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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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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속에 살다가 보니 그 아니 좋소! |
최래옥ㆍ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나는 옛날이야기를 전공한다.
“아, 그런 것도 다 전공이야? 재미있겠는데. 돈을 벌지는 몰라. 이전부터 전해 오는 말이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데······.”라고 할 것이다.
자. 나는 옛날이야기를 사랑하여 옛날이야기와 함께 살다가 보니까 행복하고 돈도 벌고 출세도 하고 남도 즐겁게 하는 등 일거다득(一擧多得)이다.
이제 옛날이야기하고 우리 국어 생활하고 묶어서 이야기판을 벌이고자 한다.
예화 1. 옛날 옛적
옛날 옛적 갓날 갓적 고려 적,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보니까 길섶에서 연기가 폴폴 나더래. 그래서 웬일인가 하고 가만히 풀을 헤쳐서 보니까, 아 글씨(글쎄), 개구리가 첫아기를 낳고 첫국밥을 끓이고 있더래. 개구리 산모도 미역국을 먹어야 하거든.
맞는 말이다. 개구리도 산모(産母)는, 가만가만, 개구리가 아기를 낳는다고? 올챙이를 낳지, 아니 알을 낳지. 아이구 속을 뻔하였네. 그리고 무슨 아기를 낳아······. 이러지 마라. 그러면 그런가 보다고 믿어야 한다. 그래야 개구리 이야기를 인간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단 말이다.
사실 여부는 각설(却說)하고, “옛날 옛적”과 “갓날 갓적”은 같은 뜻인데 흥미 있게, 기억하기 좋게, 오래전이라는 뜻에서 이런 말로 반복을 한 것이다. 비슷한 말을 하여서 흥취를 돋구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요 아리랑의 어원을 찾아볼 수 있겠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여기서 ‘아리 아리랑’과 ‘스리 스리랑’은 같은 뜻인데 비슷한 말을 반복한 것이다. ‘스리’는 ‘스리다→쓰리다’라면 ‘아리’는 ‘아리다’가 된다. 왜 있지 않은가. ‘아픈 것’과 비슷한 통증 말이다. 그렇다면 ‘쓰리다’와 ‘아리다’를 합쳐서 ‘쓰라리다’라는 말이 되니까 ‘아리 아리랑’이나 ‘쓰리 쓰리랑’이나 다 마음이 쓰라린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전국 아리랑의 노랫말은 겉으로 아리기도 하고 꼭 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그 속 정경(情景)이 쓰라린 것이다.
예화 2. 이애기 이야기
내가 어려서 고향인 전라도 춘향이 고을 남원에서 들은 이야기다.
이전 젊은 새댁이 아기를 낳고 키우는데, 하루는 엄마인 새댁이 아기에게 젖을 먹인 후에 방안에 뉘어 재워 놓고 부엌에서 나와서 빨래를 삶고 있었다. 아기를 만들 줄은 알아도 낳을 줄을 모르는 남편은 모르겠지만, 아기를 낳고 젖 물려 키우는 여자, 애 엄마는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가 되면 젖이 불어서 가슴이 무끈, 묵지근하여진다고 남자인 나는 들었고 보았고 알았다.
“아, 젖 보게, 우리 애기 젖을 먹여야지. 내버려 두면 젖이 많은 사람은 방울방울 떨어진다. 아까워라. 우리 애기 배 고프겠다.”하고 애 엄마가 방에 들어갔다.
“아가 얼른 젖 먹어라. 젖배를 채워야지.”
그런데 아기가 없었다. 방바닥에 자던 아기가 사라졌다.
이럴 수가 있는가? 아, 갓난아기가 잠자는데 어디를 갔다는 말인가? 놀랐다. 앞이 캄캄하였다. 당황하였다. 황당하였다. 앞이 다시금 캄캄하였다.
방바닥에 없으면 애가 날아갔다는 말인가, 천장에 붙었다는 말인가, 시렁에 올라앉았다는 말인가, 이야기에 나오는 아기장수같이 ······. 그래서 위를 보니, 아 글쎄, 아기가 베룽박(‘바람벽(壁)’의 방언) 중간에 딱 붙어 있었다. 원 세상에, 애가 베룽박에 척 달라붙어 있다니, 참 요상하다 하고 가서 찬찬히 보니까는,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그 이 있지 않소, 사람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 고 쪼그만 놈이 애기를 업고는 지금 베룽박을 타고 올라가는 중이 아니겠소?
참 신기하고 놀라워라. 애 엄마는 애를 얼른 베룽박에서 떼어 내려놓고 동네 우물로 달려와서 우물가 사람에게 크게 말하였다.
“들어 보시오. 이런 신기한 일이 어디 있당가요? 이가 애기를 업고 베룽박에 올라가더란 말이요.”
그러니까 듣던 사람은 다들 놀라서 물었다.
“뭐라고? 이가 애기가 베룽박을 ······. 뭐라고?”
“아 글씨(글쎄), 이가 애기를 업고 벽에 올라갔다는 말이오!”
“뭐라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여? 좀 알아듣게, 쉽게 말해 봐.”
“이가 애기 업고 벽에, 이가 애기 업고. 이가 애기. 이 애기 ······.”
“뭐라고? 뭐, 이 애기? 이애기 ······.”
“이애기랑께 그러네, 그렇게 못 알아듣소?”
“이애기 ······”
“그래, 이애기, 이야기요.”
그래서 ‘이애기, 이애기’라는 말이 생겼다. 신기한 것은, 입이 근질근질하여 보고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남들에게 말하는 것이 이애기올시다. 에헴.
이야기의 어원이 이렇게 설화가 되는구나. 신기하여라.
예화 3. 멀어서 탈
조선 중기에 어떤 집, 달성 서씨 집에 중매쟁이가 들어와서,
“어떤 집에, 고성 이씨네 집에 며느릿감으로 둘도 없이 참한 색시가 있는데 어떻소?”
그러니까 서씨 집에서 허락을 하였다.
“그 처녀 한 가지 흠은 멀어서 탈이랍니다.”
그러니까 서씨 집에서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멀면 뭐 어때요. 사람만 참하면 되지 ······.”
그래서 날을 받아 서 도령과 이씨 신부는 혼인식을 올렸다. 이윽고 첫날밤을 치를 참이었다. 그런데 이 신부가 무슨 사연이 있는지 한사코 족도리도 못 벗기게 하고 옷고름도 못 풀게 하였다. 신랑은 이 신부가 혹시 처녀 때 무슨 사고나 저지르지 않았나 하고 의심도 가고 화도 나서 와락 신부 얼굴을 잡고,
“나를 똑바로 보란 말이욧!” 하고 큰 소리를 쳤다.
“흑.” 신부는 한숨을 쉬더니 기절을 하였다.
신부는 멀었다. 눈이 멀었다! 아, 중매쟁이가 사기를 친 것인가? 아니다. 그때 신부가 다 좋은데 멀어서 탈이라고 하였지 않는가? 이것을 신랑 집에서는 거리가 먼 줄로 알았는데, 눈이 먼 줄을 몰랐다.
허 참. 누구를 탓하랴? 그래 신부는 멀었다!
신랑이 기절을 한 신부를 흔들어 깨우고 말하였다.
“신부. 놀라지 마오. 안심하오. 우리는 부부일신이오. 내가 보면 당신도 보는 것이고 당신이 못 보면 나도 못 보는 것이오. 이왕이면 보는 편이 좋지 않소. 그러니까 오늘 자로 당신은 나를 따라 눈을 뜬 것이오. 내가 당신의 눈이 되어 주겠소, 평생을.
나는 그동안 눈이 둘이 있는 줄을 몰랐소. 눈이 하나만 있어도 다 보는데 말이오. 그런데 이제 보니 이 눈 하나는 당신 눈이었구려. 당신 눈을 내가 빌려서 달고 있었구려. 이제 눈 임자가 왔으니 이 눈 하나는 당신에게 돌려줄 테니 밝게 살구려. 우리 한평생 밝게 밝게 삽시다. 안심하고 두 눈 밝게 같이 살아갑시다.”
신부는 또 기절을 하였다. 감격하여서, 처음 본 사람의 바다같이 넓은 마음에서, 활활 타는 불길에서 행복한 넋 놓음 ······.
그때 신랑이 어떻게 나오나 하고 문밖에서 엿듣던 부인네는 이 신랑의 말을 듣고 그들도 기절 직전이었다. 울었다. 소리 없이.
“그래, 잘 살 것이다. 잘 살고 말고, 하늘이 감동하였을 것이니 자손이 삼대 정승이 나올 것이다.” 하고 덕담하고 축원을 하고 갔다.
사실 이 서씨 집에 삼대 정승이 후에 나왔다.
멀어서 탈. 두 눈은 사실 부부가 함께 볼 눈.
나는 이런 전설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서 눈물 흘리기가 어디 쉬운가.
나는 옛날이야기를 듣고 운다. 때로는 분노한다. 때로는 통탄한다. 때로는 한숨을 쉰다. 이야기 속에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다.
예화 4. 시동생님 그것이 ・・・・・・・.
한 사람이 딸을 시집을 보내멘(보내면서) 시집가서는 무슨 말에든지 님 째(字)를 달아서 말하라고 대 줬다(일러 주었다).
이 딸은 시집가서 어린 시동생이 바디(바지)를 입지 않구 다니느꺼니(다니니까)
“시동생님이 부랄(불알)님을 너들님너들님 하십니다.” 하고 말했단다.
이것은 1934년 임석재(任晳宰) 교수가 평안도 선천에서 조사한 이야기다.
그것참. 예절을 차리는 데에 도가 지나쳤도다.
옛날이야기에서는 이래서 웃는다.
예화 5. 바보 각시
넷날(옛날)에 서나(사내)가 옷고름이 떨어데서(떨어져서) 색시보고 옷고름을 달아 달라고 하느꺼니(하니까), 이거를 등에다가 달아 줬다.
남덩(男丁)이 증(화)을 내서,
“옷고름 하나 제대루 달디 못하는 에미나이 같으니······.” 하멘(하면서) 과텠다(나무랐다).
색시레(색시가) 다시 단다고 달았넌데 이번에는 소매에다 달았다.
서나는 이걸 보구 기가 막혀서 허허 허구 웃었다.
그러느꺼니(그러니까) 이 에미나이 하는 말이,
“아, 비위에 좀 틀리문 과티구(나무라고) 비위에 좀 맞으멘 해해 하구, 남덩(男丁)이 맘씨를 고렇게 쓰는 거이 아니야.” 하드래.
이것도 임석재 교수가 1934년 평안도 정주에서 조사를 한 것이다.
바로 설화는 전국 방언의 백화점같이 그 지역 말로 한다. 그래서 우리 국어를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나는 설화를 공부하는 중에, 국어 생활의 참맛에서 살고, 백성의 사상 감정을 다양하게 접하고······. 그렇게 행복하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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