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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용어(특히 정보 통신 분야)순화에 대하여

심재기ㆍ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어느덧 열다섯 해가 지난 옛날 일이 되었다. 나는 어느 잡지의 ‘우리말 우리글’이란 고정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마침 그 내용이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의 실마리가 될 듯하여 다시 옮겨 적는다.

  우리나라 미래의 경제 성장은 오로지 과학 기술의 발전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 기술의 발전은 그 분야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부딪히게 되는 용어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과학 기술 분야의 전문 용어가 영어로 되어 있을 때, 그 분야 종사자들은 그 영어를 앵무새처럼 사용하면 그만일까? 영어로 된 전문 용어를 사용하면서 직감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선선히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새로운 과학 기술 분야라 하더라도 거기에 쓰이는 용어가 우리말로 되어 있다면 생소한 외국어로 되어 있는 것보다는 훨씬 쉽게 이해될 것이고, 그 이해가 바탕이 되어 기술 개발이 촉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 기술 분야의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일은 기술 자체의 발전과 병행되어야 한다. 비록 기술 발전에 앞설 수는 없다 할지라도 기술 습득과 더불어 재빠르게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이 뒤따르기는 해야 할 것이다.

  지난해 가을, 나는 전자공학과 교수 한 분으로부터 고선명(高鮮明) 텔레비전(HDTV) 용어 사전을 만들고자 하니 그 제정 작업에 참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었다. 고선명 텔레비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대답했었다. 그러나 우리말로 과학 기술 용어를 만든다는 기본 취지에 찬동한다면 우선 참석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 후로 칠팔 개월간, 나는 텔레비전 화면이 무수히 많은 점으로 된 화소(畵素)들을 점점이 찍어 나가는 주사(走査)에 의해 우리 눈에 감지된다는 것도 알았고, 그것이 시차(時差)가 있는 점 찍기이지만 빠른 속도로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이 화면 단위로 받아들인다는 것도 배우면서 한두 마디씩 말참견을 해 왔었다. 그리고 며칠 전 나는 4·6판 200여 페이지의 자그마한 책자 한 권을 받았다. ‘HDTV 용어 사전’이란 제목이었다. 겉장을 넘기니 서문이었다.
“신문사나 잡지사로부터 과학 기술에 관련된 전문 내용을 비전문가에게 소개하라는 글을 청탁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때 경험했던 당혹감을 기억할 것이다. 몇 자 적어 가노라면 당장 부딪히는 것이 용어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서문은 다음과 같은 기술용어론으로 이어진다.
“과학 기술 분야에 있어서 전문 용어의 제정은 과학 기술이라는 건축의 벽돌을 다듬는 것과 같은 작업이다. 이 벽돌을 잘 만들기 위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가 꼭 갖춰져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권위 있는 조어(造語)이다. 관련 분야의 중지를 모은 가운데, 그 분야의 석학들과 어문학자들이 공동으로 심의 과정을 거쳐서 최적의 용어를 제정하는 일이 기본적으로 중요한 일이 되겠다. 둘째로 보편적인 사용이다. 아무리 잘 만든 용어라 할지라도 널리 보급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셋째로는 효과적인 보급이다. 이것은 권위 있는 조어와 보편적인 사용을 이어주는 교량의 역할이라 할 수 있겠다.”
  모든 연구실에 불이 꺼진 지난 겨울 어느 날 밤 10시경, 창밖에는 희끗희끗 눈발이 날렸고, 바람 소리가 윙윙거리며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날 저녁 우리가 결정한 용어들이 가지런히 키 재기를 하고 있었다. 원근 이동(遠近移動: Zooming), 평면 이동(平面移動: Panning), 오목 일그러짐(Pin-cushion distortion), 볼록 일그러짐(Barrel distortion) 같은 낱말들이 눈에 들어 왔다.
  그때 누군가 이렇게 큰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도 오늘 밤 우리들 기분이었을 거야!”
<1991년 9월 주간한국>


2

  이렇게 시작된 기술 용어 제정 붐은 자연스럽게 정보 통신 분야 전체로 확산되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우리나라의 정보 통신 산업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정보화 사회로의 이행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정보 통신 기술과 관련된 새로운 용어들이 밀물처럼 국내에 도입되어 원어(주로 영어)를 발음대로 우리말로 옮겨 사용하는 사례가 급증하자 이들의 표준화가 기술 개발과 병행해야 할 초미의 사업으로 드러났다.


2.1.

  이러한 상황에서 정보 통신 용어의 표준화 사업이 태동한 것이었다. 그 목표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로는 다양한 형태로 혼용되는 통신 관련 용어의 표준화를 도모하는 것이요, 둘째로는 표준화된 용어를 사전으로 발간하여 보급하는 것이었다.


2.2.

  애초에 이 사업은 1991년부터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가 정보통신표준용어집을 간행하면서 본격화하였는데 그 후 1995년 5월에 정보통신부, 문화관광부, 기술표준원 등 3개 부처가 공동으로 용어 표준화를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같은 해 10월에 정보통신용어 표준화 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 주체가 변경되었었다. 그 위원회는 1개의 협의회와 6개의 분과위원회 총 75명의 위원이 작업에 착수하여 1996년 12월에 3개 부처 공동 관심 표준화 용어 2556개를 정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사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체제 정비가 불가피하였고 1997년 8월에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가 정보통신용어표준화 심의위원회 및 분과위원회를 재구성하여 단독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이 체제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나는 그때부터 이 사업을 지켜 본 증인이 되었다.
  분과위원회는 ‘전기통신용어위원회’, ‘무선방송용어위원회’, ‘정보기술용어위원회’ 그리고 ‘데이터통신 및 소프트웨어(S/W) 용어위원회’의 넷이고 이 4개 분과위원회에서 1차 심의한 것을 심의위원회의 최종 심의를 거쳐 표준 용어로 확정하는 절차를 거친다.


3

  여기서 나는 잠시 이 사업의 명칭이 ‘정보 통신 용어의 표준화 사업’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순화’라는 용어 대신에 ‘표준화’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기본 개념은 꼭 같은 것이다. 순화(醇化)라 할 때에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느낌이 강하고, 표준화(標準化)라 할 때에는 여러 가지가 뒤섞여 쓰이는 것을 정리하여 어떤 한 가지로 통일하여 쓰자는 것이어서 결과는 같으나 작업에 임하는 자세에는 얼마간 차이가 있다. 즉 순화는 기존의 용어들이 모두 잘못이라는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고, 표준화는 잘못이라기보다는 혼란의 정리와 효율화 쪽에 비중을 두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특히 정보 통신 분야에서는 기술 및 행정 체계의 표준화도 용어의 표준화와 함께 추진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아우르는 명칭으로도 ‘표준화’라는 용어가 당위성을 얻게 되었다.


4

  그동안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가 정보 통신 분야 용어 표준화에 기여한 업적은 2003년 12월에 간행된 정보통신용어사전(제5판 약 22000개 용어)에 최종적으로 정리·압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전은 1993년에 제1판이 나온 이래 판을 거듭하면서 증보한 것으로, 물론 앞으로도 계속하여 수정·증보가 진행될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우리나라 정보 통신 분야 표준 용어의 실상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다.


4.1.

  그러면 용어 표준화는 어떤 절차를 거쳐 확정되는가? 그 추진 체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⑴ 표제어의 조사 수집 및 용어 조사 카드 작성
  표제어의 수집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관련 서적 및 신문에 기사화되는 용어를 수집하기도 하고 관련 협회나 학회에서 만들어 쓰거나 통용하는 용어를 조사·수집한다. 또 표준화위원회의 제안 용어를 접수하기도 하며 협회의 웹을 통해 외부의 제안 용어를 접수하는 등, 여러 경로를 통하여 수집한다.

⑵ 표제어 선정과 선별
  수집된 용어들을 선정 기준에 의해 선별한다. 즉 수집된 용어 가운데에서 정보 통신에 관련된 새로운 용어, 매우 일반적이고 실용적인 용어, 그리고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용어라고 생각되는 용어들을 표제어로 선별한다.

⑶ 표제어 집필
  표제어로 선정된 용어를 전문집필위원이 정의하고 해설한다. 전문집필위원은 협회의 상근 전문위원이나 분야별 전문위원이다. 특정한 용어는 외부 전문가에게 의뢰하기도 한다. 필요에 따라, 몇 번에 걸친 수정·보완 작업이 이루어진다.

⑷ 용어 검토 및 표제어의 선정
  표제어로 선별되어 정의와 해설이 완료된 용어는 해당 분과위원회에서 표준화 용어로서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여 표제어로 선정한다. 검토 과정에서 수정·보완이 필요한 항목은 표제어 집필 단계로 후송된다.

⑸ 표준화 용어(표제어)의 심의·채택
  각 분과위원회를 통과하여 표준화 용어의 후보가 된 자료가 심의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심의 채택된다. 이 심의 과정에서도 좀 더 수정·보완이나 검토가 요구되는 것은 앞 단계로 회송되어 재심의를 의뢰하기도 하고 심의위원회의 의결로 폐기하기도 한다.

⑹ 용어 사전에 등재·출판
  표제어 곧 표준화 용어로 심의가 완료된 용어는 표제어로 채택되어 새로 간행되는 용어 사전에 등재되며, 이때에 기존 용어라도, 필요한 경우, 수정·보완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4.2.

  위의 여섯 단계의 절차 가운데 나는 심의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다섯 번째 단계인 표준화 용어의 심의·채택에만 관여하였다. 전문분과위원회는 모두 그 분야 전문가로 구성되었으나, 심의위원회에만 각 분야 전문가 외에 국어학자 두 사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내가 그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4.3.

  용어 심의가 진행되는 동안, 대체로 나는 자막 없는 어느 외국 영화를 감상한다는 착각에 빠지곤 하였다. 분명히 한국어로 진행되는 회의이고, 한국어로 적힌 해설문이요, 용어이지만 그 내용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문외한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우리말로 바꾸어 놓은 용어가 과연 합당한가 아니한가를 논의할 때에 그 우리말 용어의 적절성을 판별하는 경우에만 나의 전문가적 직관이 다소 소용될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회의에 여덟 해 넘게 참석해 오면서 참으로 뜨거운 감동과 교훈을 얻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정보 통신 분야에 세계적인 강국이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회의가 열리기 전에 미리 전자 우편으로 보낸 심의 원고를 대부분의 위원들이 철저하게 검토하고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었고, 회의 중에는 마치 각자가 자기 자신의 저서 원고를 교정하는 것 같은 성실하고도 진지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선도하는 정보 통신 기술의 믿음직한 인프라(기반)가 아닌가? 이러한 감동이야말로 내가 그 회의에 앉아 있어야 하는 존재 이유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5

  나는 이 회의에서 진정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무엇보다도 첫째로는 여유 있는 융통성이요, 둘째로는 끊임없는 적응력이었다.
  이 글의 결론으로 그 배운 바를 예를 들어 정리해 보겠다.

5.1.

  첫째, 모든 심의 대상 용어는 모두 우리말로 표준화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모든 용어는 일단 우리말로 바뀐다. 그러나 일반인에게도 이미 익숙하게 되었고, 그 개념도 널리 알려진 것은 원어 그대로 쓰는 것을 허용하였다. 예컨대 하드웨어(hard-ware), 소프트웨어(soft-ware)는 한때 글자대로 직역하여 경성기물(硬性器物), 연성제품(軟性製品) 등을 채택하기도 했으나 곧이어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외래어의 수용에 얼마간 여유를 두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가령 포털 사이트(portal site)만 해도, ‘들머리 사이트’, ‘초입(初入) 사이트’, ‘길라잡이 사이트’ 같은 우리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일반 대중이 ‘포털 사이트’라는 외래어를 그대로 쓴다고 해서 의사소통에 장애가 오지 않으므로 ‘포털 사이트’가 그대로 표준 용어가 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용어를 일단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은 철저히 시행한다. 최근에 쓰이기 시작한 매우 유동적인 용어일 경우, 초심자의 교육용으로라도 우리말로 바꾸어 표현된 용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취지 때문이다. 간혹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우리 쪽에서는 원어를 그냥 쓰는데요.” 하는 수가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말 용어가 없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말 표준 용어를 제정하는 절차를 거친다.


5.2.

  둘째, 모든 용어는 지속적인 심의 대상 용어가 된다. 예컨대 주밍(zooming)은 피사체(被寫體)에 카메라가 가까이 가느냐, 멀리 떨어지느냐 하는 관점에서 원근 이동(遠近移動)이라고 하였지만, 그 원근 이동의 결과, 피사체가 화면에서 크게 되느냐, 작게 되느냐 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므로, ‘확대(擴大)·축소(縮小)’가 더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원근 이동’을 버리고 ‘확대·축소’를 새로운 표준 용어로 채택하였다. 이것 역시 기술의 발전과 변화, 그리고 관점의 차이에 따라 표준 용어도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 예이다.
  부지런히 표준 용어를 정해서 사용하되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 이것이 우리나라 정보 통신 기술의 현 주소요, 용어 표준화의 현 주소이다.


|참고 문헌|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1997), “정보통신용어사전 제3판”, 서울: 두산동아.
                              (2000), “정보통신용어사전 제4판”, 서울: 두산동아.
                              (2003), “정보통신용어사전 제5판”, 서울: 두산동아.
                              (2004ㄱ), “정보통신용어 검색서비스 가이드”, 서울: TTA(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2004ㄴ), “TTA JOURNAL 제91호~제96호”, 서울: TTA(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HDTV 용어사전 편찬위원회(1991), “HDTV 용어사전”, 서울대학교 뉴미디어통신공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