키는 일은 우리나라 문화의 토대를 튼튼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언어를 학생에 비유한다면, 언어 순화는 학생의 두발과 복장을 단정하게 만드는 것과 흡사하다. 두발과 복장의 단정함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교육의 목적인 것은 아니다. 교육의 목적은 학생이 훌륭한 인격과 건강한 신체 그리고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언어의 순화도 중요하지만, 언어가 세련되고 아름답고 뛰어난 표현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국어 순화를 위한 노력은 국어 발전을 위한 노력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단순히 단어 차원에서 어떤 단어나 표현은 쓰지 말자고 강조하는 것은 대체로 근시안적인 주장이다. 문장을 세련되고 정확하게 쓰는 것, 단락을 조리 있게 구성하는 것, 글의 전체적 통일성과 논리성을 잘 갖추는 것 등등 한마디로 말해서 좋은 글을 쓰는 것이 곧 국어 발전을 위한 더 근본적인 노력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어 운동가보다, 국어교사보다 훌륭한 문필가가 국어 발전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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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의 국어 순화 운동은 말 그대로 불순한 것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운동으로, 배제의 원리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즉 어떤 말들은 쓰지 말자는 것이 국어 순화의 내용이요 형식이었다. 그러나 배제의 원리에 입각한 국어 순화 운동은 국어를 풍요롭게 만들기보다는 국어를 빈약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특히 외래의 어휘나 어법에 대해서 지나친 거부감을 가지고 그것들을 무조건 배척하며 순수 우리말을 강조하는 태도는 국어 발전에 심각한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이미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는 ‘입장’이나 ‘상호’라는 말도 일본식 한자어이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또 ‘식사, 만찬, 조찬’ 등의 말을 모두 사용치 말고 ‘밥’이란 말만 사용해야 건강한 우리말이 되고, ‘조우(遭遇), 해후(邂逅)’ 등의 말 대신 ‘만난다’는 말만 써야 우리말을 바로 쓰는 태도라는 주장도 있다.
  나는 여기서 우리말이 숨쉬는 마지막 자리를 아이들의 말과 글에서 찾고 싶다. 아이들의 말이 거치니 어떠니 해도 아직은 어른들 말같이 병이 들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밥이면 밥이라 했지 식사란 말은 안 쓰고, 더구나 조찬이니 만찬이니 하는 따위 말은 모른다. 만난다고 했지 ‘조우’니 ‘해후’니는 안 쓴다. ‘-에의’ ‘ -에로의’ ‘ -에 있어서’ 따위도 쓸 줄 모르고, ‘그녀’도 안 쓰고 ‘보다’를 어찌씨(부사)로 쓰는 일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른들이 쓰는 말을 아이들이 따라 쓰게 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말을 거꾸로 어른들이 배워야 한다.47)
  물론 ‘친구를 만나서 놀다가 왔다’고 하면 될 것을 ‘친구를 조우해서 놀다가 왔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또 ‘조기등산회’보다는 ‘새벽등산회’가 더 친근감이 가는 표현이기는 하다. 자연스러운 우리말을 잘 살려서 쓰는 일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사용하는 기층 어휘들만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말의 표현력을 유치한 수준에 머물게 하며, 우리말의 어휘를 매우 빈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만남’이라는 좋은 우리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버려 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조우’나 ‘해후’ 같은 어휘를 억지로 우리말에서 추방해 버리는 일도 어리석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어휘나 표현을 사용해도 되는가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말의 표현력을 얼마나 풍부하게 하는가이다.
  ‘만남’이라는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 왜 ‘조우’나 ‘해후’ 같은 말을 써야 하는가라는 문제 제기는, 각각의 어휘들이 가진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거의 같은 뜻이라 하더라도 ‘만남’을 써야 할 경우가 있고, ‘조우’를 써야 어울리는 경우가 있다. 어휘가 다양하면 그만큼 표현의 섬세함을 얻을 수 있다. ‘배’라는 우리말이 있다고 ‘항공모함’이나 ‘선박’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일본식 한자어이건, 중국식 한자어이건 표현에 편리하다면 사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어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우리말이 원래 가졌던 아름다운 어휘를 대체해서 소멸시키는 외래어가 아니라면 외래어라고 해서 기피할 이유도 없다. 가령 ‘먹골’이나 ‘구름다리’를 ‘묵동’이나 ‘육교’로 대체해 버리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말의 어휘를 늘리는 일이라기보다는 우리 것을 버리고 외래의 것을 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의 언어도 토박이말로만 된 언어는 없다. 우리말도 토박이말에만 의존한다면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지시력과 표현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다. 문화가 발전하고 지식이 발달한다는 것은 곧 어휘가 풍부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어린 학생이 지력이 높아지면 그만큼 어휘가 늘어난다. 사막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낙타와 사막에 관한 놀랄 만큼 세분화된 어휘를 많이 지니고 있으며, 추운 곳에서 생활하는 에스키모 사람들은 얼음에 관한 많은 어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풍부한 어휘를 가진다는 것은 고급한 언어가 되는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 일반적으로 공부의 많은 부분은 말을 배우는 공부이다. 달리 말해 말을 통해서 어떤 개념이나 현상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수많은 어휘를 안다는 것이 그 사람의 유식함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언어가 풍부한 어휘 수를 지니는 것은 그 언어의 고급한 수준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표현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식 표현이라거나 번역식 표현을 사용한다고 비난하는 것을 종종 본다. 가령 ‘-에 다름 아니다’ 같은 표현은 번역 투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어투를 너무 빈번하게 사용하거나 함부로 사용하는 글을 만나면 거부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번역 투라고 해서 절대 쓰지 말아야 한다거나 또는 무조건 나쁘다는 주장은 곤란하다. 번역 투 문장이라도 잘 다듬어서 적재적소에 쓰면 우리말의 풍요에 기여할 수 있다. 어디서 온 말이나 어투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왔건 간에 사용하는 사람이 잘 사용해서 우리말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5

  순수성을 지키자는 뜻은 좋으나 현실적으로 그 좋은 뜻을 살리기는 쉽지 않다. 순수성에 대한 고집은 흔히 배타성과 결합하여 쇠퇴의 결과를 낳을 확률이 높다. 역사적으로 우수한 문화는 순수를 지킴으로 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외래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사정은 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영어가 세계어의 지위를 얻게 된 데에는 언어 외적인 사정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외적 사정을 고려치 않더라도 오늘날 영어라는 언어는 막강한 표현력을 지닌 세계 최고의 언어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영어는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외래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오늘날 세계 최고의 어휘수를 자랑하는 언어가 되었다.
  영어는 특히 다양성의 미덕을 찬양하기에 적절한 언어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수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대륙에 왔다가 영어에 아무 것도 보태지 않고 떠난 집단(혹은 이미 있었던 집단)은 없다. …… 영어는 우리 주변의 많은 유용한 언어들을 차용해 옴으로써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다. 영어는 수백 개의 산, 강, 마을 그리고 지역 등의 이름들을 미국 인디언 언어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모든 언어들에서 차용했다. 우리는 은어(slang)를 통해 또한 많은 말들을 만들어냈다.48)
  영어가 얼마나 많은 외래어들로 이루어진 언어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미국인들의 먹을거리를 잠시 훔쳐보기만 해도 된다.
  스프는 프랑스어에서, 치즈는 라틴어, 버거는 독일어에서, 호박은 미국 원주민 인디언으로부터, 샐러드는 네덜란드에서, 차는 중국에서, 체리는 독일에서, 파이는 아일랜드에서, 와플은 네덜란드에서, 바나나는 아프리카에서, 커피는 아랍에서, 칠리는 스페인에서, 후추는 인도에서, 쿠키는 네덜란드에서, 칠면조는 아랍에서, 그레이비소스는 프랑스에서, 간장은 일본에서, 콜라는 미국에서 각각 유래했다.49)
  실제로 영어의 어휘는 수많은 다른 언어의 어휘를 빌려 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영어 사전에서 순수 영어 어휘(순수 영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만을 골라낸다면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영어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외래의 언어들을 받아들여서 오늘날 풍부하고 다양한 표현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현재도 영어의 이러한 포용력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노래방’이라는 어휘도 받아들이고, 일본의 ‘쓰나미’(지진해일)라는 어휘도 받아들인다. 얼마 전 인도양에서 발생한 해저 지진의 여파로 동남아시아 해안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우리에게도 ‘쓰나미’라는 어휘가 익숙한 외래어가 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에서 그렇게 ‘쓰나미’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 언론에서 ‘쓰나미’라는 일본어를 받아들였을 것인가 의문이 간다.
  배제의 원리에 입각하여 순수를 주장하는 태도는 문화의 차원에서도 언어의 차원에서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동종 교배의 위험성과 취약성은 문화와 언어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어가 발전하기 위해서도 외국어와 접촉이 많아야 한다. 우리말의 어휘 수준은 고급 언어에 크게 못 미친다. 표현력도 마찬가지이다. 고급한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어휘의 수도 많이 늘어나야 하고 또 표현의 가능성과 세련성도 한층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 잘 사용되지 않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발굴해 내서 널리 사용케 하는 일도 해야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뻔하다. 그보다는 표현력을 높일 수 있는 외국 어휘들을 적극적으로 빌려 와 우리말이 되게 하고 또 우리말 안에서도 새로운 어휘들을 개발해 내어야 할 것이다. 어휘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표현법이나 어법의 차원에서도 외국의 좋은 방식들을 적절하게 수용해서 우리말에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일본식 표현이니 일본식 한자어니 중국식 한자어니 해서 현재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어휘들을 몰아내자는 속 좁은 주장은 이제 그만 해야 한다.


6

  우리말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참으로 지켜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말의 순수성이 아니라 우리말의 규범일 것이다. 다시 한번 영어의 예를 들면, 그 누구도 영어의 순수성을 강조하지는 않지만 영어의 규범을 함부로 무시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매달리고 있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영어의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은, 한마디로 영어 어휘와 영어의 규범을 얼마나 잘 아는가를 측정하는 시험이다. 영어는 규범이 튼튼하고 또 그 규범이 존중됨으로써 오늘날 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세계어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말과 글의 규범 즉 문법은 아직도 불안정한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비교적 큰 규모의 개정이 최근까지 자주 이루어졌음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의 개정이 낭비에 가까운 시행착오나 혼란이었는지 아니면 필요하고 적절한 과정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문법에 맞는 국어 사용에 혼란과 불편이 적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동안 우리말의 규범에 대한 존중이 약했던 데에는 이러한 규범 자체의 불안정성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상식적인 규범이 너무 무시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언어 사용 현실이 아닌가 한다. 적절치 못한 단어나 표현을 쓰는 것, 통사적 규칙을 무시한 것, 논리가 맞지 않는 문장을 쓰는 것 등등 소위 ‘말이 안 되는’ 말이나 글이 너무나 많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반성적 인식도 대체로 희박한 실정이다.
  그러나 시인은 감정을 엄격히 ①규제하고 있다. 즉, 그 감정을 ②생경하게 노출하지 않고 절제하고 있는 것이다. …… 이 시에서는 슬픔을 ③오히려 절제하고 있다. 그 슬픈 감정까지도 ④객관적 태도에서 묘사하는 것이다. 슬픔의 감정을 나타내는 말은, ‘슬픈’과 ‘외로운 황홀한’ 정도인데 그것도 ‘차고 슬픈 것이 어린다’는 말로 ⑤객관화되어 있다.
  이 글은, 고등학생들에게 정지용의 <유리창>이라는 시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글의 일부로 참고서에 실려 있는 것이다. ①에서 규제란 법이나 규정으로 제한하는 것을 뜻하므로 ‘감정을 규제한다’라고 쓰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②에서 ‘생경’이란 익숙하거나 자연스럽지 못하고 낯설고 딱딱한 것을 뜻하므로 ‘감정을 생경하게 노출한다’는 말도 어색하다. 또 ③의 경우 ‘오히려’라는 부사가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다. ④는 ‘객관적으로’ 또는 ‘객관적 태도로’라고 써야 한다. ⑤의 경우, “차고 슬픈 것이 어린다”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슬픔의 감정이 객관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처럼 어법에 맞지 않는 글이지만, 이런 글에 대한 문제 제기나 반성은 별로 없다. 우리는 말의 규범을 별로 존중하지 않고 대강 무슨 말인지 짐작할 수 있는 정도의 글이라면 어법에 어긋나더라도 용인하는 데 익숙하다.
  여러 연구소들은 한국의 통일비용을 3~6천억 달러, 즉 약 250~500조 원으로 추산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엄청난 부담이다. 그러나 그런 ‘경제 부담’ 보다 더 큰 것이 교육도 포함하는 여러 사회 통합의 과업에 필요한 ‘정신 부담’일 수도 있다. 준비 부족으로 이런 과업 수행에 미진할 경우, 그것은 다시 통일의 와해나 내란, 아니면 흔히 말하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쉬 외침을 초래하는 약체 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한국사에서 통일과 통일 과업 속에서 교육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
  이 글은 우리 교육계의 저명 학자가 쓴 글이며,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는 글이다. 그렇지만 조금 주의해서 살펴보면, 문장이 어색하거나 어법에 맞지 않는 곳이 여럿 보인다. 특히 밑줄 친 부분이 그러하다. 언어의 규범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국어 순화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와 아울러 이 글이 지닌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읽는 이에게 미적 쾌감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의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아름답고 세련되게 쓰인 문장이나 글은 읽는 이에게 미적 쾌감을 준다. 유명 문인들의 아름다운 문장들뿐만 아니라 훌륭한 사상가들이나 과학자들이 쓴, 사유가 명쾌하게 표현된 글들은 스스로 아름다움을 지닌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미적 쾌감을 주는 글은 좀처럼 없고, 불쾌감을 주는 너저분한 글만 많은 것처럼 생각된다.
  국어 발전에 평생 큰 기여를 했던 저명한 국어학자가 ‘국어사전’의 첫머리에 쓴 ‘감수자의 말’마저도 그런 생각의 안에 있다.
  앞서 본인은 ‘국어대사전’을 편찬한 데 이어, ‘포켓 국어사전’ 감수의 임무를 맡아 본 일이 있거니와, 사전은 우선 간명하고도 광범위하여야 되며, 알찬 가운데 간편함을 잃지 말아야 하고, 복잡한 속에서 본연의 순수성을 지녀야 할 것임은 본인의 사전 편찬에 임하는 확고한 신념이다. 이제 ‘엣센스 국어사전’의 감수를 또 맡음에 있어, 그 빈틈없는 면밀성과 상호 유기적인 연락, 그리고 일사불란의 체계에 경탄의 마음을 금치 못하면서, 이 사전이 보다 좋은 사전이 되게 하기 위하여, 편찬 당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갖 성의와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자부하는 터이다.
  이 사전이 빛을 보게 됨에 있어, 아무쪼록 우리 언어 생활에 이바지되고 유효하게 적응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국어사전은 국어의 발전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문화 발전 전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위 필자는 국어사전의 편찬 또는 감수를 통해서 좋은 국어사전을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하셨겠지만, 그러나 ‘감수자의 말’이 보여 주는 글의 품격과 내용과 수준은 크게 실망스럽다. 글을 쓸 때 분명하게 가다듬은 생각도 없이 국어를 함부로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국어사전의 첫머리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는 것은, 우리 국어 순화 운동의 수준과 우리 국어의 전반적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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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언어의 수준은, 심원하고 미묘하고 독창적인 관찰, 사유, 감정 등등을 폭넓게 그리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표현해 본 경험을 갖고 있는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광범위하고 섬세한 표현력이다. 훌륭한 표현력은 아름다움까지도 거느린다. 그 언어가 지닌 표현력이 훌륭하게 발휘된 언어 표현은 자연히 품격과 아름다움을 지니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국어 순화는 국어 풍요가 되어야 한다.
  국어 풍요를 위한 국어 순화 운동은 크게 두 가지를 지향해야 할 것 같다. 첫째, 배제의 원리를 버리고 포용의 원리를 채택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많은 어휘와 표현법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 것의 순수성에 매이지 말고 더 과감하게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어의 표현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일본어건 중국어건 아랍어건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 이모티콘까지도 현재의 언어 규범에 복종하면서 국어 표현력을 확장하는 것이라면 용납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단어 차원에서 문장, 단락, 글의 차원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단어 차원에서 국어를 아름답게 가꾸려는 노력은 한계가 분명하다. 국어가 발전하려면 좋은 문장과 좋은 글이 많이 씌어야 한다. 독창적인 내용이 간명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문장과 글이 크게 존경받고 지저분하게 쓰인 문장과 글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될 때, 진정한 국어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하게 쓰인 글이라면 단어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 토박이 낱말들을 되살려 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문장과 글을 바르게 쓰는 일이다. 외래어와 외국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일보다 어법에 맞지 않거나 너저분한 글을 쓰는 일이 훨씬 부끄러운 일이며, 좋은 글을 쓰는 것이 곧 국어 발전에 이바지하는 일이라는 인식을 널리 확산시키는 국어 순화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