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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어를 우리말로 풀어 쓴 소설 -최인훈의 「광장」-

송하춘·소설가·고려대 교수 

 

  6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치고 최인훈의 <광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창 시절, 소위 말하는 ‘공부 시간’에,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하는 척, 책상 밑에 소설책을 감춰 두고 읽는 모습은 그 당시 교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광장>은 그렇게 몰래 읽다가 선생님한테 빼앗기고, 야단맞고, 하는 추억의 소설은 아니다. 대학에서, 대학생들이 떳떳하게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모이면 함께 토론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말하자면 그런 소설이었다. 학교에서, 혹은 거리에서, 학생들이 소설을 대하던 풍속도를 확 바꿔놓은 것이다. 숨어서 몰래 읽는 소설로부터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토론하는 소설로 열렸다고나 할까. 이와 같은 <광장>의 높은 인기는 70년대를 지나 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광장>의 무엇이 그토록 우리를 열광하게 만들었을까. 열광은커녕 지금은 소설을 읽는 모습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대학 캠퍼스에서,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구나, 어느덧 추억의 대상이 된 <광장>을 실감하는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12년 전 나는, 이명준이란 잠수부를 상상의 공방에서 제작해서, 삶의 바다 속에 내려 보냈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심해의 숨은 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1973년판 서문에서 이런 식으로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작중인물 이명준에게 진혼곡을 써 바친 것이다. <광장>의 키워드는 확실히 ‘이데올로기’와 ‘사랑’이었다. ‘이데올로기’와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열광시킨 것이다. 

  작중인물 이명준.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도 물론 1960년대 군대 가기 전 대학생 때였다. 철학과 3년생, 거기다가 대학신문에 처음 자작시를 발표하고, 홀로 가슴 뿌듯해하면서도 또 그만큼 수줍어서 어찌할 줄을 모르던 그를 만나자 나는 그만 당장 반해버렸다. 뭐든지 다 알 것 같으면서도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겠는 그는 바로 나였다. 아니다. 내가 바로 그였다. 그 시절 우리들 앞에 이데올로기가 그랬고, 그 나이 우리 또래에게 사랑이 그랬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좌우 이념의 대립, 조국의 분단, 그리고 육이오 전쟁, 이어서 휴전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그대로 이데올로기가 실재하면서도 금기시되던 시대였다. 좌우 이념이 대립하는 시대를 살면서도 아무도 그것을 입 밖에 꺼내어 말할 수 없었다. 이명준조차 그것을 말한 적은 없었다. 아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절대로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어서 비극적이었다.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하게 살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평양 방송의 대남 방송 시간에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이명준이 ‘처음 아버지를 몸으로 느끼는’ 체험이자, <광장>의 상황이 분단 상황임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뭐든지 다 알 것 같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에서는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이데올로기처럼, 사랑은 실재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형의 가치 개념이다. 사랑은 실재한다고 믿으면서도 손으로는 직접 만져볼 수 없는 허구의 실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로 정의내릴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다. 이명준이 그 사랑을 실천하고 싶지만 실천할 수 없는 욕망과 좌절을 <광장>에서 겪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점에서 <광장>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과, 정치적 상황의 인간을 동시에 다뤘다고 볼 수 있다. 그것들은 1960년대 한국 사회가 직면한 당면 과제로서, 현재진행형이면서도 금기시된 문제였다. 최인훈이 바로 그 금기를 깨고 ‘이명준’으로 하여금 <광장>을 살아가게 한 것이다. 실재하지만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깨고, 금기시된 분단 상황을 열어 보였을 때 독자들은 참신한 충격에 빠졌다. 광장 앞에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것도 그 금기를 깬 용기의 참신성 때문일 것이다.

  오늘 나는 <광장>의 언어를 새롭게 주목하고자 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최인훈의 우리말 사용을 주목하고자 한다. <광장>은 최인훈이 개작에 개작을 더하면서 아주 의도적으로 우리말을 구사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 개정판에서 고친 것은 한자어를 모두 비한자어로 바꾼 일이다.” 1976년 다섯 번째 개정판을 낼 때 작가는 그 서문 첫 줄에서 이렇게 밝혔다. 개작은 물론 내용과 언어의 두 영역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러나 유난히 내용보다 언어에 치중한 것은 ‘1976년 다섯 번째 개정판’이고, 그 실제는 전적으로 ‘한자어를 비한자어’로 바꾼 점이다. 그런가 하면 1989년판 머리말에서는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이 전집판이 가로쓰기로 바뀌게 되었다. 그동안 차츰 자리 잡아온 가로쓰기의 관행에도 맞추고, 새로 나온 표기법에도 맞출 수 있게 된 이번 판이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운 형식이 되기를 바란다.” 여기 내가 참고한 텍스트는 바로 이 1989년판임을 밝혀둔다. 그만큼 개작에 개작을 거쳐 완성된 최종 판본을 텍스트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개정판에서 ‘한자어를 비한자어’로 바꿨다는 그 ‘비한자어’를 주목해주기 바란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한자어를 우리말’로 바꿨다는 정도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썼을 때 ‘한자어’는 우리말 아니냐, 그렇다면 ‘우리말을 우리말’로 바꿨다는 말이 될 텐데 그럴 수는 없지 않느냐, 그래서 ‘우리말’ 대신에 ‘비한자어’란 말을 썼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비한자어’란 ‘원래 한자어를 순수 우리말로 풀어서 썼다’는 말쯤으로, 새겨서 알아들으면 될 것이다. 먼저, 작품의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서 이야기해야겠다. <광장>의 첫 문장이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이 첫 문장은 <광장>의 개작 과정에서 작가가 노린 세 가지쯤의 의도가 다 들어 있어서 아주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첫째, 한자어가 없다. 아니다. 적다. 하나뿐이다. 그 대신 한 군데 외래어가 들어 있다. 이 외래어까지도 한자어를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 채택되어 아주 젊고 새로운 감각을 살리고 있다. 이 밖에, 바다, 진하다, 푸르다, 비늘, 무겁다, 뒤채다, 숨, 쉬다,가 모두 순수 우리말에 해당한다. 최인훈이 이 ‘순수 우리말’을 ‘비한자어’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육중하다’의 ‘육중’이라는 한자어도 ‘무겁다’로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쓰면 그 바로 뒤에 또 ‘무겁다’가 나오니까, 중복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냥 ‘육중하다’를 썼다고 본다. 좋은 문장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문장 안에 같은 단어나 조사를 두 번 이상 쓰지 말아야 한다는 걸 우리는 잘 알기 때문이다. 
  둘째, 문장 안에 콤마를 찍어서 읽는 이의 호흡을 조절한다. 참고로, 1960년 10월 「새벽」지에 처음 발표된 <광장>의 첫 문장을 보면 그때는 같은 문장이라도 이런 모양이었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이면서 숨쉬고 있었다. 

  보다시피 처음 발표할 당시의 이 문장은 콤마( , )를 한 군데도 찍지 않았다. 콤마를 찍지 않은 위 문장이 원래 문법에 맞는 문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설령 옳다 하더라도, 옳으니까 옳은 대로만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최인훈은 한 것 같다. 말하자면 문학적인 문장으로 변화를 꾀한 것이다. 법에 따라 아무 데도 콤마를 찍지 않고 보니 모양새도 무거워 보이거니와, 읽는 호흡을 끊고 이어야 할 것도 독자의 몫이 되어버렸다. 작가는 우선 콤마를 찍어서 읽는 호흡을 조절하고, 그 시각적인 기능을 보완하여 문장의 모양새를 살렸다. 그러자, 바다는 비늘 돋친 물고기처럼 살아 움직이는 효과까지 얻게 된 것이다. 개작을 통한 실험이 얼마나 의도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셋째, 문장의 끝말에 동사의 현재형을 쓰고 있다. 숨을 ‘쉬다’ ‘쉬었다’ ‘쉬고 있다’ ‘쉬고 있었다’가 아니다. 그냥 ‘쉰다’이다. 이 부분도 맨 처음 <광장>에서는 ‘숨쉬고 있었다’였다.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이었다. 모든 ‘이야기’ 문장의 끝말은 원래 설화형어미 ‘-이었다’, ‘하였다’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도 그 이전 관습대로라면 ‘쉬고 있었다’가 맞을 것이다. 그런데 최인훈이 아주 의도적으로 ‘숨쉬고 있었다’를 ‘숨을 쉰다’로 바꿨다. ‘숨쉬고 있었다’가 ‘숨을 쉰다’로 바뀌자, 바다가 마치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눈앞에서 파닥거리는 느낌을 주었다. 최인훈이 우리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을 제시하듯 생동감을 살리는 방법을 노린 것이다. 
  한자어도 우리말인데 왜 그것들을 ‘한자어 없는 본디 우리말’로 바꿔 써야 하는가. 바꿔 써야 한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소설을 순수 우리말로만 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다면, 순수 우리말로만 쓴 소설과 지금까지처럼 한자어와 섞어 쓴 소설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작가는 1976년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피력한 적이 있다. 

  관례적 표현과 어떤 심상이 오래 결합되어 쓰이고 보면, 심상의 형성 과정--- 의식과 현실 사이의 싱싱한 갈등의 자죽이 관례적 표현으로서는 나타내기가 미흡해 보이는 때가 올 수 있다. 이럴 때는 그 표현이 낡아진 것이 아닌가 알아보는 것이 좋다.

  여기서 ‘관례적 표현’이란 그 동안 우리 문장에서 익숙하게 써온 ‘한자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 한자어를 별 생각 없이 오래 쓰다 보면 작가가 원래 의도한 표현의 참신성이 떨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한자어 대신 새로운 표현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뜻이지만 그는 또 이렇게도 말한다. 

  우리 소설 문장은 한자어를 한글 표기로 하기 때문에, 예술로서의 언어 표현의 본질인 의식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과정을, 이미 만들어진 한자어에 밀어 버리고도 그런 줄 모르게 될, 표기에서 오는 함정을 감추고 있다. 이 문제를 풀자면, 반드시 비한자어로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 즉 그 한자어를 문맥 속에서 더 꼼꼼하게 정의하는 것도 좋겠지만, 너무 번거로워진다. 이 판에서는 비한자어로 바꾸는 길을 골랐다. 그러나 관습에서 너무 멀어져야 할 때는 거기서 그치도록 했다. 그러나 부피로 보면 그대로 둔 데는 얼마 되지 않는다. 

  위의 내용을 다시 쉽게 풀이하면 이런 말이 될 것이다. 언어는 낡아간다. 표현이 낡아지면 새로운 표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우리 언어의 대부분은 한자어로 되어 있다. 한자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만큼 관례적이기 쉽다. 우리 소설 문장은 한자어를 한글 표기로 하기 때문에 예술로서의 언어 표현의 본질인 의식과 현실의 갈등을 만족스럽게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이 한자어의 함정이다. 함정을 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비한자어로 바꾸는 일을 택하였다. 이것이 최선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부분 한자어를 비한자어로 바꾼 셈이 된다. 
  한자어를 비한자어로 바꿔 쓰자 <광장>이 더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관습적인 표현을 탈피하고 이미지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좋은 시도라고 판단된다. 이와 같은 시도는 단순히 변화를 꾀하자는 의도 이상의 효과를 얻었다. 무엇보다도 관습적인 한자어를 본디 우리말로 풀어 쓰는 것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기도 하다. 최인훈은 해방 이후에 글쓰기를 시작한 작가 1세대에 해당한다. 그보다 앞선 세대는 거의가 일본어로 글을 썼거나 아니면 한글보다 일본어를 먼저 익힌 세대였다. 최인훈은 해방 당시 10살 안팎의 소년이었다. 학령으로만 본다면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막 일본어를 배우다가 중단하고 다시 새롭게 한글을 배운 나이였다. 말하자면 새로운 한글세대의 시작에 해당되는 것이다. 여기서 오는 최인훈 세대의 한글 사용이란, 한글에 대한 일종의 자각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작가로서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인훈은 그 자각과 의무를 <광장>에서 실천한 것이다. 

  다시 줄거리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광장>은 동중국해 바다 위에서 시작되어 다시 남중국해 바다 위에서 끝이 난다. 석방 포로 이명준이 타고르호를 타고 중국해를 건너 중립국 인도로 가는 것이다. 이때 타고르호와 관련된 많은 사항들이 유난히 우리말인 것이 눈에 띤다. 

  허깨비, 헛것, 사닥다리, 윗다락, 문간, 배, 뱃간, 뱃사람, 배꼬리, 탈 없는 뱃길을 빈다고……

  그런가 하면 이어지는 문장 안에서도 한자어를 우리말로 풀어 쓰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아픈 데를 건드린 실수를 비는 그런 에 그들로서는 버릇인지 모르나 퍽 분별 있는 사람의 능란한 몸짓이 얼핏 스친다. 선장을 잠시나마 거북하게 해서 안됐다. 양쪽으로 트인 창으로 바람이 달려 들어와서, 바늘로 꽂아놓은 해도의 가장자리를 바르르 떨게 한다. 갈매기들은 바로 옆을 날면서 창으로 테두리진 넓이를 내려가고 치솟으며, 맞모금을 긋고 배꼬리 쪽으로 휙 사라지곤 한다. 

  위 글을 1960년 [새벽]지에 처음 발표된 <광장>에서 보면 이런 문장이었다. 

  개인적인 상처를 건드린 실수를 사과하는 그런 태도에 그들로서는 습관인지 모르나 퍽 교양이 있는 사람의 세련된 몸짓이 얼핏 스치는 것을 느꼈다. 선장이 잠시나마 어색한 기분을 가지게 한 것을 명준은 미안스럽게 여겼다. 양쪽으로 트인 창으로 바람이 달려 들어오며 핀으로 꽂은 해도의 가상자리를 바르르 떨게 했다. 갈매기들은 바로 배옆을 날으면서 창으로 구획진 공간을 우에서 아래로 강하하고 아래서 우로 치솟으며 대각선을 긋고 선미를 향하여 휙 사라지곤 했다. 

  두 인용문을 대조해 보니, ‘상처’가 ‘아픈 데’가 되고, ‘사과하다’가 ‘빌다’가 되고, ‘태도’가 ‘품’이 되고, 이런 식으로 ‘습관 →버릇’, ‘교양 →분별’, ‘세련된 →능란한’, ‘핀 →바늘’, ‘가상자리 →가장자리’, ‘구획진 →테두리진’, ‘공간 →넓이’, ‘강하하다 →내려가다’, ‘대각선 →맞모금’, ‘선미 →배꼬리’와 같이 원래 한자어를 본디 우리말로 바꿔 쓰거나 아니면 비한자어로 풀어 쓰고 있었다. 읽는 데에 약간 뻑뻑해 보이던 것들이 부드러워진 것은 사실이다. 보다시피 ‘습관’이 ‘버릇’이 되고, ‘교양’이 ‘분별’이 되면, 관례적인 품위는 좀 떨어질지 몰라도 그보다는 친근감이 더하고 글이 좀 쉬워진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작가는 관례적인 품위보다는 이미지의 참신성을 더 노렸을 것이다. ‘스치는 것을 느꼈다’가 ‘스친다’가 되고, ‘떨게 했다’가 ‘떨게 한다’가 되고, ‘사라지곤 했다’가 ‘사라지곤 한다’가 되는 것처럼 문장의 끝말이 현재형으로 바뀐 것도 작가가 의도한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 처음 발표 지면에는 없던 콤마를 두 군데나 찍어 읽는 호흡을 맞춘다거나 시각적인 효과를 노린 점은 앞서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생략한다. 
  한자어를 우리말로 풀어 쓰는 일 가운데 작가가 아주 특별히 의도한 것으로, 이 글은 ‘-데’와 같은 예를 제외할 수 없다. ‘학력을 물을 때 ***유니버시티라고 배운 데를 댔더니’에서 ‘배운 데’는 원래 ‘학교’였다. ‘어린애같이 맑은 데가 있다’의 ‘맑은 데’는 원래 ‘단순한 데’를 고쳐 뜻을 정확히 한 경우이며, ‘그럴 만한 데서는 또 어린애들 모양 고집통으로’의 ‘그럴 만한 데’는 원래 ‘필요한 장소’라고 쓰여 있었다. 이와 같이 ‘낯선 땅을 살 곳으로 골랐다는 데서’는 원래 ‘낯설은 이역으로 자기들의 영주지를 택했다는 사실에서’를 풀어 쓴 것이고, ‘갈 데까지 가는 동안 마물러두어야 할 마음의 매듭을 혼자서 소리 없이 풀자면’은 원래 ‘제가끔 목적지에 이르는 동안까지 처리해 버릴 문제와 감정의 매듭을 혼자서 소리 없이 풀기 위하여는’을 그렇게 고친 것이고, ‘언제 갈 데 닿기 전에’는 ‘언제 상륙하기 전에’를 풀어 쓴 것이다. 
  이야기는 해방 직후 1947년에서 1948년 5월 무렵, 이명준의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명준이 월북하기 전이며, 그때 아직 육이오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철학과 3학년 학생. 철학이라면 그것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학문이다. 3학년이라면 자기 딴에는 뭐든지 잘 안다고 자부하는 학령이며, 그러나 인생 전체로 보면 아는 것보다는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나이이다. 이명준은 뭐든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대학생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뭐든지 안다고 자부하는 학생이다. 이 말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철학과 3학년이다. 철학과 3학년쯤 되면, 누리에 대한 그 어떤 그럴싸한 맺음말이 얻어지려니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곧이어 겨울방학이 될 3학년 가을, 아무런 맺음말도 가진 것이 없다. 맺음? 맺음말이란 건 무얼 말하는 것일까? 누리와 삶에 대한 맺음말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세상이 ‘누리’가 되고, 인생이 ‘삶’이 되었다. 그리고 ‘결론’이라는 말 대신에 ‘맺음말’이란 말을 썼다. 누리와 삶은 순 우리말이고, 맺음말은 한자의 훈을 맞추어 우리말에 맞게 조립하여 쓴 것이다. 순 우리말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를 쓰고, 없으면 없는 대로 그는 우리말을 조립하여 썼다. ‘늦은 가을이, 옷깃을 여미고, 조용히, 한숨을 쉬고 있는’ 계절이다. 이명준의 시가 대학신문에 게재되었다. 그 신문을 그는 ‘겨드랑이에 낀 책꾸러미 속에서 끄집어내고’, ‘맨 뒷장에 자기가 보낸 노래칸막이로 짜여서 실려 있는’ 것을 본다. 겨드랑이에 낀 것이 ‘책가방’인지 ‘책보’인지 모르겠는데 그것을 ‘책꾸러미’라고 쓴 것은 의도적이다. 그 결과 의미가 선명해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썼을 만큼 그것은 매우 의도적이었음을 알겠다. ‘시’를 ‘노래’라고 표현한 것도 의도적이라 할 수 있다. 그 뒤에 바로 “아카시아가 있는 그림”이라는 제목의 시가 인용된 것만 보아도 그것은 확실히 시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 시를 ‘노래’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를 노래라고 표현한 까닭은 인생 혹은 인간의 됨됨이를 고려해서 나온 말일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본격적인 시인의 시 작품이 아니라, 대학생의 연습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뭐든지 알 것 같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정도의 시이니까 결국 ‘노래’가 맞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시가 박스 안에 편집되어 나왔던 모양이다. 작가는 그것을 ‘칸막이로 짜여서’라고 말하였다. 
  이 시기는 말하자면 그의 전 생애 가운데 ‘시의 계절’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시는 아직 덜 익은 현실주의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가장 껍데기만을 허술히 보고 지내는 것이며, 자기와 둘레 사이에 아무 티격태격도 없는, 달걀노른자위같이 사는 무렵’을 일컫는다. 혹은 연애의 계절이기도 하다. 연애 또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애매한 사랑을 일컫는다. 윤애와의 사랑은 ‘안절부절못하던’ 사랑,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알려고, 서둘렀던’ 사랑, ‘몸의 길은 취하는 길이었다.’ 까닭도 없이 그저 달콤할 것 같고, 그저 호기심을 끄는 정체불명의 감정이다. 그런가 하면 대학 3학년은 독서의 계절이기도 하다. ‘삶을 참스럽게 생각하고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책을 모조리 찾아 읽는다.’, ‘책장을 대하면 흐뭇하고 든든한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명준은 ‘처음 아버지를 몸으로 느끼는’ 사건을 맞게 된다. ‘부친이 요사이 평양 방송의 대남 방송 시간에 나온다는 것’이다. 이명준은 형사에게 불려가고, 코피 터지는 구타를 당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만날 수 있는 광장으로 가는 길은 막혀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남과 북이 가로막힌 분단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의 감정을 표현할 때도 작가는 순 우리말을 찾아 쓰기에 바쁘다. 

  속에서 탈대로 타고 난 무서움의 잿더미에 미움의 찬비가 소리 없이 내리면서, 남은 재를 고스란히 적시며, 명준의 온몸에 스며간다. 부드득 이 가는 미움보다 더 차분하지만 사무치는 미움이다. 

  이 글은 원래는 이런 문장이었다. 

  깡그리 불타버린 공포의 잿더미 위에 증오의 찬비가 소리 없이 내리면서 남은 재를 고스란히 적시며 명준의 온 몸에 스며갔다. 부드득 이 가는 증오보다 더 조용하고 확실한 증오였다.

  ‘깡그리 불타버린 공포’가 좀 속되어 보였는데, 이 부분을 ‘속에서 탈대로 타고 난 무서움’이라고 풀어 쓰자 속된 맛이 좀 가셨다. ‘증오’가 ‘미움’이 되고, 그러자 ‘조용하고 확실한 증오’는 ‘차분하지만 사무치는 미움’이 될 수 있었다. 글이 품위가 있고, 의미가 선명해진 것이다. 
  똑같은 감정을 그는 한 가닥 시로도 읊었는데, 이때의 의도는 시니컬한 비틀림으로 나타난다. 처음 발표될 때의 시를 괄호 속에 묶어 보여줄 테니 대조해 보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좋은 (좋은 계절)
  궁리질 공부 은(철학 공부하는 친구는)
  보람을 위함도 아니면서(공부를 하다가 그렇게 된 것도 아니라는 뜻)
  코피를 흘렸는데(형사한테 얻어맞아서 코피를 흘렸다는 뜻)
  내 나라 하늘은 곱기가 지랄이다.(조국의 하늘은 매양 곱구나.)

  1960년 본 <광장>과 비교해 볼 때, ‘계절’은 ‘철’이 되고, ‘철학’은 ‘궁리질’이 되고, ‘친구’는 ‘꾼’이 되었다. ‘보람을 위함도 아니면서 코피를 흘렸다’는 원래 우리말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말을 바꾸거나 풀어 쓰지 않았는데, 그것은 ‘공부를 하다가 코피를 흘린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형사한테 얻어맞고 코피를 흘렸다’는 말을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런 참담한 심정에 어울리지 않게 ‘조국의 하늘은 매양 곱다’ 는 말인데, 이 말을 훗날 ‘내 나라 하늘은 곱기가 지랄이다.’라고 풀어 써서 맑은 날씨와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시니컬하게 대조시킨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또 한 차례 장면을 달리하는데, 그동안 한반도 남쪽에서 이데올로기 문제에 부딪힌 이명준은 마침내 북한 땅으로 넘어간다. 월북하여 그는 노동신문 본사 편집부에 근무한다. 그러나 이명준이 북에서 발견한 사회는 잿빛 공화국이었다. 어느 집회나 판에 박은 토론과 절차가 있을 뿐, 개인의 의지가 행동으로 나타나면 곧 자아비판이 따르는 사회였다. 그러니까 그동안 이명준이 파악한 남쪽이 ‘무이상’과 ‘방종’이었다면, 북쪽은 ‘광신’에 지나지 않는 광장이었다. 남쪽이나 북쪽이나 이명준에겐 절망적인 광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침내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남과 북이 요란하게 부딪친 것이다. 이명준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고, 석방 길에 남과 북 가운데 어느 한쪽을 재선택할 기회를 갖지만, 그는 중립국을 선택한다. 밀실과 광장의 거리, 개인과 집단의 거리, 그 좁힐 수 없는 간극은 이명준의 의식이 깨어 있는 한 좁히기 어려웠다. 작가는 말한다. ‘인간을 밀실이나 광장의 어느 한곳에 머물러 있게 할 때 그는 살지 못한다.’ 이명준은 나기 나름의 명확한 결론을 가지고 떳떳하게 광장에 서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명확한 ‘결론’이라는 것과 피동적으로 접근되어 오는 ‘사회’라는 것은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갈등이 아닐 수 없었다.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광장>은 판을 거듭할수록 내용과 형식면에서 많은 고침을 받았다. 그 가운데 1976년 전집을 낼 때 한자어를 비한자어로 바꾸었고, 1989년 전집을 낼 때는 마침내 가로쓰기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광장>의 작가 최인훈이 기울인 개작에의 노력은 곧 그의 투철한 한글 정신이자 시대 정신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