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경·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1. 삶을 견디게 하는 힘, 사랑의 속삭임
현대인의 삶은 각박하다. 점점 살기가 복잡하고 힘들어진다고들 한다. 주어진 일과를 아무 생각 없이 쫓아가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향해 가는지 돌아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까마득할 때가 있다. 무언가 열심히 한 것 같았는데 별달리 달라진 것이 없다는 깨달음 앞에서 삶이란 이런 것인가 하는 허망함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서 기억 저편에서 떠오르는 따뜻한 장면이 한두 가지 있다면, 잠시 숨을 고르며 쉬어갈 수 있으리라. 유년의 기억이든,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이든, 따뜻함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자신을 감싸주는 것을 감지할 때, 힘겹거나 지루한 삶의 갈피에서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최윤의 소설 『속삭임, 속삭임』(1993)은 어린 시절 빚진 사랑에 대해 토해 내는 이야기이다. 중년에 이른 여성 주인공 ‘나’가 유년 시절 자신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었던 인물을 회상하는데, 그는 그녀가 태어날 무렵 그녀 집에 들어온 이로 ‘친척 아재비’로 불렸던 사람이다. 과수원을 일구며 살아가던 그녀 부모가 산 밑에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하고 돌봐 준 뒤 먼 친척으로 알려지며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석방된 반공 포로라는 말이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눈에 활짝 지어지는 미소’와 ‘마을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해 주는’ 성실함으로 ‘포로’라는 단어의 ‘음험한 분위기’는 곧 잊힌다.
그는 병치레가 많은 아버지와 고된 일로 바쁜 어머니 대신 ‘나’를 돌봐 주고 친구처럼 놀아 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는 등 ‘나’를 위해 많은 사랑을 베푼다. 그 덕에 어린 그녀는 가난함을 잊을 정도로 행복한 유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의 무릎에서 재롱을 피웠으며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그에게서 한글을 익혔고, 족히 5리는 되는 국민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지금 내가 딸애에게 하듯이 옆에 앉혀 놓고 숙제를 돌보아 주는 것에서부터, 더듬거리는 느린 말투로 일부러 영감 흉내를 내면서 해 주는 귀신 얘기, 도깨비 얘기까지. 과수원은 그의 과수원이었을 정도로 모든 일이 그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학교만 파하면 그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나는 꽃씨 심는 법도 익히고 나무의 쓸데없는 가지 치는 법도 배웠다. 여름방학이면 얇은 판자를 엮어서 내가 들어가 앉아 놀 수 있는 나무 위의 놀이 집도 그가 만들어 주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어머니가 북에 두고 온 할아버지 할머니 생신상 차리는 데 쓰려고 따로 아껴 놓은 곡식을 그가 슬쩍 광에서 꺼내서 우리끼리 몰래 천렵도 갔다. 가난의 기억이 완전히 삭제될 정도로 두고두고 생각해도 맛나는 사건들이었다.
아재비가 베푼 일들 중 백미는 호수라고 할 수 있다. 장마로 파인 큰 웅덩이를 사흘 낮 사흘 밤을 파 대고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물길을 잡아 호수를 만들어 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조금 큰 웅덩이에 불과할지라도 그녀에게 이 호수는 ‘은근한 자랑거리’이자 ‘서울내기들에게 억울한 놀림을 당할 때마다 내심으로 부르짖을 수 있는 유일한 조커 패’로 작용한다. 이처럼 아재비의 사랑으로 행복했던 유년 시절은 그녀의 삶 내내 든든한 조력자의 역할을 한다.
아재비는 또 아버지와도 친형제처럼 지내는데, 이들의 교감은 사상이나 신분을 초월한 것이다. 고향 황해도에서 단신으로 남하한 아버지는 반공 강연을 하기도 한 사람으로서 남로당 열성 간부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아재비와는 사상적으로 적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친형제 이상으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은 눈빛 하나만으로도 알아챌 정도”였으며 늘 할말이 많아 끝도 없는 얘기를 나누곤 한다.
이는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예로서 “상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그 이전 혹은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곳에 그들의 삶과 함께 위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사상이나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마음의 교감, 사랑과 이해가 있기에 가능함을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실제로는 황량한 과수원이 그녀의 기억 속에서 아름다운 장소로 빛나고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아재비가 사랑으로 만들어 준 호수가 있고 아재비와 아버지가 나누는 다정한 속삭임이 사방에 가득한 곳이므로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다우며 평화로운 풍경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2. 악취 나는 세상을 향한 방취 살포제, 시인의 언어와 웃음
사랑의 추억이 깃든 사물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다. “창가에 놓고 아재비 생각도 해여”라며 아재비가 건네 준 채송화 화분은 단순한 화분이 아니라 아재비의 마음이다. 주인공이 듣기만 해도 ‘광증’이 동하는 ‘과수원’, ‘호수’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로, 과수원이나 호수를 지칭하는 객관적 지시어가 아니라 호수를 만들어 준 아재비의 따뜻한 마음을 연상시키는 언어가 된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며 의미 해독이 중요한, 딱딱한 언어라고 한다면, 위의 언어는 자신의 느낌과 마음의 울림을 전달하므로 부드럽다. 전자가 알다/모르다, 이해하다/이해하지 못하다의 반응이 중요하다면, 후자는 느끼고 감동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곧 ‘마음의 흐름을 확인하는 것’(「당신의 물제비」)이 중요한 것이다.
서울로 유학 온 주인공에게 보내온 편지는 이 차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아버지가 편찮으시니 주말에 집에 오너라. 올 때는 이런저런 약을 사 오너라.”라고 쓴 부모님의 편지에 비해, 아재비의 편지는 “송이가 없으니 풀포기가 다 기운이 없이 시들하다.”로 대조적이다. 부모님의 편지가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면 아재비의 것은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아재비는 시인이야.”라고 중얼거리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주인공은 아재비의 것을 마음에 들어 하는데, 이를 일상어와 구별되는 시인의 언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언어는 악취 나는 세상을 향긋하게 만들어 주는 힘을 갖는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늘 전쟁으로 “아무리 방으로 숨어들고 아무리 방패를 꺼내 들어도 사방의 문틈으로 전쟁의 냄새는 새어 들어”온다. 이 고약한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는 시인의 언어, 또는 딸아이와 같이 순수한 사람의 웃음이 필요하다.
이애, 너는 아무래도 시인이 되어야겠다. 미운 단어를 아름답게 만드는, 악취에 향기를 주는, 입을 벌리면 음악이 나오는 ------ 너는 아주 고전적인 시인이어야겠다. 발가락, 땅콩, 코딱지 같은 단어를 예쁘게 발음할 줄 아는 너. 처음 글을 배울 때 네 성인 ‘박’자를 삐뚤삐뚤하게 써 놓고 글자가 웃고 있다고 말하던 너. 이 먼 과수원에서의 오수의 나른한 틈새에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이 비릿한 냄새를 이애, 빨리 지워다오. 아주 강력한, 아주 향긋한 방취 살포제인 너의 웃음.
“모든 딱딱하고 근육질이 박인 단어에, 공기 같은 가벼움과 부드러움을 주고 모든 악취 나는 단어에 지상의 들꽃 이름을 대신해” 준다면 전쟁의 고약한 냄새가 사라질 것이며 이는 시인에 의해서 가능하다. “미운 단어를 아름답게 만드는, 악취에 향기를 주는, 입을 벌리면 음악이 나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곧 시인이란 싸움이나 전쟁과 같은 갈등과 대립을 향기로운 말들로 순화시키며 “딱딱하고 질기고 직선으로 세상을 자르는” 고약한 냄새를 가벼움과 부드러움, 향기로 바꿀 수 있는 자이다.
3. 삶, 해독할 수 없는 암호
일상적 인물과는 다른 주인공에게 세상은 불안한 곳이다. 갈라진 땅 사이로 무서운 구멍이 드러나 있는 것을 보며 이 불안한 세상에 아이를 데려온 것이 겁나 안절부절못한다. 그녀는 8살짜리 딸아이에 대해서도 보통 엄마들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말을 잘 듣지 않고 고무줄놀이에 발이 부르터 들어올 때”, 그녀의 “부당한 처사를 받아들이지 못해 다섯 시간이 넘도록 돼지 멱따는 소리로 울 때”, “용서해 달라고 끝내 빌지 않을 때”, “학교 가기 싫다고 떼를 부리면서 장난감을 모두 창문 밖으로 던질 때”와 같이 ‘미친 짓’ 할 때를 좋아하고 아이가 태어날 때 “분홍빛 커튼이 쳐 지고 알맞은 습기에 앙증맞은 침대가” 놓인 방이 아니라 ‘버려진 과수원의 황량함’을 보기 바란다. 그것은 “일찍이 황무지를 본 사람은 삶에 대해 아주 부끄러운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이며 ‘삶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는 그녀가 ‘아픈 사람의 마음’을 본다든가 나이나 사상, 신분, 계층 등 흔히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기준들이 무의미함을 알게 된 것과 연관된다. 아버지와 아재비의 교감을 통해서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 존재함을 보았고 아재비의 비극적 삶에서 삶의 불가해성을 엿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은 13세 여름방학부터 10여 년에 걸쳐 모두 다섯 번 아재비의 편지 심부름을 하는데, 아무도 몰래 그의 가족이 사는 집에 가서 편지를 던져 넣고 오는 것이다. ‘흐르는 냇물에 달이 뜰 틈이 없네.’, 암호 문자 같은 문장 하나만 씌어져 있는 편지들은 “그들의 삶의 등대지기 노릇을 멀리서나마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미미한 신호, 절망적인 신호”였던 것이다. 지척에 있어도 만날 수 없는 가족, 아픔을 누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 오십 중반에 세상을 뜬 아재비의 생애는 비극적으로 소모된 삶을 보여 준다. 아재비의 아픔 앞에서 속수무책의 당황함을 맛보았던 그녀는 ‘위로되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삶의 시대착오적 속성이나 불가항력적 측면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세속적 가치에 안주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숨어서 우는 사람의 눈물을 볼 줄’ 아는 자,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사람’이 있음을 아는 자로 살아간다.
아재비의 삶처럼 간단히 해독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사상과 무관한 아재비의 깊은 사랑과 상식의 틀을 넘어서는 아버지와 아재비의 교감, 그리고 시인이나 순수한 아이의 마음이 존재하는 한, 삶에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부드럽고 가벼운, 마음을 나누는 말들이 물이 되어 흐른다면, 모든 것을 가르는 딱딱한 경계가 지워지고 상식의 틀을 넘어서는 세상, 전쟁이 사라지고 화해와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 되리라는 꿈을.
궁극적으로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하여 드러내고자 한 것은 마음을 나누는 말이 이 세상의 딱딱한 틀을 없애고 전쟁과 갈등을 무화시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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