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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우리 시의 향기 
  90 소년 시인의 아름다운 회향(廻向), 황금찬

김재홍·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1.

사연은 없고
두 장의 꽃잎
천사의 마음이면
읽으시리다.
                 ―황금찬, 「편지」


  여기 90세가 넘어서도 소년의 심성으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노시인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연 연령 90까지 사는 일만도 쉽지 않은 일인데, 90 넘어서까지 예술가가 활발하게 창작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에 분명합니다.
  황금찬(1918~ ) 시인이 바로 그분입니다. 그는 올해 만 90세를 맞이한 생존 중인 최고 원로 시인이자 오늘날에도 여전히 건강을 유지하면서 수준 있는 작품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현역 시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1947년 『새사람』, 『기독교 가정』 등에서 시작 활동을 시작하고 1953년 『문예』와 1955년 『현대문학』으로 재등단하여 60년 이상 시인으로 활동해 왔습니다.
  우리 시단에선 일찍이 소월, 고월 그리고 이상, 윤동주에 이르기까지 요절 시인 또는 단명한 시인들이 비교적 많았음에 비추어 그의 장수와 꾸준한 창작 활동은 분명 하나의 소중한 전범이고 진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간략하게나마 연부역강을 비는 뜻에서 그 시 세계를 엿보기로 합니다.


2.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개, 보릿고개의 서정

  그 고개, 보릿고개를 아시나요?
  이 세상에서 가장 높다고 하는 에베레스트 산이나 몽블랑, 킬리만자로보다도 높아서 넘기 어렵던 우리나라의 산 고개 말입니다.
  지난해 농사져서 먹던 겨울 양식은 이미 다 바닥나 버리고 보리쌀을 수확하기까지 참고 견뎌야 했던 그 높고 험하던 죽음의 고개 말입니다. 그 보릿고개를 노래한 우리의 소중한 시인이 한 분 계시지요. 바로 황금찬 시인 말씀입니다. 

보리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블랑은 유럽,
와스카라는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코리어의 보리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어의 보리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보리고개」


  그런 우리 민족의 애달픈 사연이 있기에 시인은 이 보릿고개, 산 고개를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발 구천 미터”로 어림짐작하고 있군요.
  이 땅 척박한 역사, 헐벗은 산하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울며 넘은 고개, 채 넘지도 못하고 죽어간 죽음의 산 고개가 바로 배고픔의 고개, 보릿고개인 것이지요. 그래서 시의 화자인 소년에게는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처럼 환각과 절망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 이 땅 척박한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우리 조상들이 이 고개 앞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다가 한 줌 흙으로 사라져 갔는지요. 정말 안타깝고 서러운 마음입니다.


3. 자연 서정, 순수 서정의 세계

  그런가 하면 황금찬 시인은 우리 시의 전통적인 혈맥인 자연 서정, 전원 서정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맑고 순수한 사랑의 시심을 간직하고 있어서 관심을 끕니다. 

봄비 속에
너를 보낸다.

쑥순도 파아란히
비에 젖고

목매기 송아지가
울며 오는데

멀리 돌아간 산굽잇길
못 올 길처럼 슬픔이 일고

산비 
구름 속에 조는 밤

길처럼 애닯은
꿈이 있었다.
                              ―「보내 놓고」


  혜화동 로터리 커피집 ‘엘빈’에 가면 자주 거기 그렇게 커피향에 젖어있는 노시인을 만나게 되곤 하지요. 바로 황금찬 선생님 말입니다.
  이 분은 옛날에도 그러했겠지만 지금까지도 소년같이 맑은 서정을 간직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입니다. 안시(顔施)라고 하던가요? 밝고 편안한 얼굴 표정을 넉넉히 베풀어 사람들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시는 것이지요. 이 분의 시는 꼭 그러한 동심으로서 순수한 시인의 마음과 표정을 꽤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봄비, 쑥순, 목매기 송아지 등의 소재가 그러하고 산구빗길, 구름, 길 등의 자연 배경이 그렇습니다. 또한 슬픔, 애달픈 꿈 등의 주제도 그러하구요.
  이 분의 시는 평안한 자연 소재와 보편적인 인간의 정감이 함께 어울려 우리들의 마음을 편안하고 또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미덕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소박한 순정과 센티멘털리즘을 수반하고 있어서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요. 이러한 순수한 마음이 바로 본래의 시심이고 천심임에야 무슨 췌언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4. 고향의 소나무, 수구초심을 위하여

  그래선지 이번 시집에선 나고 자란 곳으로서 원래의 고향, 어머니와 아버지, 즉 목숨의 뿌리로 회향하고자 하는 귀향 의지 또는 수구초심이 물결치고 있어 관심을 환기합니다.

소나무는 사람의 성품을
사람만큼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소나무를
친구 중의 친구로
사귀고 계셨다

혼자 외로우실 때
소나무 숲을 찾아가신다
작은 초막을 세우고
그곳에서 열흘이고 보름
소나무와 같이
생활하다 오신다

가족에겐 못할 말이 있어도
소나무 친구에겐
못할 말이 없다
옛 사람들이 살던 집은
소나무와 흙으로만 지었는데
그 두 가지가
사는 이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에도
금이 가는 일이 있지만
소나무와의 우정에는
진실이 있을 뿐이다
                         ―「소나무와 아버지」


  사실 사람이 한평생 고단한 목숨을 이끌고 100년 가까이 지상에 발붙이고 살아간다는 일이 어찌 그리 쉽겠습니까? 모진 비바람과 눈보라, 폭풍우 속을 견디며 이겨나가는 그런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젠 고향이 그립고, 그 옛날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같이 뛰놀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들의 인지상정이지요. 그러고 보니 어느새 아버지는 소나무가 되고, 소나무가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버렸네요. 신토불이라고 하던가요. 사람과 나고 자란 산하, 산천초목이 하나로 회통하고 조응하게 됐다는 말씀입니다. 
  “친구 사이에도/금이 가는 일이 있지만/소나무와의 우정에는/진실이 있을 뿐이다”라는 소박한 결구 속에는 그렇게 하나로 육화된 아버지와 소나무, 즉 사람과 나무 사이의 회통과 화응(和應)이 담겨 있다고 할 겁니다. 그만큼 황 시인의 시 세계가 고즈넉한 영통(靈通)의 경지에 접어들었다는 뜻도 되겠지요.


5. 존재론적 서정의 한 지평

  그런데 가끔 황금찬 시인의 시를 단순 서정시 또는 소박한 의미의 자연서정시라고 치부하여 폄하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그분의 시 세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결코 간과하기 쉽지 않은 시 정신의 깊이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존재론적 서정시의 측면이라고 규정해 봐도 좋을 듯합니다.

촛불!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 때부터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누구의 정신을 배운
조용한 희생일까.
존재할 때
이미 마련되어 있는
시간의 국한을
모르고 있어
운명이다.

한정된 시간을
불태워 가도
슬퍼하지 않고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춤추는 촛불.
                      ―「촛불」


  ‘촛불!’이라고 말하면 대뜸 떠오르는 게 어떤 것인가요? 촛불 기도, 촛불 추모, 촛불 시위라는 말과 함께 고즈넉한 명상적인 분위기 또는 어딘가 종교적인 신성감이 느껴지지는 않으십니까? 특히 올해에는 이른바 쇠고기 파동으로서 촛불 시위가 우리 사회를 폭풍처럼 휩쓸어가기도 했지만 그 근본은 생명을 지키려는 안간힘 또는 보다 나은 삶을 향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그러하실 겁니다. 우리는 촛불의 모습 속에서 제 한몸을 태워 세상의 어둠을 밀쳐내려는 갸륵한 희생의 정신 또는 순교의 고귀한 넋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횃불처럼 크고 요란하지도 않게, 들불처럼 거칠지도 않게, 다만 조용히 내면을 향해 스스로를 태워가면서 “어두움을 밀어내는/그 연약한 저항”으로서 생명 의지를 읽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또 생각하게 됩니다. 촛불이 타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종말을 향해 치달려가는 우리네 인생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그 운명의 한계성과 숙명성을 말입니다.
  한 토막으로서 초의 생애는 그대로 몇 십 년으로서 사람의 한 생애를 비유하는 것이고 닳아가는 것,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상징한 것이지요. 말하자면 고독의 존재, 허무의 존재로서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형상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어찌해야 하나요? 그냥 그렇게 “한정된 시간을/불태워가도/슬퍼하지 않고/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하루하루를 성심성의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매 순간을 아름다이 꽃피우려는 그런, 마음 자세로 밝고 힘차게 살아가야 한다는 뜻인 겁니다.
  그러고 보니 새삼 만사를 긍정하면서 따뜻한 눈길로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시는 노시인 황금찬 선생님이 그리워지는군요.


6. 맺음말 - 시심은 동심, 시심은 천심(天心)

  이번 90 노시인의 시집을 거듭 읽으면서 새삼 시심은 동심이 그 근원이고, 그러기에 시심은 하늘에 닿는 마음 즉 천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망백(望百)의 경지에 들어서는 일이란 바로 타고난 순수의 마음으로서 동심을 간직하는 일이고 그것을 키워가는 일 그 자체로서 비로소 가능하고 가능해지는 일이 아닐까 생각됐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시 쓰고 읽는 일이란 지상에서 가장 순수한 것이기에 한평생을 바쳐 해볼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꽃은
모든 꽃은 다
웃는 모습입니다
소녀야 다시 소년아
니들도
꽃 모습을 닮아라
                       ―「꽃」


  그러고 보니 동심을 간직하는 일 그것은 모든 생명이 다 꽃의 마음을 간직하고 섬기며 키워가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실상 생명의 정수로서 꽃은 다 ‘웃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러게 웃는 모습으로서 꽃을 피우는 일, 즉 얼굴과 마음으로 나와 남에게 안시(顔施)를 베풀다보면 생명이 아름다이 피어나고 목숨을 목숨껏 그야말로 천수대로 누릴 수 있을 것이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시 나이가 든다는 일, 늙어간다는 일은 쓸쓸한 일, 날이 갈수록 더욱 고독과 적막, 허무와 덧없음에 사무쳐 갈 것이 자명합니다.

다 버리고
가 버렸다
겨울 바다만 남고 
모래 위에
젖은 발자국들이
눈을 감지 않는다
                ―「겨울 바다」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 소중히 여겨 아끼던 것들이 이미 다 떠나버리고 혼자 겨울 바다에 서 있는 것이 바로 근년의 노시인 마음의 풍경이 아닐까요?
  그래선지 깊어가는 가을의 쓸쓸한 심사가 새삼 「눈 내리는 소리」의 예감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 또한 조금씩 낡아가는 것이 자연스런 우주의 섭리 그 자체가 아닐까요?

눈이 내리는 소리는
어느 마을의 발자국 소리

네가 내 곁을 떠나던 날
그 발소리 위에
눈이 내리고

어디쯤 가고 있느냐
눈이 내리는데
소리도 없이

눈은 울고 있구나
네 마지막 음성이다
창 앞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울고 있구나
                 ―「눈 내리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