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제1차 국어발전 기본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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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어 규정의 몇 가지 문제 사례

손중선∙대구대학교 영어교육과 조교수

  현 표준어 규정과 사전의 일부가 실생활과 다르게 되어 있어 여러 가지 문제를 낳고 있다. 그중에서 몇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네 가지인데, 띄어쓰기와 우리말의 호흡과 가락의 문제, 변화하는 문법의 문제, 사투리 문제, 그리고 순화 혹은 조어의 문제를 사례를 하나씩 들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1. 띄어쓰기 그리고 호흡과 가락

  “‘해 질 녘’으로 띄어 써야 합니다. ‘해 지다’는 한 단어가 아니므로 띄어 써야 하고, ‘녘’은 어떤 때의 무렵을 뜻하는 의존 명사입니다. 그러므로 ‘해 질 녘’으로 띄어 씁니다.”

  ‘해가 질 무렵’을 가리키는 말을 ‘바르게’ 띄어 쓰는 법을 가르쳐 주는 국립국어원의 인터넷 답글이다. 우리말이 지닌 호흡과 음악성은 언어 정책의 고려 대상에서 제외된 듯하다. 그로 인해 우리말의 호흡은 거칠어졌고 가락은 생기를 잃어버렸다.
  호흡과 가락이 무시된 데는 우리 자신의 문법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정립되지 못하고 주로 형태의 관점에서 문법을 설명하는 서양 이론의 도입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표준어 규정을 개정하게 된 88올림픽을 기점으로 그 호흡과 가락은 더욱 거칠어졌다. 어지간하면 띄어 쓰도록 ‘편리하고 쉽게’ 정함으로써 호흡과 가락으로 우리말의 멋을 부릴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컴퓨터의 맞춤법 기능의 발달로 호흡과 가락을 무시한 띄어쓰기는 극에 달한다. 사람들은 글을 쓰다 빨간 줄이 그어지면 불안해한다. 빨간 줄이 그어지지 않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띄어 쓰는 것이다. 빨간 줄이 그어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비로소 안심한다. 교과서류를 제작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없어 띄어쓰기를 남발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석기시대’마저 ‘석기 시대’로 띄어 써야 안심하는 사람들이니까.
  ‘해 질 녘’과 ‘해질녘’의 차이는, 전자는 노래 가사를 한 자 한 자 읽는 것이고, 후자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 하면 될 성싶다. 우리말의 호흡과 가락을 되살렸으면 한다. 우리말의 큰 특징인 모음조화, 의성어와 의태어, 긴말과 준말 등이 다 호흡과 가락을 살리고자 한 것이며, 이들을 통해 어휘도 확장되어 왔다. 반면에 표준어 규정을 통해 이들은 흩어지고 사그라들었다.
  의존 명사는 의존한다 하여 의존 명사이건만 의존할 수 없게 해 놓았다. 의존 명사는 의존하여 붙어 있을 때 우리의 호흡과 가락이 부드러워진다. ‘할 수 있다’보다는 ‘할수 있다’가 우리의 호흡을 덜 거칠게 한다. ‘될 성싶다’보다는 ‘될성 싶다’가, ‘가는 듯하다’보다는 ‘가는듯 하다’가 더 호흡을 안정되게 한다. ‘성싶다’, ‘듯하다’, ‘듯싶다’의 ‘성’과 ‘듯’은 보조 형용사라는 이름의 ‘하다’와 ‘싶다’에 묶이고, ‘본 듯 만 듯’의 ‘듯’은 의존 명사고, ‘나는 듯’의 ‘듯’은 부사 ‘듯이’가 줄어든 것이라고 규정하는 인조 문법은 우리를 숨차게 한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니 다르게 보여야 한다는 소신은 우리말의 가락을 헛되게 한다. 띄어 써도 되고 붙여 써도 되는 여유가 그립다.
  아래는 웃자고 지은 것이지만 규정대로 띄어 쓴 것이다.

  ‘해 질 녘 달 뜰 녘에 천 리 길 갈 듯 말 듯 못 갈 것 같다’


2. 모밀꽃 필 무렵과 메밀꽃 필 무렵

  가산 이효석(可山 李孝石, 1907∼1942)의 “메밀꽃 필 무렵”을 읽어 본 지가 참 오래되었다. 달 밝은 여름밤 메밀꽃이 만발한 개울가, 허생원이 멱을 감을 요량으로 옷을 벗으려 방앗간에 들어갔다가 그 안에서 울고 있는 한 처녀와 마주치고, 이차저차 정까지 맺게 되는, 촌내 물씬 나는 첩첩산골 연애 이야기가 향수처럼 아련하다. 강원도 평창에서 나귀에 짐을 얹고 봉평장으로 가는 저녁 달빛에 만발한 메밀꽃밭이 마치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하여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대목은 이 소설의 압권처럼 여겨지는 풍경 묘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단편 소설의 원제목은 “렵무필꽃밀모”이다. ‘메밀’이 아니고 ‘모밀’이다. 헷갈림을 막는다는 무감성(無感性)의 표준어 규정에 의해 ‘모밀꽃’으로 남지 못하고 ‘메밀꽃’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해마다 가을이면 열리게 되는 봉평의 축제마저 표준 공무원들에 의해 <메밀꽃 축제>가 되어 버렸다.
  사투리냐 아니냐, 사투리면 어디 사투리냐를 따지는 경우들을 보면 얼른 믿기지 않을 때가 자주 있다. ‘모밀’은 강원도와 함경도 사투리라 하는데 믿음이 별로 가지 않는 주장이다. 전라도에서도 경상도에서도 ‘모밀’은 지금도 흔히 들을 수 있는 이름이다. 설사 그 이름이 모밀의 본고장인 강원도나 함경도 ‘두뫼산골’에서 퍼져 나간 것이라 해도, 전국 분포로 봐서는 얼마 전까지 ‘모밀’이 더 흔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니 “‘모밀’은 토속적인 향기가 나고 ‘메밀’은 가공 공장을 거쳐 나온 듯한 기계적인 맛과 느낌을 준다”라는 어느 글쓴이의 말에 정이 간다.
  ‘모밀’의 원래 모습은 ‘뫼밀’이다. 산에 나는 밀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ㅚ’는 국제 음성 기호로 표기하면 /œ/가 된다. 즉, ‘ㅗ’와 ‘ㅔ’ 두 소리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소리가 바뀌게 되면 두 방향으로 갈 수 있는데, 그 하나는 ‘ㅗ’이고 또 하나는 ‘ㅔ’이다. 이런 연유로 ‘모밀’과 ‘메밀’ 두 이름이 혼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상 그 분포가 강원도, 함경도에 국한되지 않고 고루 나타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근대의 경향으로 봐서는 ‘ㅚ’가 ‘ㅔ’로 바뀌는 일이 훨씬 잦은 건 사실인 듯하다. ‘멧돼지’, ‘멧새’, ‘멧짐승’, ‘멧부리’ 등이 그렇고 ‘메아리’의 ‘메’도 그렇다.
  ‘모밀’ 이외에 ‘뫼’가 ‘모’로 바뀐 경우로, ‘메추리’의 고어로서 ‘뫼차라기’, ‘뫼초라기’ 등과 함께 ‘모추라기’, ‘모라기’, ‘모치라기’를 찾아볼 수 있다. 또 ‘뫼’와 동의어로 ‘모로’가 고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한편 필자는 ‘모나다’, ‘모가 지다’의 ‘모’가 ‘뫼’와 그 뿌리를 같이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묏골(=산골)’이 있는데, 안으로 파이면 ‘골이 지’고, 위로 솟으면 ‘모가 지’게 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에서 ‘모로 가도’는 어원상 (길로 가지 않고) ‘산으로 가도’의 뜻은 아니었을까. 물론 이 말이 생겨난 시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투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규정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도 가두지 않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피 같은 많은 우리말이 죽임을 당한다. ‘모밀’과 ‘메밀’처럼 자연스레 일어날 수 있는 복수 변화는 어설프게 조사된 사투리를 핑계로 함부로 한쪽을 쳐낼 일이 아니다. ‘모밀’이라고도 하고 ‘메밀’이라고도 한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굳이 정오(正誤)의 잣대로 헷갈림을 유도하기 때문에 헷갈리는 것이다.
  어차피 헷갈릴 일도 없는데 “모밀꽃 필 무렵”으로 그냥 두면 원작의 깊은 산골 흐뭇한 꽃냄새가 더 물씬할 것을……. 참으로 아쉽다.


3. ‘내노라’와 ‘내로라’

  ‘내노라하는 사람들’은 틀리고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맞다 한다. 그런데 ‘내로라’의 문법은 오래전에 죽은 규칙의 망령(亡靈)이다. 현재 언어 생활의 문법에서는 ‘내노라’이다. 현행 표준어 규정은 그것이 망령이 아니라 실체라고 고집하고 있을 뿐이다.
  비록 ‘-러라’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내로라’ 같은 말이 과거에 흔히 있었음을 1920년대를 대표하는 다소 퇴폐적인 시 중 하나인 소월(素月)의 「비단 안개」가 보여 준다.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만나서 울던 때도 그런 날이오,
그리워 미친 날도 그런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홀목숨은 못살 때러라.
눈 풀리는 가지에 당치맛귀로
젊은 계집 목매고 달릴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종달새 솟을 때러라.
들에랴, 바다에랴, 하늘에서랴,
아지 못할 무엇에 취(醉)할 때러라.

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
첫사랑 있던 때도 그런 날이오
영 이별 있던 날도 그런 때러라.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소월 시의 ‘때러라’는 ‘때(이)노라’와 상당히 다른 어감을 지닌다. ‘때노라’가 풍기는 근엄함 혹은 엄숙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도 어느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리다고 할 수만도 없다.
  망령의 모습은 이러하다. 문화관광부의 중세 국어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자세한 설명은 이해하기 어려우니 핵심만 간단히 말하면, 소위 서술격 조사라 부르는 ‘이다’의 ‘이’와 형용사라 불리는 ‘아니다’의 ‘아니’에는 ‘-로라’가 오며(‘이로라’, ‘아니로라’), 일반 동사에는 ‘-노라’가 온다(‘가노라’, ‘부르노라’)는 것이다. 소월 시에서 ‘때러라’는 ‘때이러라’가 준 것이다. 그리고 ‘내로라’의 ‘내’는 ‘나(我)’와 서술격 조사 ‘이’의 결합이 줄어든 형태이니 ‘-로라’가 붙는 게 맞다고 할 것이다.
  현대의 모습은 이렇다. 여전히 조금은 예스러운 말이지만, 서술격 조사 ‘이’는 ‘-노라’ 혹은 ‘-로다’를 취하고(‘때이노라’, ‘때이로다’, ‘나이노라’, ‘나이로다’), 일반 동사는 과거처럼 여전히 ‘-노라’를 취한다. 과거형 어미 ‘었’이 붙으면, ‘-노라’만 취한다(‘때이었노라’). 바로 여기에 서술격 조사 ‘이’도 ‘-노라’를 취하게 된 연유가 있는 듯하다. ‘서술격 조사’, ‘(일반) 동사’라 이름 하니 이 둘이 매우 다른 듯 보이지만 사실은 둘 다 결국 동사다. 동사냐 아니냐를 판가름할 때 가장 결정적인 판단 기준은 시제를 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동사 ‘이’는 시제 어미를 취할 수 있으므로(‘이다’, ‘이었다’) 당연히 동사의 범주에 드는 것이다(굳이 영어를 예로 들자면 be-동사와 일반 동사의 차이와 유사하다). 그러니 ‘-로라’가 과거에는 그랬을망정 시간이 흘러 일반 동사처럼 ‘-노라’를 취하게 되는 유추 현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유추 현상은 진작 시작되었고 정착된 지 오래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미 늙어 가고 있다.
  오늘날 ‘이게 바로 내가 꿈꾸던 세상이노라/이로다’라고 말하지 ‘……이로라’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이고, 또 그러한 변화가 결코 오염이 아닌 이상 죽은 망령에 얽매여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내로라’ 같은 규정의 고집이 아직은 살아 있는 다른 모든 경우의 ‘……노라’마저 단명(短命)케 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입에서 나오지 않는 말(‘내로라’)은 표준어라 강요하고, 입에서 나오는 말(‘내노라’)은 틀린 말이라 함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결국 둘 다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키는 대로 따르면 되지 않느냐.”라는 말은 사람의 마음, 나아가 언어의 마음을 읽을 줄 모르는 지극히 기계적이고 산술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우리말 발전을 저해하는 말이다.

4. ‘모둠’과 ‘모듬’

  요즘 초중고 수업 자료에 조(組)에 해당하는 순수한 우리말로 ‘모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식당 같은 곳에서 쓰이는 ‘모듬’과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국립국어원은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효율적인 학습을 위하여 학생들을 대여섯 명 내외로 묶은 모임을 이르는 말은 ‘모둠’”이며, “‘모듬’은 ‘모임’의 잘못”이라 답한 적이 있다. 표준어사전에는 ‘모듬’은 ‘모둠’의 잘못이라 나와 있다. ‘조’ 혹은 ‘그룹’을 대치하는 말로 ‘모둠’을 택하여 보급한 듯한데, 학교 등에서 하는 조별(組別) 활동의 문맥에서는 ‘모둠’이든 ‘모듬’이든 둘 다 맞지 않다.
  첫째, 어원을 따지자면 ‘몯다’가 원형인데, 박재연의 고어사전에 제시된 용례들을 보면 모두 ‘모드다’의 이(異)형태로 쓰이고 있고, 따라서 명사형은 당연히 ‘모듬’이다(예.  에 쥬대인 부듕으로 서로 “모드” 구하노라). 그런데 ‘몯다’가 ‘모드다’로 활용되고 ‘ㄷ’이 사라지면서 타동사 ‘모으다’가 생겼다. ‘ㄷ’의 잔재로 ‘모두’, ‘모든’ 그리고 음운 변화를 거친 ‘모조리’(경상도 방언의 모지리<몯이리) 등에 남아 있다. ‘모듬’도 그 잔재 중 하나다. 그러니 ‘모듬’은 ‘모임’의 잘못이라 할 수도 없다.
  발음 측면에서 ‘모드다’와 ‘몯우다’(혹은 ‘모두다’)가 혼재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어에 ‘모우다’가 없고 ‘모으다’가 쓰이고 있는 것을 봐서도 ‘ㅡ’로 평정이 되었고 따라서 ‘모둠’이 보편적일 리 없다. 식당이나 시장 몇 군데만 돌아보면 해답은 간단히 나온다. ‘모듬’이다. 
  둘째, 이건 더 심각한 문제인데, ‘모듬’은 현대 국어에서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지 않는 말이다. 횟집 같은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다. 경상 방언에서는 ‘몯우다’가 아직도 가끔 쓰이고 있으며 사람에게도 쓰인다. 하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거의 쓰이고 있지 않다. ‘몯우다’에서 파생되었을지도 모르는 말로 ‘모둠꽃밭, 모둠냄비, 모둠매(뭇매), 모둠발’ 등이 현대 사전에 올라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 적용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모듬’은 종류가 같은 것들을 모아 놓은 집합이 아니고 종류가 다른 것들을 모아 놓은 집합을 가리킨다. 횟집에서 돔, 광어, 우럭 등이 한 접시에 섞여 나오는 것이 모듬이며, 일회용 반창고가 긴 것, 짧은 것, 넓은 것, 좁은 것들이 섞여 있는 것이 모듬이며, 한 종류가 아닌 여러 종류의 콩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 바로 모듬(assortment)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조를 짜는 일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설사 어린아이들과 어른들, 남자와 여자를 고루 섞어 조를 짰다 하더라도 그건 모듬이 아니다. 사람에겐 모듬이란 말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짐승들한테도 쓰지 않는 말이다. 한자어나 외래어를 순화한다지만 전혀 뜻이 다른 말을 정하고서 교과서에까지 퍼트려 쓰라는 것은 우리말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