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사회에서의 문화 상호 교류
다문화 사회에서 한국어 교육 방안
다문화 가정 자녀를 위한 언어교육
여성 결혼 이민자를 위한 한국어 교육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 이주민과 인권 현황
일본 다문화·다언어 사회의 정책과 논의
이곳 이 사람
어원 탐구 
우리 시의 향기
우리 소설 우리말
국어 생활 논단
국어 산책
국어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 드립니다
국립국어원 소식
특집: 우리 소설 우리말 
세계화, 번역, 노벨상

김 철·연세대 국문과 


  최근 10여 년간 한국인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단어 중의 하나는 아마도 ‘세계화’일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든 궂은 의미에서든, 이제 ‘세계’를 의식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음을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인들은 뼈저리게 절감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아마도 1997년의 IMF사태였을 것이다. 한국의 은행이 미국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미국 돈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는 한국인의 삶을 어떻게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교육시켰다는 점에서 그것은 참으로 값비싼 ‘세계화 훈련’이었다. 
  그런데 이 값비싼 ‘훈련’의 결과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제 세계금융시장의 판세를 한 눈에 척 꿰뚫게 된 한국인은 정말로 ‘세계화’된 것일까? 그리하여 그 결과로 얻어진 부를 바탕으로 세계 일류의 명품을 소비하고, 세계 각지를 유유히 유람하게 된 한국인은 정말로 ‘세계화’ 된 것일까?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게 된 한국인은 정말로 ‘세계화’ 된 것일까? 이런 한국인들이 흘러넘치는 한국은 정말로 ‘세계화’ 된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이미 그 어투에서도 짐작되듯이, 어떤 부정적인 답변을 예상하고 있다. 세계화는 이제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현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위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닌 정서이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위의 질문들에 대해 ‘그렇다’고 답하는 것은 매우 씁쓸하고 심지어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위의 질문들에 대해 간단히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세계화가 그 무엇보다도 자본의 전 지구적 유통과(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부문의 전 세계적 단일화를 목표로 하는 것임이 분명한 바에야, 위에서 예로 든 한국인들의 모습이 세계화와 아무 관련 없는 것이라고 부정할 근거는 없어 보인다. 인정하기가 불편하긴 하지만, 세계화란 저런 한국인들을 만들어내자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가장 극단적인 방안은 아마도 ‘우리 민족끼리’ 라는 구호에 집약되어 있을 것이다. 세계화의 거센 물결 앞에 ‘우리 끼리’ 뭉쳐서 ‘우리 것’을 지키고 ‘우리 식’으로 해나가면 그 어떤 위험도 극복할 수 있다는 투의 논리는, 그 구호의 생산지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서도 자주 발견되곤 한다. 그러나 한낱 허상에 지나지 않는 집단적 정체성의 강화와 종교적 주술행위에 가까운 정신주의적 요법을 통해 현실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 허망한 시도는, 그 단순함과 우매함에서 ‘영어를 잘하는 것이 곧 세계화’라는 정반대의 주장과 판박이로 닮았고, 동시에 오랜 세월 동안 전혀 녹슬지 않고 반복되어 온다는 점에서도 아주 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현실 적응능력을 현저히 퇴행시킨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인간적이기도 하다.
  이 두 극단이 서로 다른 듯하지만 실은 서로 닮았다는 것, 이런 태도로는 세계화를 ‘이해’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한국 문학의 ‘세계화’에 관한 문제로 논의를 옮겨보자.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문제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번역’이다. 많은 경우 ‘한국문학의 세계화’란 한국어로 된 문학작품을 외국어, 특히 영어로 번역하여 세계무대(?)에 널리 알리는 일과 동일시된다. 한국문학 번역원이라는 정부 기구에 만만치 않은 국가 예산이 집행되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며,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 같은 세계적인 행사에 (비록 졸속 번역․출판 때문에 여러 뒷말을 낳긴 했지만) 엄청난 양의 한국 문학작품들을 내보낼 수 있었던 것도 최근의 일이다. 
  문제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담론과 ‘한국문학의 번역’이라는 주제가 서로 결합할 때에 나타나는 상투적인 논의의 방식과 결론에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한 몇 차례의 심포지엄이나 공청회 등에 참가해 본 경험만으로 감히 말하자면,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번역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번역의 기량 향상, 전문 번역가의 양성 방안, 번역 대상 작품의 선정, 국가적인 지원 방안, 효과적인 해외진출 전략 같은 주제를 끝없이 맴돌고 있다.(이런 문제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의미가 없기는커녕 그것들은 보다 더 세밀하고 꼼꼼하게 탐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번역이라는 ‘수단’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잘 사용할 것인가 라는 식으로 논의가 맴도는 한,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이해되지 않으며 진정한 ‘번역’도 수행되지 않는다. 
  특히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우울한 심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번역이라는 주제가 곧장 ‘노벨상 수상’ 운운하는 논의로 치달을 때이다. 식민지 이래 끊임없이 도지는 이 ‘노벨상 증후군’이야말로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진정한 세계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주범이다. 시골/서울, 주변/중심, 한국/세계, 비서구/서구의 세계 질서를 내면화하는 데에 노벨상만큼 강력한 기제가 달리 없고,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영원한 ‘촌놈’으로 만드는 데에 ‘노벨상 증후군’만큼 심각한 질병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의 번역’하면 바로 노벨상을 연상하는 이 뿌리 깊은 ‘촌놈 근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문학의 세계화’란 허망한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노벨상 따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한국문학 작품이 더욱 많은 외국어로 더욱 잘 번역되는 것이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가장 관건적인 요소임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번역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번역 행위의 철학적 의의를 묻지 않는 맹목적 번역이야말로, ‘영어를 잘 하는 것이 곧 세계화’라는 주장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번역이란 무엇인가?’ 
  번역 없이는 ‘나’도 없고 ‘남’도 없다. 내가 나를 인식하는 것은 남과의 ‘차이’를 통해서인데, 번역이란 바로 이 차이를 깨닫고 그것을 드러내는 행위인 것이다. 이때의 번역이란 말의 직접적인 의미에서의 번역, 즉 외국의 문헌들을 자신의 언어로 옮기는(혹은 그 반대방향의) 번역 행위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것을 통해서 나와 세계를 인식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모든 근대문학은 바로 이 번역 행위를 통해서 시작되었고 한국의 ‘신문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것이 ‘신문학’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나와 다른 ‘남’과의 대면을 통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문학의 기원에 가로놓인 이 ‘외래성’은 부정하거나 외면해야 할 약점이 아니라는 것, 또 한국만의 특수한 사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모든 ‘근대문학’은 ‘외국문학’이며 우리가 ‘한국문학’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기원과 유래가 매우 복잡한 어떤 ‘외국문학’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근대문학은 다른 모든 지역의 근대문학이 그렇듯이, 이미 ‘번역문학’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외국’ 혹은 ‘외부’와 대립하는 ‘내부’는 어디인가? 그것도 사실은 분명하지 않다.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경계, 나와 남을 가르는 경계는 불투명하고 항상 흔들린다. 그리고 그 가운데 ‘번역’이 놓여 있다. ‘번역’은 어떤 교환 가능한 실체들을 어떤 명료한 경계선 위에서 주고받는 행위가 아니다. 반대로 ‘번역’을 통해서 내부와 외부의 선들이 명료하게 그어지고 교환 가능한 실체들이 형성되는 것이다.(또는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의 말을 빌리면, 번역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번역 불가능한 것들의 존재를 알게 된다. 요컨대, 번역은 ‘이해불능이라는 경험을 이해하는 경험’이다.
  우리는 타자(他者)를 이해할 수 없다. 나와 타자 사이에는 이해불가능의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그 심연을 우리가 절대로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남을 이해할 수 없고 남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번역이며, 그 이해불가능성의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번역은 그것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他者)의 존재를 이해하는 경험으로서의 번역은 그러므로 타자의 절대성에 대한 인정, 차이의 강제적 동질화를 거부하는 실천 행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이란 언제나 균질적인 어떤 두 개의 언어적 실체를 교환하거나 매개하는 투명한 행위로 인식된다. 거기에서 세계문학과 번역에 관한 숱한 오해들이 발생한다. 이 경우에 번역 행위는 타자를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종속시키거나 반대로 자신을 타자에게 종속시키는 일이 되기 십상이다. 이때의 번역은 국민국가의 경계를 확정하고 그것들 사이의 역학관계를 충실히 반영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한국인의 교양을 지배했던 세계문학 전집의 상상력이야말로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논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구호다. 여기서 ‘민족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과 짝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 ‘민족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세계’란 무엇이며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유럽이나 미국, 즉 ‘서양’을 가리키는 것이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은 유럽이나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무대’에 ‘우리 민족’을 ‘등록’시키고자 하는 한국인의 오래된 욕구가 집약된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고 있는 거센 세계화의 물결은 민족국가의 다양한 분립과 그 위계 및 분업의 질서를 통해 강력한 중심의 지배 아래 통합된 하나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며, 그 꿈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과 바로 통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민족끼리’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이 한편으로 세계화에 저항한다고 말하는 것은 실로 서글픈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세계’에 대한 한국인의 상상력이 이렇게 고정되어 있는 한, 민족적 자부심과 주체성으로 가득 차 보이는 이런 종류의 민족적 언설이 실은 서양을 ‘세계=중앙=보편’으로 상정하면서 자신을 ‘지역=주변=특수’로 위치지우는, 전도된 유럽중심주의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목청 큰 민족주의적 호소가 실은 뿌리 깊은 ‘사대주의’의 또 다른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일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번역의 상관관계는 번역의 철학적 의의를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올림픽에 출전한 국가대표 운동선수를 응원하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문학 작품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 어떤 것에도 양도하거나 분할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옹호, 오로지 집단적 귀속만을 자신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 모든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공약불가능, 환원불가능, 이해불가능의 절대적 타당성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할 때 문학의 존엄성과 가치는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번역은 그 불가능의 세계를 드러내고 깨닫게 하는 가장 유효한 실천적 행위 중의 하나다. 번역은 넘어설 수 없는 너와 나 사이의 아득한 ‘차이’를 경험하게 한다. 번역이란 일차적으로 이 차이들을 매개하고 소통시키는 행위이다. 그러나 좋은 번역은, 혹은 번역의 진정한 의의는 이 차이들을 지우거나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최대한 벌리고 유지·보존하는 것이다. 요컨대, 번역은 이 세계가 무수히 많은 다양성과 타자성의 세계임을 증언하는 행위이다. 그럼으로써 번역은 세계화의 통합력을 저지하고, 세계를 하나의 단일한 질서로 묶으려는 힘에 대해 저항하는 우리의 면역력을 기른다. 나쁜 번역이나 나쁜 문학은 이 차이들을 세계화의 통합력 안으로 귀속시키고 복무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을 국가대표 선수의 운동경기로 만든다. 그 싸움에서의 승리에 환호하고 감격하는 것은 물론 문학의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