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어에 대한 중국어의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나 한국어 속의 한자어(漢字語)를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한자(漢字)라는 문자와 결부되어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 중국어의 영향은 한자어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문자와 직접 관계없이 들어온 단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세계의 여러 언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차용어(借用語)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어의 역사적 연구에서 우리가 자주 보는 중세어 및 근대어 문헌에 이런 차용어들이 겅성드뭇하다. 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입성 운미(入聲韻尾 -k, -p, -t)가 없어진 사실을 들 수 있다. 중국어의 역사에서 이 운미의 약화는 당(唐) 말기, 오대(五代)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중국어 학자들은 이 무렵부터 근세(近世) 시기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때 이후에 들어온 단어들을 나는 ‘근세중국어 차용어’라고 불러 왔다. 내가 이 말을 처음 쓴 것은 1965년이었다(「근세중국어 차용어에 대하여」,
『아세아연구』 8권 2호). 다만 중국어의 근세 시기가 한국어의 중세와 근대 시기에 걸치므로 혼동의 염려가 있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한다.
나로 하여금 근세중국어 차용어에 눈을 뜨게 한 것은 방종현(方鍾鉉) 선생이 돌아가신 뒤 선생의 글들을 모아 책을 엮으면서 발견한 「빙자떡」이란 제목의 짧은 초고(草稿)였다(『일사국어학논집』, 1963, 259∼262면). 근대어 문헌에 보이는 ‘빙쟈’가 중국어 ‘餠食者’(빙져)의 차용어임을 논한 것이었다. 비록 수필체로 쓰인 짤막한 글이었지만, 내가 국어학을 전공한 뒤에 읽은, 가장 인상 깊은 글 중의 하나였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이런 예들을 수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황윤석(黃胤錫)의 「이수신편」(理藪新編)을 소상히 검토한 이숭녕(李崇寧) 선생의 논문(도남 조윤제 박사 회갑 기념 논문집, 1964)을 읽고 「이수신편」(권 20, 58장)에 이런 차용어의 목록이 있음을 보게 되었고, 뒤이어 정약용(丁若鏞)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많은 예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방면의 선구적 업적이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권 25, 44∼45장)에 담겨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여러 해가 지난 뒤의 일이었다. 여기서 「이수신편」의 목록은 「반계수록」의 것을 그대로 베끼고 끝머리에 몇 예를 덧붙인 것임을 발견하고 내 만각(晩覺)을 뉘우쳤었다. 지금 찾아보니 1990년에 대북(臺北)에서 발표한 내 논문[「有關韓國語和中國語的接觸」,
『韓國學報』 10, 中華民國 韓國硏究學會. 한국어로 쓴 원고는
『국어 어휘사 연구』(1991)에 수록됨]에서 「반계수록」 이야기를 한 것이 눈에 띈다.
2.
차용어가 민간 어원의 대상이 됨은 지난번의 내 글(승기악탕)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위에 든 방종현 선생의 글에서 해방 뒤 서울의 뒷골목에 ‘빈자떡’, ‘빈대떡’의 ‘빈자’를 ‘貧者’라, ‘빈대’를 ‘賓待’라 써 붙인 것을 들었음은 매우 인상적인 예라 하겠다. 흰 종이쪽이나 신문지 조각에 이렇게 써서 붙인 가게를 나도 오가는 골목길에서 가끔 보았었다. 그때마다 이 가난뱅이의 음식조차 살 수 없는 내 빈 주머니를 한탄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이들 한자 표기는 현대판(現代版) 민간 어원의 예로서 이 현상의 발생 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방종현 선생의 글은 지금 보아도 별로 손댈 곳이 없지만 몇 가지만 보충하기로 한다. 첫째, 근대어 문헌에 적힌 어형은 ‘빙쟈’였다. 「역어유해」(上 51)와 「방언유석」(2.30)에서 볼 수 있다. 이 두 책에 표기된 중국어 ‘餠食者’의 발음은 ‘빙저, 빙져’였다. 「과정일록」(課程日錄 坤 24)에도 ‘餠食者 빙쟈’가 보인다. 여기서 둘째 음절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 「광재물보」(廣才物譜, 권 2, 음식)에 ‘餠食者 빙’, 「한영뎐」(韓英字典, 1897)에 ‘빈쟈’, 광문회(光文會)의 「사전」 필사본(김민수 편, 「주시경전서」, 권 5, 662면)에 ‘빈자’이 보인다. ‘빙쟈’ 아닌 ‘빙’, ‘빈쟈’, ‘빈자’라 표기된 사실과 ‘’이 붙은 사실이 눈길을 끈다. ‘빙쟈’의 정체성(正體性)이 모호해져서 그것을 보강하기 위해 ‘떡’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셋째, ‘빈대떡’이 언제쯤 어떻게 나타났는지 밝혀진 바 없다.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말이 사전에 실리기는 문세영의 「조선어사전」(1938)이 처음인 듯하다는 사실뿐이다. 20세기 초엽의 문헌들을 널리 검색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오래전에 신문에서 ‘빈대떡’의 ‘빈대’가 해충의 이름과 관계가 있다는 이규태(李圭泰) 선생의 글을 읽은 뒤에 매우 그럴싸하게 생각하여 왔다. 이 음식의 모양이 납작한 데서 이렇게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옳은 추측이라면, 아무리 서민의 음식이라 해도 고약한 해충의 이름을 붙인 것은 조금 너무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빈자’를 이해할 수 없어 그것을 ‘빈대’로 고쳤다면 이 역시 어김없는 민간 어원의 한 예가 되는 것이다.
넷째, 오늘날 ‘빈대떡’이 표준어로 인정되고 있다. 1936년의 표준어 사정(「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에서는 이 말이 빠졌었는데 1988년의 표준어 규정(24항)에서 ‘빈대떡’을 표준어로, ‘빈자떡’을 비표준어로 인정한 것이다.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빈자떡’을 누르고 정체불명의 ‘빈대떡’이 표준어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래 써 온 ‘빈자떡’을 오늘날 잘 쓰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주 버린 것은 지나친 현실주의라는 빈축을 살 만하다. 어감(語感)이나 좋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 ‘빈대떡’을 단일 표준어로 삼은 것은 적절한 처사라 보기 어렵다.
다섯째, 이 음식이 우리나라의 여러 지방에 언제, 얼마나 보급되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음식이 평안도에서 가장 잘 보급되어 왔다, 그것은 중국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져 왔다. 그런데 정작 평안도 방언에서는 ‘빈자떡’이나 ‘빈대떡’은 쓰이지 않고 ‘지짐’, ‘녹두지짐’, ‘부침’이라 하니 기이한 느낌이 든다. 나는 ‘빈자떡’, ‘빈대떡’이란 말을 해방 뒤 서울에 와서 처음 알게 되었다.
3.
「훈몽자회」에 ‘변시’가 보인다. “飩 만두 둔 餛|卽변시”(초간본 中 10, 개간본 中 20). 이 어항 바로 앞에 ‘餛 만두 혼’이 있으니 ‘변시’는 만두의 일종을 가리킨 말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말은 근세중국어 ‘匾食’의 차용어였다. 「역어유해」(上 51)의 ‘匾食 변시’가 이 차용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여기에는 ‘匾食’의 중국어 발음이 ‘변시’라 표기되어 있어, 이 발음이 그대로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한청문감」(12.45)에 ‘扁食 변시’, 「방언유석」(2.29)과 「과정일록」(坤 24)에 ‘匾食 변시’, ‘餛飩 쟈근 변시’, 「화어유초」(30)에 ‘匾食 변시’라 한 것을 보면 19세기까지도 ‘변시’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근세중국어 차용어는 처음에는 중국어 발음으로 차용된 것이라도 그 한자의 우리나라 발음으로 고쳐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음을 우리는 여러 예를 통하여 알고 있다. 이에 비추어 ‘변시’의 ‘匾’(扁)도 ‘편’으로 고쳐질 가능성이 있음을 점쳐 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편시’가 「구급간이방」(3.73)에서 발견된다. ‘餛飩’이 ‘편시’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예를 처음 보았을 때 조금 당황했었다. 「구급간이방」은 성종 20년(1489)에 처음 간행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책은 초간본은 아니지만 아무리 늦추 잡아도 16세기 중엽에 나온 중간본으로 추정되는 것이다[안병희,
『국어사 자료 연구』(1992), 527면 참고]. 여기서 ‘편시’가 좀 이른 시기에 나타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변시’의 차용이 우리가 문헌(「훈몽자회」)에서 보는 것보다 앞선 시기에 일어난 것으로 보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아마도 전기 중세어의 시기에 중국어의 ‘匾食’가 ‘변시’로 차용되었고 그 뒤에 우리나라 한자음의 개입으로 ‘편시’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도리어 「구급간이방」 이후의 어느 문헌에도 ‘편시’라 표기된 예가 도통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위에서 든 것처럼 ‘변시’는 더러 있는데 ‘편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겨우 발견한 것은 「광재물보」의 ‘匾食 편슈’(권 2, 음식)였다. 필사본으로 가람문고(서울대학교) 소장인데 그 편자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보아 19세기에 들어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 나타난 것은 ‘편시’가 아닌 ‘편슈’여서 우리를 적이 당황하게 한다. 어떻게 해서 ‘시’가 ‘슈’로 바뀌었는지 얼핏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오기(誤記)가 아님은 그 뒤의 문헌들에 이 단어가 ‘편슈’(「한불뎐」 359면, 「한영뎐」 469면), ‘편수’(「국한회어」, 691면)로 나타남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예들에 대해서 할 말이 없지 않지만 생략하기로 하고, 이들에 ‘䭏水’란 한자 표기가 있음을 지적하기에 그치려 한다. 위의 세 책에 다 이 한자 표기가 있음은 이것이 당시에 사회 일부에서 행해졌음을 짐작케 한다. 우선 ‘匾, 扁’ 아닌 ‘䭏’을 썼음이 특이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우리나라 속자(俗字)로 떡을 가리키는 ‘편’을 나타내는 글자였다.[최남선의 「신자전」(新字典) 끝에 붙어 있는 ‘조선속자부’(朝鮮俗字部)의 “䭏 餠也 見俗書” 참고]. 그리고 ‘水’는 아마도 이 음식을 냉국에 넣어 먹은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민간 어원으로 이런 한자어로 해석한 것은 조금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조선 총독부의 「조선어사전」의 ‘편수’ 항에 이 한자 표기를 넣지 않았음은 필시 이런 느낌 탓이 아니었던가 한다.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이 이를 따랐고 한글학회의 「큰 사전」을 비롯한 여러 사전들이 그 뒤를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사전들의 ‘편수’ 뜻풀이 중에서 「큰 사전」(권 6, 3241면)의 것이 가장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변씨 만두’를 ‘편수’의 동의어(同義語)로 든 것이 눈길을 끈다. 이 사전(권 3, 1334면)에는 ‘변씨만두’가 표제어로 제시되어 있다. 이 말이 사전에 실린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다만 위의 두 곳에서 띄어쓰기가 서로 다르게 되어 있는데, 의당 붙여 써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말은 본래 위에서 말한 중세어, 근대어의 ‘변시’와 ‘만두’가 복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복합어에서 ‘변시’가 ‘변씨’로 변한 것이다. ‘변씨’(卞氏) 성을 가진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어원 인식이 이런 변화를 낳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종(顯宗) 때의 서유구(徐有榘)가 「임원경제지」(林園 經濟志) 속의 ‘정조지’(鼎俎志)에서 지적한 일이 있고 순조(純祖) 때의 홍석모(洪錫謨)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메밀가루를 써서 만두포를 만들고 채소, 파,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두부를 소로 넣고 장국에 익혀 먹는다. 또한 밀가루로 세모 모양을 만든 것을 변씨만두(卞氏饅頭)라 한다. 대개 변씨(卞氏)가 처음 만든 것이어서 이 이름을 얻은 것이다.” |
한국어의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어떤 단어가 단독으로 쓰인 경우와 복합어의 일부가 된 경우에 서로 다르게 변화하는 일을 종종 보게 된다. ‘변시’도 이러한 예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중세어의 ‘변시’가 단독으로 쓰인 경우에는 ‘편시’를 거쳐 ‘편수’가 되었는데 복합어에서는 ‘변시’가 그대로 유지되다가 ‘변씨’로 변한 것이다. 서로 방향은 달랐지만 민간 어원의 개입을 입은 점에서는 다름이 없었다.
4.
지금까지의 서술을 통하여 우리는 ‘빙쟈’와 ‘변시’가, 근세중국어 차용어로서, 이러한 차용어에 흔히 일어나는 여러 유형의 변화를 고루 겪어온 사실을 볼 수 있었다. 이 차용어들은 원체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끝으로 이 ‘빈쟈’와 ‘변시’가 근대어 후기(18, 19세기)에 ‘떡’과 ‘만두’와 합하여 복합어를 형성하기에 이른 사실에 대하여 한마디 덧붙이려 한다. 이렇게 복합어를 형성하게 된 근본 원인은 언중(言衆)의 의식 속에 이들 단어의 본뜻이 흐릿해진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은가 한다. 무엇인지 딱히 알 수 없는 말 뒤에 그것이 가리키는 물건이 속한 종개념(種槪念)이나 유개념(類槪念)을 나타내는 말을 붙임으로써 그 말의 이해에 도움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해서 그 말에 안정성(安定性)을 주려고 했던 것이리라. 그런데 이러한 복합어의 형성이 이번에는 ‘빈자’와 ‘변시’에 대한 민간 어원의 발동을 자극하게 되었다. ‘떡’과 ‘만두’ 앞에 놓인 수식어로 인식된 나머지, ‘빈대’와 ‘변씨’로 바뀌게 된 것이다. 안정성을 확보한다고 했던 일이 도리어 엉뚱한 변모를 부추기는 결과가 된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세상사(世上事) 돌아가는 이치의 일면을 보는 듯하여 씁쓰레한 입맛을 잠시 다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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