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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용어 개발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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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자국어 순화
-전문 용어 개발을 중심으로-

송기형ㆍ건국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1. 머리말

  언어는 아주 기나긴 변화의 산물인 동시에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매 순간 살아 움직이며 변하는데, 언어의 변화는 다른 무엇보다 어휘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시간 그리고 사회 변화와 함께 수많은 단어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전에는 없었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개념들이 계속 출현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새로운 어휘를 계속 만들어 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미개한 언어 또는 죽은 언어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산출되는 새로운 어휘는 거의 모두 영어에서 나오고 있다. 소련의 해체와 함께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인간 활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석권하고 있으며, 영어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영어의 지배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영어가 선진 기술과 문명의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예를 보더라도 영어가 국가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어의 지배는 심각한 문제점을 동반하고 있다. 영어 단어가 마구잡이로 사용되는 바람에 우리말의 많은 단어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예를 들어, 건강에 좋다는 포도주는 언제부터인가 ‘와인’이라고 불리고 있다. 어쩌면 포도주란 단어는 곧 사전에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같은 단어들처럼 꼭 필요한 외래어가 아닌 영어 단어들을 대한민국 사람들이 ‘모닝커피’를 마실 때부터 ‘투나잇쇼’를 볼 때까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어의 지배는 많은 언어들을 오염하거나 훼손하고 있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영어 단어에 의존하지 않으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분야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기술과 과학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알다시피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개념 그리고 이것을 지칭하기 위한 새로운 용어의 원천이다. 예를 들어, 20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현기증 날 정도의 비약을 거듭한 정보 기술 분야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용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용어들은 영어 일색이다. 이런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거나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영어 용어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보 기술과 같은 첨단 분야에서 영어 용어에만 의존하고 우리말 용어 개발을 포기한다면, 머지않아 우리말은 미개한 언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영어는 다른 모든 언어들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언어는 영어 단어의 범람에 맞서 자국어를 순화해야 한다. 프랑스어와 한국어는 너무나 다른 점이 많지만, 영어 단어의 범람 또는 영어의 위협은 공통적이다. 프랑스는 영어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언어 정책을 1960년대부터 내놓기 시작했는데, 그 양대 축은 1994년 8월 4일 자 프랑스어사용법 그리고 프랑스어 전문 용어 개발을 위한 제도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어사용법34) 은 “상품화 분야에서 프랑스어 사용을 의무화하고 그 위반에 대해서는 경범죄를 적용하여 범칙금을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어 어휘가 충분해야만 프랑스어 사용을 의무화할 수 있고,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전문 용어를 끊임없이 개발해야만 영어의 위협으로부터 프랑스어를 지킬 수 있다. 일상적인 프랑스어 어휘를 개발하거나 순화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제도적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작업은 라루스(Larousse)와 르로베르(Le Robert) 같은 대표적인 출판사들의 사전 그리고 “프랑스 한림원(Académie française) 사전”, “온라인 프랑스어 보전(寶典)(Le Trésor de la langue française) 사전”35)   등에서 담당하고 있다. 물론 일상 용어와 전문 용어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컴퓨터와 인터넷 관련 용어들처럼 전문 용어가 일상 용어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필자의 기존 연구를 요약 정리한 이 글에서는 프랑스의 전문 용어 개발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소개하고 그 성과와 문제점을 간단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2. 전문 용어 개발을 위한 제도적 장치

  프랑스에서 전문 용어 개발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1970년대 초부터 구축되기 시작했다. 소위 프랑글레36) 의 유행을 우려하는 여론이 비등하자, 프랑스 정부는 1966년 3월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언어 문제 전담 기구인 ‘프랑스어 수호와 확산을 위한 고위 위원회’를 국무총리 직속으로 설립하고 중앙 행정 부처들은 1970년부터 전문 용어 위원회 조직에 착수했다. 1970년 4월에 교통, 1970년 9월에 석유와 컴퓨터, 1971년에 경제 재정 분야의 전문 용어 위원회가 출범했다. 전문 용어 위원회 설립을 최초로 법제화한 1972년 1월 7일 자 법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앙 행정 부처 소속의 전문 용어 위원회들(commissions de termino- logie)을 설치한다.
전문 용어 위원회의 임무는 분야별로 부족한 프랑스어 어휘의 목록을 작성하고, 새로운 실재를 지칭하거나 외국어로부터의 바람직하지 않은 차용어를 대체하기 위해 필요한 용어들을 제안하는 것이다.
전문 용어 위원회는 해당 부처 공무원들과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되고, 위원장은 해당 부처 장관이 임명한다. 전문 용어 위원회의 사무는 해당 부처 장관이 지명하는 공무원이 담당한다.
전문 용어 위원회 위원장의 제안에 의거하여 해당 부처 장관은 교육부 장관이 연서한 영(令 arrêté)으로 승인된 용어와 표현 목록을 확정한다.
다음 경우에는 승인된 용어와 표현만을 사용해야 한다.
- 중앙 행정 부처의 법령, 명령, 훈령, 지침 등
- 국가 행정 부서와 공공 기관이 발신하거나 수신하는 서신과 문서 등
- 국가나 공공 기관이 당사자인 계약과 거래 문서
- 국가 소속 기관이나 산하 기관 등에서 사용하거나 재정 지원하는 교육, 훈련, 연구 책자
  이런 전문 용어 위원회들은 계속 늘어나 1996년에는 11개 부처에 소속된 20여 개의 위원회가 활동하게 된다. 이 전문 용어 위원회들의 첫 번째 작품이, 1973년 1월 18일 자 관보에 고시된 수백 개의 프랑글레 목록이다. 이 목록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킴으로써 관보 고시의 효과를 부각시켰다. 1983년 3월 25일 자 법령에 의해 의무화된 관보 고시는 용어나 표현의 분야를 밝히고 간단하게 정의한 다음, 같은 의미의 외국어(거의 영어) 단어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또 끝에 영어-프랑스어 대조표를 첨부했다. 1996년 7월까지 전문 용어 위원회들이 개발하여 관보에 고시한 용어와 표현이 4000여 개에 달하게 된다. 1986년 3월 11일 자 법령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고시한 용어와 표현 사용을 의무화했다.
- 중앙 행정 부처의 법령, 명령, 훈령, 지침 등
- 국가 행정 부서와 공공 기관이 발신하거나 수신하는 서신과 문서 등
-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뉴스와 프로그램 소개
- 국가나 공공 기관이 당사자인 계약과 거래 문서
- 국가 소속 기관 또는 산하 기관 등에서 사용하거나 재정 지원하는 교육, 훈련, 연구 책자
- 1975년 12월 31일 자 「 프랑스어사용법」37) 에서 언급된 문서, 서류, 게시문
  그렇지만 의무적인 사용을 위반하는 경우에 대한 처벌 규정은 없었고, 「 프랑스어사용법」(바로리올 법) 제1조 제1항에 대한 위반만을 「소비자보호법」에 의거하여 처벌했을 뿐이다.38)
  그러나 소련과 동구권 해체 덕에 영어는 더욱더 막강해지고 프랑스어의 위상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바로리올법」을 강화한 새로운 「 프랑스어사용법」을 제정하기로 결정하고 새로운 법안을 1994년 2월 23일의 국무 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반대론자들도 있었다. 반대론자들은 언어를 법에 의해 규제하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했다. 1994년 봄에 프랑스를 뒤흔들어 놓은 새 「프랑스어사용법안」은 격렬한 토론을 거쳐 1994년 6월 30일에 하원, 7월 1일에 상원을 통과했다. 반대론자들은 1994년 7월 1일에 새로운 법안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재판소(Conseil constitutionnel)에 제소했다. 헌법재판소는 7월 29일 자 판결에서 “정부가 프랑스어의 의무적인 사용을 법으로 정한 몇몇 분야에서 요구할 수 있지만, 일반인과 방송이 ‘공식 전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은 인권선언 제11조에서 천명된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에 위배된다.”라고 판결하고 무효화했다. ‘공식 전문 용어’ 사용은 공인(公人)에게만 부과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이 판결 때문에 새로운 「 프랑스어사용법」은 문제가 된 조항들을 삭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39)   또 기존의 전문 용어 개발 장치를 개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로 제정된 1996년 7월 3일 자 법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문 용어·신어 전체 위원회(commission générale de terminologie et de néologie)와 전문 위원회들(commissions spécialisées)을 설치한다.
· 전체 위원회는 국무총리 직속이고, 전문 위원회들은 중앙 행정 부처 소속이다.
· 전체 위원회 위원장은 국무총리가 4년 임기로 임명하고, 전문 위원회 위원장은 소속 부처 장관이 4년 임기로 임명한다.
· 각 부처의 장관은 전문 용어·신어 담당관을 임명한다.
· 전문 위원회들에서 새로운 용어와 표현을 전체 위원회에 제출하고, 전체 위원회는 이것을 심사하여 용어와 표현을 선정한 다음 프랑스 한림원의 동의를 얻어서 해당 부처 장관에게 통보한다.
· 전문 위원회가 선정하고 프랑스 한림원이 동의한 용어와 표현의 목록은, 해당 부처 장관이 반대하지 않는 한, 관보에 고시한다. 이 목록은 교육부 공식 소식지에도 게재한다.
· 관보에 고시된 용어와 표현을 아래의 경우에는, 같은 의미의 외국어 용어와 표현 대신 의무적으로 사용한다.
- 중앙 행정 부처의 법령, 명령, 훈령, 지침 등
- 국가 행정 부서와 공공 기관이 발신하는 모든 성격의 서신과 문서
- 1994년 8월 4일 자 「 프랑스어사용법」(투봉법) 제5조와 제14조가 정한 경우
  이 법령의 특징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전문 용어 개발 작업에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했다. 새로운 용어나 표현은 앞선 법령들에서처럼 국무총리나 장관의 영이 아니라 전문 용어·신어 전문 위원회, 전체 위원회, 프랑스 한림원의 공동 작업에 의해 확정된다. 전체 위원회가 관보 고시를 담당하고, 해당 부처 장관은 반대하는 권한밖에 없다.40)   실제로 그전에는 관보에 고시되는 용어와 표현 앞에 해당 부처 장관의 영이 명시되었지만, 이 법령 이후에는 전체 위원회의 이름으로 용어와 표현이 고시되고 있다. 둘째, 프랑스 한림원의 역할이 전례 없이 강화되었다. 프랑스 한림원은 “모든 정성과 열성을 다하여 프랑스어에 확실한 규칙을 부여하고, 프랑스어가 순수하고 웅변적이며 예술과 학문을 논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임무”를 부여받고 1635년 2월 22일에 창설되어 그동안 8번에 걸쳐 “프랑스 한림원 사전”을 편찬했고 현재는 9판을 간행 중이다.41)   그러나 정부가 주도하는 전문 용어 개발 장치에서는 한림원은 ‘비공식적인’ 자문 위원 역에 불과했었다. 관련 법령들의 어떤 조항도 한림원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한림원의 동의가 있어야만 새로운 용어나 표현을 확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문 위원회, 전체 위원회, 한림원 사이에는 긴밀한 공조 체제가 구축되어 있고 그 연락 업무는 문공부 프랑스어 총괄실42) 에서 담당하고 있다. 또 ‘프랑스 한림원 사전과’는 전문 용어·신어 전문 위원회들과 전체 위원회의 모든 회의와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셋째, 관보에 고시된 용어와 표현을 사용할 의무는 행정 부서와 공공 기관에만 부과된다. 정부는 개발된 용어와 표현 사용의 모범을 보이고 문공부 프랑스어 총괄실을 통하여 그 보급과 홍보에 힘쓰고 있다.
  이처럼 프랑스의 현행 전문 용어 개발 장치는 1996년 7월 3일 자 법령에 기초하고 있다. 국무총리 직속 기구인 전문 용어·신어 전체 위원회는 1명의 위원장과 18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5명의 위원(프랑스 한림원 종신 사무국장, 과학한림원 종신 사무국장 2명, 프랑스어 총괄실장, 프랑스 표준화협회장)은 당연직이다. 2005년 2월 현재 11개 중앙 행정 부처에 소속된 18개의 전문 위원회가 활동 중이다. 외무부에 1개(외무), 농수산부에 1개(농수산), 문공부에 1개(문화공보), 국방부에 1개(국방), 경제재정산업부에 7개(경제·재정, 통신, 핵공학, 컴퓨터·전자 부품, 화학·소재, 석유 과학과 산업, 자동차 산업), 고용연대부에 2개(사회 부문, 건강 부문), 환경부에 1개(환경), 장비교통주거부에 1개(장비·교통·주거), 체육부에 1개(청소년·체육), 법무부에 1개(법무), 연구부에 1개(우주 과학과 기술) 전문 위원회가 설립되어 있다. 각 전문 위원회의 사무는 관련 부서 또는 유관 기관이 담당하고 있다. 예컨대 통신 전문 위원회는 통신학교연합, 핵공학 전문 위원회는 원자력위원회가 사무를 담당하고 있다. 또 이 11개 부처와 교육부가 전문 용어·신어 담당관을 두고 있다.
  전문 위원회의 제안, 전체 위원회의 심사,43) 한림원의 동의를 거친 용어와 표현은, 해당 부처의 장관이 반대하지 않는 한, 관보에 고시한다. 관보 고시는 새로운 용어나 표현의 분야(대개는 상위 분야와 하위 분야를 함께 밝혀 준다. 예) 컴퓨터/인터넷)를 밝히고 그것을 간단하게 정의한 다음, 같은 의미의 외국어를 밝혀 주고 맨 끝에 외국어-프랑스어 목록과 프랑스어-외국어 목록을 첨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외국어는 거의 모두 영어다. 전문 용어·신어 전체 위원회는 1973년부터 1996년까지 개발된 용어와 표현 전체(4000여 개)를 검토하여 필요한 수정 또는 삭제 작업을 진행하고, 이 작업의 결과물에 대한 프랑스 한림원의 동의를 얻어서 확정된 용어와 표현의 목록을 관보에 고시하고 출판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이전 장치에 의해 개발된 전문 용어들을 새로운 장치 속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이 작업에는 4년 동안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마침내 2000년 9월 22일 자 관보에 약 2500개의 어휘가 고시되었다. 이 목록은 즉시 프랑스어 총괄실 홈페이지에 게재되고 책자로도 출판되었다. 한편 전문 용어·신어 전체 위원회가 새로운 장치의 틀 속에서, 즉 전문 위원회의 제안과 프랑스 한림원의 동의를 얻어 개발한 전문 용어는 1500개 정도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새로운 전문 용어 개발 장치가 승인하여 관보에 고시한 용어와 표현은 4000개에 이르고 있다. 이것들 중에는 일상용어라고 분류될 수 있는 것이 없지는 않지만(모든 분야로 분류되거나 운동 그리고 컴퓨터와 인터넷 분야 등), 그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전문 용어의 보급과 홍보는 문공부 프랑스어 총괄실이 주로 담당하고 있다. 프랑스어 총괄실은 분야별 어휘 소책자를 제작하여 배포하고 있으며 특히 인터넷을 통한 홍보와 보급에 주력하고 있다. 관보에 고시된 용어와 표현은 즉시 프랑스어 총괄실 홈페이지에 게재하고 자료기지 CRITER44) 를 운영하고 있다. CRITER에서는 지금까지 개발된 전문 용어 전체를 검색(분야, 정의, 같은 의미의 외국어)하고 자신의 의견도 제시할 수 있다.


3. 전문 용어 개발의 성과와 문제점

  개발된 전문 용어 또는 신어가 실생활에서 사용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제도적 장치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프랑스의 현행 장치가 개발한 전문 용어가 어느 정도 사용되고 있는지에 관한 객관적인 자료는 아직까지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인터넷 보편화와 함께 우리 시대의 일상생활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정보 기술 분야의 전문 용어와 신어를 간단하게 살펴 보려고 한다.
  현행 장치에 의해 승인되거나 개발된 정보 기술 분야의 어휘는 280개 정도이다. 이 어휘에 대한 간략한 분석에서 크게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프랑스가 영어의 지배에 굴하지 않고 전문 용어 개발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는 점은 본받을 만하다. 성공적이라고 평가되는 용어들을 같은 의미의 영어 단어들과 함께 열거해 보자.
affichage / display
arrobe / at-sign
courriel / e-mail
donnée / data
internaute / cybernaut
logiciel / software
matériel / hardware
numérique / digital
ordinateur / computer
page d’accueil / home page
panne / fault
secours / back-up
téléchargement / downloading
toile / web
traitement / processing
  특히 logiciel, matériel, numérique는 오래 전부터 일상생활의 용어로 자리 잡았으며, 다른 유럽 국가(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의 언어들에는 없는 단어라고 프랑스가 자랑하고 있다.

  둘째,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 용어와 표현은 대개 영어에 비해 복잡한 구조여서 보급과 사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à documentation integrée / self-documented
administrateur de site, de serveur / webmaster
banque de données, base de données / data bank, data base
barriére de sécurité, pare-feu / firewall
bloc-notes électronique / notebook computer, notebook
flux de travaux / workflow
logiciel de navigation / browser
logiciel à contribution / shareware
message incendiaire / flame
mise à niveau / upgrade
numéro d’urgence / hot line
pilote de périphérique / driver
traitement de texte / text processing, word processing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영어는 2개의 단어를 그대로 붙이면 그냥 새로운 용어나 표현이 되는 반면(예: share+ware=shareware), 프랑스어에는 그런 유연성이 크게 부족한 편이다(예: logiciel à contribution). 다시 말해서 프랑스어는 그 자체의 구조적인 특성 때문에 영어에 비해 신어나 전문 용어 산출이 어려운 것이다. 영어는 world와 cup을 그냥 붙여서 world cup이 되는 반면, 프랑스어는 coupe와 monde를 du에 의해 연결해야 한다(world cup / coupe du monde). 전문 용어·신어 전체 위원회 위원장 가브리엘 드 브로질은 2001년 6월 5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의 강연에서 프랑스어 전문 용어 개발 장치가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은 사실이지만, 프랑스어는 그 형태론적 경직성 때문에 혁신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신어를 쉽게 만들어 내는 언어들(영어는 자발적으로, 독어는 체계적으로)에 비해 변형이 힘들다고 지적했다. 특히 프랑스어 철자(é, è, ç, à 등)는 신어 생산에 큰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프랑스어에 고유한 이 근본적인 문제점들은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셋째, 전문 용어와 신어 개발의 성공 여부는 결국 사용 빈도에 달려 있다. 프랑스어 총괄실이 주도하고 있는 적극적인 보급과 홍보 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의 사용 실태에 관한 체계적인 조사와 자료가 전무한 실정이다. 실제로 1999년 봄에야 비로소 프랑스어 총괄실 내에 ‘언어 사용 실태 조사 위원회(Observatoire des pratiques linguistiques)’가 설치되었는데, 전문 용어와 신어 사용 실태 조사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이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전문 용어 개발 장치의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음말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일상적인 언어 행위를 규제할 수는 없다. 순화 대상 언어를 금지하고 순화어 사용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영어의 범람과 지배를 방관할 수만은 없다. 프랑스의 자국어 순화 작업 역시 이런 모순에 봉착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전문 용어 개발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개발된 전문 용어나 신어가 통용되는 경우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는 유연성에서 잃는 것을 명료성에서 만회하고, 명료성에서 보존하는 것을 유연성에서 상실한다.”라는 표현에 의해 요약할 수 있는 프랑스어의 구조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전문 용어나 신어를 비롯한 어휘 분야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사이의 격차는 크게 벌어져 있고, 앞으로 이 격차가 더욱 벌어질지도 모른다. 어쨌든 현행 프랑스의 전문 용어 개발 장치가 영어에 대한 프랑스어의 열세를 조금이나마 만회하는 데 기여하는 것은 분명하다. 또 문공부 프랑스어 총괄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는 홍보와 보급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여기서 대표적인 프랑스어권인 퀘벡 주 정부의 프랑스어 순화 작업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퀘벡 주 정부는 이미 1961년에 프랑스어청을 설립하여 프랑스어 수호와 순화 작업에 착수했다. 순화 부문에서 프랑스어청의 최대 업적은 프랑스어 순화 자료 기지 “대(大) 용어 사전(Le grand dictionnaire terminologique)”이다.45) 프랑스어청의 지원을 받은 전문 용어 학자들이 무려 30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한 이 온라인 사전은 200개 분야의 산업, 과학, 상업 어휘 약 300만 개를 프랑스어와 영어로 제공하고 있다. 이 사전의 가장 큰 장점은 엄청난 어휘 덕에 전문 용어만이 아니라 일상용어도 총망라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wine 항목에는 40개에 달하는 관련 용어와 표현이 수록되어 있고 이것들 하나하나에 상응하는 프랑스어 용어와 표현, 정의, 비고를 검색할 수 있다(프랑스어―영어, 영어―프랑스어). 이 온라인 사전은 프랑스어 순화 작업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립국어원도 누리집의 ‘언어 순화 자료’를 이 온라인 사전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컴퓨터와 인터넷 보급이,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영어의 지배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7년만 하더라도 전 세계 인터넷 사용자의 80% 이상이 영어를 사용했었다고 한다. 영어의 인터넷 독점은 시간 문제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인터넷 보편화는 그 반대의 현상을 낳았다. 인터넷이 보급되면 될수록 영어의 점유율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2000년에는 60%대를 유지하던 영어의 인터넷 점유율이 2001년에는 52%, 2003년 9월에는 35.6%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1997년 6월, 2001년 12월, 2003년 9월 세계 인터넷 사용자들의 언어 통계는 다음과 같다.

  [1997년 6월]
  영어: 82.3%, 독어: 4.0%, 일본어: 1.6%, 프랑스어: 1.5%, 에스파냐어: 1.1%, 이탈리아어: 0.8%, 포르투갈어: 0.7%, 스웨덴어: 0.6%46)

  [2002년 12월](단위: 백만 명)
  영어: 220.4(43%), 일본어: 47.5(8.9%), 중국어: 47.3(8.8%), 독어: 34.2(6.8%), 에스파냐어: 34.6(6.5%), 한국어: 22.7(4.6%), 이탈리아어: 19.5(3.8%), 프랑스어: 16.8(3.3%)

  [2003년 9월](단위: 백만 명)
  영어: 262.3(35.6%), 중국어: 90(12.2%), 일본어: 69.7(9.5%), 에스파냐어: 58.8(8%), 독어: 51.6(7%), 한국어: 29.2(4%), 프랑스어: 27.2(3.7%), 이탈리아어: 24.2(3.3%)

  따라서 우리나라도 전문 용어와 신어 개발을 통한 순화 작업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영어의 지배를 어느 정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참고 문헌|

송기형(2004), “「 프랑스어사용법」 연구”, 솔.
송기형(2004), 프랑스의 정보 기술 분야 전문 용어 개발에 대한 연구, “프랑스학 연구” 제29권, 프랑스학회.
http://www.culture.fr/culture/dglf(프랑스어 총괄실 누리집).
http://www.oqlf.gouv.qc.ca(캐나다 퀘벡 주 프랑스어청 누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