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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우리 시의 향기 
  구도의 시 ․ 깨침의 시, 조오현

김재홍·문학평론가․ 경희대학교 교수 


1. 한 생각이 무량겁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시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시는 시인에게 있어 정감의 자연스런 흘러넘침을 노래하는 한 예술양식인가, 아니면 사회 역사적인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보다 나은 공동체 실현을 위해 나아가려는 전략 전술의 효과적인 방식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거나 표현해 내지 못한 세계를 기발한 상상력과 언어로 형상화하는 역발상, 창조력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렇다. 이 모두가 시의 영역이고 범주이며 의미에 해당한다. 그러기에 시의 기본 흐름이 순수 서정시와 리얼리즘시, 그리고 모더니즘시라고 하는 세 갈래를 기본 골격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 현대시사는 이러한 세 가지 흐름이 서로 길항하면서 시대 정신을 이루어 왔음을 본다.
  그런데 이런 묶음으로만 파악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흐름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구도의 시, 명상의 시, 즉 종교적 경향의 시라고 불러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에는 크게 보아 기독교적인 경향의 시와 불교적인 시로 구분해 볼 수 있겠는데, 전자는 김현승, 정지용, 윤동주 등의 시사적 계보를 후자는 한용운, 서정주, 조지훈 등의 맥락을 추출해 볼 수 있겠다. 
  이 가운데 근년 우리시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은 불교적인 구도의 시 또는 선적인 명상시의 대두라 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승려시인 조오현의 시편들이라고 하겠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아득한 성자」

 

  2007년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인 이 시는 불가에서 말하는 ‘한 순간이 무량겁’이라고 하는 인식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삶이, 생명이 순간과 영원, 본질과 형상을 넘나드는데 그 본질이 놓여지며 그러기에 오늘의 삶,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데 의미가 놓여진다는 깨달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깨침은 그야말로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와 같이 하루살이의 모습 속에서 생명의 원리, 인생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날카롭고 섬세한 통찰이 담겨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이러한 하루살이의 모습이야말로 바로 아득한 성자, 즉 깨침을 이루고 깨달음을 완성한 순간에 적멸에 뜨는 부처님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 제시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 시는 이슬 방울 하나에서 우주를 보고 찰나에서 영원을 읽어내는 구도적인 명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요즘 시가 현저히 결여하고 있는 철학적 깊이, 종교적 형이상학의 세계를 열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기계 문명의 소용돌이, 상업주의의 범람 속에서 자아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근원을 사색하고 본질을 들여다보며 살아가라고 하는 경책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뜻이 되겠다. 아울러 생명 앞에서, 삶 앞에서 모든 존재가 높낮이가 없는 것이라는 만유 평등 사상의 한 모서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2. 자기 반성과 경책의 길

  그러기에 조오현 시인의 시는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준엄한 자아 성찰의 자세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우리 절 밭두렁에
벼락 맞은 대추나무

무슨 죄가 많았을까
벼락 맞을 놈은 난데
오늘도 이런 생각에
하루해를 보냅니다

―「죄와 벌」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잘 되면 다 내 덕이고, 못되면 다 네 탓. 남의 탓이라고 떠밀지 않는가. 그만큼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결여한 채 막무가내로 ‘나’만을 고집하고 우기면서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인간 상실 시대의 모습인 것이다.
  이 점에서 “무슨 죄가 많았을까/ 벼락 맞을 놈은 바로 난데”라는 자기 반성의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야말로 소중한 가치 덕목이 아닐 수 없으리라. 실상 이러한 자아 성찰의 부끄러움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한 점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하는 윤동주의 기독교적인 자아 성찰과도 연결되는 것이라 하겠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을 사람들은 해 떠오르는 쪽으로/ 중들은 해 지는 쪽으로/ 죽자사자 걸어만 간다// 한 걸음/ 안 되는 한뉘/ 가도 가도 제 자리/ 걸음인데”(「제자리 걸음」 전문)라는 시에서 보듯이 모든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으로서 三毒을 버리고 정신의 해탈 속에서 양심과 자유에의 길을 가려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속세를 살아가면서 온갖 괴로움과 부끄러움에 뒤채일 수밖에 없을 것이 자명한 이치이다. 스님, 달마는 서쪽으로 모든 것을 버리러 가야하는 것이 본도인데 사바세상에 육신을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온갖 번뇌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는 뜻이다. 이점에서 시인의 길은 바로 스님과 같은 구도자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3. 비움의 삶, 깨달음의 삶

  그러기에 시인은 차라리 모든 것을 다 비우고 사는 것으로서 무애의 삶, 해탈의 경지를 소망하고 지향해 나아가게 된다. 다음 시가 그 한 예가 된다.

 

새떼가 날아가도 손 흔들어주고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주고
남의 논일을 하면서 웃고 있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논두렁 밟고 서면―
내 것이나 남의 것이나
―가을 들 바라보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맘 다 비우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허수아비」



  새삼 덧붙일 것 없이 허수아비란 바로 모든 삼독과 삼착을 버리고 사는 그러한 초탈적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 새떼도,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모두 다 받아들이며 웃고 있는 허수아비, 내 것이나 남의 것이나 차별과 경계를 짓지 않고 가진 것 하나 없어도 웃고 있는 허수아비의 모습이야말로 말 그대로 해탈한 자의 모습 그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맘 다 비우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이라는 결구처럼 자아라는 소우주를 다 넘어서서 하늘까지도 품어 안는 우주적 초월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허수아비의 모습은 앞에서 살펴본 하루살이처럼 그대로 깨침을 완성한 자로서 부처님의 한 모습이고 아득한 성자로서 우주적 초월을 이루어낸 해탈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여기와 저기, 너와 나, 이해타산이라고 하는 온갖 현실계의 편견과 아집을 뛰어넘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그런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는 뜻이다. 아울러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고 바람직한 인간의 길이 아니겠는가 하는 데 대한 성찰을 은연중에 제시한 것이 되겠다.
  그렇지만 그 어떤 깨침을 이룬다고 해서 육신을 지니고 살아가는 현존재(Da-sein)로서 인간이 모든 것을 초월한 채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으리라. 구도의 길, 깨침의 길이란 끝이 없는 것, 그러기에 다시 절망과 허무의 은산철벽을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 자명한 이치이다.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 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아지랑이」



  그렇다! 살아있는 한, 열반으로서 죽음에 들지 않는 한 인간은 언제나 ‘나아갈 길도 없고 물러날 길도 없는’ 백척간두 끝에 놓여져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이기에 어쩔 수 없는 절망감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은 가도 가도 사막이고 마침내 낭떠러지. 절벽에 이르고 만다는 비극적 세계 인식이 제시돼 있는 것이다. 또한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라는 결구처럼 모든 것이 아지랑이, 즉 꿈이고 헛될 뿐이라는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표출돼 있는 것이다. 그만큼 허무와 적막으로서 삶의 본질에 대한 속 깊은 깨침이 담겨 있다는 뜻이 되겠다.



4. 일체 유심조, 마음과 생명의 길

  이러한 비극적인 세계인식 또는 허무주의적인 세계관은 결국 세상만사 모든 것은 마음 하나에 달렸다고 하는 일체 유심조, 즉 불교적 유심론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 옛날 천하장수가
천하를 다 들었다 놓아도

한 티끌 겨자씨보다
어쩌면 더 작을

그 마음 하나는 끝내
들지도 놓지도 못했다더라

―「마음 하나」



  그런데 이러한 유심론적 세계관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지점에서 다시 생명을 세상의 제1가치로 알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찬양하며 모시고 길러 나아가려는 생각의 체계로서 생명 사상으로 연결된다.

 

어느 날 아침 게으른 세수를 하고 대야의 물을 버리기 위해 담장가로 갔더니 때마침 풀섶에 앉았던 청개구리 한 마리가 화들짝 놀라 담장 높이만큼이나 폴짝 뛰어오르더니 거기 담쟁이덩쿨에 살푼 앉는가 했더니 어느 사이 미끄러지듯 잎 뒤에 바짝 엎드려 숨을 할딱거리는 것을 보고 그놈 참 신기하다 참 신기하다 감탄을 연거푸 했지만 그 놈 청개구리를 제하여 시조 한 수를 지어볼려고 며칠을 끙끙거렸지만 끝내 짓지 못하였습니다. 그 놈 청개구리 한 마리의 삶을 이 세상 그 어떤 언어로도 몇 겁을 두고 찬미할지라도 다 찬미할 수 없음을 어렴풋이나마 느꼈습니다.

―「절간 청개구리」


  그렇다. 청개구리 한 마리의 생명도 그것은 세상에서 유일본이고 원본이기에 대체하거나 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공장에서 만들어 내거나 찍어낼 수 없는 것이기에 무한가치, 절대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모든 생명체는 우주가 합심하여 창조해낸 우주 생명이고 그 스스로가 몸과 마음속에 우주를 담아내기에 생명 우주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어떤 예술 작품으로 그 생명을 형상화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의 가현, 즉 모방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 청개구리 한 마리의 삶은 이 세상 그 어떤 언어로도 몇 겁을 두고 찬미할지라도 다 찬미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비록 삶이 허무하고 덧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생명은 소중하고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서 절대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생명을 긍휼히 여기고 소중히 여기며 섬기고 기려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편들에는 생명과 인간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과 함께 그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는 구도와 갈망이 지속적으로 형상화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깨달음의 높이와 구도의 깊이를 통해 생명 사랑의 철학을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 되겠다.



5. 맺음말

  보통 시(詩)의 어원을 ‘言+寺’, 즉 절에서 쓰는 말 또는 절에서 사용하는 말의 특징적 용법으로부터 연유했다고 풀이하지 않는가? 그 만큼 시란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깨달음 또는 구도정신을 짤막하게 함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구도의 길 또는 해탈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반영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시가 사람들의 감성적인 느낌을 노래하거나 주의ㆍ주장을 펼치는 방법일 수도 있고, 또 신기한 것들에 관한 호기심의 표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향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시가 시인 한에는 생명에 대한 깨침과 삶에 대한 구원을 궁극적인 이상으로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으리라. 
  그렇게 본다면 이러한 깨침의 시, 구도의 시야말로 시의 궁극적인 바탕이며 이상향이 아닐 수 없겠다. 그것은 시의 본도이며 정도이고, 동시에 대도를 열어갈 수 있는 21세기 시의 의미 있는 대안이 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