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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자: 김민수(고려대 명예교수 / 동숭학술재단 이사장)
질문자: 이상혁(한성대 교수)
때: 2009년 5월 26일(화)
곳: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김민수 교수 댁 |
이상혁: 선생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김민수: 네,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상혁: 최근에 어떻게 건강관리를 하시는지 간단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민수: 역시 나이가 많으니까 건강이 좋지 않아요. 그런데 걷기 운동이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매일 오전에 한 번 걷기 운동을 하다가 요즘에는 오후에도 한 번 더 걸어서 하루에 두 번 걷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신문도 스크랩하려고 모으다 보니 대략 1시간 정도를 걷네요. 그런데 그 정도 걸으니까 훨씬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제 나이가 올해 84세인데 대개 나이를 먹으면 변비가 생겨서 아주 고생입니다. 그런데 신문 스크랩을 하다 보니까 고구마를 먹으라는 기사가 있어서 고구마를 매일 먹는데요, 고구마 잎을 먹는 것이 더 좋다고 해서 그 잎을 말려 가루로 만들어서 고구마와 같이 끼니마다 먹습니다. 그랬더니 변비도 없어지고......(웃음) 아마도 변을 잘 보니까 노폐물이라든지 기타 필요 없는 것들을 그때그때 배설해서 건강이 훨씬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상혁: 제가 뵙기에도 건강해 보이십니다. 그럼 우선 일제 강점기 때에 선생님 학창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김민수: 네. 일제강점기 때에 가장 문제였던 것이 소위 일본어 상용이었지요. 그러니까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들에게 일본어와 일본 말만 쓰라는 뜻이지요. 항상 일본 말을 쓰라는 것이 운동의 정도를 넘어 지시와 강요의 단계까지 갔습니다. 그것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어 버려 완전히 동화하려는 그들의 정책이었어요. 우리말을 하다가 들킬 경우 벌을 받았지요. 아마 그 바람에 일본 말은 빨리 배웠을지 모르겠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건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일화가 하나 있어요. 중학교 때에 의무적으로 듣는 교련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일제강점기 때인 만큼 교련 선생님은 일본 사람, 일본 군인이었지요. 하루는 교련 시간이 되어서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느닷없이 학교 교정 숲 속에서 별안간 군인이 튀어나왔어요. 학생들 중에 내가 나서서 일본 말로 “적 내습!” “적이 내습했다!” “데키라이슈!”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물론 그 교련 선생님도 들었지요. 같은 반 친구들도 전부 긴장하고 교련 선생님도 긴장했는데...... 왜냐하면 일본 군인을 보고 적이 내습했다고 소리쳤으니 그것은 그때 상황에서 큰 사건이었지요. ‘난 죽었구나’ 생각했어요. 우리 동급생들도 전부 떨고 있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말이에요. 교련 선생님이 따라 오라 해서 교무실로 갔어요. 동급생들은 ‘저거 가서 맞아 죽을 텐데......’하고 안절부절못했지요. 겁 없이 따라가서 무슨 말을 하는지 기다리는데 교련 선생님이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얼마나 놀라요. 그래서 내가 “선생님 훌륭한 말씀 감사합니다.”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일이에요. 하급 일본군 군인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보통 사람은 아니에요. 만일 나쁜 놈 만났으면 벌을 받았을지 모르죠. 해방 후에 살아 있는 중학교 동급생들이 모였는데, 모여서 “야, 죽는 줄 알았다.”며 그 이야기를 해요. 나는 다 잊어버렸는데 말이죠.(웃음)
이상혁: 제가 듣기로는 해방 직전에 잠시 교사 생활도 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떤 상황이었죠?
김민수: 대동아 전쟁 중이었는데 그때 중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 있으면 일본군에 들어가야 하거든요. 일본군에 들어가면 일선에 나가 살길 바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살 궁리를 해야 되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초등학교 교원 생활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중학생으로서 독학으로 초등학교 교원 자격시험 준비를 했어요. 기를 쓰고 하니까 합격이 되었지요. 경기도청에서 서울시도 행정을 할 때인데, 합격하자 장학관 찾아가서 “초등학교 교원 시험에 합격했는데 발령을 내주시오.”하며 달걀을 한 꾸러미 갖다 줬어요. 그때 내가 18살이었는데, 그 일본 장학관이 신기하게 본 모양입니다. 서울 마포 초등학교 교원 발령이 났어요. 마포 초등학교로 갔더니 교장과 교원 대부분이 일본 사람이에요. 인사를 했더니 어린 나이에 처음 교원에 나섰으니 4학년 여자 담임이 제일 쉽다며 4학년 여학생반 담임을 시켰어요. 4학년 담임을 하면서 해방이 되었어요.
이상혁: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초등학교 교사로 처음 교편을 잡으신 셈이군요?
김민수: 그렇지요. 내가 살려고 교원을 했지만, 그 4학년 여학생들에게 1년 가까이 일본 말을 가르쳤으니 어찌 보면 나 살려고 친일 행위를 한 것이지요. 해방이 되었는데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어요? 그래서 내가 젊은 나이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때가 저와 같은 세대가 생애에 겪어야 했던 어려운 고비였지요. 그런데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고민하던 터에 하루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상혁: 해방 후 우리말을 연구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나 이유에 대해서 선생님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김민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북쪽 함흥 감옥에서 징역을 살았던 이극로 선생이 석방되면서 서울 숙명여고 운동장에서 강연을 하신다고 해서 거기에 갔습니다. 갔더니 역시 청중이 20명 정도밖에 안 모였어요. 강연을 경청하는데 이극로 선생이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운동장의 연단에 올라서시더니 통곡을 하세요. 이제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다며 자꾸 우세요. 나도 따라서 울었어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역시 우리말을 지켜야 한다.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말만큼은 지켜야 한다. 말을 지키고 말이 살아있으면 나라가 죽지 않고, 민족도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어요. ‘아...... 그러면 역시 우리말을 공부해야겠구나.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서 알아야겠구나.’ 생각하며 제가 그만 감격을 했어요. 그때 이극로 선생님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리고 선생님의 그 깊은 뜻을 알았고 그 말씀으로 인해서 계속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때 상황을 이야기 하자면, 실제로 우리말을 모르는 학생들이 꽤 많고, 더군다나 우리말을 한글로 쓰라고 하면 거의 못 써요. 가르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는 터에 나는 이극로 선생의 말씀에 감동을 했기 때문에 제1회 조선어 강습회를 수강했지요. 그 강습회가 끝나고 국어 강사 자격시험이라는 것을 치렀어요. 강습생이 수백 명이고 강습생 중에 시험 응시자도 수백 명인데 그 중에서 38명만을 합격을 시켰어요. 그 중 내가 38번째로 합격을 했습니다.(웃음) 그런데 그렇게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말기에 서울에서 친형하고 같이 지냈는데, 친형이 준 조선어학회의 여러 가지 한글 잡지에서부터 맞춤법 통일안, 표준말 모음 책 등을 혼자서 읽고, 그러면서 영향을 받아서 공부를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혁: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은 어떻게 하시게 된 건지요?
김민수: 조선어학회 강습회를 통해서 서울대학 교수가 된 일석 이희승 선생, 그 다음에 월북한 정열모 선생, 그리고 연대 최현배 선생 등 이런 분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계속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지요. 자연히 서울대에 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희승 선생을 찾아뵙고서 입학을 하겠다고 하고 서울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상혁: 대학 시절에 주로 교분이 있었던 분과의 에피소드를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민수: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들어가서 그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 하나가 안문구라는 동창이에요. 나중에 월북했지요. 안문구는 나보다 더 먼저 예과를 거쳐서 학부를 졸업했어요. 그래도 합동 연구실에는 계속 나와서 가까이 지내게 되었는데 하루는 나에게 결혼을 한다고 청첩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나 써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때 제가 써 준 청첩 기록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이상혁: 대학 교수로서의 첫발을 언제 내디디셨는지요. 그리고 한국 전쟁 전후의 대학 상황에 대해서 좀 회고해 주시죠.
김민수: 일생을 분주하게 살았습니다. 1949년에 공주사범대학, 그때는 2년제 중학교 교사 양성 과정 학교였는데, 그 대학의 전임강사가 되어서 강의를 한 것이 대학 교수의 처음입니다. 그 후에 6․25 전쟁을 겪으면서 1952년에 부산에 가서 피란 생활을 했는데 그때 중앙대에 전임이 돼 강의를 한 것이 두 번째입니다. 그때 역시 경성대학 조선어문학과 졸업생으로 중앙대 전임으로 계셨던 양재연 선생님의 초빙으로 그 대학에 가게 되었지요. 그리고 1954년에 역시 고려대에 경성제대 출신으로 고전문학을 강의하시던 구자균 선생님이 국어학 전임을 구하셔서 역시 초빙을 받고 고려대 전임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고려대에서 근무했어요.
이상혁: <큰사전> 편찬에 참여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사전이 나오게 되었는지요?
김민수: 조선어학회 <조선말 큰사전>은 일제시대에 편찬한 원고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해방 후에 비로소 책으로 출간되기 시작했는데 전쟁 후에 미국의 록펠러 재단의 원조를 받아서 책을 계속 출간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결국 1957년에 전 6권으로 출간해서 완성을 했는데, 환도해서 1954년에 다시 계속 속간을 할 때에 편찬 위원으로 위촉을 받아서 사전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고려대 전임으로 있으면서 강의를 하는 시간만 대학에 있고 나머지 시간 전체를 편찬 사업에 종사해서 록펠러 재단에서 온 사람도 만날 수 있었고 매번 간행되는 책도 눈여겨 볼 수 있었지요. 그때 찍은 사진이 지금 언론계나 학계에 남아 있으니 그것을 통해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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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0월 9일 <큰사전> 완성 기념으로 찍은 사진. 아랫줄 오른쪽부터 한종수, 유제한,
정인승, 정인서, 권승욱, 이강로, 뒷줄 맨 왼쪽이 정재도, 맨 오른쪽이 김민수,
뒷줄의 나머지 사람들은 사무처 직원들이다. 사진 안 ‘큰사전 완성 기념’이라는 글씨는
김민수 선생님께서 당시에 직접 쓴 것이다. |
이상혁: 그 당시에 책에 사용되는 종이도 구하기 어렵고 제본도 우리가 하기 어려운 시대여서 힘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김민수: 록펠러 재단에서 원조를 받았는데 원조 받을 돈을 가지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 시대에 국제적으로 물자를 수입하는 길도 없고 방법도 모르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때 상황에 따라서 인쇄는 국내에서 하되 인쇄하는 종이 겉표지, 천으로 된 하드커버, 심지어 책을 매는 데 사용하는 실까지 이 모든 것을 록펠러 재단이 물자로 구입해 보내와서 사전을 만들었어요. 이 사전은 처음에 조선말이라고 붙였던 것을 빼서
『조선말 큰사전』이 『큰사전』으로 명칭이 바뀌어 6권이 완간된 것입니다.
이상혁: 『북한의 국어 연구』 책을 그 누구보다도 일찌감치 내신 바 있습니다. 이 저서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요?
김민수: 고려대에 있으면서 1964~65년 하버드대 초청을 받아서 소위 교환교수로 미국에 가서 1년 동안 있게 되었어요. 하버드대 도서관에 가 보니까 그 당시 북한의 자료가 거의 완비되다시피 갖추어져 있었어요. 나는 자료를 보고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내에 있다면 그 자료 어느 하나도 볼 수가 없는데, 거의 다 막 나온 학보나 단행본을 들춰 보면서 사변 전에 배웠던 대학 선생님 논문이나 저서도 확인할 수 있었죠. 또 월북한 동창들 선배와 후배들 것도 보다가 아주 흥미를 느껴 계속 섭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반공법 때문에 섭렵한 자료를 메모해서 가져오지를 못했어요.
맨손으로 돌아왔는데 당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김준엽 소장이 직접 미국의 포드 재단에서 30만 달러의 연구비를 가지고 와서 시작한 것이 공산권 연구였지요. 그런데 그 기회에 나는 그 공산권 연구 프로젝트에서 언어 부분을 맡았어요. 그때 금기였던 북한 언어 연구를 담당하여서, 그때 중앙정보부에서 다 허가하고 했으니까 마음 놓고 북한 서적을 볼 수 있었지요. 우선은 연구원이 되어서 처음에는 북한 자료를 모으는 일을 해야 연구를 할 수 있으니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요청으로 각국에 직접 가서 그 문헌을 사 보기도 하고 또 살 수 없는 것은 복사해 오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상당히 많은 북한 자료를 구해 와 구비했지요. 그렇게 해서 연구하여 제출한 논문을 모아서 출판한 것이
『북한의 국어 연구』라는 저서인데 그게 아마도 국내에서는 최초로 북한의 언어에 관한 연구서가 될 것입니다.
이상혁: 그 와중에 박정희 정권에서 고위 관료를 제안했다는 건 무엇인지요? 이 점이 아주 궁금합니다.
김민수: 책이 나오고 하니까 정부 중앙정보부에서 북한의 국어 연구와 관련된 내가 쓴 논문이나 글들을 보면서 이 사람이 가만히 보니까 중앙정보부의 소위 북한통이라는 정보원도 모르는 것을 아니까 한번은 간담회 형식으로 초청을 해서 거기에 가서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때에 나더러 혹시 행정부에 들어가서 일을 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요. 난 그럴 생각 없다고 했지요. 왜냐하면 해방 후 이극로 선생의 말씀을 듣고 내가 각오를 할 때부터 우리말을 연구하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보존하는 것은 내 책임이라고 혼자서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무렵에 내 고향 홍천에 어떤 모르는 사람의 초청을 받아서 간 곳에서 대접을 받은 적이 있어요. 자기가 중앙정보부에 있던 적이 있었다며 내 이야기를 해요. 나를 그때 중앙정보부에서 문교부 장관으로 추천을 했답니다. 중앙정보부가 당시에 정부를 다 움직이다시피 했으니까 그 곳에서 천거하면 그대로 임명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내가 안 한다고 해서 한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아주 고민했다는 말을 하더군요.
이상혁: 학문의 길을 가시지 않으셨다면 관료의 길을 가실 뻔하셨네요?
김민수: 그러게요. 근데 그 이극로 선생의 당부에 감동을 하지 않았으면 나도 그 까짓것 교수직 집어치우고 가서 했을지도 모르지요. 내가 학문의 외길로 지금까지 오게 한 지휘자는 이극로 선생이라고 봐야 될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이 깨끗하지요. 생애가...... .
이상혁: 부의 사회적 환원을 몸소 실천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사장으로 계신 동숭학술재단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민수: 동숭학술재단을 창립한 지도 10년이 지났네요. 창립할 때에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우리말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공헌하고 그 분야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소위 동숭학술상이라는 것을 수여해 격려해 주기 위해서 학술재단을 설립했지요. 그래서 재단에서 매년 발행하는 소식지에 보면 누가 학술상을 받았는지 또는 연구비를 받았는지 논문상을 받았는지 하는 기록이 나와 있어요. 그래서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중국․일본․미국․유럽 각처에서 공헌하고 이바지한 사람에게 직접 상을 주고 상금을 주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재단을 설립하고 운영하다 보니까 재원이 점점 고갈이 되어서 결국 비용이 자꾸 줄어드니까 사업이 발전되지 못하고 위축되는 경향이 있어서 아주 마음이 어지럽고 괴로운 생각이 좀 있어요.
이상혁: 평소에 한자 혼용을 주장하고 계십니다. 한글 전용 정책에 관한 고견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김민수: 우리말을 한글로만 표기해서 그것으로 불편 없이 또는 착오 없이 문자 생활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누가 한글 전용을 반대하겠어요? 그런데 실제 우리말에는 동음이의어가 많아서 한글로만 썼을 때에 얼른 읽고 무슨 의미인지 금방 판단하기가 어려워요. 앞뒤를 봐야 하고 또 앞뒤를 봐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으니까 한글 전용으로 나아간다고 하면 불확실한 언어생활을 어떻게 하겠는가에 대한 걱정이 생깁니다.
요즘에 신문을 자세히 보는 편인데 신문을 보다 보면 한자는 별로 쓰지 않고 한글만 쓰기 때문에 제목을 보고 의미 파악이 안 돼요. 의미 파악이 잘 안 되니 결국 기사 내용을 읽어야 겨우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신문을 보는데 가령 한자 섞인 신문이라면 10분 보면 될 것을 경우에 따라 1시간이 걸릴 때가 있어요. 그러면 지금 모두 바쁜 사람들이 세상에 신문을 붙잡고 1시간 보고 있다가는 어떻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겠어요? 신문뿐만 아니라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도 소통이 잘못되면 문제가 생기고 더군다나 어떤 재산을 주고받는 등 중요한 내용에 그러한 혼란이 생긴다면 이 문자 생활은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해요. 그래서 결국 필요한 한자를 혼용해서 국한문으로 문자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알파벳을 쓰는 나라에서는 왜 그런 혼돈이 나지 않는가를 잘 보고 알아야 합니다. 알파벳이 표음문자이지만 그 표음문자로 표기해 놓은 단어는 표의화입니다. 영어의 light의 ‘gh’자가 읽히지 않은데 그것을 빼고서 놓으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그것을 읽는 것은 표의입니다.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겉모양으로 있어야 해요.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한글을 표의화하면 가능하지요.
조선어학회가 일제 말기부터 운동을 일으킨 것이 바로 표의화 운동이었습니다. 한글맞춤법통일안 또한 새 받침이라고 해서 ㅊ 받침을 하면 얼굴의 ‘낯’, ㅅ 받침을 하면 풀 베는 ‘낫’, ㅈ 받침을 하면 밤낮의 ‘낮’을 구별해 놓았습니다. 그것이 표의화입니다. 그렇게 하면 되지만, 이것도 동음이의어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한자어 동음이의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표의어가 안 돼요. 우리말의 한자어가 70%가 되는데 거기에서 동음이의어가 아주 많지만, 그것이 구별이 안 돼요. 차라리 한자를 섞어 쓰는 것이 국어 이해의 바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 이야기는 이런 인터뷰를 떠나서도 꼭 알아야 하고 깊이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혁: 고인이 되신 늦봄 문익환 목사님과 인연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두 분의 짧은 교분이 있으셨는지 간단히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민수: 1994년 1월에 문 목사가 나한테 좀 만났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와서 1월 11일에 그 사무실에 가서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그게 오래전이라 생각이 잘 안 났는데 일기장을 들춰보니까 그때 같이 만난 사람이 유원호, 이오덕, 정정찬, 이렇게 이 분들하고 같이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사무실 이름은 <통일맞이7천만겨레모임>이라는 명칭을 붙인 곳으로 문익환 목사가 남북통일을 지향하기 위해 생전에 운동하던 본거지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평양의 문고를 북쪽에 세우고 남북 언어 좌담회도 할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 사람이 통일 문고 수록을 위한 남북 언어 좌담회를 계획했는데 자신이 북한 언어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내가 그 사이에 연구하고 발표했던 문헌을 통해서 나에게 물어서 알아야겠다고 생각해서 가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결국 남북통일 문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게 남북이 공통되는 남북 국어사전 편찬이 시급하니까 그 이야기를 거기서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시기에 북쪽 사전을 봐도 남쪽 사전과 비해서 가나다순도 다르고 또 그뿐만 아니라 같은 제목의 주석도 관점에 따라서 다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의미 주석이야 남북이 같아야지 그것이 다르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러한 통일 국어사전에 관한 것, 국어사전은 통일 국어사전이 되려면 그것만 아니고 국어 규범, 규칙도 통일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표준어 문제도 있습니다. 그것은 북한 언어를 살리고 남측 언어도 살리는 것을 역시 고려해야 하겠지만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마 비교적 구체적으로 문익환 목사에게 자문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상혁: 지금 그게 『겨레말 사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김민수: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마도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 가서 김 주석과 남북언어 통일을 위한 그러한 작업을 하기로 협의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는데 그때에 관여했던 분들이 그 후에 역시 또 북쪽과 어떠한 연결이 이어져서 만나서 협의하고 요즘에
『겨레말사전』을 남북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것이 최초로 남북이 한 직접적인 약속이라는 생각이 들고, 통일 국어사전 편찬에 대한 결정은 그때 김 주석과 문 목사가 함께 한 것이 시발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상혁: 건강이 좋아 보이십니다. 선생님만의 또 다른 장수 비결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김민수: 누구나 음식을 자기 체질에 맞게 잘 가려서 꼭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서 먹어야 해요. 대부분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으니까 못하는데 저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신문 스크랩을 하면서 건강에 관한 기사를 따로 모아서 그걸 자세히 검토해 보고 내게 필요한 것은 계속 아까 말씀대로 고구마 먹듯이 계속 먹으니까 그게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요즘에 특히 담배를 태우는 여성들이 많다고 야단입니다. 술 담배가 기호품으로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동시에 그것에 대한 피해가 또 보통이 아니에요. 그래서 담배는 백해무익이라고 해서 끊은 지가 꽤 됐습니다. 또 대부분 사람들이 끊지 못하는데 그것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의식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요. 뭐 죽을 각오로 하면 못 할 것이 어디 있겠나 하는 것과 같이 내가 의식을 가지면 그 정도 왜 못 끊겠어요?
그 다음에 술은 잘 마실 적에는 막 마셔도 나이 먹으면 자기 몸을 제어해야 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아예 젊었을 때부터 술은 자기 체질, 자기에게 맞는 양을 꼭 지켜 마시도록 습관화하도록 하고,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술은 권하지 않는 것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술을 이용하는 쪽으로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술에게 홀리지 말고 술에게 잡히지 말고 마시는 것이 아마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 전에 술 두 잔은 참 좋은데, 자기 전에 여성은 1잔, 남성은 2잔. 남녀차별이에요.(웃음) 남녀 개개인의 주량의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남자는 2잔 정도를 그렇게 마시면 아주 오래 살고 건강하다고 신문 기사를 봤습니다. 저는 술도 좋아하지마는 그 규정에 어기지 않게 마시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상혁: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이 있으시면 한 말씀 해주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몇 년 전에 느닷없이 정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연락이 와서 내 생애에 겪은 일, 또 사건들 이것을 녹취해서 소위 구술사로 엮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것은 조선시대의 왕조실록처럼 정부에서 역사 기록의 하나로 영원히 보존하겠다고 하고 또 정부에서 한다니까 근심할 것도 없다 생각해서 승낙을 했지요. 그런데 막상 보니까 빠진 게 있어도 문제고 틀려도 문제니까 사전에 준비하는 작업이 엄청나게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래서 구술사 녹취 및 녹화 작업을 했는데 1960년대까지밖에 못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죽기 전까지 그 내용을 녹화한다고 생각을 하고 구술사를 위한 원고 쓰기를 앞으로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한 기록이 앞으로 100년, 1000년 보관되어서 우리 자손들이 본다고 할 때에 그것이 얼마나 좋은 자료가 되겠어요. 그러니 절대로 내용에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요. 그렇게 해서 ‘내가 자진해서 끝까지 써야 되겠다.’라고 단단히 각오했지만, 신문 스크랩 하랴,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한쪽에 미뤄 놓다 보니 1970년대까지 쓴 것 말고 전혀 진전이 없어 아쉽습니다.
이상혁: 앞으로 선생님의 구술사가 완성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좋은 말씀으로 장시간 인터뷰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김민수: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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