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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김석향ㆍ이화여자대학교 통일학연구원  

1. 시작하는 말

  이 글은 분단 이후 북한 당국이 추진해 온 우리말 다듬기 운동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또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은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의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새터민(북한 이탈 주민)20) 에게 사회심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작성하였다. 굳이 새터민의 시각에서 이 작업을 시도하는 이유는 남쪽의 우리가 향후 어떤 관점에서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을 평가해야 하는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이 전개되어 온 과정과 그 사회심리적 의미를 고찰하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한 가지 있다. 다름이 아니라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이란 구체적으로 그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논의한 뒤 말 다듬기 운동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 새터민 등 이 땅 한반도에 뿌리를 둔 채 서로 동질적인 속성을 강하게 지녔으면서도 동시에 이질적인 면모도 지니고 있는 ‘한국인’21)   내 소집단 각각에 대해 북한의 말 다듬기 운동이 사회심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 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다른 자료와 함께 새터민 면담 내용을 논리적 전개에 꼭 필요한 근거로 폭넓게 활용하였다. 다만 이 글에서 활용하는 새터민 면담 자료가 이번에 새로 조사한 자료 이외에 앞서 다른 연구를 위해 수집한 내용도 있다는 점을 밝혀 두고자 한다. 이 글에서 활용한 면담 자료는 필자가 2002년 8월~10월과 2004년 9월~10월, 각각 다른 목적으로 35명씩 면접 조사를 실시했던 결과물과 이번 연구를 위해 2005년 2월에 5명을 대상으로 면접 조사를 통해 습득한 내용이 함께 섞여 있다.22)   특히 이번 연구에 앞서 2005년 2월에 면접 조사를 시행할 때에는 면접 대상자인 새터민들이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그 실체에 대한 논의

  우리가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 문제가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실체를 파악해 두는 것이 앞으로 통일 한국의 언어 정책을 확립하는 첫걸음이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지금까지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논의한 자료를 본 기억이 없다. 다만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이라고 하면 외래어와 한자어를 우리말 단어로 바꾸어 사용하는 현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23)
  이런 추측을 하는 근거는 통일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와 주요 언론사의 누리집(home page)은 물론이고 초·중·고등학교 수업 시간과 방송 매체에서 남한 말/북한 말 항목을 구분하여 ‘아이스크림’과 ‘얼음보숭이’, ‘원피스’와 ‘달린옷’, ‘도넛’과 ‘가락지빵’ 등 단어 비교표를 제시하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간혹 이런 현상에 지나치게 빠져든 나머지 언어란 마치 유기체적 생물체와 같아 생성·성장·소멸의 변화 과정을 겪는다는 사실을 잊은 채 북쪽에서 예외적으로 몇몇 사람이 사용했거나 또는 한때 널리 퍼졌던 일이 있으나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표현까지도 남쪽에서는 북한 말로 여기고 열심히 공부하려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얼마 전, 필자에게 초ㆍ중ㆍ고 교과서 편집 실무자 한 분이 전화를 한 뒤, 북쪽에서는 겨울을 ‘겨울’이라 하지 않고 ‘동삼’이라고 한다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질문한 일이 있었다. 어디서 그런 의견을 들었느냐고 반문하자 그 분은 교과서를 제작하면서 남한 말/북한 말 단어를 비교하는 도표를 만드는데 마지막 편집 단계에서 전문가 감수를 받았더니 감수를 맡으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을 것 같지만 확인해서 알려 주겠다고 대답한 뒤 우선 평소에 각별하게 지내는 새터민 몇 사람에게 전화해서 북한에서 겨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 ‘동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때 필자의 전화를 받은 새터민은 도무지 ‘동삼’이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하였다. 한참 설명을 하려고 애쓴 다음, 마침내 ‘동삼’이라는 표현이 겨울을 대신하는 용어인지 물어보는 것이라는 내용을 파악한 새터민들은 한결같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반응을 나타냈다. 겨울은 겨울이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그들의 반응이었다.
  다음 단계로 필자는 오늘날 북쪽에서 사용하는 “조선말 대사전”(평양: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1992년) 올림말 중에서 ‘겨울’과 ‘동삼’ 항목을 찾아보았다. 다음 인용문은 “조선말 대사전”에 나오는 ‘겨울’과 ‘동삼’ 항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겨울 [명] 한 해의 네 철 가운데 넷째 철 곧 가을 다음에 오고 봄과 바뀌는 추운 철. ¶~을 나다. 박달나무도 얼어터지는 추운 ~ ¶겨울이면 눈덮인 산등판과 얼음판마다가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터로 된다. △ 늦~. 첫~. 한~.

동삼 [명] ① 겨울철 석 달이라는 뜻으로 «겨울»을 이르는 말. ¶시꺼먼 눈구름을 앞세우고 다가오는 그해 동삼에 성준은 썩은 거적들을 주어오고 길길이 자란 보통벌의 풀대들을 베여다가 그 다리 밑에 초막을 한 채 지어 놓았다. (장편소설 «평양시간») ② «동삼삭»의 준말(冬三)
  새터민 몇 사람의 반응과 “조선말 대사전”의 내용을 종합해 본 결과, 필자는 나름대로 일의 전후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도 ‘동삼’이라는 표현은 소설 ‘평양시간’을 지은 작가를 비롯한 몇몇 사람이 사용하여 “조선말 대사전”에 오를 정도에 이르렀으나 대다수 북한 주민은 일상생활에서 겨울을 겨울이라고 하며 동삼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지내는 상황이라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었다.
  물론 필자는 이런 내용과 함께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전화를 걸었던 교과서 편집 실무자에게 알려 주었다. 아울러 교과서에 남쪽 말/북쪽 말 항목을 비교하는 도표를 만들어 넣으려면 각각의 단어가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과 아울러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그 단어를 사용할 때 알게 모르게 전달하게 되는 감성적 느낌까지 함께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렇게 하지 않은 채 단어만 제시해 놓으면 전혀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을 전달하였다.24)
  지금까지 서술한 사례와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배경에는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은 곧 한자어와 외래어를 우리말 단어로 바꾸어 표기하는 정책으로 한정하여 생각하는 일반적인 인식이 존재한다. 이런 인식에 따르면 남쪽에서 사용하는 외래어인 ‘컴퓨터’나 ‘키보드’를 북쪽에서 다듬어 놓은 ‘전자계산기’나25)   ‘건반’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막상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이 만나 축구를 하다가 ‘골키퍼’와 ‘문지기’라는 용어가 번갈아 나오면 서로 상대방이 이상하다고 느끼거나 북쪽 사람이 나서서 왜 좋은 우리말을 놔두고 영어를 쓰느냐고 힐난하면서 우쭐한 표정을 짓는 현상이 생기곤 한다.
  우리의 언어생활은 단순한 단어의 교환 행위가 아니다. 단어의 교환을 훨씬 넘어서 상대방에 대한 친근감이나 거부감은 물론이고 언어 사용자의 가치관이나 생활 방식을 평가하는 행위까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언어생활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말 다듬기 운동이 단순히 외래어나 한자어를 우리말 단어로 다듬어 사용하는 분야에 국한해 두어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외래어나 한자어를 우리 고유의 단어로 바꾸어 놓는 일이 말 다듬기 운동의 중요한 구성 요소라는 점은 불을 보듯 명확한 사실이다. 그러나 외래어를 우리 고유의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 곧 북한의 말 다듬기 운동과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왜냐하면 ‘북한의 말 다듬기 운동’이란 단순히 외래어나 한자어를 우리말 표현으로 바꾸는 차원을 넘어, 이른바 ‘혁명적 문풍’을 따라 배워 발음을 바꾸거나 억양을 강하고 약하게 조절하는 훈련은 물론이고 심지어 “남조선에서 쓰고 있는 말에서 한자 말과 일본 말, 영어를 빼버리면 우리말은 ‘을’, ‘를’과 같은 토만 남는 형편” 이라고 주장하는 김일성의 발언 내용에26)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배우고 익히는 가치관 정립 과정까지 얽혀 있어, 훨씬 복잡하고 감정적으로도 미묘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새터민의 발언은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이 미치는 영향은 단순히 단어의 표기를 다르게 하는 차원을 넘어 발음이나 억양은 물론이고 언중(言衆)의 감성적 측면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아파트 단지 지하상가 식당에서 “냉면 하나요” 했는데 아줌마가 못 알아들었다. 옆에 있는 남한 사람이 “냉면이오” 하니까 알아들었다. 같은 냉면이라고 한 것도 내 말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건, 억양이 서로 다르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람들(남한 사람들)보다 떨어진다고 생각이 된다.(30대 남자, 1998년 탈북, 2001년 국내 입국.)

  ‘례절’이 고유한 말 같다. 여기서 ‘예절’이라 하는 게 틀려 보인다. 회사 다니니까 (회사에서) 서로 틀렸다고 분쟁할 때가 있다. 회사에 사람들이 왔다가는 돌아가서 “북한 여자 봤다.”하면서 자기네들끼리 내가 한 말 기억했다가 써먹고 자기네들끼리 웃는다. “꼴똑 찼다.” 이런 말을, 내가 말하는 거 듣고 신기해서 계속 따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계속 (북한에 대해) 묻는다. “배급 줘요?”, “잘 안 주죠?” 하면서……. 그러면 “북한에 한번 가 보세요” 한다.(20대 여자, 1998년 탈북, 2000년 국내 입국.)

  북한에서 왔다는 게 콤플렉스, 열등감인데, 말이라도 북에서 쓰는 말이 맞았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 그런 기대와 함께 ‘례절’같이 ‘ㄹ’하는 게 맞는다고 한참 주장했었다.(20대 남자, 1997년 탈북, 1998년 국내 입국.)

  한마디에 “교포시군요.”하고 이방인처럼 생각한다. 자기 민족 아니구나 하는 걸로 생각돼 열등감 든다. ‘교포구나’ 할 때 ‘제 나라 사람 아니구나, 남이구나’ 생각하는 것 같아 위축감 들고 말 못하겠다.(40대 여자, 2002년 탈북, 2003년 국내 입국.)
  위의 인용문은 우리가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에 대해 논의할 때에는 단순히 단어 바꾸기 차원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다시 말해서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을 분석할 때에는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이 명시적으로 밝힌 의도와 함께 숨은 의도는 무엇인지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하며 아울러 말 다듬기 운동을 통해 다듬어 놓은 단어의 사용자인 언중(言衆)의 사회심리적 특성까지 고찰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3.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진행 과정

  적어도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는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이 공식적으로 언제부터 시작된 일인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었다. 다만 김일성의 교시와 노동신문이나 민주조선 등 북한의 주요 일간 신문이 게재하는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의 전개 과정을 통해 북한 당국이 우리말 다듬기 운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하고 끝낸 시점이 언제인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부분에서는 우선 북한 최대의 일간지인 노동신문에 나타나는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의 전개 과정과 아울러 그 과정에서 북한의 정치 지도자 김일성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노동신문의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이 북한의 말 다듬기 운동의 주요 요소이기는 하지만 두 가지 개념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당연히 북한의 말 다듬기 운동은 노동신문의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 이외에도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의 사회심리적 의미를 평가하고자 할 때에는 분단 이후 북한 당국이 추진해 온 언어 정책의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여 총체적인 맥락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원고 분량의 제한이라는 현실적 여건을 감안하여 노동신문의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을 중심으로 북한의 말 다듬기 운동의 전개 과정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김일성은 1964년 1월 3일과 1966년 5월 14일, 두 차례에 걸쳐 북한의 언어학자들과 담화를 나누었다. 1964년 담화의 제목은 “조선어를 발전시키기 위한 몇 가지 문제”였으며 1966년에는 “조선어의 민족적 특성을 옳게 살려나갈 데 대하여”라는 제목이었다.27)   그 뒤, 1966년 7월 9일 자 노동신문 제4면에는 “«우리말 다듬기»의 지상토론을 시작하면서”라는 제목 아래 국어사정위원회의 인사말과 제1회 우리말 다듬기 기사가 나온다. 이 점으로 미루어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은 이 무렵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28)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은 1966년 7월 9일에 제1회 이래 1973년 10월 28일에 제554회로 마지막 회에 이를 때까지 대체로 2~3일 간격으로 노동신문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북한 당국의 필요에 따라 1~2주 정도 중단하거나 드물게 두 달에 걸쳐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을 게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왜 중단하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29)   반면 노동신문이 왜 1973년 10월 28일에 제554회를 마지막으로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을 더 이상 게재하지 않는지 그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30)
  노동신문에서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을 시작하고 끝내는 모습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우선 시작할 때 모습은 다소 거창한 느낌을 줄 정도로 두 차례에 걸쳐 공식적인 인사말을 게재한다. 1966년 7월 9일, 제1회를 시작할 때 북한의 국어사정위원회는 “«우리말 다듬기» 지상토론을 시작하면서”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수록하였다.
  우리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말을 하고 쉬운 글을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묻혀 있는 좋은 말을 찾아쓰는 한편 어려운 한자어나 외래어를 우리말로 다듬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국어사정위원회에서는 이 지상토론을 조직한다. …… 독자들은 다듬은 말이 마음에 드는가 안드는가 하는 의견을 우편으로 국어사정위원회나 본사에 보내되 직장, 직위, 이름, 나이를 밝혀서 아름다운 우리말을 활짝 꽃피우며 더욱더 빛내기 위하여 모두 다 이 토론에 참가하자.
  똑같은 인사말이 1966년 7월 15일 제3회에 한 차례 더 나온다. 반면 1973년 10월 28일, 제554회로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을 끝낼 때에는 아무런 인사말이 없다. 게다가 그 내용을 읽어보면 제554회 원고를 작성한 사람은 자신이 마지막 회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점이 나타난다.
  모두 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높이 받들고 우리말 다듬기 지상토론을 더욱 활발히 벌려야 한다. 이번에는 물고기의 알과 관련한 말을 비롯한 일부 말마디들을 토론에 붙인다.
  노동신문은 1973년 10월 28일에 왜 갑자기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을 끝낸 것일까? 무려 7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꾸준히 게재해 왔던 연재물을 끝내면서 제554회 필자가 마치 다음 회에 또 이어질 것 같이 “이번에는 …… 일부 말마디들을 토론에 붙인다”고 글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상태에서 필자의 능력으로 이런 질문에 대해 구체적인 증거가 확보된 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앞으로 더 많은 연구를 전제로 하되, 일단 다음에 제시하는 두 가지 자료를 관찰해 보면 그 당시 북한 당국이 추진하던 말 다듬기 운동은 단순한 단어 다듬기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으로 복잡한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첫 번째 자료는 노동신문의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 내용을 통해서 김일성의 위상 변화를 추적하는 과정이다. 특히 1967년 11월 이후 1969년 6월까지 게재되었던(제124회 이후 제257회에 이르는)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은 북한의 말 다듬기 운동이 단순한 언어 정책의 범위를 넘어 김일성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도구로써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 나타난다.
  노동신문의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은 제1회 이후 제123회까지 순전히 외래어나 한자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운동에 전념한다. 그런데 제124회에서 갑자기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라는 표현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 뒤 1년 6개월에 걸쳐 “김일성”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가 하는 점은 아래 <표 1>에서 관찰할 수 있다.

<표 1> 노동신문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에 나타나는 김일성 이름의 빈도
시기 김일성 이름 등장 횟수(A) 총 횟수(B) 백분율(A/B) 해당 횟수
67년 11~12월 1 16 6.3 122~137회
68년 1~ 2월 1 12 8.3 138~149회
68년 3~ 4월 0 14 0.0 150~163회
68년 5~ 6월 5 15 33.3 164~178회
68년 7~ 8월 0 15 0.0 179~193회
68년 9~10월 7 12 58.3 194~205회
68년 11~12월 3 13 23.1 206~218회
69년 1~ 2월 6 13 46.2 219~231회
69년 3~ 4월 10 13 76.9 232~244회
69년 5~ 6월 12 13 92.3 245~257회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그 이유는 이제 서술하게 될 두 번째 자료와 연결해 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두 번째 자료는 1967년 이후 197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북한 사회 전역에 휘몰아쳤던 혁명의 광풍을 거치면서 당시 북한 주민들은 일상생활에서 말을 하는 행위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새터민의 체험담은 그런 두려움의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8살 때 중국에서 평양으로 갔어요. 그해 해방이 되었는데 집에서 재산을 다 팔아서 은으로 바꿔 가져 갔지. 한 4~5개월 걸렸어요. 연말쯤 평양에 도착해서 평양제2인민학교를 다니고 대접받으며 잘 살았어. 오빠 덕분에……. 오빠가 전쟁 시기 서울 해방시킨 사단의 참모장이었어요. 그러다 포항 근처에서 죽었어. 유공자였지, 전쟁 유공자. 우리 부모님 고향은 남쪽이야. 내가 늘 엄마는 왜 경상도 말 고치지 못하냐고 했거든. 말 하는 게 이상했어요. 어쨌든 대접받고 고위층에서 잘 살았는데 70년 7월 4일에 남편이 영원히 못 나오는 정치범 수용소에 갔어요. 그때 내 나이 서른다섯이었는데 아직도 그 사람 생사를 몰라요. 재판을 안 했으니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곧 이어 나는 7월 10일에 보위부 초대소에서 두 달 심문을 받다가 정치범 수용소로 갔어요. 뭐 내가 말한 게 남조선에 전달되었다 할 때 책임이 없느냐고 묻는 건데, 뭐라 하겠어요? 거기서 8년을 있었지. 들어갈 때에도 뭘 잘못했는지, 언제 나오는지 모르고 갔지만 나올 때에도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아는 게 없어요.(60대 여자, 2001년 탈북, 2003년 국내 입국.)
  그 당시 북한 당국은 1967년에 끝낼 예정이었던 7개년 인민 경제 계획을 3개년 연장하여 1970년에 마무리할 것을 결의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주체사상이 본격적으로 대두하는가 하면 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이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에 들어가 그 아버지의 후계자로 위치를 확립해 가는 중이었다. 또한 남로당, 소련파, 연안파의 거물급 인사들이 숙청당한 뒤 사실상 김일성 세력을 견제할 유일한 대안으로 남아있던 박금철 등 갑산파의 주요 인물이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 당시, 평양을 비롯한 북한 전역에 흩어져 살던 평범한 사람들이 갑자기 광산촌이나 수용소로 쫓겨 가는 일이 줄지어 일어났다. 쫓겨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쪽 출신이었으나 자신들이 왜 갑자기 그런 대우를 받는지 설명을 듣지 못했고 스스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사람도 많았다. 다만 명목상 사회주의 체제를 비난했다거나 무심코 말했던 내용이 이른바 간첩을 통해서 ‘남조선’에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보위부 간부들의 추달을 받았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말을 하는 행위 자체가 그 당시 북한 주민의 일상생활에서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상태에서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노동신문 1973년 10월 28일 자 제554회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을 작성했던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평양을 떠나게 된 인물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4.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그 사회심리적 의미

  북한 당국이 추진해 온 우리말 다듬기 운동은 과연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 그리고 새터민에게 각각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재일 동포나 조선족, 고려인을 포함하여 오래 전에 이 땅 한반도를 떠난 사람들은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또 분단 이후 남쪽에서 더 좋은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 이른바 잘사는 나라로 떠나 그 곳에 터전을 잡은 국외 동포들은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제시하려면 앞으로 더 많은 후속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단지 북한의 말 다듬기 운동에 대해 북쪽에서 태어나 상당한 시간을 보낸 뒤 남쪽에 와서 정착하게 된 새터민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아마도 노동신문의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에 따른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았고 그만큼 북한의 말 다듬기 운동을 민감하게 평가하는 집단은 단연코 북쪽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쉽게도 우리가 북쪽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직접 조사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여건에 놓여 있다. 따라서 아쉽지만 이 글에서는 새터민과 면접한 내용을 근거로 북쪽 사람은 물론 북쪽에서 살다가 남쪽으로 건너 온 새터민들은 북한 당국이 추진했던 말 다듬기 운동을 어떻게 평가했을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31)
  새터민과 면접한 자료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마도 이들은 대다수가 말 다듬기 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 다듬기 운동이야말로 북쪽 사람에게 그 체제에 대한 자부심을 제공하는 근거의 하나로 작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런 자부심은 남쪽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나 안타까움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강력하게 추진했던 말 다듬기 운동이 실제로 성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새터민도 있었다. 다음에 새터민들의 의견을 인용해 보겠다.
  그러니까 여기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 영어라는 게 뭐 예를 든다면 패스워드 하게 되면 아 이건 뭐 비밀 번호다 하는 걸 어렸을 때부터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나가잖아요. 그런 측면에서는 북한에서 잘한다고 봐요. 나는 그런 측면에서는 한국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적으로 보거든요. 언론에서도 얘기하잖아요. 우리말을 쓰자고 말은 하면서도 그도 모르게 외래어들이 많거든요. 그러니깐 그건(우리말은) 옛날 시대 오래 전부터 살아오면서 쌓아온 거니까 그냥 맞춰 써야 하지 않겠어요? 비판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그런 언어 정책에서는 한국보단 북한이 잘 된 거 같아요.(50대 남자, 2002년 탈북, 2003년 국내 입국.)

  평가를 한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안타깝다고 생각해요. 영어는 영어 자기 분야에서 사용돼야 해요. 그런데 이게 생활 속에 들어오면 우리 조선말 없어지지 않겠어요? 저는 아주 부정적으로 봐요. 실지 생활에서는 영어로 쓰면 안 돼요. 그런데 여긴 지하철도 다 영어로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 우리 자라나는 새 세대들이 진짜 조선말을 바탕에서 잃어버릴 수 있다니까요. ‘헤어’ 하면 ‘머리카락’이지 어떻게 ‘헤어’가 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걸 첫째 부정적으로 많이 바라보게 돼요.(40대 여자, 2000년 탈북, 2000년 국내 입국.)

  (외래어 많이 써서) 남북한이 한 민족인데도 한 민족이라는 느낌이 안 들고,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면 어머니는 미국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완전 영어도 아니고, 발음도 정확하지 않게 별나게 섞어서 완전 영어도 아니다.(30대 남자, 1999년 탈북, 2000년 국내 입국.)

  영어로 ‘포크’라 하잖아. 이런 것도 다 별나게 우리말로 만들어 놨어요. 그런데 바꾼 말로 잘 사용 안 해요. 그런 용어 고친 게, 내 지금 생각 잘 안나요. 지상 토론, 연구 토론회, 웅변. 이런 거……. 김일성의 노작들, 저작집, 말씀들 위에서 내려오면 우리는 그거 갖고 연구 토론회 하는 거요. 자기가 연구하고 면담에 나가서 토론하고 자기 의사 그대로. 그런 건 있어요, 실제로. 그런데 그게 생각도 역시 김일성이 생각 주제로만 표현돼야 하지, 내가 건설적으로 생각해서 하는 것 그런 거 함부로 말 못하는 거야.(40대 남자, 2003년 탈북, 2004년 국내 입국.)
  새터민들이 특히 거부감을 느끼는 부분은 남쪽에서는 영어를 써야 지식이 있고 훌륭한 사람으로 대접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점이다. 또한 단지 북쪽에서 왔다거나 영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점에 대해 분노와 절망감을 느끼는 것 같다.
  내가 여기서는 특히 비판적으로 보는 게 그거야. 조선말 쓰는 거 보다 영어를 쓰는 게 아주 유식한 사람처럼 그렇게 실제적으로 비춰지는 부분이 많거든요. 드라마를 보게 되면, 요즘에 아침에 드라마를 보면, 아, 여기도 영어를 써야 유식한 걸로 표현되는 그런 시절이 있었기 땜에 차곡차곡 지금까지 누적돼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김일성이가 얘기하는 것은, 고건요, 외래어를 다 없애야 되겠다 (하는 거예요). 근데 북한에서도 아직 그대로 쓰는 게 있거든요. 고유한 말이 없는 것은 그대로 쓰라고 하지만…….(50대 남자, 2002년 탈북, 2003년 국내 입국.)

  북한에서 왔다 하면 배운 게 다르다고 생각하고, 지식 수준이 여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 또 못사는 데서 왔다고 생각한다. ‘나라 잃은 설움’이라고 할까. 상대방 표정을 보고, 깔끔한 성격 사람 앞에서는 주눅이 든다. 많이 배워 보여서 그런지……. 허물 없는 사람한테는 이야기해도 어려운 사람 앞에서는 말 못한다. 마요네즈 같은 소스 정확히 분별이 힘들고 어디서 파는지도 모르겠다. 음식은 뭘 사야 할지 모르겠다. 다 먹어 볼 수도 없고……. 난 모르는 건 다 물어본다. 하지만 한번은 회사에서 너무 많이 물어봐서 그런지 ‘우리 딸 채연이보다 모르는 게 많고, 묻는 게 많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자존심 상해 말 안한다.(20대 여자, 1998년 탈북, 2000년 국내 입국.)
  위의 면담 내용을 살펴보면 새터민들이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에 대해 평가하는 내용은 단순히 외래어를 우리말 표현으로 바꾼 것의 범위를 넘어 정서적, 감성적 반응이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남쪽의 우리가 앞으로 북한의 우리말 다듬기 지상 토론을 평가할 때에는 정서적 측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5. 마무리하는 말

  2000년대의 시작을 눈앞에 두고 동아일보에서 전국의 20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한 결과 우리 국민들은 지난 1000년 동안 한국인이 이룩한 일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한글 창제를 선정했고 가장 아쉬웠던 사안으로는 남북 분단을 지적한 것으로 밝혀졌다.32)   또한 월간중앙 ‘역사탐험’에서 2004년 신년호 특별 기획 ‘한국사 흐름을 바꾼 역사적 결정’이라는 주제로 교수·교사·전문 연구원 등 역사 전공자 101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훈민정음 창제는 전체 응답자 101명 가운데 51명이 지목할 정도로 높은 지지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33)   이와 같은 사실은 남북한 주민의 만남이 전보다 더 다양하고 활발해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앞으로 우리가 한반도의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하는지 시사해 주는 점이 매우 크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통일을 향하는 길에서 북한 주민은 물론 새터민과 함께 우리말과 글을 어떻게 가꾸고 다듬어 갈 것인지 큰 방향을 정립해야 한다. 단순히 단어와 어휘, 표기법의 차이 수준을 벗어나 이들이 일상생활에서 남북한의 말 다듬기 운동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또 과거의 우리 역사에서 말과 글을 다듬어 온 조상들의 노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앞으로 우리말을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 함께 논의하는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 하겠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남북한의 통합과 통일을 지향하는 언어 정책은 남북한의 언어 현실을 좀 더 종합적으로 분석한 뒤, 언어 사용의 주체인 남북한의 7,000만 주민이 스스로 원하는 대안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반드시 남쪽 사람뿐만 아니라 북쪽 사람과 새터민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한편 그들이 원하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 또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