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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의 원두막과 파꽃 핀 여름 풍경
-박용래의 「건들 장마」와 문정희의 「파꽃길」-

김현자·문학평론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1. 풀 내음 청량한 시인의 여름 

  여름이다. 묽고 은은한 봄의 끄트머리로부터 한껏 멀어져, 짙어지고 깊어지기 위한 날들이다. 유독 사람이 사는 땅이 오밀조밀한 풍광으로 가득한 우리나라는 계절마다 다른 얼굴로 새로운 기쁨을 전해 준다. 
  물기 오른 봄날의 아스라함이 생명을 깨운다면, 여름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그 생명을 힘껏 자라게 한다. 해마다 무더위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달아오른 아스팔트에 도시의 열기가 숨이 막혀 올수록 더더욱 사무치게 그리운 ‘여름’의 풍경이 있다. 에어컨 아래서 땀을 식히는 여름날이 아니라, 신록이 우거진 하늘 아래서 뜨겁게 살을 부비며 익어가고, 때마침 내리는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에 맨발로 물장구를 치는 여름날이다. 
  시인들은 짙푸른 생명으로 이글대는 여름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누구보다도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그들은 기꺼이 온몸으로 펜이 된다. 뜨겁고도 끈끈한 우주의 열기를 직접 감각하며, 따가운 땡볕 아래 익어가는 열매들과 넘실대는 바다를 독자들에게 펼쳐 보인다. 그리고 시인들은 생의 압력과 열기를 견디며 뜨겁게 달구어진 몸으로 어린 생명들을 감싸 안는 계절의 숙명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다. 



2. 파꽃 냄새와 기억의 바다 

흰 파꽃이 피는 여름이 되면
바닷가 명교리에 가보리라
조금만 스치어도
슬픔처럼 코끝을 건드리는
파꽃냄새를 따라가면
이 세상 끝에 닿는다는 명교리에 가서
내 이름 부르는 바다를 만나리라
어린 시절 오줌을 싸서
소금 받으러 가다 넘어진 바위
내 수치와 슬픔 위에
은빛 소금을 뿌리던 외가 식구들
이제는 모두 돌아가고 없지만
서걱이는 모래톱 속에 손을 넣으면
차가운 눈물샘은 여전히 솟으리니
조금만 스치어도
슬픔처럼 코끝을 건드리는
파꽃냄새를 따라가서
그리운 키를 쓰고 소금을 받으리라

넘실대는 여름바다에
푸른 추억의 날개를 달아주리라

- 문정희, 「파꽃길」 전문                                


  파꽃은 꽃치고는 밋밋하고도 뭉툭하다. 흰빛도 회색빛도 아닌 어중간한 색깔로 밋밋한가 싶기도 한데,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 「파꽃길」은 슬픔처럼 코끝을 건드리는 파꽃을 통해 기억을 불러들인다. 바다의 짠맛과 파의 매운맛을, ‘아린’ 향기를 공통항으로 삼아 연결 짓는 시인의 솜씨는 “조금만 스치어도 슬픔처럼 코끝을 건드리는 파꽃냄새”의 의미를 복잡한 설명 없이 감각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시는 파꽃 핀 길을 따라 다채로운 감각을 펼쳐 내는데, 이러한 감각의 육화는 시간을 온몸으로 전이시킨다. 무자비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걸음을 붙들어, 아스라한 기억을 불러내는 시도는 ‘은빛 소금’과 ‘푸른 추억의 날개’와 같이 청량하고 반짝거리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된다. 또한 ‘서걱이는 모래톱’, ‘차가운 눈물샘’의 마음 시린 촉각들을 통해, 이 풍경은 기억을 만지고 온 감각을 다해 ‘내 이름을 부르며’ 유년의 시간을 현재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더해 “명교리”라는 마을은 시인의 고향인 동시에, 우리 모두가 이상적으로 떠올리는 무의식적 공간이다. “명교리”라는 직접적인 지명이 “이 세상 끝에 닿는다”는 의미를 거쳐, 읽는 우리의 고향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것은 고유 명사가 보통 명사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름인 ‘명교리’는 양성모음 및 유음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음상으로 시인이 펼쳐 보이는 풍경이 어떠한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파꽃길」은 소리와 의미가 치밀하게 결합하여 결 고운 언어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부드러운 조율은 감각적인 시어의 운 맞춤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서걱이는’과 ‘차가운’의 시어가 주는 서글픈 느낌은 모음의 운 맞춤을 통해 더욱 뚜렷하게 각인된다. 또한 ‘은빛-외가-이제’와 ‘수치-슬픔-소금’의 자음의 운 맞춤은 이들을 관통하는 일련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며 은은한 의미의 울림을 자아내고 있다. 
  돌아갈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슬픔을 자극한다. 그러나 시인의 언어는 파꽃을 통해 여름을 추억하고, 그 추억의 무게가 너무 커서 조금만 스쳐도 파 내음이 눈을 아리게 해, 독자 스스로도 언어화할 수 없었던 그리움을 쏟아내게 한다. 
  시인이 불러오는 유년의 추억은 뜻밖에도 오줌 싸고 소금을 얻으러 가는 사소한 일상의 풍경이다.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니지만, 어린 날의 기억 속에서는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이 바로 오줌 싸고 소금 얻으러 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수치와 슬픔”이라는 시어 앞에서 독자는 슬며시 웃음을 베어 물게 된다. 오줌 싼 옷의 소금기와 창피함으로 얼룩진 눈물의 짠맛, 그리고 바다의 짠맛은 외가 식구들이 뿌리는 “은빛 소금”으로 집중된다. 이 “은빛”은 바다 위에 비치는 햇살의 반짝임이자 소금의 흰빛, 그리고 현재의 시인이 바라보는 파꽃의 흰빛으로 이어지며 시 전체를 짜임새 있게 연결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흰빛 서걱이는 모래톱에 찬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리운 키를 쓰고 소금을 받으리라.”라고 노래한다.
  현실의 논리는 과거의 시공간이 현재와는 단절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문법을 뛰어 넘는 시의 논리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독자에게 추억을 통해 그리운 풍광을 더욱 아름답게 그려낸다. “넘실대는 여름바다에 푸른 추억의 날개를 달아주리라.”라고 이야기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더욱 아름다운 것은, 찝찔한 땀조차 은빛 소금으로 치환하는, 지난한 일상사와 별 것 아니던 기억이 소중하게 바뀌는 때문일 것이다. 



3. 장맛비 긋던 유년의 원두막

건들 장마 해거름 갈잎 버들붕어 꾸러미 들고 원두막 처마밑 잠시 섰는 아이 함초롬 젖어 말아올린 베잠방이 알종아리 총총 걸음 건들 장마 상치 상치 꽃대궁 白髮의 꽃대궁 아욱 아욱 꽃대궁 백발의 꽃대궁 고향 사람들 바자울 세우고 외넝쿨 거두고.

-박용래, 「건들 장마」 전문


  시인 박용래는 도회적이고 인공적인 소재보다 자연적인 소재, 그리고 새나 바람, 풀꽃, 풀벌레 등의 자연적 소재를 통해 농촌의 맑고 평화로운 풍경을 보여 주며 독자를 그리운 유년의 세계로 이끈다. 그의 시에서 독자들은 사계절 불어오는 바람이 똑같은 바람이 아니라 앵두 바람, 살구 바람, 아카시아, 밤꽃, 싸리꽃 바람 등 꽃피는 계절마다 제각기 달라지는 바람의 이름이며 계절마다 달라지는 바람의 무게를 가늠하게 된다. 
  특별히 그의 시에서 독자들은 섬세한 계절 의식과 기후에 대한 감각을 엿볼 수 있다. 물리적이고 수학적인 시간의 직선적인 흐름은 그의 시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적인 시간으로 탈바꿈한다. 그는 꽃이 피고 지는 시기, 그리고 그 계절의 기후에 어울리는 자연물의 변화를 통해 시간의 변화를 감지한다. 피고 지는 꽃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끌어오는 그의 예민한 감각은, 독자로 하여금 알게 모르게 계절의 변화에 반응하는 우리네 일상을 떠올리게 하며 공감하게 만든다. 계절별로 피는 꽃과 먹을거리를 보며 달마다 깃든 명절을 준비하고, 햇살의 정도를 보아 벼를 심고 기르며, 추수 이후 겨울나기 김장에 바쁜, 그리고 얼굴에 다가오는 바람의 습도를 보고 기후를 예측하는 일상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삶의 양식이, 그의 시에서 때로는 흥겹게 때로는 애잔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자연에 고스란히 녹은 농가의 풍경을 천진하고 흥겹게 그려내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그려지는 풍경에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건들 장마」는 갑자기 오는 비를 피하려 원두막 처마 밑에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여름 풍경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소박하고 담백한 시어가 간결한 리듬에 실려 몽롱하면서도 애상적인 여름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다. ‘건들 장마’는 ‘장마가 계속해서 내리지 않고 잠깐잠깐 해가 비추며 멈추었다 내리는 비’를 말한다. 우리는 싱겁고 줏대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 혹은 괜히 딴죽을 걸며 체신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일컬어 ‘건들거린다’고 한다. 이렇듯 사람의 행위와, 여기에서 유추된 장마의 특징을 합성해 나온 ‘건들 장마’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상호 침투 하면서 제목에서부터 친근하게 다가오고 있다. 장마가 주는 지루함이나 답답함이 ‘건들’과 합쳐져 이 시의 분위기는 어둡지 않고 밝고 낙천적이다. 이 낙천적인 분위기는 시어의 반복과 ‘ㅇ’ 음상의 사용, 그리고 소재로 등장하는 사물의 모습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음상과 시어의 반복이 주는 리듬감과, 한순간에 포착된 장면을 한 문장처럼 표현함으로써 얻어지는 긴장감이 시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하겠다. 
  갑작스럽게 비를 만나 원두막 밑에 들어가 선 아이의 모습은 정겹기만 하다. 온종일 물속을 들락날락하며 신 나게 놀다가 해 질 무렵이면 주섬주섬 갈잎에 버들붕어 꾸러미를 들고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에서 작열하는 아스팔트 위에 뛰어놀 공간조차 없이 학원 버스를 기다리는 요즈음의 아이들이 갖지 못하는 여유를 읽어낼 수 있다. 아이는 발을 동동대거나 심통을 부리기보다 그저 잠시 비를 그을 뿐이다. 이때 걷어 올린 베잠방이와 드러난 알종아리는 근심 없이 뛰어놀던 우리 유년의 추억을 불러오며 비에 젖은 몸에서 나는 땀 냄새, 갈잎의 냄새, 버들붕어가 환기하는 물과 식물의 이미지를 수채화처럼 펼쳐 보인다. 
  또한 뜨거운 햇빛과 소낙비 속에서 만물이 익는다. 여름의 숙명이다. 푹푹 찌는 더위와 열기를 안으로 받아들여 과일이 익어가고, 천둥 · 번개가 칠 때면 더욱 깊은 단맛이 스며든다. 열매가 자라는 동안, 알종아리 아이도 순정(純正)하게 자란다. “고향 사람들 바자울 세우고 외넝쿨 거두고”라는 구절을 통해, 시인은 어린 아이의 주변을 둘러싼 농촌 풍경을 담담하게 담아낸다. 내리는 비가 단순히 비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과 풍경을 끌어안는 여유와 흥겨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박용래는 자연에서 낙천적인 흥취를 노래하며, 자연 속에 자신을 용해시키는 평화로운 동일화를 지향한다. 단순한 비가 아닌 ‘건들 장마'라는 구체적인 기상어를 통해, 시인은 사람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소박한 자연의 풍경을 그려낸다. 자연의 사물들과 인간사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여유롭고도 유연한 흥취는 시인의 낙천적인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시적 지향은 자연과의 완전하고도 평화로운 동일화를 추구하며, 사람과 인간의 융화와 화합을 그려내고 있다.



4. 푸르른 추억의 날개 

  여름의 기억, 그 끝에는 넘실거리는 바다가 있고 외갓집이 있고 유년의 원두막이 있다. 시간의 두께를 일순에 뚫고 살아나는 푸르른 빛, 파꽃 냄새처럼 알싸하게 아려 오는 시원의 감각들. 베잠방이 알종아리에 눈물로 범벅이 된 어린 생명이 햇살을 가르며 줄달음을 친다. 아리도록 그리운 태양의 계절, 생명의 시간. 
  몇 줄의 시는 일상은 건너서, 잊힌 시간과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푸른 날개를 달아준다. 뜨겁고 지루한 여름이 일순 푸른 날개를 달고 솟구쳐 오른다. 여름의 뜨거운 에너지가 시로 변전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삶의 결 또한 새롭게 되살아난다. 정말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