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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 찾기 운동’을 제안한다

손석춘ㆍ한겨레신문 논설위원/중앙대학교 겸임교수  

  무릇 사랑은 어렵다. 요즘 유행어로 하자면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기에 더 그렇다. 더구나 사랑은 왜 그렇게 오해받기도 쉽던가.
  국어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솔직히 국어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민망스럽다. 신문에 쓰는 글에 이따금 순 우리말을 쓴다고 해서 ‘우리말 지킴이’가 된 것도 쑥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신문에 순 우리말을 쓴 뒤에는 어김없이 서너 명의 독자들로부터 비아냥거리는 편지를 받는다. 그 가운데 한 분의 짧은 편지가 모든 걸 설명해준다.
“당신 우리말 실력 자랑하쇼?”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오해는 가능한 한 풀어야 옳다. 항의하는 독자들에게 답장을 꼬박꼬박 보내드리는 까닭이다. 답장의 내용은 기실 새로운 게 없다. 그동안 우리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영어 사전을 찾아보았는지 묻는다. 이어 국어사전도 이제 가까이 하자고 제안한다. 우리말을 시나브로 풍부하게 하는 일, 아름답지 않은가 되묻기도 한다.
  필자가 시사 문제를 다루는 글에서 순 우리말을 쓰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필자가 글을 쓸 수 있도록 지금까지 정신을 살찌워준 것이 바로 국어 아닌가. 국어를 쓰며 밥 먹는 사람으로서, 국어를 풍부하게 하는 것은 의무다. 아니, 어쩌면 국어의 풍요로움을 말하기란 사치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국어의 풍요 이전에 국어의 오용이 문제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실 국어를 정확하게 쓰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쓰는 게 국어라 해서 시들방귀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낱말 뜻대로 옳게 써 가는 글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거꾸로 말이 현실을 숨기거나 비트는 현상이 많은 게 우리 현실이다.
  새삼 말할 나위 없이, 말의 힘은 참에서 나온다. 거짓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진실을 밝히려는 것은 사람이 지닌 ‘본능’이다. 문제는 우리가 진실이 담긴 말과 거짓말을 가르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가령 우리는 지금 누구나 의병을 ‘의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19세기 말, 조선 곳곳에서 의병이 살아 숨쉬며 싸울 때, 그리고 장렬하게 전사해 갈 때, 이 땅에서 발행되던 신문들은 의병을 의병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은 의병을 일러 살천스레 ‘비도’라고 보도했다. 의병과 비도는 어감이 달라도 이만저만 다른 게 아니다. 더러는 시대적 상황에서 의병을 비도라고 보도할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다. 의병과 비도는 비단 느낌만 다른 게 아니다. 국어사전은 명백하게 의병과 비도의 뜻을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ㆍ의병: 국가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놓였을 때에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외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민병. 의군.
ㆍ비도: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살인 약탈을 일삼는 도둑의 무리.
  국어를 바르게 쓰려면, 국어를 사랑하려면, ‘의병’과 ‘비도’를 섞을 수 없다. 오늘의 시점에서 과연 누가 감히 의병을 일러 ‘비도’라고 말하겠는가. 의병을 비도로 잘못 부른 것은 국어의 오용에 머물지 않는다. 의병을 의병으로 옳게 부르지 못함으로써, 그 시기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의병에 참여하지 못했다. 되레 의병을 ‘비도’로 오해하여 학살에 가담하거나 모르쇠 했다. 그 결과는 어떤가.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한 차례의 정규전도 치르지 않은 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최근 벌어지는 과거사 진실 규명 문제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진실이 말 뒤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직도 ‘친일 언론’을 ‘민족지’로 부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더러는 일제 시대에 신문을 발행하려면 ‘어느 정도의 친일’은 불가피하지 않았느냐고 나무라기도 한다. 딴은 옳은 말이다. 민족지로서 신문을 발행하려고 ‘어느 정도의 친일’을 어쩔 수 없이 한 신문을 오늘의 잣대에 비추어 ‘친일 신문’으로 비판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주장일 터이다.
  하지만 친일 신문들은 비단 일본 ‘천황 폐하’에 형식적으로만 충성을 바친 게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육군 특별 지원병 제도를 만들자 조선의 젊은이들을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강제 징집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입대하는 ‘지원병 제도’를 찬양하며 한글 신문들은 ‘황국 신민’으로서 “황국에 대하여 갈충진성(竭忠盡誠)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스스로 신문의 1면 사고에서 ‘자임’했듯이 “대일본 제국의 언론 기관”으로 적극 나섰다. 지원병이 전사하자 “조선 지원병의 영예”라고 보도했다. 심지어 ‘영예의 전사자’ 집을 찾아가 ‘가정 방문기’를 실었다. “전사는 남자의 당연사/부군 못지 않은 부인의 결의”라는 기사는 차라리 섬뜩하다.
  “부인은 ‘전선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마는 남자의 당연한 일이오니 슬픈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고 부군에 못지 않은 굳은 뜻을 보이었다.”
  전사자의 부인까지 일제 찬양의 ‘도구’로 삼았다. 그래서다. 역설이지만 그들이 결코 친일 언론이 아니라는 주장에 필자는 동의한다. 친일을 저지르지 않아서가 아니다. 정반대다. 단순히 친일 언론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일제에 적극 빌붙은 반민족 언론, 스스로 지면을 통해 주장했듯이 ‘일본 제국의 언론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적잖은 조선 청년이 독립 운동을 벌이던 시절에, 그들은 ‘성전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우는 지원병’을 내걸고 ‘일본 군인으로 나가라’고 곰비임비 부추겼다.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해 보아도 반민족적 선동이다. ‘지원병’ 어머니까지 동원했다. “이 어머니에 이 아들 / 자식은 나라에 바친다.”라고 보도했다.
  너그러운 이는 모든 걸 ‘용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동에 속아 일본 군인이 된 조선 청년들이 총알받이로 개죽음을 당했을 때도 이를 ‘영예의 전사’ 따위로 대서특필한 반민족적 행위까지 ‘관용’해도 과연 좋은가.
  잘못 들어선 국어 타락의 길은 끝을 모른다. 1937년 7월에 일제가 중국 침략 전쟁을 일으켰을 때, 한글 신문들은 일본군을 ‘아군’ 또는 ‘황군’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독자들에게 ‘황군의 사기를 고무 격려’하자고 강조했는가 하면, ‘국방 헌금’을 걷는 사고(社告)를 낸다. 요즘 ‘불우 이웃 돕기 성금’ 사고처럼 이때도 신문사의 ‘헌금 솔선’을 밝히며 다음과 같이 ‘분발’을 촉구한다.
“북지사변 발발 이래 민간의 국방 헌금과 군대 위문금은 날로 답지하는 형편인데 본사에서는 일반 유지의 편의를 위하여 이를 접수 전달하려 하오니 강호 유지는 많이 분발하심을 바랍니다.”
  한글로 만든 신문들이 일본군을 ‘아군’으로 부를 그때, 많은 사람들은 일본군을 적군이라고 옳게 인식하고 피 흘리며 싸웠다. 반면에 국어를 더럽히는 길로 줄달음질 친 세력은 일본 왕 앞에 ‘신민’(臣民)으로 보도하던 조선 백성을 언죽번죽 ‘신자’(臣子)로 불렀다. 일본 왕의 ‘자식’을 자임한 셈이다.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이날에 제39회의 어탄신을 맞이하옵시사 억 신자(臣子)의 충심으로 흥아성업도 황위하에 일단은 진척을 보아 선린의 새 지나 국민 정부가 환도의 경축을 하는 이때에 이 아름다운 탄신을 맞이한 것은 더욱 광휘 있고 경축에 불감할 바이다.”
  그렇다. 국어의 말뜻을 온새미로 지켜야 할 까닭은 단순히 국어의 문제에 있지 않다. 국어를 바르게 쓰지 못할 때, 우리 삶 자체가 일그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러는 제국주의가 이 땅을 강점하던 시기의 특수성을 일반화하는 게 아니냐고 눈을 홉뜰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섣부르다. 의병을 비도로 쓰는 국어의 오용은 그것이 과거이기 때문에 투명하게 보일 따름이다.
  오늘 빚어지는 현실의 문제로 돌아가 보더라도, 국어의 오용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가령 ‘침략’과 ‘공격’이라는 두 말을 들었을 때, 독자들은 두 말이 어감부터 다르고 뜻도 다르다는 사실을 단숨에 알 수 있다. 실제로 국어사전을 펴보면 다음과 같이 뜻이 확연하게 다르다.
침략: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의 나라에 무력으로 공격함.
공격: 적을 쳐부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아감.
  하나는 긍정, 하나는 부정의 뜻을 지닐 만큼 두 말은 대조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두 말을 혼동해서 쓴다. 가령 미국과 이라크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차분히 톺아 보자.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에서 내세운 이유와 명분은 무엇이던가. 가장 큰 명분은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지니고 있다는 대량 살상 무기였다. 미국의 쌍둥이 고층 건물 폭파와 관련 있으며, 대량 살상 무기로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게 전쟁을 벌인 이유였다. 하지만 미군이 이 잡듯이 뒤졌는데도 대량 살상 무기는 발견되지 못했다. 쌍둥이 고층 건물 폭파와 관련성도 나타나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서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공격한 것이다. 국어는 그런 현상을 ‘침략’으로 규정해 놓았다.
  그렇다면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 옳은 말인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옳은 말인가. 국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국어사전을 찾아본 사람이라면, 그 답은 명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정반대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라는 국어 표현이 ‘가치가 개입된 것’으로 생각한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가치 판단이 배제된 중립적인 표현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신문과 방송이 ‘이라크 공격’이라고 곰비임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침략’이라고 말하면, 자칫 ‘색깔 공세’에 시달릴 수도 있는 게 우리 사회의 기막힌 현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국어를 바르게 쓰는 것이, 국어 사랑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의병을 ‘비도’로 표현하는 게 국어의 타락임은 누구나 선뜻 인정할 터이다. 그러나 이라크 침략을 이라크 공격으로 표현하는 것이 여전히 옳다고 주장할 사람은 과연 없을까.
  국어의 타락은 언론을 통해서만 퍼져 가는 게 아니다. ‘울산 국어 교사 모임’에 초청받았을 때다. 강연이 끝나자 중년의 국어 선생님이 교단에서 벌어지는 국어 오용의 사례들을 제시했다. ‘자율 학습’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학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학생도 교사도, 심지어 교육부도 모두 알고 있다며 개탄했다. ‘보충 수업’도 결코 보충이 아니란다. 보충 수업 희망 조사도 결코 ‘희망’을 묻는 조사가 아니다. 보충 수업도, 자율 학습도 모두 ‘강제’이고, ‘타율’이다. 설 연휴 때 휴일의 징검다리를 위해 ‘효도 방학’으로 하루 더 쉬지만 누구도 그것을 ‘효도를 위한 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그 자리에 참석한 국어 선생님들 모두 폭소를 터트렸다.
  무릇 국어를 다듬고 바르게 쓰도록 앞장서야 할 주체는 학교와 언론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 사회에서 언론과 학교는 거꾸로 국어를 오용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이다. 하지만 국어를 우습게 보는 데서 비롯하는 게 많을 성싶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10대부터 60대까지 옆구리에 영어 사전만 끼고 살아온 세대들로 가득 차 있다. 간판이나 상품 이름에 영어가 많다고 한탄하기란 어느새 쑥스러운 세태가 되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아예 국어사전이 없는 집이 아마도 적지 않을 터이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구석 어딘가에서 홀대받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다. 필자는 옷깃을 여미며 ‘국어사전 찾아보기 운동’을 제안하고 싶다. 국어 바로 쓰기 운동이다. 어떤 낱말의 뜻을 이미 알고 있다고 지레짐작할 게 아니다. 낱말 하나하나를 쓰임새에 맞춰 정확하게 써야 한다. 국어 사랑, 그 길이 결코 쉽지 않은 까닭이다. 무릇 사랑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