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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
-자아 분열의 비극적 아이러니-

이상섭ㆍ연세대학교 명예 교수, 평론가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윤동주는 1941년 여름 방학 동안에 북간도의 고향에 다녀와서 연희 전문에서 마지막 학기를 막 시작했을 무렵 이 시를 썼다. 전에는 언제나 즐거웠을 귀향이었지만 이번에는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하여 아마도 부모와 의견이 맞지 않아 무척 고민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나날이 심하여 가는 일제의 압제 속에서, 어둡기 그지없는 앞날에 거의 절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부모는 문학 공부를 위한 그의 일본 유학을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그가 문학으로, 더더구나 우리말로 쓰는 시로 현실 사회에서 어떤 성공을 거두리라 바랄 수 없었고 윤동주 자신도 문학으로 어떤 성취를 이루리라고 자신만만했던 것도 아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말로 쓸 시를 공부하기 위하여 일본 대학에 일본말로 가르치는 영문학을 공부하러 가겠다고 그는 고집했다. 아마도 그것은 그러한 절망으로부터의 한 탈출구가 되리라 여겨졌기 때문이었겠으나 그가 아주 큰 희망을 거기 두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만주 용정은 이미 그가 단순하고 순진하게 즐거워할 수 있는 “고향”이 아니었다. 어딘지는 모르나 “또 다른 고향”이 그에게는 절실히 필요했다.
  이 시는 어둠 속에서 시작하여 어둠 속에서 끝난다. 이 시에서 어둠의 검은 빛깔과 백골의 하얀 빛깔이 무섭게 마주친다. 그런 공간 속에 하늘로부터는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리고 땅에서는 도둑을 지키는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 사이에서 윤동주가 세 개의 자아로 분열된다.
  서울에서 만주 용정까지는 세 번 기차를 갈아타는 먼 길이었다.1) 고향에 도착하면 가족과 친지를 만나 기쁠 터이지만 몸은 무척 고단할 것이다. 고향에 도착한 첫날 밤은 그렇게 피곤한 몸을 푹 쉬는 기분 좋은 밤이 되었을 것이다. 전에는 늘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1941년 여름은 달랐다. 고단한 몸은 쓰러져 쉬다 못해 아주 사그라져 “백골”이 되어 있고 그냥 백골로 남아 있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백골이 진토가 되도록 “곱게 풍화작용”하고 있다.
  윤동주는 이 시에서 일상 언어에서 서로 비슷한 뜻을 가지는 “곱다” 와 “아름답다”라는 두 낱말을 쓰고 있는데, “곱다”는 백골에 관하여, “아름답다”는 “혼”과 “또 다른 고향”에 관하여 쓰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둘은 확실히 구별되고 있다. “곱게” 풍화작용을 한다는 것은 “아무 말썽 부리지 않고, 고스란히, 완전히 수동적으로, 자연스럽게, 조용히” 변하여 간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어떤 섬 지방에서 죽은 사람의 유해를 오랫동안 바람맞이 쪽에 내어두어 뼈만 남게 하던 풍장(風葬)을 연상시킨다. 매장은 땅에 묻힌 시신의 살을 썩혀 흙에 혼합시키는 방식이다. 그러나 풍장은 말 그대로 시신의 살이 그대로 바람에 불려 없어지고 백골만 남기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백골마저 “풍화(風化)” 작용을 입어 바람처럼 사라질 것 같다.
  우리는 극심한 긴장을 겪을 때 피로한 자신과 그런 자신을 관찰하는 또 다른 자신으로 분열되는 경험을 하는 적이 있다. 필자는 한국 전쟁의 포화 밑에서 며칠을 새우면서 그런 경험을 했다. 지치고 겁에 질린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를 경험했다. 이럴 경우, 대개 능동적으로 관찰하는 자아에 비하여 관찰의 대상이 되는 또 다른 자아는 피곤하여 수동적이 된다.
  윤동주의 경우에도 “나”의 관찰의 대상이 되는 자아는 수동적이다 못해 “백골”, 그것도 막 사라져 가는 “백골”이 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고향의 부모와 친지들이 전과 다름없이 사랑하는 것은 그런 고분고분한 “고운” 윤동주이지만 “나”가 볼 때 그것은 그의 “백골”일 뿐이다. 그의 백골은 진짜 쉬러, 영원히 쉬러, 고향에 돌아와 척 누워 버렸던 것이다. 실제로 이 시를 쓰고 2년 반쯤 뒤에 그는 피골이 상접한 채 죽어 화장되어, 문자 그대로 백골이 진토가 된 채, 고향 땅 무덤 속에 영원히 눕고 말았다. 그 자신이 자기의 훗날 모습을 그렇게 그려 보았던 것일까? 우리는 그의 이 예견적 비전에 섬뜩함을 아니 느낄 수 없다. 이는 블레이크나 뭉크 같은 표현주의 화가의 무서운 그림으로나 표현될 수 있는 장면이다.
  그의 피곤한 몸이 백골이 되면서 “나”는 몸을 떠나 자유롭게 된다. 어두운 좁은 방은 갑자기 우주로 확대된다. 백골이 되어 누워 버린 일상적 공간은 무의미하게 된다. 동시에 예사롭던 바람 소리는 하늘로부터의 무슨 “말씀”처럼 들린다. 아직은 “소리처럼” 부는 바람이지만 그것이 뜻있는 소리 또는 말씀 자체로 들리기를 윤동주는 절망적으로 고대했을 것이다. 그가 어릴 적부터 듣고 읽은 기독교 성경에는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복음 3장 17절).”라는 구절이 있다. 이 시를 쓸 때 그의 의식 속에 이 구절이 아련히 떠돌았음 직하다. 이 시보다 먼저 쓴 ‘또 태초의 아침’에서도 그는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 온다.

무슨 계시일까.
라고 쓴 적이 있다. 그는 어렸을 적에 바람이 불 때 전선이 우는 소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려워하거나 신기해하며 들었던 것 같다. 필자도 아이 적에 아이들과 같이 전신주에 귀를 대고 웅웅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게 하나님 말소리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윤동주는 어디서든 “말씀”을 들을 수 없어 속이 타고 있다.
  “나”는 백골을 들여다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돌연 “혼”이 끼어들어 함께 눈물을 흘린다. 다시 말하면 그는 “나”와 “백골”과 “혼”으로 분열되어 그 세 자아가 동시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그는 “나”와 “백골”로만 분열된 것이 아니라 “혼”으로도 분열되어 일종의 ‘삼위일체’를 이룬 것이다.
  심신이 모두 지친 윤동주는 고향에 돌아온 첫날 밤에 자리에 누워 울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그는 그렇게 우는 자기를 관찰하며 우는 다른 자기와 그 두 자기를 바라보며 우는 또 다른 자기를 의식했던 것 같다. 셋은 모두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일단 자아가 분열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수하게 분열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 윤동주는 자아의 분열을 셋으로 통제하고 그 각각의 역할을 획정한다. 셋이면서 하나이다. 즉 삼위일체다.
  그는 고향 땅에 누워 버린 “백골”을 측은하게 여길 뿐 아니라 백골과의 이별이 또한 한없이 슬플 것이다. 이것은 육신의 고향과의 작별이기도 하다. 그때로부터 그는 만주의 고향과 그의 유소년 시절과 육친의 동기들과의 갈라섬을 아프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해서 그의 “순진”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제로부터 암흑한 전망의 새 삶이 시작되려고 한다.
  그는 그의 또 다른 자아를 “혼”이라 부르고 그에게는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를 붙였다.2) 유령이나 귀신 같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아름다운” 혼이다. 혼은 몸을 떠날 때에 비로소 주체를 획득한다. “아름다운 혼”은 피곤한 백골에서 벗어난 깨끗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다. 그는 백골의 고향을 떠나 “아름다운 혼”과 함께 또 다른 고향, 이상향을 찾는 길에 오른다. “고운” 백골과는 달리 “아름다운” 혼은 능동적으로 확대된 우주 공간으로 날아다닐 수 있는 존재다.
  그는 이미 고향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다. 그래서 이방인의 내습을 막는 개 짖는 소리에 그는 거기가 이미 고향이 아님을 직감한다. 앞에서 하늘에서 들리는 듯한 소리가 있었는데 여기서 소리는 개 짖는 소리가 된다. 하늘에서는 끝내 소리가 안 들리고 땅에서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것은 개 짖는 소리, 자기를 내모는 것으로 들리는 소리일 뿐이다.
  밤을 새워 짖는 개를 그는 “지조 높다”고 했는데, 개를 지사(志士)나 충성심의 상징이라고 엄숙하게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3) 여기서 우리는 윤동주 특유의 아이러니를 아니 느낄 수 없다. 개는 개의 본성을 그대로 살려 밤이면 으레 짖어대니 타고난 “지조”를 지킨다고 할 수 있지만, 윤동주 자신은 본래의 순진을 버리고 고향을 등지려 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는 “이 육중한 기류 가운데 자조하는 한 젊은이”라고, 수필 ‘별똥 떨어진 데’에서 자신을 특징지은 적이 있다. 누가 보나 얌전했던, 즉 고왔던 그는 속으로는 자조적인, 자의식이 강한 청년이었다. 개의 본성적 지조에 반하여 자기는 그의 육친의 정이 깃든 본래의 고향을 저버림을 자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둠을 짖는 개”가 백골을 남겨둔 채 떠나는 자기를 쫓아버리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그는 육신의 고향을 떠나는 것이다. 하얀 백골에서 떨어져 나온 자기는 “어둠”의 검은 빛깔일 것이다. 확실히 그는 어두운 그림자처럼 쫓기는 이방인이다. 그래서 백골은 거기 그냥 남겨 둔 채 또 다른 고향을 찾아, 어딘지도 확실치 않은 그곳을 찾아 떠나자고, 그는 “아름다운 혼”에게 재촉하는 것이다. 확실한 고향이 있는 백골을 떠나 그들은 몸 없이 방황하는 이방인이 되려는 것이다.
  이 시는 고향 상실을 말하는 동시에 미지의 또 다른 고향을 향한 방랑의 출발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고향으로부터의 “추방”은 또 다른 고향으로의 “해방”이 되는 것이다. 추방이 곧 해방이 된다는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를 이 시가 절절하게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고향으로부터의 추방은 한없이 슬픈 일이고, 새로운 고향을 찾아 날아갈 수 있는 해방은 무한히 자유롭되 또한 무한히 두려운 일이다.
  윤동주는 많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고향을 찾아가다가 비극적 불행을 당했지만 그의 아름다운 혼은 지금 우리의 말 속에 우리의 정감 속에 마침내 새로운 고향을 찾았다. 이제 우리는 윤동주를 찾아 그의 백골이 진토 되어 묻힌 중국 용정을 찾을 필요는 없다. 아직도 그곳의 “지조 높은 개”들은 우리 같은 이방인을 짖어 쫓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벌써 그때 거기를 떠났으므로 거기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