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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어원 탐구 
  김대문: 우리나라 최초의 어원학자

이기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어원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것도 드물다. 여러 나라의 역사를 보면 먼 옛날에 어원을 논한 기록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늘날 전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랜 사서(史書)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펴면 놀랍게도 그 제1권(신라본기 新羅本紀)에 어원 해석이 건성드뭇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 맨 첫 장에 시조(始祖)의 성씨 ‘박’(朴)에 대한 어원설이 있고 그 뒤의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에 보이는 왕호(王號) ‘차차웅’과 ‘이사금’에 대한 김대문(金大問)의 어원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권3(신라본기 제3)에는 눌지 마립간(訥祗痲立干)의 ‘마립간’에 대한 김대문의 어원설이 인용되어 있다. 아래에 김대문의 세 어원설을 「삼국사기」에서 옮겨 적기로 한다.

(1)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이 섰다. 차차웅은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 였다. 김대문이 말하기를 “방언(方言)으로 무당(巫)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인(世人)이 그를 외경(畏敬)하여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이라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권1>
(2)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이 섰다. 남해(南解)의 태자였다. (중략) 처음 남해가 붕서(薨逝)하매 유리가 마땅히 서야 했는데 대보(大輔) 탈해(脫解) 가 본디 덕망이 있어 위(位)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탈해가 말하기를 “신기 대보(神器大寶)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제가 듣기로 성지 인(聖智人)은 이(齒)가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 시험합시다” 하였다. 유리 가 치리(齒理)가 많았으므로 좌우와 더불어 받들어 세우고 이사금(尼師今) 이라 불렀다. 고전(古傳)이 이와 같다. 김대문이 말하기를 “이사금은 방언이 다. 치리(齒理)를 일컫는다. 옛날에 남해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에 연장(年長)이 위(位)를 이으라’고 하였다. 그뒤 김(金)성이 또한 일어나 삼성(三姓)이 치장(齒長)으로 서로 왕위를 이었으므로 이사금이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권1>
(3) 눌지 마립간(訥祗痲立干)이 섰다. 김대문이 말하기를 “마립은 함조(諴操) 를 일컬으며 위계(位階)에 따라 설치되었다. 즉 왕궐(王橛)이 주(主)가 되고 신궐(臣橛)은 그 아래에 줄지어 늘어섰으므로 인하여 이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권3>


  여기서 특히 (1)(2)(3)에 김대문(金大問)이란 이름이 적힌 사실에 새삼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고려 시대에 신라를 대표하는 어원학자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권1)에도 역시 이들 어원설이 인용되어 있음을 볼 때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김대문은 누구인가. 「삼국사기」에서 김대문(金大問)이란 이름은 위의 (1)(2)(3) 외에 다음 두 군데에 보인다.

 

(4) 김대문은 본디 신라 귀문(貴門)의 자제로서 성덕왕(聖德王) 3년에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이 되었으며 전기(傳記) 약간 권(卷)을 지냈는데 그의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는 아직도 남아 있다. <권46. 설총전(薛聰傳) 끝에 붙어 있는 김대문전(金大問傳)>
(5) 이는 김대문의 「계림잡전」(鷄林雜傳)에 기록된 바에 의거하여 쓴 것인데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찬(撰)한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에 기록된 바와는 다르다. <권4. 법흥왕 15년>

  아무런 확증은 없지만 위의 기록들에 보이는 김대문이 모두 같은 인물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잘못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귀문의 자제로서 관직으로는 성덕왕 3년(서기 704년)에 한산주 도독을 지냈다고 했으니 그의 생애는 대체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에 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4)(5)에 적힌 그의 저서가 모두 다섯을 헤아리며 그것이 고려 시대에도 전해져 있었다고 하니 그는 이름있는 저술가(著述家)였음에 틀림없다. 이 저서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집필에 참고가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김대문의 어원 연구가 어떠했는지, 그 전모를 지금으로서는 밝힐 길이 없다. 위의 세 어원설을 통하여 그가 왕호(王號)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통일신라시대에는 건국 초기의 왕호들의 뜻이 모호해져서 그 참뜻에 대한 궁금증이 컸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것이 김대문의 어원설이었고 그것이 후대에까지 널리 인정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리하여 김대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어원학자라는 명예를 지니게 된 것이다.



2.

  김대문의 어원설들은 20세기에 들어 몇몇 언어 및 역사 학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기서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하여 두 분(우리나라 학자와 일본 학자)의 연구를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1)의 ‘차차웅’, ‘자충’(중세어의 한자음으로는 ‘웅’, ‘츙’)에 대하여 아유카이 푸사노스케(鮎貝房之助 1931)는 무당을 가리킨 말이라고 한 김대문의 어원설에 의지하면서 이 말이 변하여 ‘즁’(僧)이 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웅’, ‘츙’은 본래 남자 무당을 가리킨 말이었는데 불교가 들어온 뒤에 남자 승려 즉 ‘즁’을 가리키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 설의 흠점은 중세어 문헌에 무당을 가리킨 ‘스승’의 예들이 있음을 모른 데 있었다.

  

(6) (가) 녯 님그미 스승 삼가시고(前聖愼焚巫) <두시언해 10.25>
(나) 도로 와 큰 스승을 뵈리아(還來謁大巫) <두시언해 19.7>
(다) 스승 튜믄 녜 마초지 아니 이리로다(鞭巫非稽古) <두시언해 중간본 12.41>
(라) 셰쇼개 스승이 간대로 비셰원호미 미츄미 심야(世俗巫禱狂妄甚) <정속언해 20>


  중세어에서 ‘스승’은 대개 현대어의 ‘스승’(師)과 같은 뜻으로 쓰였는데 무당을 가리킨 예들이 드물게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중세어 문헌의 ‘스승’(巫)의 예는 위의 넷이 전부가 아닌가 한다. 양주동(梁柱東 1942. 180면)이 이 예들을 찾아낸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때에는 「두시언해」는 중간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만 (나)의 예를 빠뜨린 것이 지적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예들에 근거하여 ‘스승’은 원래 무당(巫)의 뜻을 가진 말이었는데 뒤에 스승(師)의 뜻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한 것도 그의 비범한 안목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웅’, ‘츙’에 ‘스승’을 연계시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주동(1942. 180면, 544면)이 ‘스승’의 고형을 ‘’이라 한 것은 많은 고민 끝에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次), ‘’(慈), ‘츙’(充)등의 초성 ‘ㅊ, ㅈ’에 가깝게 하려고 ‘ㅿ’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ㅿ’이 고대어에서 어두음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의문시될 뿐 아니라, 그것이 ‘ㅅ’으로 변했다고 하는 것도 무리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삼국사기」에는 한결같이 ‘尼師今’(중세어 한자음 ‘니금’)이라 표기되었으나 「삼국유사」에는 ‘尼叱今’ 또는 ‘齒叱今’으로도 표기되었다. ‘叱’이 속격 조사의 표기였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신라어에서 정확히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임시로 중세어의 어형을 따라 ‘ㅅ’으로 가정하면 이들은 ‘닛금’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왕호 ‘니금’, ‘닛금’의 본뜻이 치리(齒理)라 한 데 대해서는 20세기의 모든 학자가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아유카이(1931)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어원설은 어느 모로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경칭(敬稱)에 쓰인 두 말, ‘니’(예. 아버니, 어머니)와 ‘굼’(예. 「훈몽자회」의 ‘皇 님굼’)의 합성어라 하였다. 「용비어천가」 등의 ‘님금’을 보지 못하여 ‘귬’이라 한 것이다.
  한편 양주동(1942. 86면)은 ‘거서간’(居西干)이 ‘’ 곧 시조(始祖)의 뜻임에 대하여 ‘닛금’은 사왕(嗣王), 계군(繼君)의 뜻이라 하였다. 쉽게 말하면 동사 어간 ‘닛-’(繼, 嗣)과 명사 ‘금’(王)의 합성어로 보았던 것이다. 여기서 동사 어간과 명사의 직접 합성이라는 특이한 조어법(造語法)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이와 비슷한 예를 들지 않았음이 아쉽게 느껴진다. 고대어에서는 용언이 그대로 명사적으로 쓰였다고 보는 관점(양주동 1942. 268면 등)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어원설을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4.

  끝으로 ‘마립간’(麻立干 중세어 한자음 ‘마립간’)의 ‘마립’을 말뚝(橛)으로 해석한 김대문의 어원설도 현대 학자들은 옳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유카이(1931)는 ‘말’(頭, 首), ‘, 마로’(宗), ‘’(棟), ‘마로’(廳) 등을 들어 ‘마립’을 정상(頂上), 극소(極所)를 가리킨 말로 보았다. 양주동(1942. 71-72면)도 ‘말, 마리’(頭, 首), ‘’(宗, 棟, 脊梁), ‘마로, 마루’(廳)는 모두 본래 머리(頭), 위(上)를 뜻한 동원어(同源語)라 하였다.
  중세어에서 모음 ‘아’와 ‘’의 구별이 엄연히 존재하였고 이 구별은 고대어에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들을 한데 섞어 버무리는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중세어에서 말뚝을 가리킨 명사는 ‘맗’이었다.


(7) 橛은 말히라 <능엄경언해 8.85>
이 나귀 욘 말히라 니(是繫驢橛) <몽산법어약록언해 57>
樁 말 좡, 橛 말 궐, 椓 말 탁, 杙 말 익 <훈몽자회. 중18>


  이로써 ‘마립간’의 첫 음절의 모음은 ‘아’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의 두 분이 든 여러 예들 중세어는 ‘마리’(頭)만이 고려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5.

  지금까지 김대문의 세 어원설과 이에 대한 두 현대 학자의 논의를 엿보았다. 요약하면, 김대문의 세 어원설 중에서 하나만 용인했을 뿐, 나머지 둘은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어원설을 제시하였다. 용인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였다. 아유카이(1931)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66면), “큰 의문이 없지 않다”(79면)라 하였고 양주동(1942)은 “부회(附會)의 속설(俗說)”(71면), “우합(偶合)함에서 생긴 속설”(86면)이라 하였다. 두 분이 제기한 새로운 어원설을 보면, 임금의 칭호는 극존칭어(極尊稱語)여야 하는데 김대문의 어원설은 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임금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은 현대의 우리보다 옛 사람들이 더 깊었었고 김대문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김대문의 어원설이 신라와 고려 사회에서 오랜 동안 널리 알려졌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실은 이에 대한 두터운 믿음이 밑받침이 되었음을 좀더 신중히 헤아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내 머리 속에는 20세기 역사·비교언어학의 거벽(巨擘) 앙투안 메이예(Antoine Meillet 1866-1936)가 “고유명사의 어원은 불확실하다”고 한말이 내내 맴돌았다. 그 이유로 메이예(1925. 41-42면)는 고유명사의 경우 음상(音相)은 분명한데 의미(意味)가 분명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메이예더러 말하라면, 이 글에서 논한 세 고유명사의 어원설은, 김대문의 것이거나 현대 학자들의 것이거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다음과 같은 명언(名言)으로 끝을 맺었다.


(8) 고유명사의 어원에 각별히 관심을 가지는 언어학자는 대개 언어학의 모험가(冒險家)이며 필요한 모든 방법론적 요구 조건을 갖추는 사람은 아주 적 다. <메이예. 1925. 42면>

 

참고 논저

梁柱東(1942), 古歌硏究, 博文書舘.
李基白(1978), 金大問과 그의 史學, 歷史學報 77號.
鮎貝房之助(1931), 雜攷 第一輯, 京城.
Meillet, Antoine(1925), La méthode comparative en linguistique historique, Os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