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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순화의 문제점과 극복의 길

김하수ㆍ국립국어원 언어정책부장

1. ‘순화’의 개념 문제

  국어 순화의 문제를 다루기 까다로운 까닭은 그 방향에 대한 찬반의 태도를 정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개념의 불확실성과 중의성의 영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순화’라는 명제 안에는 다양한 개념들이 복합적으로 엉켜 있었다. 더구나 이 부문에 대한 이론적인 논의는 찾아볼 수 없고 각자의 주관적 주장, 애국적 구호 등으로 감성화하는 데에 머물러 있었다. 언어 전문가들은 감성 차원을 극복하고 이론과 개념이라는 그릇에 담아 만민이 참여하여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논점을 구성해 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담론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쳇바퀴의 함정에 빠질 것이고, 양식 있는 사람일수록 아예 다가서기 싫은 주제로 방치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순화’ 문제와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은 외래어 남용에 대한 비판 의식에서 비롯한 토착어 장려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무엇이 ‘남용’이고 무엇이 적절한 사용인지에 대해서는 논자들의 주관적 판단만이 난무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흐름은 우리의 토착 어휘를 갈고닦아 쓰자는 취지에 발맞추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주류에 속하는 것 같지는 않으나 이 흐름에는 종종 언어 사용자에 대한 심성적 평가가 동원되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서 거친 표현, 비속어 등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함께 묻어 나온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의제가 아닌가 한다. 살아 있는 언어가 사용자의 분노, 경멸감, 수치심 등을 표현하는 기능을 가진 것은 극히 당연한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러한 격정을 일으키는 인간관계나 사회적 조건이 지적되어야 하지, 애꿎은 언어에 화살을 돌릴 필요는 없다.
  이 밖에도 ‘순화’라는 이름 아래 정확한 발음과 표현, 방언 퇴치, 현학적 표현 비판 등의 다양한 목소리가 섞여 나오는 경향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논지의 방향을 분명히 하기 위해 ‘외래어에 대한 문제 의식’에 중심을 두려고 한다. 곧 ‘국어 순화’를 ‘언어 순결화(Language Purification)’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겠다는 말이다.
  그 까닭은 언어 순화의 문제는 ‘우연히’,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언어 공동체에서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라는 데에 있다. 언어 순화에 대한 담론의 틀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보편성의 원리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순화론자의 논리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언어는 자연스러운 것’, ‘그러므로 인위적인 변화나 교체는 안 된다’는 원리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 원리는 표면적으로는 더욱더 보편적인 틀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물학적인 존재이니만큼 자연에서 비롯하였다. 곧 사람도 생태계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찌 된 일인지 생태계, 곧 자연의 질서에 만만하게 순종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의 세상을 따로 만든 것이다. 그것이 사회이다. 정리하자면 사회는 자연과 대립항을 이룬다는 것이다. 사회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의 선물인 ‘본능’에 머무르지 않고 ‘의식’을 갖도록 자극한다. 자연은 생물체들이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질서에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사회화된 인간은 약육강식의 질서를 파괴할 ‘의식’을 획득한다는 말이다. 이 ‘의식’의 교류를 위하여 ‘언어’는 탄생한다. 따라서 언어는 근본적으로 사회적일 뿐이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태어난 언어는 주어진 사회적 조건과 호환하는 작용을 하면서 자신의 형태와 기능을 적절히 변화시켜 나간다. 이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 축적이 되면서 ‘언어의 역사’가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역사는 그 속에 매몰되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시 자연적인 것으로 보일 뿐이다. 역사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을 읽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역사 의식’이 있는 사람뿐이다. 그런 점에서 언어 혹은 언어 변화는 인위적이어서는 안 되고 자연스러운 창조와 변화만 인정할 수 있다는 논점은 역사 의식을 지워 버린 관점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언어에 대한 인위적인 손질은 허다하게 저질러져 왔다. 아마 그런 손을 한번도 안 탄 언어는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중국에서도 한 시대 혹은 한 지배 체제가 바뀌면 언어 규범에 대한 새로운 정본이 나왔고, 유럽의 경우는 새로운 신앙으로 개종하거나 종교 자체를 개혁하려 할 때 당연히 언어에 대한 변화를 도모하였다. 제삼 세계의 경우 ‘식민지화’라는 굴레 아래 자신들의 언어를 잃거나 손상당하지 않은 경우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제삼 세계가 탈식민지화 정책을 수행하면서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 때,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비판한다면, 그것은 맥락상 식민지화가 더욱 자연스럽다고 하는 주장에 지나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2. 순화와 언어 의식의 계기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언어 형태를 바꾸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정한 계기가 생기면 언어 변화를 시도한다. 그 계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이른바 ‘순화’의 정당성을 제시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언어 자체에 대해 적잖은 ‘불만’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올바르지 못하다든지, 점잖지 못하다든지 혹은 순결하지 못하다는 등의 불만을 말한다. 이러한 불만은 곧이어 이 언어를 ‘개혁’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무언가 더 나은 상태로 바꿔 보려는 시도를 하게 마련이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언어 사용 방식을 바꾸게 되기도 하고, 익숙한 자신의 방언을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가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큰 집단의 흐름을 만들어 낼 경우, 또 그것이 그 시대의 구조적인 특성을 드러낼 경우, 이것은 상당한 규모로 언어의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 집단의 움직임은 사회적 현상을 보여 주며, 그 시대의 특성은 역사적 조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언어 순화와 관련되는 가장 돋보이는 현상은 중세기를 마감하고 근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특히 유럽을 필두로 일어난 민족 국가 형성 과정에서의 언어 순결화 운동이다. 중세기를 지배하던 라틴어를 대체하여 지역과 지방의 통속어에 머물렀던 넓은 의미의 방언을 민족어라는 거창한 지위로 올려 놓는 작업과 운동이 있었다. 이 주도 세력은 당시의 사회 변화를 주도했던 신흥 시민 계급이었고, 이들은 자신들이 쓰는 언어를 지배 언어로, 자신들이 보기에 품위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 형태를 ‘교양’이라 불렀다.
  흥미로운 것은 언어 순결화를 외칠 때에는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된 특정한 언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영어의 경우는 이미 노르망디 어와 상당한 혼합이 이루어져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프랑스 어는 주로 영토 내의 딴 언어(알사스 지방의 독일어, 남부의 바스크 어, 카탈루냐 어 등)와 방언(오크 어, 노르망디 어 등)과의 대결 의식이 강했다. 또 상인들 사이에서 많이 쓰는 영어에 대해서도 적잖은 경계를 했다.
  반면에 독일어의 순결화 과정에서는 주로 라틴 어와 프랑스 어가 주 개혁의 대상이 되었었다. 훗날 터키의 경우는 역시 터키 어의 순결을 주장하면서도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곧 페르시아 어와 아랍 어는 배척하면서도 프랑스 어와 이태리어에 대해서는 호의를 보였다. 구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했던 세르비아의 친슬라브 정책, 파키스탄의 우르두 어 정책에서 보이는 친이슬람 경향, 아프리카의 스와힐리 어 사용 지역에서 나타나는 친영어 정책 등을 훑어 보면 모든 순결화 정책은 결코 순결하지는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이다.
  자신의 언어를 중심으로 순결한 언어를 만들려고 할 때는 그 순결을 더럽힌(?) 언어에 대한 적대감이 함께 드러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가까이 지내고 싶은 언어나 문화에 대해 접근하는 경향도 있다.
  19세기 말 대한 제국의 개화파가 유독 유학과 중국 문화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하면서도 일본과 미국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다. 당시 신소설 작가들의 주 흐름이 그것을 보여 주고 있으며, 초기에 한글에 대한 애정을 가졌던 이들도 대부분이 중국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비판과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반면에 일본과 유럽·미국 문화에 대한 동경심은 초기 국어학자들에게는 상식이었던 것 같다. 그 점에서 근대화 과정에서의 우리의 언어 순화 의식은 역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하나의 탈중세화 과정인 동시에 탈중국화 과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언어의 순결화라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는 정치적 실천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어 순화 운동의 출발은 전근대 사회의 한자어가 그 주 대상이었다고 하겠다.
  유럽처럼 비교적 순탄하게 민족 국가를 이루지 못한 지역은 식민지라는 또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대개의 식민지는 오랜 시일을 지내면서 식민 모국의 언어에 동화되어 버리거나 혼합어의 성격을 띠게 된다.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대부분은 ‘언어’ 문제로 매우 치열한 고민을 경험한다. 이들은 때로는 식민 모국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거나(중남미의 경우) 지역 내의 다언어 상황으로 말미암아 식민 모국의 언어를 다수 공용어 가운데 하나로 삼거나(인도, 필리핀 등) 아니면 혼합어를 독립한 나라의 공용어로 쓴다(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탄자니아 등). 자신의 언어가 아직 살아 있을 경우는 지체 없이 모어를 회복시킨다(남북한, 베트남 등). 아주 극단적인 경우 이미 사라져 버린 옛날의 언어를 문헌 연구를 통하여 소생시키기도 한다(이스라엘의 경우).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는 못하지만 이미 소멸한 언어를 부활시키는 운동의 경우도 적잖이 순결화 작업이 시도된다. 아일랜드의 에이레 어, 영국의 콘월(Cornwall) 지방어와 앞에서 예를 든 이스라엘 어가 이에 해당한다.
  언어의 순결을 외치는 집단 가운데 가장 위험 시되는 경우가 독일의 파시즘의 정책이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언어의 순결을 지키려는 운동이 매우 강한 편이었고, 이에 따라 언어에 대한 짙은 낭만주의적 경향이 오래 갔다. 이러한 낭만주의는 나중에 국수주의와 결합을 하였고, 독일 국수주의는 유례없는 폭압 체제를 만들어 냈다. 이 경험은 두고두고 언어 전문가들에게 언어 순결화 운동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경각심을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언어 순결화, 곧 언어 순화 운동은 자신들의 역사적 조건에 대해 각성한 시민 운동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역동성을 보여 줄 수 있었지만 국가 권력의 수단으로 이용될 때는 본의든 아니든 전진이 아닌 퇴행의 모습을 보여 줄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겨 주었다. 그렇기에 한국의 국어 순화론자 가운데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전용 조치를 높이 평가하려는 태도는 경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들은 국어 순화가 사회의 민주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몰역사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3. 국어 순화의 합목적성 문제

  정당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국어 순화 운동은 늘상 미흡한 면을 드러내어 오기 일쑤였다. 그 까닭은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근거를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에 항상 ‘현실론’, ‘실용론’에 비해 호소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깊은 언어 의식으로 무장한 일부 지식인들과 산발적으로 흩어진 동호인들 사이에서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버린 부분이 없지 않다. 결국 국어 순화 운동의 첫 번째 문제점은 객관적인 합목적성을 추려 내지 못하고 마음에만 호소하려는 낭만적, 더 나아가 유심론적 자세에 깃들어 있다고 본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줄곧 내세우는 국어 순화 문제는 결코 특이한 집단에 의해서 제기되는 희한한 현상이 아니라 이 시대와 우리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철학의 문제임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의 순화 문제를 우리의 시대 위에 올려 놓고 시대와 삶에 대한 해석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합목적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어의 문제는 ‘근대화’의 문제와 함께 시작한다고 본다. 근대화의 주역이 되어야 할 시민 계급의 발생과 발전이 뒤늦었고,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의 근대성을 규정하는 역사적 집단인 ‘시민’이 사라지고 농촌 아닌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의 시민만 남아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다음으로는 공통의 의사소통 도구라는 측면이다. 현재 사회 경제적 통합 과정 속에서 방언 차이의 극복은 어느 정도 가능해졌지만 민족 분단이라는 더 큰 족쇄가 풀리지 않고 있다. 독일의 경우는 분단 이전에 이미 완숙한 상태의 공통성을 성취하였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덜 겪었다. 한국의 경우는 아직도 단 한 번도 공통의 도구를 제대로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남다른 어려움을 또 겪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순화라는 말은 바로 이 문제와 관련지어서도 매우 중요한 구실이 남아 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압축적 발전을 하고 있다는 한국 사회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미 현대 후기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서 아직도 남아 있는 전근대적 요소와 모순되게 공존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곧 가족의 해체 현상과 가족주의, 전 인구의 도시 집중과 지방색, 양성 평등 의식과 남아 선호, 생태 운동과 산업화 욕구, 외국인 이주의 증가와 인종적 배타성 등 우리가 한 세기 동안 처리하지 못한 숙제들이 뒤엉켜 남아 있는 상태이다. 바로 이때가 새로운 가치에 대한 갈증이 무르익을 시점이다. 새로운 가치는 새로운 표현을 갈구한다. 유럽의 르네상스는 새로운 가치를 얻게 해 주었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중세 공통어인 라틴 어가 아니라 자신들의 언어였다는 것이 그들의 자각이었다.
  우리가 찾아가는 새로운 가치는 아마도 이국적인 냄새의 외래어가 아닌 그리고 딱딱하고 고색창연한 낡은 어휘가 아닌 새로운 우리의 언어에 의해서 발현될 가능성이 더 크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물을 보고 그 성격을 파악하여 무언가의 언어로 규정해 나가는 과정은 자신의 의식과 감성에 의해 언어화(verbalization)될 때 가장 명확한 인식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은 또 하나의 문제는 사회 구성체의 문제이다. 지난날의 언어 문화는 주로 지식인,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사회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않았던 폭넓은 대중의 참여가 불가피해질 것이다. 그동안 광범위한 지식의 축적과 교육을 통한 대중화 작업이 선행되었다. 게다가 이제 다수가 참여하는 통신 매체가 마련되었다.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은 낡은 제도뿐이다. 다수의 일반 대중이 요구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 ‘제도의 보장’이 아직 미비한 것이다. 아직도 국어 순화는 일부 지식인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일반 대중의 작품은 그 통속성, 즉흥성, 전복성 때문에 한글 파괴니 외계어니 비속어니 하는 모욕을 당하고 있을 뿐이다.
  남은 일은 전문가 집단과 일반 대중이 만나는 통로를 개척하는 것이다. 대중의 착상을 예술적으로(?) 다듬어 그들에게 돌려주는 역할을 언어 전문가들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언어 전문가란 전형적인 국어학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넓은 의미에서 작가, 언론인, 법률가, 출판 관계자, 다매체 전문가 등 언어 덕에 괜찮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정치인이 끼어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한국 사회에서의 언어 순화의 정당성은 앞 절에서 논의하였듯이 보편성을 가진다. 그리고 그 보편성 위에서 우리 사회의 근대화 문제(곧 민족 국가 형성 문제), 사회 내부의 공통성 문제, 그리고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입히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감성적 문제의식을 뛰어넘어 시대와 사회에 대한 구조적인 인식으로 무장하는 일이 필요하다.


4. 전략과 문제

  국어 순화와 관련된 논의 가운데 가장 아쉽게 빠져 버리는 부분이 바로 ‘전략’에 관계된 문제이다. 그리고 또 한국어의 순화 문제에서 합목적성의 문제와 함께 가장 비판받을 부분이라 할 것이다.
  합목적성의 결여는 자연스럽게 전략의 엉성함을 드러낸다. 문제의식이 감성적이니만큼 전략도 감성적인 선동이 중심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한일 관계나 과거사 문제 혹은 친일 경력 등의 사회적 쟁점이 터졌을 때에는 유용한 면이 있지만 장기적이고 일관된 실천을 보장할 수는 없다.
  순화 운동의 낭만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능성에 대한 재인식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정신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더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 순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순화 운동을 기능적인 면에서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접근 방식을 간략하게 제시해 본다.

(1)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많은 동음이의어에 부딪힌다. 어느 언어든지 동음이의어는 있는 법이고, 맥락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의를 위하여 온갖 불편을 감수하자는 말로만 들린다. 잠시 동조할 사람은 있겠지만 언어 사용자 집단을 오래 묶어 둘 수는 없는 해석이다. 결국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순화가 필요하다고 보아야 한다. 한자어는 아무리 보아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은 동음이의어를 만들어 낸다.
(2) 한자어의 경우 한자를 잘 알면 의미 파악이 쉽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말하는가 하는 반문에 응답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한자 지식을 통해 한자어의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형태소의 의미를 쉽게 파악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형태소의 의미부터 배우는 것이 가장 허망하다. 무엇보다 어휘 의미를 알아내고, 그 사용법(화용적 의미)을 배워야 하고, 더 나아가 중요 용어일 경우에는 개념을 익혀야 한다.
오로지 한자 지식만 가지고는 학교(學校), 학원(學園, 學院), 학당(學堂), 학사(學舍) 등의 사용법을 배울 수 없다. 제대로 된 언어 교육을 통해 ‘형태소’ 아닌 ‘어휘’를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해야 ‘노인’이라는 말이 ‘나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 외에 당사자들이 언짢아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여복(女福)’이라는 말이 ‘여자의 행복’이라는 뜻이 아니라 마초(macho) 집단의 숨겨 둔 욕구를 담은 말이라는 ‘진실’에 빨리 접근한다. 다시 말해서 한자어의 한자 표기는 언어 능력 향상에 도움보다는 장애를 일으킨다. 융합된 어휘의 의미를 다시 부스러뜨리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화를 논할 때 한자어 가운데 형태가 충분히 고정되어 있고, 어휘 의미가 명백하고, 더 나아가 동음이의어도 없거나 충분한 변별력을 가지는 것은 확실하게 순화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더 낫다.
(3) 서구어에서 온 외래어는 형태의 고정이 매우 어렵다. 우선 우리말에 대응하는 요소가 없는 [v], [f], [ɵ], [ʤ] 등의 표기가 안정적이 못 된다. 또 대부분의 유성음이 된소리처럼 인식되면서 공식적 표기와 통속적 표기에 편차가 나는 수가 많다. 따라서 형태가 유동적이 되면서 다양한 변이형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의사소통의 공통성을 저해할 수 있는 요소이다.
(4) 외래어의 경우 의미의 고정도 불편한 점이 있다. 외국어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은 원어의 의미를 지키려 하고, 통속적으로 배운 사람들은 사용 과정에서 획득한 화용적 의미를 중요시한다. 원어를 배운 사람은 ‘와인’이란 말을 ‘식물의 열매를 담가 만든 술’로 넓게 이해하지만 통속적으로 배운 사람은 ‘포도주’의 서양식 이름이라고 알고 있다. 교육 수준에 따라 의미 해석에 차이가 나는 말은 당연히 ‘공용어’로서는 문제가 있다.
  순화의 전략에는 일차적으로 이러한 기능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접근만으로는 목표에 다다르기에 충분하지 않다. 순화가 가지는 높은 수준의 가치는 앞에서 언급한 합목적성을 충족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순화의 대상으로 삼는 한자어의 경우 그 의미가 전근대적인 요소를 지닌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복잡한 친족 관계를 표현하는 어휘나 신분 제도를 나타내는 말들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보아야 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은 순화할 필요도 없이 ‘옛말’ 항목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겠다. 이러한 말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지난날 표준어 사정 과정의 잘못이다. 표준어가 ‘현대’ 의식을 좀 더 분명히 했다면 이러한 전근대적 요소는 벌써 19세기 어휘 사전에 넣어 두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말 어휘의 한자어 비율이 반 이상이라는 계량적 주장에 대해 많은 회의를 느낀다.
  의사소통의 공통성을 강화하는 문제에서도 언어의 순화는 매우 중요하다. 이미 언급했듯이 한자어와 외래어는 지식 수준에 따라 형태와 의미의 굴절이 생기기 쉽다. 또 우리의 분단 상황과 맞물려 본다면 남북한의 의사소통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도 서로 언어적 공통성을 강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에 나가 있는 해외 거주자들과 한국계 외국 시민권자들(이른바 ‘교포’)과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 주는 기능도 필요하다.
  언어 순화는 사용자들로 하여금 ‘조어법’에 눈을 뜨게 한다. 조어법을 체득하면, 사물의 이름을 짓거나 그 속성을 파악하는 일이 매우 익숙해진다. 외래어가 많은 까닭도 조어법에 대한 자신감 부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적으로 본다면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요술이 아니라, 마찬가지의 사물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는 일 혹은 새로운 성격을 부여하여 언어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과 문화가 발전했다고 하는 것은 그 공동체 구성원들이 이렇게 창조적인 언어 능력, 곧 공동의 조어 능력을 가졌다고 재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남과 북의 서로 다른 세계관으로 나뉜 사회,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각각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에 모여 살고 있는 교포/교민 사회에서 공통의 언어 사용 능력과 조어 능력을 가졌다고 가상해 보자. 이 세상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사회와 문화 발전에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교두보가 확보된 셈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합목적성의 세 번째 항목인 가치의 문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요소이다. 최근에 거론되었던 사례를 중심으로 본다면, ‘동해’냐 ‘일본해’냐 하는 문제는 언어의 문제인 것 같으나 사실은 가치의 문제이다. 또 ‘행정 수도’냐 ‘천도’냐 하는 문제도 가치의 대립이 그 밑에 숨어 있음을 웬만한 사람들도 다 이해할 것이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는 그 가치의 요인을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일상어의 경우는 사용자들의 일상성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서는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 의식이 있어야 한다.
  서양식 외래어의 경우, 대응하는 우리말 어휘가 모자란 탓보다는 외래어 자체가 지니고 있는 가치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 ‘로드맵’이란 말은 ‘이정표’라는 말에 비해 그 어휘의 주도 세력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지배 상징이 더 큰 기능을 한다. 평범한 서민이 친구나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면 이정표가 필요하고, 권력 기구가 일반 대중의 삶을 규정하는 기획을 할 때에는 로드맵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 그 정책적인 기획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성을 배경으로 하여 형성되었다면, 그렇게도 멀리 있는 낱말을 빌려 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냥 이정표라고 하든지 아니면 ‘길차례’라고 새로운 말을 만들든지…….
  권력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익의 문제에서도 외래어는 예외 없이 위력을 발휘한다. 일반 소비자들은 ‘다방’보다는 ‘커피숍’에 갈 때에, ‘커피숍’보다는 ‘카페’에 갈 때에 더 많은 금전 지출을 각오한다. 목장에서 소의 ‘젖’을 짜서 공장에 보내면 용기에 담아 넣고 ‘우유’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놓는다. 그리고 이것을 서비스 업소에서 고객에게 ‘밀크’로 제공하면서 계속 부가 가치가 높아져 간다. 가난한 사람은 ‘단칸방’에 세 들고 부자는 ‘원룸’에서 사는 것을 언어를 통하여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곧 토착어에서 한자어로, 또 서구 외래어로 변신할 때마다 당당히 이윤을 더 비싸게 붙일 수 있는 위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사례는 외래어가 상품의 사용 가치보다는 교환 가치를 높이는 데에 이용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고객의 이익보다는 상품 제공자의 이익을 우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언어의 주인인 일반 대중의 의식에 내면화시키면서 손실을 입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순화는 당연히 고객의 이익, 소비자의 이익을 위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각성한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여기서도 왜 언어가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다시 언어 사용의 현장으로 눈을 돌리면, ‘명문 학교’, ‘잡상인’, ‘베이커리’, ‘블록버스터’ 등의 어휘 의미는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 말인지 눈에 띈다. 그리고 그 가치에서는 미래지향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부분이 보이게 된다. 언어의 순화는 바로 그 길목을 노려야 한다.
  여기서 고심해야 할 부분은 이렇게 숨을 길게 쉬며 실천적 운동을 맡아서 할 사람 혹은 집단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른바 ‘담당자’의 문제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일부 국어학 전공자와 일부 열정적인 동호인들을 중심으로 운동을 하다가 사회적 분위기가 우호적이면 일부 성공을 하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를 거듭해 왔다. 그러는 와중에 이미 우리 언어에는 과연 순화가 가능할까 하고 의심이 들 만큼 엄청난 순화 대상 어휘를 가지게 되었다. 결국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략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펼쳐 나갈 담당자 집단을 엮어 내야 하는 것이다. 이 집단은 무슨 사회적 결사 단체처럼 꾸릴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자신들끼리 고립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미 활동 중인 조직의 대부분이 처음 시작할 때에는 힘차게 ‘대중 속으로’ 뛰어드는 기개가 있었지만 조직이 완성된 이후에는 조직의 생존에 허덕이는 경우가 적잖이 눈에 띈다. 결국 자기들끼리의 결집은 강해지지만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어림도 없어진다.
  현 세기에서 볼 수 있는 사회 운동의 이점은 다양한 매체의 가능성에 있다. 매체는 서로 다른 집단을 이어 주고 연대를 가능케 한다. 지금까지 따로 고립되기 쉬웠던 전문가 집단, 사회 운동 집단, 동호인 집단 등을 엮어 내는 소통의 그물이 필요하다. 이 사이에서 이 문제에 관한 이념을 정리하고 구체적인 실천 항목을 추려 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략의 이행을 보장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계이다.


5. 맺는 말

  언어 순화는 우선 그 목적과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한다. 현재와 같이 외래적 요소를 무조건 박멸하자는 태도부터 꼭 문제가 있는 부분만 하자는 태도가 뒤섞여 있고, 토착어 살리기만이 아니라 정신을 순화하고 비속어까지 청산하자는 주장이 뒤엉킨 상태로는 구체적인 실천이 불가능하다.
  진정 필요한 것은 ‘서로 합의된 이상(Idea)과 방향성(Orientation)’을 세우는 일이고, 거기서 운동의 합목적성을 찾아내야 한다. 합목적성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당연히 다르거니와 우리의 경우는 미진한 근대화의 완성, 불완전한 공통성의 성취, 그리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가치의 구현이라고 제안해 본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순화’라는 이름 아래 수행되어 온 모든 긍정적, 부정적 현상의 핵심에는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는가를 파악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른바 ‘토착어’에 대한 지나친 감성적 쏠림 현상은 반성할 여지가 많다. 토착어는 형태적으로나 의미적으로 매우 유용하면서도 통속어 혹은 사투리로 다루어져 변두리에 밀려 있던 어휘를 재발견하고 어휘 유통의 순환 고리에 올려놓는 경우에 큰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형태나 의미의 유용성도, 무슨 용도인지도 확실치 않은 어휘를 가지고 어거지 조어를 남발한 것은 역으로 우리말의 발전에 해를 끼쳤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거지 조어는 언어 대중이 외면하여 자연히 소멸될 수밖에 없겠지만 순화 운동의 흐름을 교란하고 일반 대중의 관심을 식어 버리게 한 과오는 지적해 두어야 한다.
  토착어에 대한 쏠림은 역으로 한자어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동반한다. 여기에서도 당연히 순화 대상의 폭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사실상 우리말에 정착된 어휘도 발본색원하려 한다면 역시 언어 대중의 지지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두 가지 상반된 흐름은 운동의 방향성을 심하게 왜곡시키는 원인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애당초의 이상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가서 근본 방향을 재조정해야 한다. 그것은 사회적 변화에 부응하는 언어의 발전 문제로 귀착시키는 것이 올바른 시각이 아닐까 한다. 언어 발전(Language development)에 대한 논의는 이 지면에서 논의를 이어갈 형편은 못 된다. 이에 대해서는 ‘죠수어 A. 피시먼(Joshua A. Fishman)’의 연구 결과물을 광범위하게 참조하는 것으로 줄일 수밖에 없다. 언어 발전론은 한 사회가 시대적 변화를 겪어 가면서 어떠한 필연적 변화 혹은 조치를 통해 새로운 언어로 거듭나게 할 것인가 하는 논의를 중심으로 일종의 언어 정책론(Language Policy)과 언어 계획론(Language Planning)의 기본 바탕을 이룬다.
  한국어의 순화 운동은 넓은 틀에서 언어 발전의 한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순화 작업은 순수 토착어냐의 여부보다는 우리의 사회와 역사가 발전하는 데에 언어가 어떤 구실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것의 형태와 의미가 시대적 조건에 맞게 변화해야 하며, 또한 한국어화(Koreanization)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한국어화를 한다는 것은 그 형태가 한국어의 사용 방식에 적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논점에서 조금 벗어난 예로 외래어 표기 역시 이러한 방향성을 지녀야 할 것이다. 또, 한국어화를 한다는 것은 그 의미 역시 현 세기의 한국어가 표현해야 할 것을 담당해 준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국어 순화의 정신적 동기는 우리의 언어가 다가오는 새 시대에 걸맞지 않다는 위기의식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어학 전문가들의 소임과 기능 역시 일정한 한계를 긋든지 아니면 낡은 이론의 틀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틀을 찾아나서야 한다. 지금 국어학적으로 순화 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는 낡은 시각은 언어 변화는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잘못된 의식과 어휘의 내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형태소에서 출발한다는 고정관념, 그리고 어휘의 정당성을 ‘어원’에 지나치게 기대려 하는 자세 등이라고 생각한다. 심하게 표현한다면 어원은 하나의 상상력에 가깝다. 전문가의 상상력은 문헌이나 물증에 기대는 소극적이고 속박된 것이지만 대중의 상상력은 유추를 이용하는 적극적이고 자유스러운 활동이다.
  결론은 순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해 온 사람들의 자기 반성, 이것이 역사 속에 이 운동의 정당성을 지켜 줄 첫 번째 고리가 아니겠는가?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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