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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설 우리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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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顚覆)의 가능성
―‘내선 결혼’과 한국 소설 |
김 철∙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어휴, 냄새. 저리 가요. 또 마늘을 잡수셨군.”
- “용서해 줘. 그게 나오면 나도 모르게 손이 가거든. 할 수가 없어”
- 마늘 소동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현은 이따금씩 몸에 이상이 올 적마다 향토 요리가 먹고 싶어 지고, 그런 때마다 지독한 냄새를 피우며 돌아오곤 하는데 그것이 아사미(阿佐美)를 질색하게 하는 걸 알면서도 어찌할 길이 없었다. 은밀히 먹고 와서 아사미의 코를 용케 속이는 수가 있지만, 대개는 들통이 나서 야단을 맞곤 했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었다.
일본어로 쓰인 이효석의 단편 「아자미의 장(薊の章)」(『國民文學』, 1941)의 한 장면이다. 마늘 냄새에 코를 싸쥐는 ‘아사미’(阿佐美)는 카페의 일본인 여급(女給)인데 조선 지식인 ‘현’에게 반해 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주위의 냉대와 질시, 집안의 반대와 가난―젊은 그들의 결합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산적해 있다. 아사미는 ‘버젓한 식도 못 올리고 적(籍)에도 올라 있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정식으로 결혼을 해서 집안에 들어앉고 싶다’는 소망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여움을 품은 듯한 강렬한 생김새의 엉겅퀴’를 보면서 [엉겅퀴의 일본어가 ‘아자미’(あざみ, 薊)인 것이다.] 일본의 고향으로 돌아간 ‘아사미’와의 추억을 회고하는 이 소설에서 인용한 위의 장면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숙명’ 같은 문화적 관습의 차이가 일상에서 일으키는 마찰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에 건너와 살았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조선 국세(國勢) 조사 보고』 등의 신뢰할 만한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10년 현재 조선 내 총 인구 1,300만여 명 가운데 일본인은 1.28%, 즉 15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 대부분은 관리나 교원, 경찰, 군인이었다. 한편 노동자, 농민, 유흥업 종사자 등의 하층 계급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조선 반도로 건너왔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숫자는 해방될 때까지 조선 내 전체 인구의 3%를 넘지 않았다. 1944년 현재 조선 내 총인구는 조선인 25,133,352명, 일본인 712,583명, 기타 외국인 71,573명, 합계 25,917,508명이었다.
그런데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위치가 정해진 ‘일본인’과 ‘조선인’은 조선 내에서 어떻게 살아갔을까?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조선인 마을이나 거주지와 분리되어 서로 ‘소 닭 보듯이’ 살았을까? 아니면,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 역사 기록들이 말하듯, 무력을 앞세운 소수의 외래 침입자가 다수의 ‘원주민’을 짓누르고 수탈하는 형태의 폭력이 이들의 사이를 시종일관했을까?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거나 부모를 따라 조선에 와 유년 혹은 소년 시절을 보낸 일본인들이 조선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경우에1)
유아사 가츠에(湯淺克衛) 같은 작가의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경찰 관리였던 아버지가 조선에 근무하게 됨으로써 조선으로 건너온 그는 3·1 운동 당시 제암리 사건을 목격하고
『간난이』(カンナニ)라는 장편 소설을 쓰고 조선을 무대로 하는 소설을 꾸준히 발표했다. 그의 소설은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의 생활에 관한 충실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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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나 ‘민족주의’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일까?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과 조선인이 결혼하는 경우는 어떠했을까? 해방 이후의 그들은,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어떤 운명을 겪었을까?
식민지란 거대한 이동이다. 그것은 사람과 물자, 그리고 당연히 문화의 끊임없는 이동과 혼합을 유발하고 또 그것을 통해 유지된다. 이 이동과 혼합의 양상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한마디로 답할 수 없다. 수탈과 억압을 규탄하는 과장되고 흥분된 기록들은 넘쳐흘러도 식민지에서의 일상생활을 차분하게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사실적 기록들은 만나기 어렵다.2)
그런 뜻에서 유종호 교수의
『나의 해방 전후』(2005) 같은 저서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편, 식민지 시기에 미국으로 이민 온 조선인 이민자들을 직접 인터뷰한 결과를 정리한 힐디 강(Hildi Kang)의 Under the Black Umbrella(2001, Cornell University)는 식민지 경찰과 민중 사이의 실제적 접촉 양상에 관한 일반적인 상식에 많은 충격을 가하는 저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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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결혼, 동거, 연애 등을 그린 소설은 그 점에서 매우 높은 희소가치를 지닌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연애나 결혼을 주제로 한 소설은, 뒤에 살피겠지만, 대부분 일본어로 쓰였다. 한국어로 쓰인 것은 이인직의 「빈선랑(貧鮮郞)의 일미인(日美人)」(『매일신보』, 1912. 3.1)과 염상섭의 「남충서(南忠緖)」(『동광』,1927), 채만식의 「냉동어」(『인문평론』, 1940) 이광수의 「그들의 사랑」(『신시대』, 1941) 정도가 고작이다. 이인직의 소설은 가난한 조선 남자에게 시집온 일본인 부인이 남편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어느 날의 풍경을 그린 꽁트 같은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후 식민지 시기의 한국어 소설에는 일본인과의 연애나 결혼 문제는 물론이고, 일본인이 전면에 등장하는 작품도 이상할 정도로 없다.(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깊이 있는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염상섭의 「남충서」는 그런 점에서 매우 희귀한 작품이다.
‘남충서’는 “서울서 셋째 손가락 차례는 되는” 부자 남상철(南相哲)과 기생 출신의 일본 여인 ‘미좌서’(美佐緖) 사이에 난 인물이다. “조선 사람도 아니요 일본 사람도 아닌 이상한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며 자라난” 남충서의 결혼과 상속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가정사를 다룬 이 소설은, 식민지의 거대한 이동이 어떻게 개인적 정체성의 경계를 뒤흔드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성(姓)인 ‘남’(南)과 어머니의 이름 중의 ‘서’(緖)를 한 글자씩 따서 ‘남충서’가 된 주인공은 “동경까지 가서 제국대학 경제과를 졸업”한 “훌륭한 청년 신사”이지만 때때로 ‘야노 다다오(矢野忠緖)’이기도 하고, ‘미나미 다다오(南忠緖)’이기도 하고, ‘남충서’이기도 한 존재이다. 계급 운동을 하는 지하 조직에도 가담해 있는 그는 그러나 조직의 동지들에게서도 일상적으로 의심을 받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며 전형적인 소수자이다. 다음의 독백은 그러한 그의 사정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 어머니는 그래도 행복하다. <중략> 아버지도 하여튼 행복이다. 돈에 입이 달린 이 세상에서는 어떻든지 행복하다. 동지들도 똑같이 비참한 운명과 예기할 수 없는 공포에 허덕이면서도 야노 다다오라고 불렀다가 미나미 다다오라고 했다가 남충서가 되었다가 하지 않으니만큼은 하여간 행복이다. 그들에게는 고향과 혈육에 대한 애착이 있다. 가정의 평화가 있다. 민족에 대한 감격이 있다. 그러나 내게는 그게 없다. 야노면 야노, 남가면 남가, 어디로든지 치우쳤다면 조그만 비극을 일평생 짊어지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인공 남충서만 문제적인 것은 아니다. 충서의 어머니인 ‘미좌서’ 역시 흥미로운 존재이다. 기생 출신으로 조선인 부자 남상철의 첩이 되었다가 본실 부인이 죽은 뒤 “남편과 싸움싸움하여 큰집 차지를” 한 이 일본인 여성의 ‘삼십 년 가까운’ 조선 생활은 이미 그녀를 전형적인 조선 가정의 부인으로 만들었다. 남편의 재산을 둘러싼 처첩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그녀가 보이는 악착같은 탐욕과 원한들에서 이미 식민지 지배자로서의 일본인의 위치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조선인 부자 남상철이 가부장적 가해자라면 일본인 여성 미좌서는 연약한 피해자에 지나지 않는다.(이 기묘한 전도는 작가의 의도였을까?) “조선말도 조선 사람 볼 줴쥐르게 하지마는” “조선식 살림을 할 줄 모를 뿐 아니라 위생에나 취미에도 도저히 맞지”가 않아서 걸핏하면 “하오리로 곱게 꾸미고 일본으로 조선으로 온천 신세나 지고 다니던” 미좌서는 “나두 조선의 흙이 되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역시 동경이 그립다.”라고 말한다. 식민지의 동요하는 경계, 그 혼종성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을 염상섭은 1920년대에 이미 이렇게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연애나 결혼을 다룬 소설은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정책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는 1940년 이후 급증했다. 이광수의 장편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綠旗』, 1940), 「소녀의 고백」(『신태양』, 1944), 최정희의 「환영 속의 병사」(『國民總力』, 1941), 이효석의 「아자미의 장」(『國民文學』, 1941), 정인택의 「껍질」(『綠旗』, 1942), 한설야의 「피」(『國民文學』, 1942), 「그림자」(『國民文學』, 1942), 최재서의
『민족의 결혼』(『國民文學』, 1945) 등이 대표적이다.3)
이 밖에도 일본에서 발표된 김사량의 「빛 속으로」(『文藝首都』, 1939) 장혁주의 「憂愁人生」(『日本評論』, 1937) 등이 있지만 여기서는 논의의 성격상 이들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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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일본어로 쓰여졌고 「아자미의 장」 정도를 제외하면 ‘내선일체’의 의의를 고취·선양하는 이른바 ‘친일 소설’의 범주에 들 만한 것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들이다.
그러나 의례적인 정치적 수사들을 일단 괄호 치고 이 소설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는 결코 간단치 않은 식민지의 현실이 다양한 형태로 반영되어 나타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의 대다수는 관리나 교원들이었고 나머지는 하층의 농민들이나 여자들의 경우 유흥업 종사자들이 많았다. 그러니 조선인 남성이 이성으로 접할 수 있었던 일본인 여성이란 대개 술집이나 카페의 여급 등으로 국한되었던 것이고, 그러한 현실은 염상섭의 「남충서」나 이효석의 「아자미의 장」에서 잘 드러난다. 기생이나 여급이 아니면서 조선인 남성과 연애하거나 결혼 관계에 있는 일본인 여성의 이야기는 채만식의 「냉동어」, 정인택의 「껍질」, 한설야의 「피」, 「그림자」 등에 나타난다.
조선인 작가에 의해 쓰인 이 일본어 소설들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결혼이나 연애, 동거가 일으키는 온갖 문제들을 다룬다. 가문과 핏줄을 중요시하는 전통적인 조선의 혼인 풍습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데에서 오는 갈등과 혼란들, 언어, 풍습, 생활에서의 사소한 차이들로 인한 감정적인 충돌들, 주변 사람들의 반감과 질시로 인해 겪는 고통들이 이 소설들의 주 내용을 이룬다. ‘내선일체’란 결국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고 두 민족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식의 정치적 구호로 끝나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좌절하고 쓰러지는 것으로 끝남으로써 역으로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교묘하게 드러내는 작품도 있다.
이 소설들의 배경을 이루는 현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940년 1월 1일에 창간된 일본어 잡지
『內鮮一體』는 이와 관련하여 주목을 요하는 대상이다. 1939년 7월 창씨명을 오오토모 사네오미(大朝實臣)라고 하는 조선인 박남규에 의해 “내지와 조선 쌍방의 마음을 실천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진정한 ‘내선일체’를 구현하고, 정신적 결합을 철저히 지키기 위한 국민운동을 기도할 목적으로” ‘내선일체 실천사(內鮮一體 實踐社, 이하 실천사)’라는 것이 결성되었다. 총독부 당국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이 단체는 1940년 1월 조선 전체에 66개의 지사를 갖는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했다. ‘실천사’는 기관지
『내선일체ꡕ를 1940년 1월부터 1944년 10월까지 통권 38호 간행하였는데, 이 단체와 잡지가 가장 중점을 둔 사업이 바로 ‘내선 결혼’, 즉 ‘내지인’(일본인)과 조선인의 결혼 사업이었다. 다음은
『내선일체ꡕ 1940년 12월호에 실린 선언문이다.
- 우리는 제창한다! 내선 양쪽이 결혼할 수 있도록 양쪽의 장벽을 하루빨리 제거해야 한다. 장애는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언어, 풍속습관, 예의, 사법 등에 있다. 이것을 빨리 제거해서 내선의 구별이 나지 않게 할 방법과 수단을 찾아내야 한다. …… 본사 사업의 중심인 내선 결혼이 성하게 되면 우리 회사의 운동도 절반은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이 잡지에 게재된 몇 개의 통계가 눈길을 끈다. 창간호에 실린 ‘내지인과 조선인의 배우자 통계표’라는 기사는 ‘한일 합방 이후의 내선 결혼자를 2만 쌍’으로 가정하고 있다. 이 가정을 근거로 이 기사는 한 쌍의 평균 가족 수를 5.3명으로 잡아 10만 6천 명을 ‘내선일체 가족’으로 계산한다. 거기에 남녀 양쪽 부모의 가족까지를 더하면 총 31만 8천 명이 ‘내선 혈연관계’ 즉 친족 관계에 있으며, 이 숫자는 일본 전체 인구(조선 포함)의 0.3%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1941년 4월 호에 실린 ‘표창받은 내선 결혼자’라는 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1940년 한 해 동안 내선 결혼을 한 부부는 모두 137쌍이며, 이들 중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의 결혼이 106쌍에 이른다. 창씨개명, 징병제 등과 함께 중요한 동화 정책의 하나로 부각된 내선 결혼은 총독부 당국과 언론 기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이렇듯 사회 운동의 차원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인 여성과의 결혼을 원하는 조선인 남성의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실천사’가 곤란을 겪기도 하는 기사가 실리는 것을 보아 국가가 주도하는 이 희대의 ‘중매 사업’은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통계가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한해 137쌍의 내선 결혼, 그리고 106쌍의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의 결합이라는 통계의 뒤에는 어떤 욕망들이 숨어 있을까? 왜 조선에서건 일본에서건 ‘내선 결혼’은 거의 대부분 ‘조선 남성-일본 여성’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을까? 이것은 매우 복잡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문제이지만,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몇 가지만 간단하게 말하고자 한다.
‘내선일체’ 같은 식민지 동화 정책은 지배자의 강제와 피지배자의 무의지적 수용이라는 일방적 방향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 식민지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욕망이 어지럽게 엇갈리며 교차하는 장(場)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피지배자로서의 조선인은 ‘차별’과 ‘동원’의 대상이다. ‘차별’은 식민지 지배를 유지시키는 필수적인 메커니즘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 혹은 ‘차별’이 사라진다면, 식민지는 유지되지 않는다.(그러므로 “내선 결혼을 통해서 내선의 구별이 나지 않게 하자”는 「실천사」의 선언은 지배자가 보기에 따라서는 발칙한 도전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동화’나 ‘내선일체’는 어쨌든 이 ‘차별’을 폐지하고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과하겠다는 선언이다. 지배자로서는 피지배자를 동원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큰 모험이다. 그러나 피지배자가 진정으로 동화되어 자기와 같아지는 것을 지배자는 정말 원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너는 지금부터 나와 같다. 우리는 하나다.”라고 실은 스스로도 믿지 않는 위험한 발언을 지배자가 속삭일 때, 피지배자는 그 틈을 파고든다. “그래? 그렇다면 진짜로 같아지자. 진정으로 동화하자.”라고 그는 지배자의 언어를 빌어 말한다.(이광수가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라는 장편에서 한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피지배자로서도 목숨을 건 도박이다. 자칫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지배자에 동화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잘하면 그는 오랜 차별과 불평등을 벗어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거기에 모든 것을 건다. 일제 말기에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그 길을 택했다. 이른바 동화정책에는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이렇듯 복잡하고도 교묘한 욕망과 간지(奸智)가 교차하는 것이다.
내선 결혼의 양상에 이러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어긋나는 욕망들이 숨어 있음을 여러 기록들은 보여 준다. 그런데 왜 ‘조선 남성-일본 여성’의 결합이 절대적으로 많았을까? 한 연구자에 따르면, 내선 결혼을 통해서 일제가 획득하려고 한 것은 ‘병력으로서의 조선 남성’이었다. 정신적으로 ‘완전하게 황민화한 조선 남성’이야말로 전쟁 수행에 가장 필요한 자원이었고 그것은 내선 결혼을 통해 효과적으로 충당될 수 있을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제가 내선 결혼을 통해서 동화시키고자 한 대상은 조선 남성이지 여성이 아니었던 것이다.4)
오오야 치히로(2006), 『잡지
『내선일체』에 나타난 내선 결혼 양상 연구』, 연세대 국문과 석사학위 논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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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내선 결혼이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의 결합이었던 것은 이러한 사정에서 기인한다.
이에 비해 피지배자, 즉 조선인의 입장은 많이 달랐던 것임을 다른 기록들은 보여준다. 제국주의 지배에서 식민지는 흔히 여성으로 표상된다. 제국의 무력이 식민지를 정복하는 것은 힘센 제국의 남자가 식민지의 연약한 여성을 정복하는 일에 비유된다. 이 욕망을 뒤집으면 어떻게 될까? 피식민자의 남성은 제국의 여성을 취함으로써(그 방법이 무엇이든간에) 그의 굴절된 욕망을 심리적으로 위무한다. 채만식의 유명한 단편 「치숙」(1938)은 그러한 욕망에 사로잡힌 한 식민지 청년의 내면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 나는 내지인 규수한테로 장가를 들래요. …… 내지 여자가 참 좋지요. …… 인물이 개개 일자로 예쁘겠다, 얌전하겠다, 상냥하겠다, 지식이 있어도 건방지지 않겠다, 조음이나 좋아! 그리고 내지 여자한테 장가만 드는 게 아니라 성명도 내지인 성명으로 갈고, 집도 내지인 집에서 살고, 옷도 내지 옷을 입고 밥도 내지식으로 먹고, 아이들도 내지인 이름을 지어서 내지인 학교에 보내고……
이 청년은 그의 소망을 이루었을까? 얌전하고 예쁜 내지인 규수와의 사이에서 그가 아무 문제없이 행복할 수 있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잡지
『내선일체』는 의식주, 언어, 생활습관, 취미 등의 문화적 차이로 고통받는 부부들의 이야기와 그것을 극복할 방안들을 소개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서양식 풍습의 도입’ 심지어는 ‘제3국행’이 제안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떤 논자는 “내선 결혼자가 정말로 일치하는 것은 서양식 습관을 채용했을 때이다. 양식을 먹고, 서양 음식을 감상하고, 아파트에서 베드 생활을 할 때 그들은 완전히 일치 조화한다.”라고 쓰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해결책으로 중국이나 만주, 몽고와 같은 ‘제3국’으로 나가 행복하게 사는 부부들의 사례가 소개되기도 했다. 요컨대, 내선일체를 통해 ‘완전한 일본인’을 만든다는 기획은 이렇게 스스로도 자기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선 결혼을 희망하고 실천했던 조선인들의 내면을 하나의 논리로 일반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인간은 정치적 제도나 강제의 영향 속에 살지만 동시에 반드시 제도의 의도대로 되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인간은 많은 경우 제도를 배신하거나 뒤집는다. 그것이 역사에 절망하면서도 동시에 역사의 진보를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 ‘내선 결혼’은 지배자의 의도에 의해 추진되었지만, 실제로 그것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당연히 수많은 문제들이 야기되었고, 그것은 때때로 지배의 기본 원칙들에 심각한 도전이 되기도 하였다. 이 예기치 않은 전복(顚覆)의 가능성들을 읽는 것,식민지의 삶과 문화에 대한 이해는 거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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