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모토 유키오·일본 레이타쿠 대학교 교수
일본에는 옛 자료들이 다량으로 전존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메이지(明治) 시대에 외교관으로 일본에 온 청국인(淸國人)은, 당시 서양 숭배로 가치관이 바뀌었고, 동양이나 일본의 문물이 절과 신사 · 귀족 · 영주 · 무가 등의 소장에서 시중에 유출되었던 것들 중에는, 중국에서는 이미 상실된 서적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거의 문화가 없다고 여기고 있던 동이(東夷) 일본에, 서명으로만 중국에 전해지고 있었던 수(隋) · 당(唐)의 서적이 잇따라 출현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 자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8세기 중엽 천황이 사용하였던 것이 중심으로 전해지는 나라(奈良) 쇼소인(正倉院)에는, 고대 조선과의 교류를 말해 주는 자료가 남겨져 있다. 예를 들어, 신라의 거문고 · 먹 · 사발 · 고문서 · 종이 등이 확인되지만, 기타 당(唐)에서 가져온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물품 중에는, 고대 삼국 문물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일본에서 ‘조선 회화전’이 개최되고 있는데, 고려 불화나 조선조 전기의 회화들이 한국보다 훨씬 많이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0년쯤 전에 역시 ‘조선 회화전’이 개최되었는데, 그 질이 높아서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번 전시회에서도 몇십 점이 발견되어, 전문가에 의하면 앞으로도 새로운 자료의 출현이 기대된다고 한다.
또한 최근 일본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것에는
『대장경』이 있다. 종래 불교학자들은 세계적으로, 일본의
『다이쇼신슈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에 그 연구 기반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다이쇼신슈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은 기본적으로는 재조
『고려대장경』에 의하면서 일본의 옛 사경(寫經)등을 교감(校勘)에 이용하고 있다.
『고려대장경』은 거란경(契丹經)을 이용한 수기(守其)의 교감을 거쳤지만, 기본적으로는 송(宋)의 칙판개보(勅版開寶)
『대장경』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개보
『대장경』의 계보를 가지는 『다이쇼신슈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을 별다른 의문도 없이 학자들은 이용해 온 것이다. 물론 19세기 말에 발견된 둔황(敦煌)의 사본은 귀하여, 중히 여겨져 왔지만, 전존량은 한정되어, 모두를 커버할 수는 없다. 일본에서 비교적 최근 재인식된 것으로서, 당(唐) 시대에 전래한 옛 사경이 있다. 일본 승려가 장안(長安)에 유학하여,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목숨을 걸고 가져온 것이다. 당인(唐人)의 사경, 혹은 장안(長安)에서의 일본 승려의 사경으로 당대(唐代)의 것은 현존하고 있는 것이 극히 드물지만, 일본에서 새롭게 베껴 쓴 것은 많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헤이안(平安)시대나 가마쿠라(鎌倉)시대(8〜14세기)에 베껴 쓴 것은, 고찰이 많은 간사이(關西)지방을 중심으로 많이 전존하고 있다. 일본 옛 사경의 중요성은 이미 이전부터 언급되어 왔지만, 최근 나고야(名古屋)의 나나츠데라(七ッ寺)에서 재확인된 사경군 중에는, 이미 일서(逸書)로 여겨지고 있던 불서가 출현되어, 구체적으로 그 중요성을 재확인하게 해 주었다. 앞으로의 불교 연구는, 송대(宋代)의
『대장경』에 의거할 것이 아니라, 일본 옛 사경에 대표되는 당대의
『대장경』에 의거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도 일본에서 고서의 보존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면 보존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서적의 보존과 전존에는, 개인의 의욕과 노력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 이상으로 사회 제도가 크게 관계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천황가 · 귀족 · 무가 등은 세습제이며, 문물이 자손 대대로 계승된다. 천황가는 12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무가 세력에 밀려서 실질적인 통치 능력을 잃었지만, 형식적으로는 무가 세력 위에 존재했다. 또한 천황가를 모시던 귀족들은 천황가와 일심동체로 성쇠(盛衰)를 함께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전통 유지에 노력하고, 문물의 보존과 전존에 진력했다. 반면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왕조가 바뀌고, 또한 개인도 과거 제도에 좌우되면서 성쇠가 현저했기 때문에, 문물의 집산(集散)이나 은멸(湮滅)은 격심하고, 일관해서 문물의 전존은 곤란했다.
또한 유학(儒學) 연구에는 크게 나누어, 한대(漢代)이후의 구주(舊注)와 송대 주자(朱子)이후의 신주(新注)가 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주자학의 발흥 이래, 신주를 중히 여기고 구주를 가볍게 보았기 때문에, 구주가 대부분 끊어져 버렸다. 거기에 반해 일본에서는 종래의 구주는 귀족에 의해 계승되고, 나중에 들어온 신주는 17세기 이후를 주로 해서 도쿠가와(德川) 정권의 관학(官學)으로서, 또한 그 영향하에 있는 각지의 영주의 학교에서 신봉되었다. 영주의 학교도 신주뿐만 아니라, 양명학을 따르는 곳도 있었다. 이렇게 일본에서는 학문의 영역 분리라고도 할 수 있는 현상이 있었고, 그 밖에 신토(神道)나 서민 대상의 심학(心學) 등이 있어, 서적도 그에 따라서 다양했다.
일본에 불교는 538년(혹은 552년)에 백제로부터 전해져, 많은 불서가 전래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신라에 유학한 승려들도 많은 불서 등을 가져왔다.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한 후에는 중국으로부터도 제종(諸宗)이 전해져, 각양각색의 종파가 병존했다. 12세기 이후 선종(禪宗)이 전래하여, 주로 무가 계급에 숭배되었지만, 천태종(天台宗) · 진언종(眞言宗)과 같은 교종도 계속해서 신봉되었다. 선종은 원래 ‘불립문자(不立文字)’, 즉 경전(經典)을 공경하지 않고, 좌선(座禪)에 의한 개오(開悟)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경전을 그다지 공경하지 않는다. 조선 왕조에서는 불교를 숭배하지 않고, 게다가 선종만을 인정했기 때문에, 경전의 전존은 극히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일본에는 이와 같은 이유로, 7세기 이후의 제종의 경전이 극히 많이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원효(元曉) · 의상(義湘) · 경흥(憬興) · 현일(玄一) 등의 저서는, 이미 본국에서는 일서가 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승려에 의해 중히 여겨져, 맥맥히 사본으로 전해져 왔다. 그것들 중에는 에도(江戶) 시대 초기, 즉 17세기 전반에 서민의 진출과 함께 출판문화가 개화한 시기에 목판본이 된 것이 있다.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서적 전존에는 매우 적합한 조건을 사회제도로서 유지했기 때문에, 8세기 이후의 넓은 분야에 걸치는 방대한 양의 서적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 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에는 많은 한국 자료가 존재하고 있다. 8세기의 사경도 상당히 많이 현존하고 있어, 그 중에는 수(隋) · 당(唐)의 사경도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보다 더욱 밀접함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전한 백제, 혹은 고구려 · 신라 등의 사경은 최근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바로 몇 해 전에 처음으로 오타니대학(大谷大學)이 소장하고 있는 7세기 사본, 원효선(撰)
『판비량론(判比量論)』의 잔권(殘卷)이 신라의 사경이지 않을까라고 주장되었다. 또한 正倉院이 소장하고 있는 일부합권(一部合卷)
『화엄경(花嚴經)』도 신라 사본이지 않을까라고 주장되고 있다. 중국 · 한국 · 일본의 사경은 용지나 서체 등이 매우 흡사하고, 식별이 매우 곤란하지만, 장래 과학적인 식별 수법이 확립되면, 상당량이 고대 삼국의 물건이라고 인정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1967〜70년에 한글학회와 서울대학교에 유학하여 한국어학을 공부했지만, 고서에 관심이 많아 규장각이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고서를 열람했다. 일본에는 한국의 고서가 많다고 하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귀국 후에는 한국어학 자료를 발굴·연구하면 한국어학에 조금이나마 공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토대학(京都大學)에 돌아와서 복학하여 조사를 시작했다. 학생의 신분으로 충분한 여비도 없었기 때문에 먼 곳에는 가지 못하고 교토대학이나 그 부근에서 조사를 했는데, 어학 관계의 옛 자료는 없었고, 거의 대부분이 경(經) · 사(史) · 자(子) · 집(集)의 4부에 걸친 한문 자료들이었다. 필자는 원래 중국학 지망으로 한문에는 친근감이 있었기에 모든 한국 책을 대상으로 연구를 하면, 한국학뿐만 아니라, 중국학에도 공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생을 걸고 그 작업에 착수했다. 연구를 시작한지 벌써 40년 가까이 되고, 상당히 많은 조사를 마칠 수 있었다. 2006년에는
『日本現存朝鮮本研究 集部』를 출판했다. 경(經) · 사(史) · 자(子)부는 현재 준비 중이다. 이하 필자가 발굴하고, 논문으로 발표한 어학 관계서 중에서 세 개의 예를 들어 논하고자 한다.
1. 『훈몽자회(訓蒙字會)』
본서에 대해서는 필자가 논문을 쓴 것은 아니지만, 천하 고본(天下孤本)을 한국 학회에 소개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 경위에 대해서 언급해 두고 싶다. 1967년 가을 고려대학교 교수 이홍직(李弘稙) 선생님께 욕지를 얻어, 서교동 댁에 자주 찾아뵈었고, 환대를 받았다. 부인께서는 전쟁 전에 나라(奈良) 여자고등사범학교를 나오셨고, 또한 내외분 모두가 일본어에 능통하셨다. 때로는 우메다 히로유키(梅田 博之) 선생님, 오사 마사노리(長 正統) 선생님 내외분과 동행하기도 했다. 귀국 직전 1970년 2월에는 이홍직 선생님 댁에서 환송회를 열어 주셨는데, 술잔을 들고 몹시 흥겨워하시던 것이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해 5월에 타계하셨기 때문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안이 벙벙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 환송회 자리에서 이홍직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 교수(현재 貴姓失念)가 교토(京都) 엔랴쿠 사(延曆寺)의 장서를 담은 에이잔(叡山) 문고에
『훈몽자회(訓蒙字會)』가 있다고 하니, 한번 확인해 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귀국 후 즉시 약속을 실행하지 못하고 부보(訃報)에 접하여, 여름이 되어서야 에이잔(叡山) 문고를 방문할 수 있었다.
『훈몽자회』는 규장각에서 본 적이 있지만, 반엽(半葉)에 4행 4자인 것에 비해, 에이잔(叡山) 문고본은 10행 18자로, 당시는 충분한 서지학적 지식도 없었지만, 그 활자를 조사한 결과 을해자(乙亥字)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홍직 선생님께는 보고드릴 수 없었지만, 모 교수께는 근무하시는 대학으로 편지를 드렸지만, 웬일인지 회신도 없었다. 귀중서일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필자의 서울대학 때의 은사이신 이기문(李基文) 교수께 연락을 드리고, 동시에 문고에 사진 촬영 의뢰를 했다. 그러나 문고 쪽에서는 그것을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 학문적 중요성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랬더니 그 열의가 전해진 것인지, 그러면 엔라쿠 사(延曆寺)의 총책임자인, 집행에나미소켄대승정(執行叡南祖賢大僧正)께 직소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을 하셨다. 다만 소켄시(祖賢師)는 고령이시기도 하며 또한 숙환으로 누워 계시므로, 소장(訴狀)을 올려도 봐 주실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한 가닥의 희망을 걸고,
『훈몽자회』는 천하의 고본이며, 한국의 국어학회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며, 또한 한 ·일 우호를 위해서도 부디 한국에서의 출판을 부탁드리겠다는 취지를 진정했다. 이 일은 10월경이었다고 생각되는데, 한 달 못돼서 에이잔(叡山) 문고로부터 허가가 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필자의 열의가 전해졌다는 것에 실로 기뻤다. 그 직후 1971년 1월 4일 소켄시(祖賢師)는 시적(示寂)하셨다. 그 후 교토(京都)의 고라쿠도(光樂堂)라고 하는 전문 사진관에서 촬영하여 현상한 사진을 이기문 선생님께 보내 드렸다. 그 사진은 이기문 선생님의 배려로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동양학 총서 제1집으로서, 도쿄대학 도서관 소장 4행본 고본
『훈몽자회』와 함께 영인(影印) 출판되었다. 필자에게 있어서는 이미 40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이홍직 선생님 내외분과 에나미소켄(叡南祖賢)대승정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2. 『천자문(千字文)』
필자가 초기에 조사한 곳으로 도쿄(東京)의 다이토큐 기념 문고(大東急記念文庫)가 있다. 일본 · 중국의 귀중서를 많이 소유하고, 한국본은 거의 없었지만, 더러 질이 높은 것이 있었다. 이 문고에서
『천자문』과 『유합(類合)』을 만나게 된 것이다. 1973년에 단국대학 동양학연구소에서, 만력(萬曆) 3년(1575) 광주(光州) 간행본과 동 11년 7월(1583) 석봉봉교서(石峯奉教書)라는 간기를 가진
『천자문』 등, 세 종류의 『천자문』이 영인본으로 간행되었다. 정부 출판물인 관판(官版)이며, 또한 달필가 석봉의 휘호인 석봉계
『천자문』이 권위를 가짐으로써, 조선 왕조 후기에는 널리 보급되어 그 이전에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타 계통의
『천자문』을 구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오늘날 타 계통의
『천자문』은 전해지지 않아, 그 훈에 대해서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기문 교수에 의해서, 도쿄대학 오구라신페이구장서(小倉進平舊藏書) 중에서 광주 간행본이 발견되고, 또한 나이카쿠(內閣)문고에서 인쇄가 좋고 첫 간행본으로 여겨지는 상기의 석봉본이 발견되어 영인하게 된 것이다. 이기문 교수는 광주본은 석봉본과는 다른 계통이며, 또한 상당히 다른 훈을 가지고, 게다가 이해하기 힘든 훈도 있어서 전라도 지방의 방언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하셨다. 여기에 처음으로 훈이 다른
『천자문』의 존재가 확인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부언하자면 이 두 가지 본은 모두 일본에서 발견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초간에 가까운 석봉본이 확인되었지만, 한국에 있는 것은 일상적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많다. 반면 일본에 전해지는 한국본은 중국에 버금가는 선진 문화국, 즉 한국에서 온 것으로 매우 소중하게 보존되어 왔다. 대부분이 완본에 가까운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다이토큐 기념 문고(大東急記念文庫)에서 다른 새로운
『천자문』을 발견했다. 이 다이토큐(大東急)본이 흥미를 더 해 주는 것은, 광주 간행본과 지극히 유사하다는 점이다. 두 책 모두가 반엽 3행에, 1행 4자로 되어 있고, 한자의 틈을 이용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훈과 음이 달아져 있다. 즉 처음부터 훈과 음을 단 것이 아니라,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한자본
『천자문』의 틈을 이용하여 누군가가 훈과 음을 단 것이다. 즉 훈과 음을 달기 시작한 초기의
『천자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책의 훈과 음은 매우 흡사하여 광주본은 광주에서 출판된 것이며, 다이토큐(大東急)본도 역시 광주 부근, 적어도 전라도의 간행본이라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두 책을 잘 비교해 보면, 같은 한자본을 이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주본에서는 훈과 음을 반드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단 것에 반해서, 다이토큐(大東急)본에서는 역방향으로 단 경우가 3군데가 있었고, 또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달았지만 상하 표기도 뒤섞인 경우가 10군데가 보여진다. 이것은 다이토큐(大東急)본 쪽이 표기법이 확립하기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시간적으로도 앞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다이토큐(大東急)본 쪽이 Z음을 보다 많이 유지하고 있고, ‘사이시옷S’에 있어서도 광주본이 S인 것에 반해, 다이토큐(大東急)본에서는 K나 T 등, 옛 표기법을 유지하고 있다. 어학적 견지에서 보아도 다이토큐(大東急)본이 앞서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다이토큐(大東急)본의 성립은 언제일까? 두 책 모두 마멸(摩滅)이 현저하지만, 다이토큐(大東急)본 쪽이 그 정도가 현저하다. 게다가 다이토큐(大東急)본의 오각(誤刻)을 보면, K를 P로, T를 M으로, P를 N으로, NG를 M으로, NG를 S로, NG를 Z로, R을 Th로, Ph를 K로 잘못 새겨진 것이 많고, 오각의 수는 광주본을 훨씬 능가한다. 필자는 양서 모두를 복각(復刻)본, 즉 선행(先行)본을 해체해서 판목에 붙여서 새긴 것이라고 본다. 다이토큐(大東急)본의 저본(底本)은, 위와 같은 오각이 생길 정도로 마멸했었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천자문』은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인출 빈도가 높고, 따라서 마멸도가 현저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이토큐(大東急)본은 그 마멸도로 보아 상당히 장기간에 걸쳐 계속해서 인쇄되어 온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점들로 미루어, 전라도 지방에서
『천자문』에 음훈이 붙여진 것은 한글 창제 약 50년 후, 즉 15세기 말경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두 책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훈이 있다. 이것은 전라도 지방의 방언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대 일본의 역사서인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누가 언제 달았는지 불분명하지만, ‘王’에 ‘KISI’라고 읽는 법이 적혀 있다. 그 밖에 인명 · 지명에도 읽는 법이 적혀 있지만 이것은 백제 말이 아닐까라고 지적되어 왔다. 그런데 위의 두 책은 모두 전라도의 간행본, 즉 백제 계통을 이어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들에 있어서 ‘王’은 ‘긔’라고 훈독되고 있어, 이기문 교수도 지적하신 바와 같이, 이것은 ‘KISI’에 해당한다고도 해석된다. 두 책 모두의
『천자문』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흥미 있는 어례(語例)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필자는 또다시 일본의 쇼료부(書陵部)에서도 다른
『천자문』을 찾아냈다. 이것은 19세기 전반의 간행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새로운 것이지만, 훈을 달리한다. 훈 자체에 방언적 요소나 고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훈을 선택하는 방법이 다른 것이다. 여기서
『천자문』의 훈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천자문』은 기본적으로는 4자 1구(1字1句)로 되어, 2구가 전고(典故)를 근거로 한 대구(對句)로 되어 있다. 따라서 2구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각 문자는 일정한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일본의
『천자문』 읽는 법은 문장으로 읽기 때문에, 각 문자의 훈은 한 가지로밖에 읽을 수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문장으로는 읽지 않고 문자 단위로 읽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읽는 법이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만면락(背邙面洛)’이라는 한 귀절을 보면, 일본에서는 문장의 뜻에 부합하여 ‘邙山に背にし、洛水に面する(망산을 등지고 낙수를 면하다)’라고 읽기 때문에, ‘背’자는 ‘背(등지다)’라고 동사로밖에는 읽을 수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문장의 뜻에 관계없이 읽기 때문에, ‘背’자는 ‘등 뒤로 하다· 뒤· 등지다・ 도망치다· 물러나다· 암송하다· 양(陽)· 간(艮)· 무리’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이 중에서 어느 것으로 읽어도 된다. 즉 한국에서는
『천자문』의 각 글자는 자의적으로 훈독할 수 있는 것이다. 계통이 다른
『천자문』의 훈이 각각 다른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물론 실제로 별로 사용하지 않는 훈을 택하여 읽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그 훈을 선택하고 결정했던 것일까? 필자는 그 지역에서 존경받는 대유석학(大儒碩學)이 음훈을 선택하고, 선택된 음훈이 전통적으로 그 지역에 계승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천자문』이 한국에 전래된 직후부터 각 지역의 학파는 그것을 계승해 온 것이다. 물론 아주 긴 세월 동안에 음운 변화나 어휘 변천의 영향을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446년에 한글이 창제되자마자, 서울말이 한글 혹은 언해서(諺解書)를 통해서 지방에까지 영향을 주고,
『천자문』의 훈에 변화를 초래했을 수도 있다. 광주 간행본이나 다이토큐(大東急)본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전라도 방언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이해하기 힘든 훈이 10군데 남짓, 즉 1% 정도인 것으로 보면 이미 서울 방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와 긴밀히 결합한 훈은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쇼로부(書陵部)본도 어느 지역인지는 한정할 수 없지만, 어느 한 지역의 전통을 지키며 전해져 온
『천자문』이라고 생각된다. 석봉 『천자문』이 선조 16년(1583)에 간행되자마자 전라도에서도 전래의
『천자문』은 상실된 것으로 보이며, 광주본 및 다이토큐(大東急)본은 임진왜란 때에 일본에 전래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 가지 더 부언하자면, 그 후 경상도에서 만력(萬曆) 11년 7월 「박승임내사(朴承任內賜)본」이 발견되었고, 계속해서 필자도 일본 세이키도(成簣堂) 문고에서 임진왜란 전의 「양안원구장(養安院舊藏)」 한 권을 발견했다. 이 두 가지 본은 위에서 언급한 다이카쿠(內閣) 문고본과 표기법에 있어서는 다소 다른 점이 있지만 훈 자체는 별로 다르지 않다.
3. 『유합(類合)』
한국에서는 동몽서(童蒙書)로서 첫째로 뽑히는 것이
『천자문』이며, 다음이 『유합』이었다.
『유합』에 대해서는, 유희춘(柳希春) 편
『신증유합(新增類合)』 (1576序)에서는, 누구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조선에서 만들어졌고 수록 문자가 적절하여 오래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필요한 문자가 모자라서 보수하여 3,000자로 늘려 한글 훈과 음을 달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으로 그 이전에 한자만으로 이루어진
『유합』이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12년(1517) 4월 무오조(戊午條)에 세자가
『천자문』과 『유합』을 암송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편자에 대해서는 조선조 전기의 학자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라고 말하고들 있지만 확증은 없다. 유희춘이 말하는 임진왜란 전의 한자본
『유합』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이후의
『유합』은 여러 가지 알려져 있다. 안병희(安秉禧) 교수에 의하면, 모두 17세기 이후의 것으로 10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들은 반엽마다 행수는 다르지만, 수록 글자 수는 모두 1,512자이며, 1행은 모두 6자, 각 글자 아래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한글에 의한 훈과 음이 달아져 있다. 필자는 「선암사(仙巖寺) 간행본」 · 「칠장사(七長寺) 간행본」 · 「송광사(松広寺) 간행본」 · 「무교(武橋) 간행본」 · 「Siebold본」 · 그 외 한 권의 간행본을 검토한 적이 있다. 임진왜란 전의 한자본이 없었기 때문에 유희춘편
『신증유합』이 그전의 한자본에다가 어떤 문자를 보수했는지 분명하지 않고, 또한 17세기 이후의 여러 가지의
『유합』이 임진왜란 전의 한자본 『유합』을 계승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필자는 상기와 같이, 다이토큐(大東急)기념 문고에서
『유합』의 한자 고간본을 찾아낸 것이다. 동 문고의 목록에는
『삼자경(三字經)』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필자가 조사 연구한 결과 임진왜란 전
『유합』인 것이 확인되었다. 내광(內框) 19.7 × 13.0센티로 비교적 소형이고, 인면여정(印面麗正), 상하중흑구(上下中黑口) 반엽 4행 6자로, 판식이나 종이의 질로 보아 명종(明宗) 무렵의 간행본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전후로 낙장이 있다. 17세기 이후의
『유합』과 대조해 보면 통음(通音) 등에 의한 문자의 교체가 확인되지만, 전체적으로는 일치한다. 따라서 낙장부는 제1장 앞면 ・ 31장 ・ 32장 앞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다이토큐(大東急)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한자본
『유합』은 한글 표기가 없기 때문에 훈의 연구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 출현에 의해서 유희춘이 어느 글자를 어떠한 의도하에 보수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17세기 이후의
『유합』이 한자본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는 것도 밝혀졌다.
본서가 한국에서 만들어진 책인지 아닌지는 종래 확정되지 않았다. 한자본
『유합』에 ‘부부남매(夫妻娚妹)'라는 한 구절이 있는데, 중국에서 ‘娚'자는
『集韻』(1067)에 ‘어성(語声)'을 나타내는 문자로서, 여기에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 그러나 이 ‘娚'자는 한국에서는 중국과 같은 한자를 이용하면서도 ‘자매가 남자 형제를 칭하는 말'로서 이미 신라 「개령갈항사조탑기(開寧葛項寺造塔記)」(758)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娚'자의 용법은 한국에서만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유합』은 한국에서 성립된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단지 선자가 서거정인지 아닌지는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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