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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 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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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알고 있는 어원 몇 가지(2) |
조항범∙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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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특정 단어의 어원 가운데에는 잘못된 것이 많다. 이 잘못된 어원을 바로잡는 것이, 어찌 보면 바른 어원을 널리 알리는 것보다 시급한 일일 수 있다. 이에 우리는 앞서 ‘가랑비, 으악새, 짱개집, 환장’의 어원을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가시내, 가시버시, 고릿적, 까치설, 노털, 도루묵’의 어원을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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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가시내
‘사내’라는 단어의 대립어는 무엇인가? 그 답으로 ‘가시내’를 제시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가시내’는 답이 될 수 없다. ‘사내’의 대립어는 ‘계집’이나 ‘계집아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의미만을 따진다면 ‘가시내’도 ‘사내’의 대립어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가시내’는 경상, 전라 방언이어서 ‘사내’라는 표준어의 대응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가시내’는 경상 방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다. 그만큼 단어의 세력이 커진 것이다.
그럼 이 ‘가시내’라는 말은 어디서 온 것인가? 이 ‘가시내’의 어원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항간에 여러 설이 떠돌았다. 어림잡아도 예닐곱 가지나 된다. 한 단어에 집중된 어원설치고 이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관심이 그 단어의 어원에까지 미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비교적 널리 퍼져 있는 것은 ‘갓쓴애’ 설이다. ‘갓쓴애’는 ‘갓을 쓴 아이’라는 뜻이다. 고려 시대 때 원나라에 공녀(貢女)로 팔려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또는 조선을 유린한 오랑캐 놈들의 겁탈을 피하기 위해 여자가 갓을 쓰고 남장을 하고 다녔다는데, 이러한 여자 아이를 ‘갓쓴애’라 했고, 이것이 변하여 ‘가시내’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여자 아이가 남장을 할 때 ‘갓’을 쓸 수도 있지만, ‘갓쓴애’가 변하여 ‘가시내’가 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갓쓴애’ 설은 믿을 수 없다.
‘가사내(假--)’ 설도 제법 널리 퍼져 있다. ‘가사내(假--)’는 ‘가짜 사내’라는 뜻이다. 상고(上古) 시대에 호남 지방에 병란(兵亂)이 심하여 남자들이 전몰하자 급기야 여자들이 남장(男裝)을 하고 거짓으로 남자인 것처럼 하고 싸웠다고 한다. 이들을 ‘가사내(假--)’라 했고, 이것이 변하여 ‘가시내’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호남 지방에 특별히 전란이 많았다는 것과 또 여자들이 남장을 하고 싸웠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가사내(假--)’가 ‘가시내’로 변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이 설 또한 크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이들 어원 설 이외에도 ‘중에게 시집보낼 아이’라는 뜻의 ‘가승아(嫁僧兒)’ 설, ‘사내에게 시집갈 것’이라는 뜻의 ‘가사내(嫁--)’ 설, ‘이가정(李稼亭)이 아이를 낳음’이라는 뜻의 ‘가산아(稼産兒)’ 설 등도 전하지만 모두 신뢰할 수 없는 민간 어원일 뿐이다.
물론 이 ‘가시내’의 어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여자’를 뜻하는 ‘가시’에 접미사 ‘-내’가 결합된 어형으로 보기도 하고, 그와 같은 ‘가시’에 ‘태생(胎生)’이라는 의미의 ‘나’가 결합된 어형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이런 해석도 잘못된 것들이다. ‘가시내’에 대한 여러 민간 어원이 떠돌고, 또 학자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은 ‘가시내’의 어원 설명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반증(反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시내’의 어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우선 그 기원형을 찾아 형태를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실마리를 잡아 보기로 하자. ‘가시내’의 기원형은 16세기 문헌에 보이는 ‘가나’이다.
‘가나’는 ‘갓’과 ‘아’가 속격 조사 ‘’을 매개로 연결된 형태이다. ‘’과 ‘아’가 결합된 중세 국어 ‘나’와는 속격 조사 ‘’의 유무에서만 차이를 보이는 조어 형태이다. 중세 국어에서 ‘갓’은 ‘여자’ 또는 ‘아내’라는 뜻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이 단어 자체가 없어졌다. ‘아’는 ‘아희’를 거쳐 지금 ‘아이’로 남아 있다. 이로 보면 ‘가나’는 ‘여자 아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다. 지금의 ‘가시내’와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16세기의 ‘가나’는 제2음절의 ‘ㆍ’가 ‘ㅡ’로 변하여 ‘가스나’가 된 다음 ‘가스나희, 가시나히’를 거쳐 지금의 ‘가시내’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경상도에서 일어난 것이고, 서울에서는 다른 변화의 길을 걷고 있어 주목된다. 곧 ‘가나’가 ‘갓나’로 변한 것이다.
‘가나’는 제2음절 모음 ‘ㆍ’가 탈락하여 ‘갓나’로 변한다. 중세 국어에서는 ‘갓나’가 주로 쓰였다. 이 ‘갓나’가 ‘간나, 간나희’를 거쳐 지금의 ‘간나이, 간나’로 이어졌다. 북한에서 쓰는 ‘종간나 새끼’라는 욕 속의 ‘간나’가 ‘갓나’까지 소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간나이’나 ‘간나’ 또한 ‘가시내’처럼 방언으로만 존재한다. 이에 대한 표준어는 ‘계집아이’이다.
2.2. 가시버시
‘가시버시’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전의 ‘부부(夫婦)의 낮춤말’이라는 기술을 참고하면 ‘부부(夫婦)’의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아 그 정확한 용법을 알기가 어렵다.
물론, ‘가시버시’는 이른 시기의 문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 단어는 20세기 이후에 와서야 용례가 확인된다. 필자가 본 가장 이른 시기의 용례는 20세기 초 소설인 ꡔ임꺽정ꡕ의 “같이 살면 가시버시지 어째 명색이 없느냐?”에 나타나는 그것이다.
이 ‘가시버시’라는 단어는 일단 ‘가시’와 ‘버시’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분석해 놓고도 ‘가시’와 ‘버시’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도대체 이들과 관련된 단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가시’의 경우는 ‘버시’의 경우보다는 사정이 낫다. ‘장인’, ‘장모’를 뜻하는 ‘가시아비, 가시어미’ 등과 같은 단어를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시버시’의 ‘가시’를 ‘가시아비, 가시어미’의 그것과 똑같은 것으로 볼 수도 없다.
그런데 ‘가시버시’의 ‘가시’와 ‘가시아비, 가시어미’의 ‘가시’는 그 어원이 다르다 하더라도 의미상 관련되는 것은 분명하다. ‘가시아비’나 ‘가시어미’의 ‘가시’가 ‘여자’나 ‘아내’를 뜻하는 ‘갓’에 속격 조사 ‘’가 결합된 ‘가’로부터 ‘가싀’를 거쳐 나온 것이라면, ‘가시버시’의 ‘가시’는 그 ‘갓’에 주격조사 ‘ㅣ’가 결합된 ‘가시’가 명사로 굳어진 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가시’가 ‘아내’라는 뜻임은 분명히 드러난다. 혹자는 ‘가시내’의 ‘가시’까지 ‘가시아비’나 ‘가시버시’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가시내’는 ‘가나(갓++아)’로부터 변한 어형이어서 ‘갓’을 포함은 하지만, 속격의 ‘’을 취하고 있어 ‘가시아비’나 ‘가시버시’의 그것과는 출발부터 다르다. 의미가 유사하고 어형이 같다고 하여 모두 동일한 것으로 처리하는 것은 잘못이다.
‘버시’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그래서 단순히 ‘가시’에 운(韻)을 맞추기 위한 첩어 요소로 설명해 오기도 하였다. 그렇게 보면 ‘가시버시’는 ‘부부(夫婦)’ 가운데 ‘부(夫)’의 의미가 반영되지 않은 이상한 단어가 되고 만다.
‘버시’에 대한 궁금증은『조선어사전』(1938)에 나오는 ‘가시밧’이라는 단어를 접하면서 싹 가신다. 이 사전에서는 ‘가시밧’을 ‘내외의 옛말’로 기술하고 있다. ‘가시밧’에서 ‘가시버시’가 나온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면 ‘가시밧’의 ‘밧’은 무엇인가? 이는 ‘>밖[外]’의 다른 표기에 불과하다. ‘밖’은 단순히 ‘外’라는 뜻 이외에도 ‘바깥에서 활동하는 사람’, 곧 ‘사내, 남편’의 뜻도 함축한다. ‘바깥양반, 바깥주인’에 쓰인 ‘바깥’의 의미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조선어사전』(1938)에서는 ‘밖’에 ‘사내[夫]’라는 의미를 정확히 부여하고 있다.
‘가시밧’의 ‘밧’이 ‘남편’을 지시한다면 ‘가시밧’이라는 단어는 ‘아내’를 뜻하는 ‘가시’와 ‘남편’을 뜻하는 ‘밧’이 결합된 합성어가 된다. 그러므로 ‘가시밧’이 ‘부부(夫婦)’라는 의미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가시버시’의 ‘버시’는 바로 이 ‘밧’으로부터 변한 것이다. ‘밧’에 접미사 ‘-이’가 결합되어 ‘바시’가 되었다가 모음 변화에 따라 ‘버시’가 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시밧>가시바시>가시버시’의 변천 과정이 상정된다.
‘가시밧’의 ‘밧’이 ‘남편’의 뜻이기에, ‘가시버시’의 ‘버시’도 ‘남편’의 뜻으로 이해된다. ‘버시’는 ‘남편’을 뜻하는 단어로 굳어져 ‘버시아비(시아버지), 버시어미(시어머니)’와 같은 단어를 만드는 데도 이용된다. 이로써 ‘가시버시’도 ‘가시밧’과 같이 ‘夫婦’의 뜻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2.3. 고릿적(高--)
먼 과거의 일을 언급할 때 상투적으로 쓰는 말들이 있다.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울 적’, ‘소싯적’, ‘고릿적’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이 과거를 지시하기는 하지만 똑같은 과거의 시간대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 옛적’은 그야말로 지정되지 않은 먼 과거를 지시한다. 이는 “옛날 옛적에 깊은 산골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요.”와 같이 옛날이야기의 서두에 많이 쓰인다. ‘옛날 옛적’을 ‘아주 아주 먼 옛날’로 바꾸어 표현하기도 한다.
‘호랑이 담배 피울 적’은 ‘호랑이가 사람처럼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라는 뜻이니, 지금과는 형편이 아주 다른 옛적을 지시하되 호랑이가 담배를 피울 때라는 지정된 과거를 지시한다. 상식적으로 호랑이가 담배를 피울 수 없으므로 ‘호랑이 담배 피울 적’은 도저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던 먼 옛날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변형된 구조로도 널리 쓰인다.
‘소싯적’의 ‘소시’는 한자 ‘少時’이다. 이 ‘소시’에 ‘시’와 의미가 같은 ‘적’이 덧붙은 어형이 ‘소싯적’이다. ‘소시(少時)’나 ‘소싯적’은 ‘젊었을 때’라는 뜻이다. 나이가 어렸을 때를 지시하므로 지정된 과거이며,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이다. 이 ‘소싯적’은 “내가 이래 봬도 소싯적에는 한가락했지.”와 같은 표현 속에서 확인되듯 어느 정도 나이 든 사람이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쓰는 말이다.
앞서 설명한 과거 지시 표현들과는 달리 ‘고릿적’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어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또 고릿적 얘기는 꺼내고 그래?”와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이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를 지시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고릿적’은 ‘고리’와 ‘적’ 사이에 사이시옷이 개재된 어형이다. ‘적’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울 적’, ‘소싯적’ 등에 쓰인 ‘적’과 같이 ‘때’를 지시한다. 지금은 ‘때’라는 단어에 밀려나 ‘∼할 적에’와 같은 일부 표현이나 ‘소싯적, 고릿적’ 등과 같은 관용어 투의 표현, ‘그저께, 어저께’와 같은 시간어에서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문제는 ‘고리’이다. ‘고릿적’의 ‘고리’를 ‘고리나 대오리로 엮어서 상자같이 만든 물건’으로 이해하고, ‘적’을 ‘짝’으로까지 바꾸어 ‘고릿적’을 ‘고리짝’으로 바꾸어 쓰기도 한다. ‘고릿적’이 지니는 ‘과거’의 의미와 ‘고리짝’이 지니는 ‘낡고 오래된 물건’이라는 이미지가 맞아떨어져 ‘고릿적’을 쉽게 ‘고리짝’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리짝’은 ‘낡고 진부한 것’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웬 고리짝 같은 소리냐?”와 같은 표현에서 이와 같은 의미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고릿적’의 ‘고리’는 ‘고리짝’과는 무관하다. ‘고리’는 ‘고려’의 변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려’라니 이것이 무엇인가. 나라 이름 ‘高麗’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릿적’은 ‘고렷적’으로 소급하고 ‘고려 때’라는 의미를 띤다. 더 정확히는 ‘고려 시대’를 가리킨다. ‘고려’라는 시간대가 과거의 일이므로 이 표현은 적어도 조선 시대 이후에서나 쓰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 시대에 그 이전 왕조인 고려 시대를 회상하며 ‘고려 때에는 이러이러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고렷적’이라는 말을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만들어 쓰던 사람들은 조선 시대 사람들이다. 아마도 조선 시대는 고려 시대와 달라진 것이 많아 그것을 비교하기 위해 이와 같은 말을 만들어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고렷적’이라는 말을 쓰면서 당시보다 좋았던 고려 시대를 추억했을 수도 있고, 지나간 시기와 단절하며 새로운 시대 상황에 적응하기를 모색하였을 수도 있다.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고릿적’은 그리움의 대상이자 극복의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2.4. 까치설
설날의 전날, 곧 섣달 그믐날을 ‘까치설’이라고 한다. 이 ‘까치설’은 ‘설날’의 전날이니 ‘작은설’과 같다. 그런데 설날의 바로 전날을 ‘작은설’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만, 이 날을 ‘까치설’이라고 하는 것은 짐짓 이해가 가지 않는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라는 동요에 따라 ‘까치설’을 ‘까치가 맞는 설’이라고 해석하기도 어렵다.
기실, ‘까치’와 ‘설’은 그렇게 큰 관련이 없다. 따라서 ‘까치설’의 ‘까치’는 어떤 다른 요소의 변형일 가능성이 높다. ‘까치설’을 ‘작은설’이라고 한다는 사실에 유념하고, ‘작은설’을 뜻한 옛말이 ‘아설’ 또는 ‘아설’이었다는 사실을 참고하면 ‘까치’가 어떤 단어의 변형인지를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까치설’의 ‘까치’는 ‘아치’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아치’는 ‘少(소), 小(소)’의 뜻을 갖는 형용사 어간 ‘앛-’과 관련된 어형이다.
그런데 문헌에 ‘작은설’이라는 뜻으로 ‘아설’ 또는 ‘아설’은 보이지만 ‘*아치설’은 보이지 않는다. ‘아설’은 ‘앛-’의 관형사형 ‘아’과 ‘설’이 결합된 어형이고, ‘아설’은 ‘작음’을 지시하는 ‘아’과 ‘설’이 결합된 어형으로 모두 ‘작은설’이라는 뜻이다. 이들 ‘아설’이나 ‘아설’은 19세기 이후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설’과 ‘아설’을 이어 확인되는 것은 ‘*아치설’도 아니고 ‘까치설’이다.
‘까치설’이 나오려면 ‘*아치설’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아치설’의 ‘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유력하다. 그 하나는 ‘아츤설’의 ‘아츤’에서 ‘ㄴ’이 탈락한 ‘아츠’의 모음 변화형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앛-’에 조음소 ‘으’가 개재된 ‘아츠-’의 모음 변화형으로 보는 것이다. 전자로 보면 ‘아츤설’이 ‘*아츠설’로 변한 뒤에 ‘*아치설’이 된 것이고, 후자로 보면 ‘*앛설’이 ‘*아츠설’을 거쳐 ‘*아치설’이 된 것이다. ‘아치’의 정체가 어떤 것이든 ‘*아치설’이 ‘작은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면 어째서 ‘*아치설’이 ‘까치설’로 변하였을까?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 있다. ‘*아치설’에 쓰인 ‘아치’의 참뜻을 잊고, 그 어원을 찾고자 하는 노력에서 그것과 우연하게도 음상이 유사한 ‘까치’를 떠올려 그것으로 ‘아치’를 대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까치’는 지혜와 부지런함을 갖춘 새로서 ‘설날’이 지향하는 희망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아치설’을 ‘까치설’로 바꾸어 부르는 데 큰 저항이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치’가 ‘까치’로 변한 단어에는 ‘까치설’ 말고도 ‘까치고개, 까치밭, 까치산’ 등과 같은 지명도 있다. 이들 지명의 대부분에는 ‘까치[鵲]’와 결부된 유래 설이 결부되어 있지만, 정작 ‘까치’와 무관한 지명이 많다. 이들 지명은 해당 지형지물이 작은 규모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까치고개’는 고개의 규모가 작아서, ‘까치산’은 산이 작고 낮아서 붙여진 지명이다.
2.5. 노털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노털 도사’를 잘 알 것이다. ‘노털 도사’가 이끄는 유명한 낚시 강좌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강좌에서 ‘노털 도사’는 낚시에 대한 여러 정보를 전한다.
그럼 이 ‘노털 도사’에서 연상되는 것은 무엇인가. ‘도사’가 대부분 그렇지만, ‘노털’이 붙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무엇보다 흰 머리털과 길게 늘어뜨린 수염이 연상된다. ‘노털’이 ‘흰 머리털과 긴 수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이는 ‘노털’의 ‘털’을 피부에 나는 ‘털’로 생각한 결과이다.
‘노털’의 ‘털’을 피부에 나는 ‘털’로 이해한 나머지 ‘머털 도사’라는 단어도 만들어졌다. ‘머털 도사’는 머리털을 뽑아 요술을 부리는 도사이니 여기서의 ‘머털’은 ‘머리털’임이 분명하다. ‘머털’이 ‘노털’의 아류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머털’이 ‘노털’의 아류이므로 사전에 나올 리가 없다. 주목되는 것은 ‘노털’도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노털’이 표준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틀’이 표준어인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표준어인 ‘노틀’보다 표준어가 아닌 ‘노털’이 한층 많이 쓰이고 또 훨씬 자연스럽다. “이제는 ‘노털 축’에 낀 그의 이름은 털털한 ‘노털’ 박상민”이라는 표현 속의 ‘노털’을 ‘노틀’로 바꾸면 오히려 의미 전달이 잘 안 된다. ‘노털 도사’도 ‘노틀 도사’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노틀’은 ‘늙은 남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퇴물을 그렇게 부른다. 그러므로 ‘늙은 남자’를 낮잡아 이르는 ‘노땅, 늙다리, 늙은데기’ 등과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늙다리, 늙은데기’는 ‘늙-’과 관련된 어형이고, ‘노땅’은 한자 ‘老’를 포함한 어형이다. 그렇다면 ‘노틀’은 어디에서 온 말인가? 제1 음절이 ‘노’이기에 ‘노땅’처럼 ‘老’를 포함한 단어로 보는 데 문제는 없다.
그런데 ‘틀’이 문제이다. 이 ‘틀’을 ‘어떠한 물건을 만드는 데 기본이 되는 모양새’로 이해하여 ‘노틀’을 ‘늙은 모습’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노틀 같다’라는 표현을 젊은 사람이 나이 든 차림새나 모습을 하여 ‘나이 든, 늙은 모습을 띠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노틀’은 중국어에서 들어온 차용어이기 때문이다.
‘노틀’은 중국어 ‘老頭兒[laotour]’에 기원한다. ‘老頭兒’는 ‘노인(老人)’을 뜻하는 ‘老頭’에 접미어 ‘兒’가 덧붙은 어형이다. 그래서 ‘老頭兒’는 ‘라오터울’ 정도로 발음이 난다. 이것이 한국어에 ‘노털’로 정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중국어 원음에 가까운 ‘노털’이 표준어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 원음에서 더 멀어진 ‘노틀’이 표준어로 정해진 것이다.
어째서 ‘노털’이 아니라 ‘노틀’이 표준어로 정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떠한 물건을 만드는 데 기본이 되는 모양새’를 뜻하는 ‘틀’이라는 단어나 ‘듬직하고 위엄이 있는 겉모양’을 뜻하는 ‘틀거지’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러한 단어와 어떤 관련성을 의식해서 ‘노틀’이 표준어로 정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용어의 경우, 원음에 가까운 것을 표준어로 삼는 것이 원칙인데 ‘노틀’의 경우는 예외이다. 오래전부터 써 오던 ‘짜장면’을 버리고 ‘자장면’을 표준어로 삼은 것만 보아도 원음 주의(原音主義)가 원칙임을 알 수 있다.
‘노틀’을 평북 지역이나 함경도에서는 ‘노토리’라고 한다. 이는 ‘노톨’에 접미사 ‘-이’가 결합된 어형이다. ‘노톨’을 ‘노털’의 제2 음절 모음 ‘ㅓ’가 선행 음절의 모음 ‘ㅗ’에 영향을 받아 변형된 어형으로 본다면, 이로써도 ‘노털’을 표준어로 내세워야 한다는 논리가 선다. 현실적으로 ‘노틀’보다 ‘노털’이 훨씬 많이 쓰이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노틀’은 ‘노톨’과 마찬가지로 ‘노털’에서 변한 어형으로 추정된다.
이제 분명한 것은 ‘노틀’이나 ‘노털’은 중국어 ‘老頭兒’에서 온 말이라는 사실과 이 둘 가운데에서는 ‘노털’이 그 원음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노털’이 중국어 차용어라는 것을 안다면 더 이상 ‘노털’의 ‘털’을 피부에 나는 ‘털’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노털 도사’를 보고 머리털이나 수염이 텁수룩한 노인장을 떠올려서도 안 된다. ‘노털’이 ‘노틀’과 같이 ‘늙은 남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므로, 굳이 ‘노털 도사’를 해석하면 ‘늙고 추레한 남자 도사’가 될 것이다.
2.6. 도루묵
얼마 전, 텔레비전 교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우리말의 어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10여 개 정도의 우리말 어원을 언급한 것 같은데, 그 가운데에 ‘도루묵’에 대한 것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방송 녹화가 끝난 뒤, 사회를 맡았던 여자 아나운서는 물론이고 프로그램을 담당한 프로듀서까지 ‘도루묵’이라는 단어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정말 그 어원이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으냐고 물어 왔다. 자기네들이 알고 있는 어원 설과는 너무나 다르기에 정말 그런 것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방금 이야기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알아 왔고, 그것이 맞다고 여겨 왔는데, 딴소리를 하니 조금은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들이 알고 있는 ‘도루묵’에 대한 어원 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때는 조선 14대 선조(宣祖) 시절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 임금은 피란을 가게 되었다. 피란 떠날 때 먹을 것을 충분히 가지고 간 것도 아니고, 피란지에 맛난 먹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임금이라도 초라한 수라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딱한 소리를 듣고 한 어부가 동네 앞바다에서 잡은 ‘묵’이라는 물고기를 임금께 바쳤다. 선조 임금은 이 물고기를 아주 맛있게 먹고 그 이름을 물어보았다. ‘묵’이라고 하자 그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며 즉석에서 ‘은어(銀魚)’라는 근사한 이름을 하사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환궁한 뒤 피란지에서 맛보았던 ‘은어’가 생각나서 다시 먹어 보았더니 옛날의 그 감칠맛이 아니었다. 그래서 선조 임금은 “에이, 도로(다시) 묵이라 불러라.”라고 하셨다. 이로부터 ‘도로묵’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위의 내용대로라면, ‘도루묵’이라는 단어는 ‘다시 묵이라고 하라’는 말에서 생겨난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어원 설이 아주 널리 퍼져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까지 이러한 내용이 실린 적이 있었다고 하니, 그 교과서를 한 번이라도 읽어 본 학생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이와 같은 어원 설을 철석같이 믿어 왔을 것이다. 국어 교과서가 어떤 책인데 의심을 했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어원 설은 민간에 떠도는 우스개 이야기에 불과하여 전혀 믿을 수 없다.
‘도루묵’이 옛 문헌에 ‘돌목’으로 나오는 것만 보아도 ‘다시’라는 뜻의 ‘도로’와는 무관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돌목’에서 ‘도르목’을 거쳐 얼마든지 ‘도루묵’이 될 수 있어서 ‘도루묵’이 ‘돌목’에서 온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돌목’이라는 말의 흔적이 함남 방언 ‘돌묵어’의 ‘돌묵’에 남아 있다.
‘돌목’은 ‘목’이라는 물고기 이름에 ‘돌’이라는 요소가 덧붙은 구조이다. ‘목’이라는 물고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나온다. 우리 물고기 이름을 보면 ‘돌목’과 같이 ‘돌’이 붙는 것들이 유달리 많다. ‘가자미’에 대한 ‘돌가자미’, ‘농어’에 대한 ‘돌농어’, ‘돔’에 대한 ‘돌돔’, ‘붕어’에 대한 ‘돌붕어’, ‘상어’에 대한 ‘돌상어’, ‘잉어’에 대한 ‘돌잉어’ 등이 모두 그와 같은 것이다.
이들 ‘돌’이 첨가된 물고기를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돌’이 붙지 않은 물고기에 비해 흔하고, 질이 떨어지고, 모양새가 좋지 않다. 이로 보면 ‘돌’이 ‘질이 떨어지는’ 물고기를 지시하기 위해 이용된 변별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 기능은 ‘돌배, 돌나물, 돌사과, 돌복숭아, 돌팥’ 등과 같은 식물 이름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식물 이름에서는 ‘돌’이 ‘질이 떨어지는’이라는 의미 이외에 ‘야생으로 자라는’이라는 의미를 더 갖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돌목’은 ‘목’이라는 물고기 가운데 질이 좀 떨어지는 물고기라고 잠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도루묵’이라는 물고기는 해산물 가운데 품질이 떨어지고, 기름지지도 않으며, 볼품도 없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관용 표현이 생겨난 것만 보아도 ‘도루묵’이 얼마나 하찮은 물고기로 대접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잔뜩 기대를 하고 그물을 건져 보니 좋은 물고기는 하나도 없고 모두 질이 떨어지는 ‘도루묵’뿐이었다는 것이 ‘말짱 도루묵’이라는 표현이 아닌가.
그런데 ‘돌’과 ‘목’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옛 문헌에 ‘목’을 한자 ‘木’이나 ‘目’으로 쓰고 있으나 그렇다고 ‘목’을 한자라고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다. ‘돌’은 ‘石’의 ‘돌’일 가능성이 있다. ‘돌’은 아주 흔하여 하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돌’이 붙은 물고기의 주둥이가 ‘돼지’ 주둥이 형상을 하고 있다고 보아, ‘돌’을 ‘돼지’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신빙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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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가시내’는 중세 국어의 ‘가나’로 소급한다. ‘가나’가 ‘가스나희, 가시나히’를 거쳐 ‘가시내’가 된 것이다. ‘가나’는 ‘갓’과 ‘아’가 속격 조사 ‘’을 매개로 연결된 어형으로 ‘여자 아이’라는 뜻이다. 아울러 ‘가시내’도 ‘여자 아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다.
(2) ‘가시버시’는 ‘가시밧’으로 소급한다. ‘가시밧’에 접미사 ‘-이’가 결합되어 ‘가시바시’가 되고, ‘가시바시’가 모음 변화에 따라 ‘가시버시’가 된 것이다. ‘가시밧’의 ‘가시’는 ‘아내’를 지시하고, ‘밧’은 ‘[外]’의 다른 표기로 ‘남편’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가시버시’는 ‘夫婦’라는 뜻이다.
(3) ‘고릿적’은 ‘고렷적’의 모음 변화형이다. ‘고렷적’의 ‘고려’는 나라 이름 ‘高麗’이고, ‘적’은 ‘때’의 뜻이다. 그러므로 ‘고렷적’은 ‘고려 때’라는 뜻이다.
(4) ‘까치설’은 ‘*아치설’로 소급한다. ‘*아치설’의 ‘아치’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까치’에 유추되어 ‘까치설’이 된 것으로 파악된다. ‘*아치설’은 ‘*아츠설’의 모음 변화형으로, ‘*아츠설’은 ‘아츤설’에서 ‘ㄴ’이 탈락한 어형이거나, ‘*앛설’에 조음소 ‘으’가 개재된 어형으로 파악된다. ‘*아츠설’이 ‘작은설’이라는 뜻이므로 ‘*아치설’이나 ‘까치설’도 그와 같은 의미를 띤다.
(5) ‘노털’은 중국어 ‘老頭兒[[laotour]’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老人’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노털’은 표준어가 아니고 방언이다. 표준어는 ‘노털’보다 원음에서 먼 ‘노틀’이다.
(6) ‘도루묵’의 중세 국어 어형은 ‘돌목’이었다. ‘돌목’에 조음소 ‘으’가 개재된 ‘도르목’의 모음 변화형이 ‘도루묵’이다. ‘돌목’은 ‘목’이라는 물고기 이름에 ‘돌’이 덧붙은 어형이다. ‘돌’은 ‘질이 떨어지는’이라는 의미를 띠어 ‘돌목’은 ‘목’이라는 물고기 가운데 질이 떨어지는 물고기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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