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한국어 교원, 그들은 누구인가?
한국어 교원 양성 제도에 대하여
한국어 교육 능력 검정 제도와 그 운영 방안
한국어 교육과 교사 제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한국어 교육
이곳 이 사람
어원 탐구
우리 시의 향기
우리 소설 우리말
국어 생활 논단
고향 말을 찾아서
알면 쉬워지는 우리말
국어 산책
국어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 드립니다
국립국어원 소식
우리 시의 향기
영랑, 민족 의식과 민족어 완성의 길

김재홍∙경희대 교수, 문학평론가

머리말. 시인의 가슴, 지사의 혼

  시인 영랑 김윤식(1903~1950)은 일찍이 16세 때인 1919년 향리인 전남 강진에서 3ㆍ1 운동을 모의하고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수개월 동안 감옥 생활의 고통을 겪기도 한 독립투사이자 민족운동가이기도 하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함으로써 시 「독(毒)을 차고」에서 보듯이 지사적 절의를 보여 주는가 하면, 「춘향」 등 고전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데에도 남다른 인식을 보여 준 점에서 민족혼과 정서를 지키고 갈고 닦는 데 이바지 한 점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제 강점하에서 지용과 함께 한글의 문학적 훈련을 통해서 ‘시의 시다움’을 실천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선구적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는 龍兒 朴龍喆과 더불어 『詩文學』지를 창간, 주재함으로써 1930년대 이 땅의 서정시 운동을 본격화하였다. 그는 시의 본도가 서정에 놓여져야 하며, 그것은 언어의 섬세한 조탁에 의해 미학적 수준으로 상승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아름다움은 영원한 즐거움”(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ever)이라는 키츠(J. Keats)의 말을 음미하면서 사라져 가는 우리의 고유어를 발굴하고 향토어인 전라 방언을 널리 사용함은 물론 독창적인 조어를 활용하는 등 국어의 심미적 가치를 개발하는 데 주력하였다. 소월과 지용에게서 특징적으로 볼 수 있었던 언어의 심미적 가치에 대한 섬세한 인식은 영랑에 이르러 본격적인 작품상의 실천을 보게 된 것이다. 영랑에게서의 이러한 서정에 대한 재인식과 국어의 미적 구조성에 대한 재발견은 이 땅의 시를 생경한 관념이나 도식적인 이데올로기의 수준에서 예술적인 차원으로 상승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이해된다.
  
  

1. 「모란이 피기까지는」, 생의 밝음과 어둠 또는 희망과 절망의 변증법

  그의 시집으로 처음 발간됐던 것은 『영랑시집』(시문학사, 1935)인데, 여기에는 제목이 없이 번호만으로 모두 5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해방 후 여기에다가 영랑이 동향 후배인 서정주에 의뢰해 초판 『영랑시집』에 17편을 더해서 일련번호를 붙여 모두 70편의 시를 싣고, 비로소 각기 첫 행을 따서 제목을 달아 놓은 확정판 『영랑시선』(중앙문화사, 1959)을 발간하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봄을 기둘리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五月어느날 그하로 무덥든날
  떠러져누은 꼿닙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뻐쳐오르든 내보람 서운케 문허졋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잇슬테요 찰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이 피기까지」 전문
  그런데 여기에는 구두점이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시의 가락을 열어놓음으로써 음악적인 흐름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영랑의 의도적인 장치로 이해된다.
  띄어쓰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시인 자신의 호흡률(breath group)에 의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랑이 시의 리듬을 살리기 위해서 시인 나름대로 조어를 해서 사용하고 전라 방언을 적극 시어로서 활용한 점을 유의해 본다면 이러한 구두점을 사용하지 않은 것과 띄어쓰기를 국어 정서법에 맞지 않게 한 것은 의도적이고 계산된 영랑 나름의 창작 방법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랑의 이 시는 형태적인 면에서도 의도적으로 잘 계산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어법이나 표현의 면에 있어서도 거의 대부분의 시어 및 종지법(終止法)이 유성음과 유성 종지법으로 짜임으로써 시에 부드럽고 유려한 리듬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표현과 형태, 즉 언어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 가히 프랑스 상징시와 비견되는 독보적인 표현 미학 내지 형태 미학을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이 시의 의미 구조는 대략 형식 구조와 서로 대응되는 것으로 보인다. 의미의 단락이 형태의 단락과 서로 대응적인 일치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란의 낙화가 의미하는 생의 소멸이 지금 눈앞에 현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머지않아 다가올 모란의 숙명적 한계이며 생명을 지닌 것들의 필연적 결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의 화자는 모란의 화려한 개화를 보면서 동시에 이윽고 다가올 처참한 낙화의 모습을 투시함으로써 생의 모순성, 비극성을 감지하며 순간적으로 전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순간적인 비극적 전율이 바로 가상적인 ‘오월 어느 날의 落花’라고 하는 가상적 현실 체험을 도출하게 된 것이다. 실상 모란의 숙명성과 양면성 및 그 비극성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 있어서의 생명의 원리이며 법칙이 아닐 수 없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생명이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유한성을 지니며 동시에 근원적인 면에서의 비극적인 존재성을 지닌다. 그것은 일회적 존재로서의 생의 모습이면서 유한자ㆍ단독자로서의 인생의 본질에 해당한다. 모란이 떨어지는 것은 ‘五月어느날 그 하로 무덥든 날’로서의 가상적 현실이지만, 그것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눈앞에 현전하는 숙명적 사실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연에는 생명의 양면성ㆍ모순성 또는 숙명적 비극성에 대한 새삼스러운 발견과 그에 대한 탄식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거듭되는 현실에 있어서의 절망과 좌절이 부정적ㆍ하강적 시어로 반영되고 있는 바, 이것은 영랑의 뿌리 깊은 비극적 세계관 또는 절망적 현실인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5세 이른 나이에 상처(喪妻)를 한 바 있고, 16세 때 이미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6개월간 복역하는 등 인생의 쓰라림과 고달픔을 맛본 바 있는 영랑으로서는 인생이란 비극과 좌절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러한 절망과 좌절체험이 부정적ㆍ하강적 시어로서 모란의 생명 과정을 묘사하게 된 것이며, 바로 이 점에서 이러한 부정적ㆍ하강적 생의 인식은 바로 그의 비극적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실상 이러한 ‘개화→낙화→개화’라는 이 시 전체의 사건 전개는 ‘희망→절망→희망’이라는 감정추이를 반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끊임없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삶을 긍정하며 기다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을 상징화한 것으로 이해된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이러한 ‘피어남→떨어짐→피어남’이라는 생성과 소멸, 소멸과 생성의 간단없는 반복 위에서 삶을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행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는 결구 속에는 밝은 것과 어두운 것, 상승과 하강, 생성과 소멸이라는 존재의 원리를 긍정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의 본성이 날카롭게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는 마지막 핵심 구절은 인생의 모순되는 양 측면과 그것의 숙명적 비극성에 대한 투시, 그리고 그러한 비극성을 뛰어넘으려는 초극 의지가 제시되어 관심을 끈다. 개화와 낙화라는 모순되는 양 측면을 함께 포괄하는 봄의 모습은 이별과 만남, 소멸과 생성, 하강과 상승, 희극과 비극 등이 끊임없이 반복 전개되는 생의 모습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 시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이란 ‘찬란함(개화)’과 ‘슬픔(낙화)’이라는 서로 상대되고 모순되는 양면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봄을 표상으로 제시함으로써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이별과 만남 등이 무시로 교차하며 전개되는 인생의 모순성ㆍ비극성ㆍ양면성을 예리하게 투시해 낸 명구로 풀이된다. ‘찬란함’과 ‘슬픔’이라는 두 모순되는 표현을 함께 결합한 눈물겹게 빛나는 정신의 힘은 그만큼 삶의 이중성ㆍ모순성ㆍ양극성의 문제에 괴로워하던 영랑 자신이 무수한 절망 속에서 문득 섬광적으로 깨치고 이루어 낸 절망과 비극성의 초극 의지를 발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정지용이 아들을 잃은 절망과 오뇌의 순간에 성취해 낸 ‘외롭고 황홀한 심사’(「유리창」, 「조선지광」 89호, 1930.1.)에 해당되는 절창인 것이다.
  
  

2. 영랑과 소월, 지용, 만해 그리고 고전 시와의 상관성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소월의 ‘진달래꽃’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보기가 역겨워/가실때에는/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寧邊에 藥山/진달래꼿/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우리다//가시는 거름거름/노힌 그 꼿츨/삽분히즈려밟고 가시옵소서//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아니 눈물흘니우리다.
  우선 구두점을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과 호흡률에 의한 띄어쓰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유사성을 지닌다.
  여기에 내용적인 면에서 볼 때 이 시는 영랑 시와 더욱 연결된다. 이 작품이 꽃(진달래꽃/모란꽃)을 제재로 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이 상실(이별)이라고 하는 인간사의 본원적인 문제와 연결돼 있는 점이 더욱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적인 배경이 봄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닌다. 봄의 개화 속에서 낙화를 예감한다는 점이 두 시에서 근원적인 발상법의 유사성을 드러내 준다. 이렇게 본다면 두 시는 다 같이 ‘꽃―봄―이별(사랑)’의 상관관계를 핵심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형식상에 있어서도 이 시는 기·승·전·결이라는 4연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상에 있어 그것이 ‘기(1연)―서(2·3연)―결(4연)’으로 짜여 있으며 수·미가 상응한다는 점에서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유사하다. 또한 이 시에서 이별이라는 가상적 상황 또는 미래적 공간이 설정된 점이 ‘모란이~’에서의 그것과 호응을 이루고 있어서 흥미롭다. 즉 이 시에서 이별은 실제 일어났던 일이 아니며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도 아니다. 이별은 ‘가실’에서의 ‘-ㄹ’이나 ‘보내드리우리다/뿌리우리다/가시옵소서/눈물흘리우리다’에서의 ‘리’와 같이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가정적 상황에 대한 예감 또는 대비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래 시제의 습용이나 ‘죽어도 아니’라는 역설적인 강조 어사는 이별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만, 일어난다 해도 눈물속에서 카타르시스하겠다는 미래에의 비장한 결의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이별과 그에 따르는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심리적인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의 작용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행 ‘죽어도아니 눈물흘니우리다’와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의 대응은 두 가지가 다 미래적 상황을 날카롭게 예감한 것으로서 두 시에서 각각 백미가 된다는 점에서 소중한 의미를 던져 준다.
  무엇보다도 두 시에 비관적인 현실 인식과 부정적인 세계관이 드러난다는 점이 유사하다. 진달래꽃의 화려한 개화 속에서 이별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예감하는 소월과 모란꽃의 피고 짐 속에서 생의 모순성 양면성을 꿰뚫어 보는 영랑의 시심은 근원적인 면에서 하등 다른 것이 아니다. 세계와 사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선이 비관적이고 어두운 정조에 깊이 물들어 있는 것이다. 봄에 피어나는 진달래꽃은 겨울의 죽은 땅에서 살아나지만 그것은 머지않아 떨어져 버리고 말 숙명적인 비극성을 지닌다. 이른바 개화 속에서 낙화를 보는 것이며, 만남에서 이별을 예감하는 것이고, 아울러 봄 속에서 겨울을 읽는 것이다. 피어남에서 떨어짐으로 이어지는 꽃의 숙명성은 겨울을 읽는 것이다. 피어남에서 떨어짐으로 이어지는 꽃의 숙명성은 자연의 순환 원리에 비춰 볼 때 극히 자연스러운 일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도 반드시 이별이 근본 원리로서 작용하며, 인생에서도 죽음이 언젠가는 닥쳐올 운명에 해당한다. 인간도 언젠가는 죽음의 세계로 떠날 수밖에 없는 숙명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소월은 ‘피고 짐’으로서의 꽃의 원리를 ‘만나고 떠남’으로서의 사랑의 원리로, 다시 ‘태어나고 죽음’으로서의 인생의 원리로, 마침내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으로서의 만물 존재의 원리로서 상승시킨 것이다.
  이 점에서 소월의 「진달래꽃」은 역시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노래한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깨달음을 담고 있는 존재론의 시, 형이상학적인 시라고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소월의 「진달래꽃」이 이별의 상황 설정이라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서 존재의 근본 원리를 형상화한 존재론의 시인 것처럼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도 모란의 피고 짐 및 낙화라는 가정적 상황 설정을 통해서 존재의 근본 원리를 투시한 존재론의 시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그 발상법이나 상상력의 전개 양식에 있어서 부지불식중에 소월 시 및 지용 시와 상관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영랑에 있어 달의 상상력과 흐름의 시학이 나타나는 점 혹은 비극적 세계관이나 전원 상징이 두드러지는 점, 그리고 고유어와 방언을 활용하고 있는 점 등이 소월시의 광범위한 영향으로 해석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랑의 문학적 우수성이나 독자성이 조금도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영랑은 영랑다움을 확보함으로써 소월시를 창조적으로 변용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월은 영랑이 있음으로 해서 상대적으로 빛을 발할 수 있으며 보다 완성되는 면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영랑과 지용도 깊은 영향 관계에 놓인다. 두 사람은 같은 휘문고보 동문이면서 시문학파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시의 정신이나 내용 및 표현상에 있어서 직ㆍ간접적으로 영향 관계를 형성한다.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물 먹은 별이, 반짝, 寶石처럼 백힌다./밤에 홀로 琉璃를 닦는 것은/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고은 肺血管이 찢어진 채로/아아, 늬는 山ᄉ새처럼 날러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
  아울러 영랑의 시에는 부지불식중에 정지용이 실험한 바 있던 주지주의적인 감각성과 회화성도 두드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공감각적인 심상의 다양한 활용과 시어의 절제는 지용을 뛰어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특히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라는 지용 시구와 「나는 기둘리고 있슬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는 영랑의 절창은 직접적으로 대응된다. “외로운 황홀한”과 “찬란한 슬픔”이라는 모순어법이 그것이다. 생의 양면성ㆍ모순성ㆍ양극성을 날카롭고 섬세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서로 호응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영랑의 이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소월 시의 발상법과 상상력에 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지용의 감각주의의 세련을 섭수하면서 완성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볼 수 있으리라고 본다.
  한편 만해는 시 정신의 면에서 영랑에게 연결된다. 우선 영랑은 만해가 서울에서 주도한 3ㆍ1 독립 운동을 강진 지역에 전파하고 주도한 것은 물론 왜경에게 피체되어 감옥 생활을 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아울러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등 민족 운동을 전개하면서 끝까지 정신적 지절과 일관성을 지닌 것도 서로 연결된다.
  내 가슴에 독을 찬지 오래로다/아직 아무도 해(害)한일 없는 새로 뽑은 독/벗은 그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나는 그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독 안차고 살어도 머지않어 너 나 마주 가버리면/억만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잣고 흘러가고/나종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것임을/「허무(虛無)헌듸!」 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虛無)헌듸!」 허나/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마음을 노리매/내 산체 짐승의 밥이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네맛긴 신세임을//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마금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 「毒을 차고」
  이렇게 본다면 영랑은 문학적인 면에서 소월과 지용, 그리고 정신적인 면에서는 만해의 그것과 직ㆍ간접적인 원천ㆍ영향 관계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영랑의 시는 우리의 전통 시와 다양한 원천과 영향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시 정신과 방법을 고전 문학에서 차용 변용함으로써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밤이면 고총아래 고개 숙이고
  낮이면 하날보고 우슴 좀 웃고
  너룬 들 쓸쓸하야 외론 할미꽃
  아모도 몰래 지는 새벽 지친별
― 「4행시ㆍ46」

  큰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春香)이는/제마음이 그리도 독했든가 놀래었다/성문이 부서저도 이 악물고/사또를 노려보는 교만한 눈/그는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이/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었었니라/오! 일편단심(一片丹心)/원통코 독한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서름이 사모치고 지처 쓰러지면/남강(南江)의 외론혼은 불리어 나왓느니/논개(論介) 어린춘향을 꼭 안어/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오! 일편단심
― 「춘향」
  4행시는 형태상에서 한시의 절구 또는 시조의 3장을 확장한 형태로서의 구조적 특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전통 시와 연결된다. 그리고 「춘향」은 내용 면에서 「춘향전」의 내용을 패러디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맥락을 지닌다. 그만큼 영랑 시가 전통문학의 현대시적 변용을 성취한 것으로 판단된다.
  
  

맺음말. 민족어의 완성을 향하여

  영랑의 시는 순수 서정시의 한 전범에 속한다. 그의 시는 시의 섬세한 의미와 가락, 그리고 형식이 유기적으로 통합됨으로써 생의 인식이 예술 의식으로 상승된 한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순수’와 ‘서정’의 세계에만 함몰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시에는 인생에 관한 더욱 깊이 있는 응시와 관조, 그리고 현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짙게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그 밑바탕에는 비관적 현실 인식과 함께 비극적인 세계관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영랑의 시 정신은 전통적인 선비 정신에 바탕을 둔 지사 의식과 시인으로서의 예술가 의식을 함께 갖추고 있다는 뜻이 되겠다. 말하자면 시인의 가슴과 지사의 정신이 영랑의 본 모습이자 핵심이 된다는 뜻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의 시는 생의 모순성과 삶의 비극성에 대한 끈질긴 극복 의지를 드러내게 된다. 그가 시종일관 견지한 투철한 지사 의식, 즉 독립 운동가, 민족 사상가로서의 저항적인 현실인식과 비극적 세계관, 그리고 그것을 형상화하기 위한 언어 미학에의 끈질긴 집념은 당대 일제의 포악한 파시즘에 시인이 대처할 수 있는 효과적인 문학적 응전 방식에 해당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보여 준 한국의 전통적 서정과 모국어에 대한 뜨거운 애정 및 현대적 변용의 노력, 그리고 향토적 정감의 소중함에 대한 재발견의 노력과 그에 따른 한국어의 미적 가치와 그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깊이 있는 신뢰와 실천적 탐구야말로 민족어의 완성을 지향하는 바람직한 시인의 사명 완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그의 시는 표층적인 면에서는 순수 서정적인 면모를 지니지만, 심층적인 면에서는 삶의 모순과 그 비극성에 대한 끈질긴 극복과 초월 의지를 담고 있는 존재론적 서정시임이 확실하다. 바로 이 점에서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대표되는 영랑 문학 전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필요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