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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국어 산책 
  한글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김성규·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1. 

  한국 문화사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 한글은 세종이 만들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글의 창제자로 집현전 학자들을 들기도 하고, 왕자나 공주가 한글을 만드는 데 관여하였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 어떠한 주장도 세종이 한글 창제에 가장 깊숙이 관여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세종이 아닌 다른 사람, 그것도 서양에서 태어난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적 미술가이자 과학자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한글을 만들었다면 그 문자의 모양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러한 공상은 한글의 자형(字形) 속에 감추어져 있던 새로운 사실을 밝혀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세종(1397-1450)이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안 있어 태어났다. 이 두 위인은 다양한 분야에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역량을 토대로 문화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이 세상에서 동일한 시간대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훈민정음 해례본』의 ‘제자해(制字解)’는 한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세종이 창제한 한글과 연결짓는 상상의 공간을 열어준다. 


2.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의 설명에 의하면 한글의 자음은 발음 기관을 상형(象形)하여 만들어졌고, 모음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상형하여 만들어졌다. 그런데 ‘제자해’의 ‘ㄱ’과 ‘ㄴ’에 대한 설명에는 그동안 관심을 끌지 못했던 흥미로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제자해’에서는 어금닛소리 ‘ㄱ’은 혀의 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형상을 본떴고, 혓소리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형상을 본떴다(牙音ㄱ 象舌根閉喉之形 舌音ㄴ 象舌附上齶之形)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설명은 ‘ㄱ’과 ‘ㄴ’이 <그림 1>과 같은 옆얼굴을 토대로 이루어졌음을 알려 준다. 



<그림 > 좌안


  <그림 1>처럼 혀끝과 잇몸이 왼쪽에 있고 혀의 뿌리와 목구멍이 오른쪽에 있는 좌안(左顔)의 모습이 전제되어야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ㄱ’과 ‘ㄴ’의 자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제자해’에서 ‘ㄱ’과 ‘ㄴ’을 <그림 2>와 같은 우안(右顔)의 얼굴을 전제로 설명하였다면, ‘ㄱ’과 ‘ㄴ’의 모양은 각각 <그림 3>과 같이 좌우가 뒤집힌 ‘ㄱ’과 ‘ㄴ’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림 2> 우안 <그림 3> 좌우가 뒤집힌 ‘ㄱ’과 ‘ㄴ’  

  혀끝과 잇몸이 오른쪽에 있고 혀의 뿌리와 목구멍이 왼쪽에 있는 <그림 2>와 ‘제자해’의 ‘ㄱ’과 ‘ㄴ’에 대한 설명을 결합시키면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문자의 모양은 당연히 <그림 3>처럼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의 창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제자해’에서는 분명히 좌안의 얼굴을 상정하고 ‘ㄱ’과 ‘ㄴ’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훈민정음을 처음 고안할 때부터 그러했는지, 아니면 훈민정음을 완성한 후 글자를 다듬는 과정에서 그러한 발상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ㄱ’과 ‘ㄴ’에 대한 ‘제자해’의 설명이 좌안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제자해’의 설명에서 좌안이 전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당시에 쉽게 떠오르는 옆얼굴 그림이 좌안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언어학 관련 서적들의 조음 기관 그림도 대개 좌안이지만, 훈민정음 창제 당시 우리나라에서 선호하던 옆얼굴 그림 역시 좌안이었다. 문화재관리국에서 나온 『전국초상화조사보고서(1987)』에 따르면 조선시대를 포함하여 1936년 이전에 제작된 448점의 초상화 중 좌안이 333점으로 전체의 3/4을 차지하고, 우안은 32점에 불과하여 좌안의 1/10 수준이며, 나머지는 기타 정면상 등이다. 게다가 다른 조사 결과들을 보더라도, 동양이나 서양이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좌안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15세기에도 “옆얼굴” 하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모습은 좌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여기서 생각의 연결 고리를 한 단계 더 나아가 보기로 하자. 초상화 중 좌안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오른쪽 뇌의 지배를 받는 왼쪽 얼굴에 사람의 감정이 더 잘 나타나서 왼쪽 얼굴을 선호하여 그린다는 설이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자신의 왼쪽 얼굴과 오른쪽 얼굴을 비교해 보면 왼쪽 얼굴의 사진에서 친근감을 더 많이 느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우안보다 좌안의 초상화가 더 많은 이유를 여기에서만 찾는 것은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다. 얼굴을 그리는 사람의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설명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 즉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의 측면을 고려한다면 두뇌의 좌우반구가 기능상으로 다른 역할을 하며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오른손잡이’의 대뇌는 그림의 왼쪽을 더 주목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옆얼굴에서 중요한 요소인 눈, 코, 입 등이 왼쪽을 향하는 그림을 그린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뇌와 좌뇌의 기능 차이에 바탕을 둔 설명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오른손잡이’라는 표현이다. 오른손잡이는 사람의 옆얼굴을 그릴 때 우안보다는 좌안을 그리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이 현상은 손목의 운동 방향과 관련이 있다. 원을 그릴 때 왼손은 시계 방향으로 손을 돌리는 것이 편하고, 오른손은 반시계 방향으로 손을 돌리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오른손잡이가 옆얼굴을 그릴 때는 반시계 방향으로 얼굴의 윤곽을 그려 나가므로 그림의 왼쪽이 얼굴이 향하는 앞부분이 될 것이고, 그 방향으로 얼굴을 틀고 있는 초상화는 자연스럽게 좌안이 된다.
  반면 주변에서 접하는 왼손잡이들에게 아무런 전제 없이 옆얼굴을 그려 보라고 하면 우안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간혹 좌안을 그리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의 세계 속에서 살면서 오른손잡이들이 그리는 좌안의 얼굴 그림에 적응한 결과라고 해석된다. 오른손잡이가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오른손잡이가 그리기 편한 좌안의 초상화가 사회를 지배하는 일종의 문화처럼 굳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오른손잡이 문화는 언제부터 정착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선사시대의 벽화에 보이는 사람이나 동물의 얼굴 방향까지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는 인간에게 오른손잡이가 많은 이유가 궁금해질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정설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안다. 이쯤에서 생각의 전개를 멈추어도 한글과 관련된 상상에는 문제가 없으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4.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왼손잡이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항상 앞자리를 차지하는 위인이다. 어떤 사람이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 판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을 그릴 때나 글씨를 쓸 때 왼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 이는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향하는 그의 붓질 방향(\\\\)으로도 확인되지만, <그림 4>처럼 글씨의 좌우를 뒤집으면서 우에서 좌로 써 가는 뒤집힌 글씨(거울 영상 서체)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림 4>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거울 영상 서체


  역사적으로 글씨의 좌우가 뒤집히는 서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비문에서는 첫 번째 행은 좌에서 우로, 그 다음 행은 우에서 좌로 소가 밭을 갈듯이 글씨를 쓰던 우경식 서법(boustrophedon)이 발견되는데, 이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행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글씨와 동일한 방식으로 글씨의 좌우가 뒤집어져 있다. 그러나 우경식 서법은 글을 쓰는 손의 여부와 상관없이 당시에 통용되던 서법이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우는 왼손잡이로서 가지고 있던 개인적인 서법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처럼 뒤집힌 서체를 쓰던 왼손잡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한글을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좌안이 아닌 우안을 옆얼굴의 기준으로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ㄱ’과 ‘ㄴ’의 방향은 앞에서 본 <그림 3>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림 5> 좌우가 뒤집힌 한글 음절


  또한 <그림 5>처럼 음절의 초성이 오른쪽에 오고 중성이 왼쪽에 오도록 합자(合字)하는 방법을 고안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뒤집힌 글씨만 쓴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글씨를 뒤집어서 쓰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이 읽어야 하는 글은 당시의 관행대로 표기를 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2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에 있는 한 도시의 지도를 그렸다. 그런데 동일한 지도를 두 장 그리며 한 지도에서는 뒤집힌 글씨로 도시의 이름을 썼고, 완성본으로 여겨지는 지도에서는 ‘다시 뒤집힌’ 일반적인 서법으로 도시의 이름을 썼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뒤집힌 글씨를 두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조처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평소에는 뒤집힌 글씨를 쓰고 다른 사람에게 글의 내용을 보여주려고 할 때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서체로 썼다고 거꾸로 해석하는 편이 온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문자를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처음에는 왼손잡이의 관점에서 문자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이 만든 문자를 오른손잡이 사회에서 쓰기 편한 문자로 수정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상상의 방향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닌 세종에게 맞추어 보자. 만약 세종이 왼손잡이였다면 어떠했을까? 세종이 왼손잡이였다면 글자의 획을 우에서 좌로 쓸 때 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도 <그림 5>와 같이 만들어졌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 중 하나는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爲民)’이었다. 당시에도 분명히 오른손잡이가 사회의 주류로서 문화를 지배하였기 때문에 세종은 자신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글쓰기를 고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후 표기 방식이 정착되는 과정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소리 나는 대로 쓰는 음소주의와 현재의 맞춤법처럼 뜻을 밝혀 적어서 읽기에 편한 형태음소주의 중 세종 자신은 후자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표기된 문헌은 세종이 직접 관여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에 한정되며, 이후 모든 문헌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쓰기에 편한 음소주의로 흘렀다는 사실이 그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오른손잡이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오른손잡이 문화 속에서 한글이 만들어진 이상, 그것을 만든 사람이 왼손잡이였다 하더라도 그 글자는 지금처럼 오른손잡이 문화를 담고 있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자는 사회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고안된 매개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