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동훈·전북대학교 사회학 교수
I. 다문화 사회의 도래
“국경 없는 사회” 또는 “지구촌”이란 말이 전혀 낯설지 않다. 수출입액을 합한 무역 통계 기준으로 한국은 세계 13번째 교역국이다. 인터넷 회선망과 가입 인구 비율 등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고, 동시에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로 몰려들고 있다.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이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수많은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거주하고 있다. 일상 용어와는 달리, 유엔 인구부에서는 일시 방문자를 제외한 외국인 체류자 수를 이민자로 파악하여 이민 통계를 작성한다. 이러한 용례에 비추어 보면, 한국 사회는 이미 이민사회가 되었다.
196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까지 수많은 한국인들이 외화 벌이를 위하여 다른 나라로 갔다. 한 때 한국은 필리핀과 수위를 다툴 정도의 노동력 대량 송출국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1987년 역전되었다. 1987년은 한국 민주화의 원년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민의 방향이 바뀐 해이기도 했다. 그 해 이후 해외로 취업한 한국인 수는 줄어든 반면, 국내로 일하러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 수는 점점 더 많아졌다. 노동력 송출국에서 유입국으로 변모된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이주변천(migration transition)이 이루어진 이후 외국인 노동자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한국의 외국 인력 정책이 정비되기 이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노동자는 스스로 몰려왔다. 그들의 대다수는 중국과 동남아시아ㆍ남부아시아ㆍ중앙아시아 출신이었는데,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직종의 일을 떠맡아 수행하였다. 2006년 말에 한국 사회에 체류하고 있었던 외국인 노동자 수는 약 40만 명이다.
한편, 1990년대 초부터 외국인이 한국인과 결혼하여 국내로 이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물론 그 전에도 국제결혼은 이루어졌지만, 정부가 1990년부터 국제결혼 통계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무렵부터 국제결혼이 활성화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국제결혼과 관련한 ‘이주변천’은 1995년에 이루어졌다. 1994년 이전에는 선진국 출신의 외국인 남성이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주류였으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1995년 이후에는 저개발국 출신의 외국인 여성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는 현상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1994년까지는 국제결혼을 한 한국 여성들이 해외로 떠났고 극히 일부만 국내에 거주하였다면, 1995년 이후에는 외국인 여성들이 국내로 이주하여 정착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국제결혼 건수가 급증하였다. 특히 2002년 이후 국제결혼 건수는 매년 약 1만 건씩 늘어났다. 외국인 아내의 출신국은 중국이 가장 많고, 다음은 일본ㆍ필리핀ㆍ베트남ㆍ태국ㆍ몽골ㆍ러시아 등의 순이다. 그들 중에는 의사소통의 어려움, 문화적 차이로 인한 고충, 차별 대우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적지 않아, 정부가 제공하는 사회복지 제도의 주요 수혜 대상 집단으로 등장하였다. 2006년 말 기준 국내 거주 결혼 이민자 수는 약 10만여 명에 달한다. 한편, 한국인의 국제결혼이 보편화되면서, 중국ㆍ일본ㆍ필리핀ㆍ베트남ㆍ태국ㆍ몽골ㆍ러시아 출신 어머니를 둔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다. 그 아이들은 흔히 ‘혼혈인’으로 간주되지만, 그들의 부모들은 이러한 개념 규정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뿐 아니다. 약 3만 명의 외국인 유학생이 국내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외국 국적을 가진 동포 중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사람도 약 10만 명이다. 또 이주 역사가 100년 이상인 화교 인구도 1만여 명이다.
외국인의 국내 유입은 꾸준히 그리고 급격히 늘어났다. 2007년 8월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서울의 지하철 객차에서 외국인을 발견하는 것이 어려운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외국인이 탑승하지 않은 차량을 발견하는 게 오히려 힘들 정도다.
사람은 자기 출신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더라도 원래의 문화를 간직한 채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게 일반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과 외국인 또는 이민자간에 다양한 형태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지면서, 그들은 한국문화와 소통하는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여러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생활하면서 다양한 갈래의 문화접변(文化接變, acculturation)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오랜 기간 동질적 문화를 간직해왔던 한국 사회는 다종족ㆍ다문화 사회의 모습을 띠기 시작하였다.
한국 사회의 외국인ㆍ이민자 집단 중 한국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집단은 한국인과 국제결혼을 통해 이주한 외국인들이다. 그들은 한국인의 가족이라는 점에서 ‘이주 노동자’에 비해 훨씬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체류와 생활에서의 각종 편의 제공은 물론이고, 사회복지 혜택에서도 다른 외국인ㆍ이민자 집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또 그 자녀들은 대한민국 국적법에 의거하여 전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그러나 한국인들에 의하여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결혼 이민자들 중 상당수는 자신들이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토로한다. 또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무조건적으로 ‘혼혈인’으로 범주화하는 데 불편한 심경을 그러낸다. 이 글에서는 결혼 이민자 자녀를 대하는 한국인의 태도를 통해 다문화 사회 한국의 상호 문화 교류 현실을 진단해보기로 한다.
II. 다문화 사회에서의 혼란과 극복
대부분의 한국인은 자신들이 오랜 세월 동안 단일 혈통을 유지해온 것으로 믿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순수 혈통의 신화를 신봉하는 이유는 과거의 도래인(到來人)들이 외모상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아 쉽게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단일민족의 신화를 믿는 한국인들은 순수 혈통을 숭상하고, 혼혈과 잡종을 배척한다. 피가 섞인 짐승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비속어들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 대표적 표현으로는 ‘종(種)이 다른 두 동물 사이에서 난 새끼’를 의미하는 ‘튀기’가 있다. 튀기는 동물에게 적용을 하면 특별한 부정적인 의미가 없을 수도 있는 표현이지만, 사람에게 적용을 하면 매우 경멸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어에 익숙했던 세대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이노코’(間の子)라는 일본어 표현도 자주 사용하였다. 이 표현은 두 개의 실체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어정쩡한 존재로서의 혼혈인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용어에 비하면, ‘혼혈’이라는 표현은 딱히 비하(卑下)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전적 의미에서 혼혈은 ‘서로 인종 또는 종족이 다른 혈통이 섞임, 또는 그 혈통’을 의미한다. 혼혈은 일본의 조직 폭력배 ‘야쿠자’(やくざ)가 행하는 것처럼 ‘피를 섞는 행위’(유비기리, 指切り)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족이 다른 남녀의 성적 결합에 의한 자녀의 재생산으로 나타나는 ‘혈통의 결합’을 뜻한다. 한국ㆍ중국ㆍ일본 사회에서는 혈통의 뒤섞임을 의미하는 ‘혼혈’ 개념이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영어권 사회에서는 ‘혼종’(mixed race 또는 mixed ethnicity) 개념이 주로 통용된다. 표현은 다르지만 그 내포 의미는 동일하다.
쟁점은 그 기준이 되는 인종 또는 종족의 범위와 관련되어 있다. 혼혈인의 범위는 사회와 시기에 따라 제 각각이다.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 부모를 둔 사람은 ‘혼혈인’이 아니라 ‘흑인’으로 간주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앙골라에서는 ‘혼혈인’으로 간주된다.
미국사회에서 ‘혼혈인’이라고 할 때는 그 기준은 백인ㆍ흑인ㆍ아시아인ㆍ히스패닉 등의 인종 또는 종족이다. 2000년 미국 인구센서스에서 7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자신이 혼혈인이라고 답했다. 미국사회에서는 혼혈인을 이중인종(biracial people) 또는 혼합인종(mixed race 또는 interracial people)으로 표현하는데, 백인ㆍ흑인ㆍ아시아인 등 인종 집단 내부의 결혼에서 태어난 사람은 혼혈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과 베트남계 미국인의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는 혼혈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혼혈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인종ㆍ종족ㆍ국적 등의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국적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국제결혼가족의 자녀를 모두 혼혈인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중국 조선족’과 ‘한민족 한국인’ 부부의 자녀도 혼혈인 범주에 포함된다. 한국 사회의 일반적 인식은 그들을 혼혈인으로 간주하지 않으므로, 국적은 결코 타당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종족(한민족) 개념을 적용할 경우, 기본 준거는 민족이다. 몽골인-한국인 부부, 일본인-한국인 부부, 한족(漢族) 중국인-한국인 부부, 필리핀인-한국인 부부의 자녀는 혼혈인이고, 조선족 중국인과 한국인 부부의 자녀는 혼혈인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 한국인은 한민족인 경우에 한한다.
인종은 그 분류의 모호함 때문에 종종 문제가 있음이 지적되지만,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다. 예컨대, 펄벅재단(Pearl S. Buck International Korea)에서는 부모의 인종이 다른 사람을 혼혈인으로 정의하고, 2003년 기준 국내에 약 35,000명의 혼혈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미국계 혼혈인이 5천 명 정도, 아시아계 혼혈인이 3만 명 정도라는 것이다. 펄벅재단에서는 부모 중 한 사람이 필리핀ㆍ태국ㆍ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인 또는 백인ㆍ흑인이고 다른 한 사람이 한국인인 사람은 혼혈인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한국인과 외모에서 거의 차이가 없는 일본인ㆍ중국인ㆍ몽골인을 양친 중 하나로 둔 사람은 혼혈인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한국인은 몽골인ㆍ중국인ㆍ일본인ㆍ베트남인과는 같은 황인종이지만, 필리핀인ㆍ인도네시아인 등 갈색인종과는 구분된다는 인식의 반영이다. 외모에서 일반 한국인과 많이 차이가 나는 혼혈인이 극심한 차별과 고통 속에서 살고 있음을 고려하여 분류한 방식이다.
요컨대, 한국 사회에서 혼혈인의 기준으로 ‘국적’은 부적합하고, ‘인종’ 또는 ‘종족’(민족)이 기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인종과 종족의 구획에 대해서는 합의된 것이 없다. 한국인과 필리핀인이 ‘같은 인종’(아시아인)인지 ‘다른 인종’(황인종과 갈색인종)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고, 한국인과 몽골인 또는 일본인이 같은 종족인지 아닌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인종과 종족 중 어느 것이 혼혈인의 식별 기준인지도 불명확하다. 미국사회에서 한국인과 몽골인은 아시아인(mongoloid), 즉 동일 ‘인종’으로 간주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다른 ‘종족’이다. 그렇지만 개인이나 단체에 따라서는 달리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일본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를 둔 사람이 혼혈인이라고 차별 당한 사례는 별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기준이 불명확한 상황에서는 인종 또는 종족 둘 다(또는 그 중 하나가 선택적으로) 혼혈인의 기준으로 적용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혼혈인 개념을 결혼 이민자 자녀에게 적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에서는 결혼 이민자의 자녀를 ‘코시안’(Kosian)이라 부른다. ‘코시안’은 원래 한국의 한 시민단체에서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자녀’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한 용어였다. ‘한국(Korea)에 거주하는 아시아인’(Asian)이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 용어가 변질되어 ‘아시아 출신의 이민자와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의 흑인 혼혈인 또는 백인 혼혈인과 구분되는, 제2세대 혼혈인이라는 것이다. 구태여 영어로 표현하면 ‘코리언 아시안’에 해당하는 ‘코시안’이 아니라, ‘아시안 코리언’(Asian Korean) 즉 ‘아시아계 한국인’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들은 ‘순수 한국인’이 아니라 타자(others)로 간주된다. 쉬운 말로, ‘우리’가 아니라 ‘남’이다.
아이의 엄마들인 결혼 이민자들은 이 용어에 대해 불만이 많다. “한국인도 아시아인인데, 왜 그런 말을 쓰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하고, “우리 아이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인(Korean)이므로, 그런 말로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역설한다. 한 필리핀 출신 이민자의 다음 진술은 그 불만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 “한국에 살고 있고 한국 사람의 아이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한국 사람이에요. 차별 당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반쪽 한국인’(half Korean)이 아니라 ‘온전한 한국인’(whole Korean)이에요. ‘반쪽’(half)인 사람은 없어요.”
일반 한국인과 구분되는 제3의 존재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국제결혼한 부부나 그 자녀들은 자신(또는 자녀들)이 ‘코시안’이라고 불리는 데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코시안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그 대체 용어로 제시된 ‘온누리안’(세계인)이라는 말도 그들을 제3의 존재로 집단화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들은 특수 집단의 명칭으로 불리기를 원하지 않고, 그냥 개인(“아이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한다. 특수 집단화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묶어서 호명(呼名)하고, 그렇게 불리어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것은 ‘차별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코시안과 온누리안 개념을 둘러싼 논란은 외국인과 혼혈인에 대한 비하의 정서가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일부 한국인들은 고루한 순수혈통주의에 집착하여 가난한 나라 출신들을 업신여긴다. 한국인들은 인종 서열과 출신국의 세계 체계상 서열 및 역사적 관계를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외국인들의 위계 서열을 매기고 있다. 이러한 위계 서열은 그 나라 출신 외국인과 한국인의 결혼에 의하여 태어난 혼혈인에게도 적용된다.
순혈민족주의가 뿌리 깊은 한국에서 혼혈인은 ‘버린 사람’ 취급을 받는다. 전지구화 시대라는 요즘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혼혈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다. 혼혈인과 ‘아시아계 한국인’이 급증하는 시점에서 민족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한민족에는 대한민국 국민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은 물론이고, “국적을 불문하고 한민족의 혈통을 지닌 자로서 외국에서 거주ㆍ생활하는 자”까지 포함된다. 재외동포재단법에서는 한민족의 혈통을 지닌 자를 모두 동포 또는 겨레, 즉 한민족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법률 규정에 따르면, 한국계 미국인(재미동포), 한국계 중국인(朝鮮族), 한국계 러시아인(高麗人)은 물론이고, 재일동포 중 남북한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조선적(朝鮮籍)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한민족의 범주에 포함된다. 당연하겠지만, 부계(父系)든 모계(母系)든 한민족의 혈통을 가진 혼혈인들은 모두 한민족의 일원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법률적 규정과 일반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민족 개념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순혈주의자들 중에는 혼혈인을 우리 민족의 일원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고, 남성위주의 혈통 계승을 신봉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모계 한민족 혈통의 혼혈인들이 한민족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종종 발견된다. 재외동포재단법에서 규정하는 것처럼 민족이 ‘혈통공동체’로 정의된다면, 이러한 인식은 명백히 오류다. 그렇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편향된 인식을 하고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편향된 인식이 어떻게 배양되었는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것은 학습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 탈식민지 시대에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에서, 교과과정에서는 한민족은 단군의 후예로 수천 년간 단일민족사회를 유지해온 것으로 교육해온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 교과과정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순혈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해왔음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민족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하면 다른 민족에 대한 무시와 혼혈인에 대한 멸시라는 사회문제를 낳은 인종주의와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지나치면 외국인과 혼혈인에 대한 비하와 혐오로 직결되는 거나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으로 표출된다는 점을 경계하여야 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몇몇 백인계 혼혈 연예인이 젊은 층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력적인 이미지로 상품화된 연예인’에 대한 동경일 뿐, 일상생활에서의 혼혈인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한민족이 영화를 누리며 번영ㆍ발전하기 위해서는, 누가 ‘우리’인가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혼혈인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다.”라는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 혼혈인이 우리 민족의 일원이라는 점에 대한 회의가 없어야 한다. 한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혼혈인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혼혈인 문제가 사회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경험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다문화 교육’이 필수적이다. 한국 내 혼혈인도 한민족의 혈통을 가진 ‘100% 한인’이라는 점에 이견이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한민족 혼혈인’ 개념이 조속히 사라져야 한다.
III. 다문화 사회 한국의 사회통합과 문화교류
국제사회에서 한국 경제가 차지하는 위치, 초국가적 이주 현상의 확산, 저출산과 고령화 등을 고려할 때 한국 국민의 다민족화 경향은 앞으로 더 확대ㆍ지속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만간 한국이 배타적 단일민족 신화에서 벗어나 이질적이고 혼성적인 존재들이 공생하는 다문화주의적 사회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우리가 노력하기에 달려 있다.”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노력해야 할 것인가?
한국인들의 외국인에 대한 배타의식은 경우에 따라서는 차별적인 태도로 발현되므로,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특히 가난한 나라 출신의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여러 가지 차별 대우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한국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있는 ‘결혼 이민자 자녀'조차 순수혈통주의에 따른 차별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외국인과 이민자의 상태가 더욱 열악함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한국인 남편의 구타에 의해 베트남 출신 여성들이 숨졌고, 또 다른 여성들은 자살하였다. 상시적인 폭행과 폭언에 시달리는 결혼이민 여성이 한둘이 아니다. 또 불법체류 이주 노동자들 중에서 임금 체불과 폭행 등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들은 불안정한 체류 자격 때문에 인권침해를 당하더라도 공권력에 호소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극심한 인권침해는 확률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의 문제가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관점, 즉 한 건의 인권침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선진 사회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인권침해 문제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미비점을 개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후 그 제도를 제대로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민자와 외국인의 사회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게 필수적이다.
사회통합(社會統合, social integration)이란 비통합적인 상태에 있는 사회 내 집단이나 개인이 서로 적응함으로써 단일의 집합체로서 통합되어 가는 과정을 일컫는다. 사회통합은 인종적ㆍ민족적ㆍ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을 한 사회 내에 제한 없이 평등한 공동체로 진입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회통합은 민주적이고 자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강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식민지 동화(同化, assimilation) 정책과 같은 강압적 방식의 통합은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장점과 더불어, 피지배집단의 반발과 저항을 유발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는 단점이 있다. 완전하고 안정된 사회통합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고 내면화해야 한다. 사회통합을 주도할 핵심 세력이 있을 때 사회통합은 촉진되는데, 그 세력은 자기중심적으로 통합을 추진한다. 기회의 균등은 사회통합을 안정되게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으로, 소외 집단 또는 소외 계층에게도 공평한 기회와 기본적 사회적 시민권을 보장할 때 체제의 정당성이 보장되고 사회 통합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정부가 균등한 기회 보장을 실현하기 위해 강력하면서도 효과적인 정책을 실천할 때 사회통합은 실현될 수 있다.
사회통합이란 다양한 정도로 통합된 혹은 분리된 사회적 단위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사회적 단위들이란 개별행위자, 집단, 조직, 지역사회 등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민자들은 당연히 통합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통합을 동화와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고이다. 용광로(melting pot) 속에서 쇠붙이를 녹이는 것처럼 융해를 꾀하는 것이 동화 모델이다. 동화는 이민자가 모국사회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특성들을 포기하는 동시에 한국 사회 속에 완전히 포함되는 것, 즉, 기존의 국민정체성을 버리고 한국인 정체성을 가지되, 그것이 기존 한국인들과 완전히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민을 받아들인 모든 사회는 이민자의 동화를 꾀하지만, 그것이 단기간에 이루어지기는 힘들다는 점이 여러 나라의 사회에서 입증되었으므로, 동화 이외의 대안적 이민자 통합 방식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다문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이민자 및 외국인과 한국인 양자(兩者)가 함께 노력하여야 한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이 각각 상대방에게 적응하여야 한다.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서로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쌍방적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 그러나 적응의 부담은 “뿌리 뽑힌 삶”을 영위해야 하는 이민자나 외국인에게 더욱 가중된다. 그들은 한국어를 익혀야 하고, 한국문화와 관습을 이해하고 적응하려 노력해야 한다. 한국인들의 부담은 이민자 및 외국인만큼 크지는 않으나, 외국인과 외국문화를 인정하고 이해하여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한국인들은 인종적ㆍ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학습하여야 한다.
1. 이민자의 사회통합 노력
이민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정보와 기술을 습득하여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한국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민자가 한국에 와서 생활을 할 때는 한국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관습을 잘 이해해야 쓸데없는 오해를 없앨 수 있다. 이민자의 본국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행동들이 한국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한국의 문화나 관습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종속적인 태도라기보다는 문화적 상대성을 인식하고 세계인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민자들은 한국 사회 적응을 위해서 한국말을 배우고, 노동법과 근로조건 준수와 같은 사회통합에 필요한 단계들을 열심히 밟아야 하며 한국 사회는 이민자들이 이러한 일을 순조롭게 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외국인이 살만한 한국 사회 만들기 운동’을 벌여 나갈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외국인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외국인에게 차별적인 법ㆍ제도의 존재, ‘단일민족 신화’에 따른 배척과 차별 대우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세계화 시대에 이미 우리와 더불어 살고 있는 정주 외국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외국인을 단지 ‘노동력’으로만 보는 태도를 버리고, 독자적 문화를 가진 ‘인간’으로 보는 국민 정서를 조성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즉, 노동정책뿐만 아니라 문화정책에서도 이주 노동자를 배려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주 노동자가 우리나라에서 ‘경제발전’, ‘정치적 민주화’, ‘한국 사회의 수준 높은 문화’ 및 ‘따듯한 한국인의 마음씨’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함은 물론, 송출국의 문화를 한국인들에게 알릴 수 있는 사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도 우리나라 국민과 외국인 간의 마음의 벽을 허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 사회의 이민자에 대한 적응
한국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존중하면서 이민자의 정체성도 인정하는 균형 있는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이민자와 한국인의 ‘차이’만을 강조하는 자세를 버리고, 그들이 가진 문화의 다양성에 주목하는 열린 사고방식으로 진정한 통합의 길을 추구하여야 한다. 다른 문화를 가진 외국인과의 교류는 그들에 대해서 ‘몰랐던 점’들을 발견하고 열린 마음으로 그들의 참된 가치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서로를 잘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인식하여야 한다. 사실, 한 나라 안에 여러 문화들이 법과 질서를 보존하면서 정당하게 존재하는 현상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민자의 출신국에 따른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서서히 한국 사회의 문화 속으로 통합시키려는 방식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민자를 위한 정책’이 자칫 잘못하면 의도와는 달리, 그들에 대한 차별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예컨대, 학교에서 학력 부진을 겪고 있는 국제결혼가족의 아이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할 경우, 방과 후 또는 주말 특별보충과정을 운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특별활동ㆍ재량활동 시간을 활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학교에서 결혼 이민자 자녀를 위하여 특별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거나 놀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민자 사회통합 정책은 그들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해야 하는 게 기본이다.
이민자들의 출신국 문화를 최대한 존중함으로써 자긍심을 고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민자만 한국 사회에 일방적으로 동화되도록 하는 게 아니라, 한국인들도 이민자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민자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만큼이나 그 가족을 위한 ‘이민자 출신국 사회의 이해 교육’이 중요하다. 가족들이 아내ㆍ어머니ㆍ며느리, 또는 남편ㆍ아버지ㆍ사위의 출신국에 대해 긍지를 느낄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또 그 핵심 내용을 텔레비전과 신문 등을 통해서 널리 알려야 한다. 모든 한국인들이 다문화 사회의 가치관을 학습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도록 훈련해야 한다.
요컨대, 이민자의 사회통합은 이민자와 한국 사회 쌍방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현상이다. 참된 이해(understanding)와 관용(tolerance)의 자세로 서로의 문화를 알고 서로의 문화에 개방적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공생 내지 상생하기 위해서는 이해와 관용의 정신으로 외국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인정하여야 한다. 즉, 한민족만의 단일한 문화를 고수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우리와 이미 더불어 살고 있는 이웃나라들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배양하여야 한다. 우리 문화가 우수하다는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다른 문화를 무시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를 견지하려는 훈련을 하여야 한다.
IV. 다문화 사회 한국의 문화 상호 교류 방법
한국 사회의 인종적ㆍ민족적 다양성을 문화적 다양성으로 승화시키고, 그것을 조화롭게 만들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한국 사회가 문화적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인종적ㆍ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중앙정부ㆍ지방정부ㆍ기업ㆍ시민사회가 하여야 할 역할을 제시하기로 한다.
첫째, 한국 사회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절반에 해당하는 생산기능직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침해가 빈발하고 있는 현실을 개혁하여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가 이 땅에서 살면서 차별대우와 인권침해로 삶이 망가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제도와 문화면에서 전지구적 표준(global standards)을 준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현대판 노예’라고 한탄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침해를 예방할 수 있도록 제도의 미비점을 고치고, 제도 운영상 문제점을 시정해야 한다. 외국인 주민들의 권리를 보호ㆍ신장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한국인에게도 충분한 권리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데 외국인을 배려할 수 없다는 주장이나, 외국 정부가 한국 교민에게 그러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데 우리가 너무 앞서 나간다는 주장은 무의미하다.
둘째, 지방자치단체가 해야 할 역할은 매우 많다. 지방정부는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외국인들의 자발적인 문화 행사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여야 한다. 지방정부가 앞장서서 문화 행사를 기획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아래로부터 조직된 문화 행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예컨대, 지방정부는 가칭 ‘다문화주의 기금’ (multiculturalist fund)을 조성하여, 사업계획서와 행사계획을 제출하는 외국인 단체에 장소와 자금 및 행정서비스 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다. 외국인들이 원하는 문화적 수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지방정부가 그것을 충족시켜 주려 노력하는 적극적 자세 전환이 요구된다. 한국 사회가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욕구를 적절하게 처리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또한 지방정부에 외국인 업무를 전담하는 부서를 설립하여,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이해 증진을 도모하여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일본의 가와사키처럼 외국인 대표가 ‘외국인대표자회의’를 통해 지방행정에 직접 참여하는 기회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셋째, 기업이 수행하여야 할 역할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대우와 착취를 하지 못하도록 상호 감시 운동을 벌이는 일이다. 기업가들은 돈 벌러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에게서 1960~70년대 해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던 과거의 우리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전통문화와 생활관습을 존중하는 기업문화를 조성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구체적 일례로, 외국인을 고용하는 기업가들은 그들의 금기 식품을 배제한 식단을 짜서 제공해야 한다. 예컨대, 종업원 중에 이슬람교도가 있다면 돼지고기 요리보다는 닭고기 요리를 준비하는 정도의 배려는 해야 한다. 이는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넷째, 한국의 시민사회는 외국인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나 차별적인 태도를 과감히 탈피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전지구화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외국인과도 상생(相生)을 도모하여야 한다. 한국 사회가 전지구화된 세계 속에서 발전을 거듭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과 ‘민주주의’를 존중하여야 한다. 그 방법은 바로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데 있다. ‘더불어 사는 사회’는 모습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화합하며 같이 살아감으로써 건설된다.
한국인들 중에는 외국인과 친하게 지내고 싶더라도 자신의 외국어 실력 부족을 이유로 말조차 건네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점을 극복하기 위해, 시민운동단체에서는 외국인과 한국인과 친구 맺기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가칭 ‘친구 맺기 프로그램’(friendship program)을 만들어 한국인 친구를 사귀기 원하는 외국인과 외국인 친구를 사귀기 원하는 한국인을 맺어주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은 시민사회단체뿐 아니라 지방정부, 학교와 기업 등 다양한 조직에서도 운영하여야 한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인 친구를 사귀게 되면, 한국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그만큼 향상될 것이다.
일반 시민들은 외국인들과 친구로 지내기 운동을 벌여야 한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면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 길을 잃고 당황해 하는 외국인을 만나면, 먼저 말을 건네 보자.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남을 이해할 수 있고, 남도 내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한국인과 외국인들이 서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만들어야 하고, 같이 참여하여 어우러지는 화합의 장과 신나게 흥을 돋울 수 있는 신명의 장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것은 한국인과 외국인이 동일한 시민으로서 ‘더불어 사는’ 시민의식을 고양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노력이 충분히 경주되어야만 ‘다양성 속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격조 높은 문화를 간직한 한국 사회를 새롭게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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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도시와 문화적 다양성: 서울의 사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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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동훈(2005). |
‘이민과 다문화 사회의 도래’, 김영기 편, “한국 사회론”,
전북대학교출판부, pp.3~23. |
설동훈(2007). |
‘혼혈인의 사회학: 한국인의 위계적 민족성', "인문연구" 52,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pp.125~160. |
설동훈ㆍ이혜경ㆍ조성남(2006). "결혼 이민자 가족실태조사 및 중장기 지원정책방안 연구", 여성가족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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