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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 소식
특집: 이곳 이 사람 
 김계곤
 한글학회 이사장

 김계곤 한글학회 이사장은 초등학교에서 시작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2만여 명의 제자들을 길러낸 교육자이며, 현대 국어의 조어법과 방언 연구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한글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현대 국어의 조어법 연구』와 『경기도 사투리 연구』는 오랜 세월을 파고든 깊이가 돋보이는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일찍이 한글 운동에 몸을 바쳐 한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해 왔으며, 한글학회 회장을 지내고, 현재는 한글학회 이사장으로서 한글학회의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있다. 
지난 8월 31일 한글학회 100돌을 맞아 성대한 기념행사를 치러낸 김계곤 한글학회 이사장을 만나 다함이 없을 한글 사랑과 한글 연구 외길 인생에 대해 들어본다. 답변자: 김계곤(한글학회 이사장)

질문자: 장승욱(작가)
때: 2008년 9월 8일
곳: 한글학회 이사장실

장승욱: 먼저 한글학회가 100돌(8월 31일)을 맞이한 것을 뒤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한글학회 이사장으로서 100돌을 맞은 감회가 남달랐을 텐데, 어떠셨습니까?

김계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학회가 100돌을 맞았다는 것은 유례가 없을 만큼 대단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100돌을 맞이할 때까지 숱한 위기와 고비를 헤치며 꿋꿋이 협회를 지켜온 선배님들께 깊은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번 100돌을 학회가 거듭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쨌든 한글학회 이사장으로서 학회 100돌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 저 개인으로서는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장승욱: 여러 가지 기념행사도 성대하게 치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김계곤: 한글학회의 모태가 된 국어연구학회 회원들이 100년 전인 1908년 8월 31일에 창립총회를 열었던 봉원사에 기념 표지석을 세우고, 8월 31일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우리 학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100돌 기념 전시회'도 있었습니다. 또 세계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글학회 100돌과 우리 말글의 미래'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도 개최되었습니다. 한글학회 100돌 기념우표도 나왔습니다. 우표에는 <독립신문> 1호 사설에 실렸던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라는 글귀가 담겼습니다. 말과 글이 병들면 그 말과 글을 쓰는 사람들의 정신도 함께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우리 말글을 우리 스스로가 잘 갈고 다듬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장승욱: 방금 협회를 지켜온 선배님들께 고마움을 느낀다고 하셨는데, 어떤 분들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김계곤: 한글학회의 역사는 곧 한글 발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멀리 보자면 뭐니 뭐니 해도 글자를 만들어준 세종대왕의 공이 크고, 그 뒤로 한글을 중흥시킨 분이 한힌샘 주시경 선생입니다. 왜정 때 일본 사람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교회에 한글 일요강좌를 만들어 제자들을 키웠지요. 그때 그분이 집에서 자료나 교재를 등사해서 보따리에 싸서 가지고 다녔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유명한 ‘주보따리' 아닙니까? 무슨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사명감 때문에 한 일이었지요. 그분 고향이 황해도 봉산인데, 한학도 했지만, 배재학당에서 신학문도 공부했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삼면이 바다이니 나라가 잘되려면 해운이 성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천에 있는 관립 이운학교에 들어갈 정도로 나라 사랑에 투철한 분이었습니다. <독립신문> 교보원으로도 있으면서 아까 얘기한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는 생각에서,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말글을 지키고 다듬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우리 말글을 연구하고, 최현배, 김두봉, 장지영 선생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지요. 
주시경 선생의 책을 보면 제자들의 점수가 다 매겨져 있어요. 예를 들어 최현배 선생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수제자가 됐는데, 점수가 99.5인가 그랬어요. 최현배 선생은 울산에서 나셨는데, 어린 나이에도 나라 걱정을 많이 해서, 그때 신문에 나라 팔아먹은 5적이니 7적이니 난 것을 보고 밤을 새워 울기도 했답니다. 최현배 선생의 저서인 『우리말본』과 『한글갈』은 조윤제 선생의 『한국 시가의 연구』, 양주동 선생의 『조선 고가 연구』와 함께 왜정 때 5대 명저로 꼽히는 책들입니다. 『우리말본』은 우리말의 체계를 세운 책이고, 『한글갈』은 우리말 연구의 역사를 다룬 책입니다. 최현배 선생은 죽어서도 은사 곁에 묻히고 싶다고 해서 남양주 장현리 주시경 선생 묘소 곁에 모셔졌지요. 주시경 선생 묘소는 나중에 국립묘지로 옮겨지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한글학회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조선어학회 사건'을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저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아니라 ‘조선어학회 수난'이라고 말합니다. 주시경 선생과 그분의 제자들이 우리 말글을 지키는 기둥이 되어 1926년에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는 ‘가갸날'을 정한 것을 비롯해 많은 활동을 펼쳤습니다. 가갸날이 나중에 한글날이 된 것인데, 일제 시대 때 한글날이 있었다니 놀랍지요. 
1933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고 1936년에는 표준말 사정을 끝냅니다. 맞춤법이 있고, 표준말 사정이 끝나야 사전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활동들 때문에 일본 사람들에게는 한글학회, 당시는 조선어학회 사람들이 눈엣가시였겠지요. 그래서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 단체라는 이유로 1942년과 1943년에 걸쳐 학회 회원과 관계자들을 잡아 가두는 ‘조선어학회 수난'이 빚어지게 됩니다. 이 사태로 이윤재, 한징 선생은 옥중에서 돌아가시고, 이극로 선생이 징역 6년, 최현배 선생이 징역 4년을 선고받은 것을 비롯해 일곱 분이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물 먹이기, 공중에 매달기, 불로 지지기, 동료끼리 뺨 때리게 하기 같은 갖은 고문을 당했는데, 최현배 선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나라 사람이 내 나라 말글을 연구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그 어려운 시기에 이런 분들이 우리 말글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우리는 나라를 영원히 잃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이 나라를 위하고 겨레를 위한 일편단심으로 해놓은 작업을 바탕으로 광복 뒤에 조금도 어려움 없이 우리말 교육을 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말글의 생명을 이어온 것이 한글학회의 큰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승욱: 한글학회 이사장으로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김계곤: 이사장이 할 일은 직원들을 관리하고, 한글회관을 비롯한 학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물론 학회가 벌이고 있는 여러 가지 활동을 지원하는 것도 일입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는데, 바로 한글학회 100돌 기념관을 세우는 일입니다. 학회에서도 애를 쓰고 있지만, 국가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니만큼 나라의 지원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승욱: 요즘도 한글 전용과 한자 병용에 대해서 논란이 많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계곤: 한글 전용은 국가 시책으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걸 자꾸 흔들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며칠 전에도 어떤 사람을 만났더니 “한자를 써야 합니다" 그럽디다. 왜 써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동북아 친선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해요. 한자의 종주국은 중국인데, 중국이 왜 그렇게 문자 개혁을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한자가 전부 5만 5000자나 된다고 하는데, 거기다가 번체자니 간체자니 해서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루쉰 같은 사람은 “중국과 한자는 공존할 수 없다. 한자가 존재하면 중국이 망하고, 한자가 망해야 중국이 일어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조 500년 동안 유교 사상에 젖어 한글을 암클이다, 반절이다 하면서 비하했지만 한글처럼 배우기 쉬운 문자 체계가 세계 어느 나라에 있습니까? 노인들도 며칠만 배우면 읽고 쓸 수 있는 것이 한글입니다. 유네스코에서 시상하는 문맹 퇴치상의 이름이 ‘세종상'인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누가 한자 이야기를 하면 “소설책에서 한자 본 적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소설책은 수준이 낮아서"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 안 됩니다. 손자들이 어렸을 때 바위에 올라가다가 미끄러워서 그만두고 내려오면 “할아버지, 포기하셨어요?" 합니다. ‘포기'라는 한자는 쓰라고 해도 못 쓰지만, 뜻은 잘 알고, 말하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한자 쓰자는 사람들은 한자를 안 쓰면 말을 못한다고 하는데, 이건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말의 뿌리가 한자라고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옛날 한자 배울 때를 생각하면, 의사의 의(醫) 자를 바로 쓰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선생이 “일(一) 하고 화살(矢) 하고 직각 하고 구(九) 하고 또(又) 하고 술 반(酉)만 써라"라고 노래를 지어서 가르쳤어요. 이게 얼마나 비능률적인 일입니까? 단적인 예로 우리는 ‘밤낮'이라고 하지만 한자로는 ‘주야(晝夜)'죠. 그만큼 우리말과 한자는 다른 것이니까 굳이 거기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글 전용을 해서 우리말로 쉽게 쓰자고 하면 예를 들어 이화여자대학교를 ‘배꽃계집큰배움집'으로 해야 하느냐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굳어진 말까지 고치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죠. 

장승욱: 곳곳에 영어 마을이 세워지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영어 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계곤: 이명박 정부가 처음 들어섰을 때 영어 몰입 교육이니 하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의아했습니다. 우리말은 다 잊어버리고 영어만 잘하면 되는가요? 그건 말이 안 됩니다. 필요한 사람만 하면 되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영어를 신주 모시듯 해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단에 갔다가 그곳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하도 좋아 보여서 그 걸음걸이를 익히려고 했는데, 그 걸음걸이도 안 익혀지고, 자기 본래 걸음걸이도 잊어버려서 결국은 기어서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먼저 내 나라 말글을 확실하게 익혀야 합니다. 그다음에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영어도 배우고 해야 하는 것이지, 내 것을 제쳐두고 남의 것을 앞세우는 것은 본말이 뒤집힌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문화의 바탕입니다. 전에 미국에서 온 평화봉사단원이 우리 집에 와서 추어탕을 대접한 적이 있습니다. 한참 땀 흘리며 먹다가 제가 “쿨(cool)" 하니까 그 사람은 “베리 핫(very hot)" 그러는 거예요. 우리가 맛을 표현할 때 ‘시원하다'는 말을 어렸을 때도 물론 썼지만, 늙어갈수록 더욱 실감이 되는 것이 ‘시원한 맛'이거든요. 그 사람이 이런 느낌을 압니까?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문화의 바탕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접근해야지 이래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내 것부터 챙겨놔야 합니다. 역사도 우리 역사부터 바로 알고 그다음에 남의 역사를 공부해야죠. 대학의 교수들도 강의를 영어로 하라고 하고, 또 그것을 자랑으로 아는 풍토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전공과목에 대한 것은 우리말로 해도 알아듣기가 어려울 텐데 영어로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너무 일변도인 정책, 일변도인 교육은 좋지 않습니다.

장승욱: 조금 있으면 한글날이 돌아옵니다. 우리말 사랑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김계곤: 50년도 훨씬 전에 진해중학교 교사로 있을 때입니다. 아버님 제사를 모시는데 지방을 쓸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어머님이 축문을 쓰라고 해서 못 쓴다고 했더니 중학교 선생까지 하는 사람이 그것도 못 쓰냐고 하시기에 제가 우리말로 썼습니다. ‘오늘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이라 후손들이 모여서 정성으로 제사를 모십니다' 이런 식으로 썼더니 어머님이 “아이고, 오늘 제사는 틀렸다"고 끌탕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게 진짜 제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유세차 감소고우" 이렇게 뜻도 모르고 쓰는 것보다 우리말로 알기 쉽게 쓰는 것이 낫습니다.
묘비를 세울 때도 ‘아무개지묘(之墓)'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개의 무덤'이라고 하는 것이 읽기도 쉽지 않습니까? 제 고향이 경상북도 청도인데, 내가 주인공 행세를 하게 된 뒤로는 다 이렇게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야 한자를 모르는 후손들도 쉽게 찾아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글학회에서 한글 전용을 하자고 주장하는 이유도 다 이런 데 있습니다.

장승욱: 선생님께서 쓰신 책 중에 『우리 말글살이의 바른 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요즘 우리 말글살이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김계곤: 어려운 한자말을 써야 유식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없애야 합니다. 또 지금은 서양풍이 들어와서 영어나 독일어, 프랑스어 한마디는 해야 유식하다고 생각들을 하는데, 역시 그건 아니지요. 
그리고 늘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거리에 왜 그렇게 외국어 간판이 많은지 놀라게 됩니다. 일본어, 영어로 돼 있어서 한글은 찾아볼 수도 없는 간판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데 관심을 갖고 자기 의견을 나타내고 하면 이런 난잡한 간판들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말은 꽃밭의 꽃과도 같습니다. 늘 관심을 갖고 우리말을 다듬고 가꾸는 노력을 기울일 때 우리말이 활짝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제 책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제 제자들이 그 책을 보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님, 어쩌면 그렇게 쉽게 쓰십니까?" 제가 일부러 쉽게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한글로 써서 쉬워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글, 우리말의 힘입니다. 

장승욱: 선생님의 다른 저서들도 좀 소개해 주십시오.

김계곤: 제가 학자로서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국어의 조어법과 사투리입니다. 먼저 조어법 쪽에는 『현대 국어의 조어법 연구』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30년 넘게 연구한 결과를 모은 책으로, 1100쪽이 넘는 분량입니다. 사투리 쪽으로는 『경기도 사투리 연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도 700쪽에 가까운 분량인데, 제가 직접 경기도에서 채집한 사투리들을 연구한 결과입니다. 부산에 있을 때는 서울 사람 말씨는 다 표준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울로 올라와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천교육대학에 근무하면서 20여 년 동안 여름방학이면 학생들과 함께 다니면서 경기도 사투리 채집을 했습니다. 
사투리는 우리말의 훌륭한 자원입니다. 또 사투리를 통해 우리말의 어원이나 근본을 캐낼 수도 있습니다. 그 자체로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는 것이 사투리입니다. 지금은 서울이나 경기도가 다를 바 없게 되어서 그런 연구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힘이 들기는 했지만, 그때 그런 연구를 했던 것을 참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장승욱: 살아오면서 이것만은 내가 꼭 지켜야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 아니면 좌우명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김계곤: 제가 인천교대에 있을 때 문학평론가인 김영수라는 분이 제 호를 ‘한벗'이라고 지어줬습니다. “선생님은 오직 한글을 벗 삼아 사시는 분 아닙니까?" 하면서.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제가 지켜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사람은 참뜻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겉 다르고 속 다르면 안 된다, 언제나 정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장승욱: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김계곤: 재작년에 자동차 사고가 나서 머리를 다쳐서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대전 국립묘지로 옮겨진 간재 정인승 선생 묘소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그 뒤로 건강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지만, 사고 후유증인지 기억력이 많이 떨어져 애를 먹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은 생생한데, 바로 며칠 전, 몇 시간 전의 일들이 가물가물합니다. 

장승욱: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궁급합니다.

김계곤: 제 나이가 지금 여든셋입니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지금까지 해놨던 것도 정리하고, 제 인생 걸어온 길은 기록으로 남기고도 싶습니다. 그리고 사는 날까지는 지금껏 살아온 자세를 지키려고 합니다. 저는 장기도 둘 줄 모르고, 화투도 칠 줄 모릅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이 아까워서 배우지를 않았습니다. 텔레비전도 거의 보지 않습니다. 시간을 아껴야 하니까.
한마디 덧붙이자면 대학교수는 연구가 첫째고 둘째입니다. 요즘은 학교에서 보직을 맡으면 성공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말이 안 됩니다. 제가 인천교대 있을 때도 무슨 자리, 무슨 자리 맡으라고 했는데, 제가 안 했어요. 교무처장, 그런 것 하면서 연구가 됩니까? 

장승욱: 살아오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김계곤: 너무나 많이 받기만 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시골이었지만 부잣집 아들로 자랐습니다. 제가 9남매 가운데 여덟째라 어릴 적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컸습니다. 형이면 형, 누님이면 누님, 일가친척들도 제게 많은 사랑을 주었습니다. 큰형은 큰조카가 나하고 두 살 차이니까 누가 봐도 아버지라고 생각할 정도였는데, 제 엉덩이에 종기가 나면 상처가 덧날까 봐 입으로 고름을 빨아주기도 했습니다.
또 제가 교단생활을 오래 해서 제자들이 줄잡아 2만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또 왜 그렇게 저를 잘 따라주었는지……. 그래서 저는 제가 복을 타고났다고 생각합니다. 제자 복, 스승 복, 사람 복…….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목욕탕에 갔는데 어떤 젊은이가 때를 밀어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전에는 아버지와 같이 다녔는데 저를 보니 아버지 생각이 난다고 하면서. 그렇게 인연을 맺고 지낸 지가 10년 가깝습니다. 어제도 택배로 뭘 보냈던데……. 대구 우리은행의 지점장으로 있는 사람인데, 나는 그 사람한테 받은 것을 갚으려고 해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말합니다. 나를 빚쟁이로 만들지 마라.
이런 친구들에게도, 가족과 친척들에게도,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저는 늘 빚쟁이일 뿐입니다. 무엇으로 갚을지, 언제 갚을 수는 있을지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승욱: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빕니다.

김계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