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어원 탐구 |
 |
|
잘못 알고 있는 어원 몇 가지(6) |
조항범∙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이 글은, 평소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어원을 대상으로 그 잘못을 수정하고 바른 어원 설을 제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는 앞서 이와 같은 목적으로 ‘가랑비, 가시내, 가시버시, 갈보, 고릿적, 까치설, 노털, 대박, 도루묵, 샛강, 시집, 어음, 억지 춘향(이), 업둥이, 영계, 자린고비, 짱개, 총각무, 해장국, 환장, 삼수갑산(三水甲山), 소나기, 수수께끼’ 등의 어원을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앞선 글과 같은 방법으로 ‘장(醬)을 지지다, 종간나, 화냥’의 어원을 대상으로 그 어원을 소상히 밝히고자 한다.
2.
2.1. 장(醬)을 지지다
상대편이 무슨 일을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장담할 때나 자기가 주장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장담할 때 ‘장을 지지다’라는 표현을 쓴다. 말하자면 ‘장을 지지다’는 자기 생각이나 주장이 틀림없다고 호언장담(豪言壯談)할 때 쓰는 확신의 표현이다. “그 인간이 대학에 합격하면 내가 장을 지지지.”, “장을 지지건대 나는 결코 그 일을 하지 않았다.” 등에서 ‘장을 지지다’의 의미가 잘 드러난다.
‘장을 지지다’라는 표현의 유래는 ‘장’과 ‘지지다’의 의미만 밝혀지면 쉽게 해결되리라 짐작된다. ‘장’에 대해서는 한자 ‘掌’ 또는 ‘醬’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지다’는 물론 ‘국물을 조금 붓고 끓여 익히다’는 뜻이다. ‘청국장을 지지다’는 표현 속의 ‘지지다’가 바로 그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다.
‘장’을 ‘掌’으로 보면 ‘장을 지지다’는 ‘손을 지지다’로 해석되고, ‘장’을 ‘醬’으로 보면 ‘장을 지지다’는 ‘장을 끓이다’로 해석된다. 그 의미만을 고려하면 ‘장’을 ‘醬’으로 보고 푼 해석이 더 자연스럽다.
그러나 ‘장을 끓이다’는 의미만으로는 ‘장을 지지다’가 지니는 의미를 설명해 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장을 끓이다’는 완전한 형식의 표현이 아닐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 “손에 장을 지지겠다.”,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 “손톱에 장을 지지겠다.”와 같이 형식이 유사하고 의미가 일치하는 속담이 존재하므로 그 가능성은 더 커진다. ‘장을 지지다’는 이들 여러 속담에서 ‘손바닥에’, ‘손에’, ‘손가락에’, ‘손톱에’ 등이 생략된 표현으로 보아 틀림이 없다.
‘장을 지지다’는 이들 여러 속담 가운데에서도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라는 속담과 밀접히 관련된다.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라는 표현은 ‘손바닥에 간장을 분 다음 손바닥 밑에 불을 대어 그 간장을 끓이다’는 의미여서 ‘장을 지지다’의 의미를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손가락’이나 ‘손톱’에 장을 붓고 끓일 수는 없어서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나 “손톱에 장을 지지겠다.”라는 표현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이들은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라는 속담의 유사 속담에 불과하다. ‘손바닥’을 ‘손’으로 바꾼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그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또한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라는 속담의 유사 표현으로밖에 볼 수 없다.
물론 “손에 장을 지지겠다.”를 그 본래의 속담 형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장’을 한자 ‘掌’으로 이해한 뒤 ‘손에’의 ‘손’을 나중에 덧붙은 요소로 간주한다. 말하자면 ‘손에 장을’을 같은 의미의 단어가 중복된 잉여적인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장’이 ‘掌’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임에 분명하다. 다시 말하지만 ‘장을 지지다’는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에서 온 것이며, 이는 ‘손바닥에 간장을 붓고 손바닥 밑에 불을 대어 끓이다’는 뜻인 것이다.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와 같은 의미의 속담으로 “손가락에 불을 지르고 하늘에 오른다.”는 속담이 쓰이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가 불을 지르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손바닥 밑에 불을 지펴 손바닥 안에 있는 간장을 끓인다니, 그 손바닥이 온전할 리가 없다. ‘솥’이나 ‘냄비’는 그 거센 불길을 견뎌 내겠지만 사람의 손은 어림도 없다. 더군다나 간장이 끓을 때까지 그 손바닥이 온전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바닥으로는 간장을 끓여 낼 수 없는 것이다.
손바닥을 ‘솥’ 삼아 간장을 끓인다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는 바로 그 큰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의지는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에 믿음이 없으면 나올 수 없다. 그리하여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가 자기 확신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쓰이는 것이다.
2.2. 종간나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전쟁 영화는 관객 동원이라는 측면에서 신기록을 세운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이 무려 1173만 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 국민 네 명당 한 명꼴로 관람한 숫자이니 정말 놀라운 인파가 아닐 수 없다.
전쟁 영화여서 그런지 이 영화에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장면이 많이 나올 뿐만 아니라, 주고받는 언어도 격하고 불량하기 짝이 없다. 듣기 민망한 욕설이 난무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 욕설 가운데 북한 인민군이 국군 포로나 민간인에게 쏟아내는 ‘종간나’라는 욕은 아주 모욕적이다.
‘종간나’라. 이 욕은 사실 남한에서는 잘 쓰이지 않고, 함경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북한에서 주로 쓰이고 있다. 남한에서는 월남한 사람들로부터 간혹 들을 수 있는 정도이다.
‘종간나’는 상대방을 아주 얕잡아 이를 때 쓰는 욕이다. 그러니 이 욕을 들으면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 ‘종간나’는 주로 ‘새끼’와 어울려 ‘종간나 새끼’라는 형식을 취한다. ‘종간나’라는 욕은 ‘종간나 새끼’에서 ‘새끼’가 생략된 형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종간나 새끼, 한번 혼좀 나 보라우야.”와 같은 말 속에서 ‘종간나 새끼’에 함축되어 있는 멸시와 저주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럼 이 ‘종간나 새끼’에 쓰인 ‘종간나’는 어디에서 온 말인가? ‘종간나’는 일단 ‘종’과 ‘간나’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종’이나 ‘종간나’를 ‘호랑이’와 같은 ‘짐승’을 뜻하는 단어로 알고 있다. 그렇게 보고는 ‘종간나 새끼’를 ‘짐승의 새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을 ‘종자(種子)’로 보아 ‘남자’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대응하여 ‘간나’에 ‘여자’의 의미를 부여한 뒤 ‘종간나 새끼’를 ‘남자와 여자가 낳은 새끼’로 해석한다. 물론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이들에 비하면 ‘종’을 ‘노비’의 뜻으로, ‘간나’를 ‘갓 태어난’의 준말로 본 뒤 ‘종간나 새끼’를 ‘종으로 갓 태어난 자식’으로 해석하는 설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종’이 ‘노비’인 것은 분명하지만, ‘간나’는 ‘갓 태어난’과 무관하여 이러한 해석도 잘못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간나’는 15세기 문헌에 보이는 ‘갓나’까지 소급한다. ‘갓나’가 ‘간나’, ‘간나희’, ‘간나의’를 거쳐 ‘간나이’가 된다. 이 ‘간나이’에서 제3 음절의 ‘이’가 생략된 어형이 ‘간나’이다. 15세기의 ‘갓나’는 다시 ‘가나’로 소급한다. ‘가나’에서 제2 음절의 모음 ‘、’가 탈락한 어형이 바로 ‘갓나’이다.
‘가나’는 ‘여자’를 뜻하는 ‘갓’과 ‘아이’를 뜻하는 ‘아’가 ‘’이라는 조사를 매개로 연결된 형태이다. 그러므로 ‘여자 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아울러 ‘갓나’나 ‘간나’도 그와 같은 의미를 띤다.
그렇다면 ‘종간나’는 ‘종살이하는 여자 아이(가시내)’라는 의미를 띤다. 바로 그 어린 계집종이 낳은 자식이 ‘종간나 새끼’이다. 야수같이 덤비는 주인 마님을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인 결과 낳은 자식이 ‘종간나 새끼’인 것이다.
주인 마님의 씨이지만, 어린 계집종이 나은 자식은 천덕꾸러기 신세이다. 주인 마님과 부적절한 관계로 낳은 자식이어서 오히려 더 천대받고 멸시받는 존재이다. 그래서 ‘종간나 새끼’가 상대를 극도로 멸시하고 천시하는 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종간나 새끼’는 ‘새끼’가 생략되어 ‘종간나’로 변할 뿐만 아니라 ‘종’이 생략되어 ‘간나 새끼’로 변하기도 한다. ‘종간나 새끼’, ‘종간나’, ‘간나 새끼’가 욕으로서 똑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에 이들 욕이 몇 번이나 나오는지 세어 보면 세 가지 욕의 사용 빈도를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3. 화냥
‘화냥’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서방질을 하는 계집’이라 풀이되어 있다.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간 남자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는 여자라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나 실제로는 남편이 있거나 없거나 또는 애인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여러 남자와 관계하는 음탕한 여자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화냥’을 욕으로 이를 경우에는 ‘년’을 붙여 ‘화냥년’이라고 한다. ‘계집’이나 ‘갈보’를 더 천하게 일컫기 위해 ‘년’을 덧붙여 ‘계집년, 갈보년’이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화냥’은 어디서 온 말인가? ‘화냥’에 대해서는 여러 어원 설이 전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두 가지 정도가 그런대로 널리 퍼져 있다. 그 하나는 ‘음탕한 계집’을 뜻하는 만주어 ‘하얀(hayan)’에서 왔다는 설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많은 여인네들을 겁탈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이 농락한 조선 여인네들을 자기네 말로 ‘하얀’이라 비아냥거리며 멸시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여자를 하대하는 ‘년’까지 붙여 ‘하얀년’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변하여 ‘화냥년’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화냥’이 만주어 ‘하얀’에서 왔다는 설이 받아지려면 ‘화냥’이라는 말이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부터 쓰였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런데 ‘화냥’이라는 말은 병자호란 이전의 문헌에도 나온다. 그러므로 만주어 ‘하얀’ 설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다른 하나는 한자 ‘환향(還鄕)’에서 왔다는 설이다. 이 설 또한 만주족이 일으킨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조선 천지를 짓밟은 되놈들은 조선 여인네들을 닥치는 대로 겁탈하고 또 청나라 수도였던 선양까지 끌고 가 온갖 욕을 보였다.
끌려간 조선 여인네들은 노예로 전락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수모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그중 운이 좋은 여인들은 이른바 ‘속환(贖還)’의 돈을 치르고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도 몸을 버렸다는 수치심과 주위의 따가운 눈총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에 나라에서는 고국으로 어렵게 돌아온 여인네들이 홍제원(弘濟院) 밖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려 하였다. 그러나 한번 더럽혀진 몸이 냇물에 씻어낸들 순결한 몸이 될 수 있었겠는가.
선양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네를 조선에서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여 ‘환향(還鄕)’으로 불렀고, 몸을 더럽혔다 하여 ‘년’을 붙여 ‘환향년’이라 비하했다는 것이다. 이 ‘환향년’이 변하여 ‘화냥년’이 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환향(還鄕)’ 설도 이 단어가 병자호란 이후부터 쓰였다고 할 때나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 ‘화냥’이라는 말이 병자호란 이전에도 쓰였으므로 아무리 역사적 사실을 동원한 설명이라 하더라도 ‘환향’ 설은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화냥’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이는 중국어 ‘花娘(화랑)’에서 온 말이다. 중국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기생’이나 ‘첩’ 등을 ‘花娘’이라 불렀다. 중국어 ‘花娘’은 우리의 ‘화냥’과 발음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어 ‘花娘’은 우리말에 들어와 ‘외간 남자와 문란하게 관계하는 여자’를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여자를 더욱 멸시하여 말할 때에는 ‘년’을 붙여 ‘화냥년’이라 하였다. ‘화냥년’은 여자들에게 너무나 치욕적인 말이다.
3.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장(醬)을 지지다’는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라는 속담에서 ‘손바닥에’가 생략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는 본래 ‘손바닥 밑에 불을 지펴 손바닥 안에 있는 간장을 끓이겠다’는 뜻이다. 손바닥이 ‘솥’이 되는 셈이니 불로 인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 곧 ‘장을 지지다’이다.
(2) ‘종간나’는 ‘종’과 ‘간나’가 결합된 형태이다. ‘종’은 ‘노비(奴婢)’의 뜻이다. ‘간나’는 15세기의 ‘갓나’로까지 소급한다. ‘갓나’가 ‘간나>간나희>간나의>간나이’를 거쳐 ‘간나’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종간나’는 ‘종살이하는 여자아이’가 된다. 이 ‘종간나’에 ‘새끼’가 연결된 ‘종간나 새끼’는 ‘그 계집종이 낳은 자식’을 지시한다.
(3) ‘화냥’의 어원에 대해서는 한자어 ‘還鄕(환향)’ 설, 만주어 ‘하얀’ 설 등이 있어 왔다. 그러나 ‘화냥’의 어원은 중국어 ‘花娘’에 있다. 중국어 ‘花娘’은 이른 시기부터 ‘기생’이나 ‘첩’ 등의 뜻으로 쓰였다. 이것이 국어에 직접 차용되어 ‘화냥’이 되고, ‘외간 남자와 문란하게 관계하는 여자’라는 의미를 띠게 된 것이다.
| 참고 문헌 |
- 김민수 외 편(1977), 『우리말 語源辭典』, 태학사.
- 안옥규(1980), 『어원사전』,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 조영언(2004), 『한국어 어원사전』, 다솜출판사.
- 조항범(1997), 『다시 쓴 우리말 어원 이야기』, 한국문원.
- 조항범(2004),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1,
2)』, 예담.
- 조항범(2005), 『그런, 우리말은 없다』, 태학사.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