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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의 이모저모 |
강재형·문화방송 아나운서
나는 ‘방송쟁이’이다. 콕 찍어 얘기하면 아나운서. 달마다 월급 받아 사는 봉급생활자이지만 사는 방식은 여느 직장인과 좀 다르다. 뭐가, 왜? 나의 휴일 근무 이야기를 하면 답이 될지 모르겠다.
내가 휴일 근무를 하던 어느 날의 일이다. ‘근무 중 이상 무’, 내 몫이었던 뉴스를 잘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길. 회사 앞 다방에서 차 한 잔 사 들고 여의도를 벗어나려는데 전화가 울린다. “급하다, 뉴스 속보 들어간다.” 이런 내용이었다. “언제?” 이렇게 되물으니 “바로 들어간다. 아나운서국에 사람이 없더라, 전화를 안 받는다”라는 거였다. 누가 있고 없고를 따질 겨를이 없는 상황. “일단, 알았다” 해 놓고 회사로 들어왔다. 전화를 받은 시각은 오후 6시 21분. 잰걸음으로 회사로 돌아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또 전화가 온다. 다급한 목소리. “3분 뒤에 들어가는데, 어디?”라고 한다. “알았다, 지금 1층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이렇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회사 5층 보도국 입구가 분주했다. PD 기자가 날 보더니 “바로 뉴스 센터로 오라”라는 말만 남기고는 황망히 스튜디오로 뛰어간다. 아무리 급해도 ‘의관’은 갖춰야 할 일. 6층 아나운서국에 올라가 옷장을 열어보니 나보다 덩치가 큰 후배 아나운서 옷만 걸려 있다. ‘그의 옷이 맞을까?’ 이런 생각은 이미 ‘사치’가 되어버린 순간, 편집부 AD가 뛰어와 원고를 건네준다. 원고 내용 확인하면서 뉴스 센터로 걸어갔다. 뉴스 센터에 도착하니 편집부 요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앵커 자리에 앉았다. 시계를 보니 6시 36분. 분장하지 않은 ‘민낯’1)
‘화장하지 않은 여자의 얼굴’<<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이다. 시쳇말 ‘쌩얼’을 대신 쓸 수 있는 표현이다. 낱말 뜻풀이에서 ‘여자의’는 없는 게 좋겠다. 화장과 분장은 여성만 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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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이 생각났다. 분조차 바르지 않으면 얼굴이 번들거릴 수 있다는 사실,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분 찍어 바르며 PD와 진행 순서 확인했다. 어느새 화면에는 ‘뉴스 속보’ 화면이 나가고 방송 시작. 그리고 뉴스 속보는 마무리되었다. 불과 17분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착착 진행된 셈이다. 그 시간, 17분이 흘러가는 동안 회사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 5층과 6층을 오르내리며 방송을 준비하는 내내 나는 단 한 걸음도 뛰지 않았다. 급하더라도 뛰면, 가빠진 호흡에 마음도 진정되지 않는다. 방송 22년에 쌓인 경험에 따르면 그렇다. 아나운서는 급해도 절대 뛰지 않는다.
<강재형 누리사랑방에서 발췌 요약>2)
‘블로그(blog)'를 순화하여 이르는 말. 국립국어원이 개설·운영하고 있는 ‘모두가 함께하는 우리말 다듬기’ 사이트를 통하여 ‘누리사랑방’으로 순화되었다. <<2004 신어자료집>>(2004, 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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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할수록 뛰면 안 되는, 늘 ‘속보 상황’ 같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방송과 잇닿아 있는 아나운서의 일상은 다른 이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더욱이 방송 언어와 관련된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다른 얘기를 또 해 보자.
‘지금은 라디오 시대’는 대한민국 청취율 1위를 굳게 지키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조영남-최유라가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을 두고 제작진은 ‘지.라.시’라고 줄여 부른다. 광고 전단 따위를 이르는 속칭 ‘찌라시(지라시)’3)
‘선전지, 낱장광고’로 순화<<일본어 투 용어 순화자료집>>(2005, 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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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는 다르니 오해는 하지 말자. 언젠가 그 프로그램에서 ‘강석의 뺨을 때려라’란 제목의 시간을 마련했다. 성대모사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청취자를 모시겠다는 뜻을 담은 꼭지4)
국어사전은 물론 ‘신조어사전’에도 오르지 못한 낱말이지만, 방송과 신문 등에서 ‘기사한 꼭지’, ‘이번 꼭지는 시민 반응으로 하지요’처럼 오래전부터 널리 쓰는 표현이다. 방송 프로그램이나 기사에서 난(欄)의 뜻으로 흔히 쓰는 ‘코너’는 오리지널 영어와는 거리가 먼 쓰임으로 ‘순화 대상’으로 삼을 표현이다. 안정효가 펴낸
『가짜 영어사전』(2006, 현암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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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석의 뺨을 때려라?’ 나는 그 방송을 차 안에서 들었다.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싶었다. ‘뺨을 때린다’는 건 상대를 모욕하는 일이다. 강석을 이른바 ‘성대모사의 달인’으로 치켜세우는 뜻을 담았다 해도 청취자가 오해할 만한 표현이다. ‘뺨을 치다’와 ‘뺨을 때리다’는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엠비시 라디오에서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 나가는 거,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는 일이다. ‘비교 대상을 능가하다’는 뜻으로 쓰는 ‘뺨치다’는 귀싸대기를 후려치는 ‘뺨 때리다’와 같을 수 없다. 머뭇거릴 일이 아니었다. 생방송 중인 스튜디오로 전화했다. ‘지.라.시’ 방송이 크게 들리는 수화기 너머로 제작진에게 말했다. ‘뺨치다’는(속된 표현이긴 하지만) 관용적으로 쓸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뺨 때리다’는 곤란하다, 이렇게 말이다. 그 뒤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거다.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그 방송을 들었던 이도 독자 중에는 있을 테니까. 노래 한 곡, 청취자 사연 하나를 더 읽은 뒤 ‘강석의...뺨을 때려라’는 ‘강석의 뺨을 쳐라’로 바뀌어 나갔다. 최유라-조영남의 ‘황금콤비’는(아나운서국의 지적으로) ‘빰 때리다에서 뺨치다로 바뀐’ 사연까지 부드럽게 전해줬다.
<위 누리사랑방에 실린 내용을 깁고 보탬>
나만 제대로 된 우리말 하면 된다, 이런 시대는 벌써 지났다. 더불어 가는(가야만 하는) 사회 아닌가. 우리는 동료 아나운서뿐 아니라 외부 진행자들의 표현과 발음도 생방송 중에 바로 잡아주고는 한다. 방송 언어, 우리말과 더불어 살아가는 아나운서는 방송 울타리 밖에서도 ‘시험’에 들고는 한다. 이번엔 회사 밖에서 일어난 얘기 하나 전한다.
이름만큼이나 밝은 동네 ‘명동(明洞)’의 한 ‘오뎅집’에서 겪은 일이다. 다른 데도 아니고 국립국어원에서 펴내는 ‘새국어생활’에 ‘오뎅’5)
「일본어 투 용어 순화 자료집」(2005, 국립국어원)은 ‘꼬치(안주)’로만 쓰라고 했지만, 나는 이에 ‘불복(不服)’한다. 다음 이유에서이다. 첫째, 표준국어대사전에 오른 ‘꼬치’, ‘꼬치안주’의 뜻풀이는 ‘오뎅’을 가리키지 않는다. 둘째, ‘오뎅’은 간장 등으로 양념한 국물에 어묵을 주재료로 무와 다시마, 파 따위를 넣고 끓여 만든 일본 음식 이름으로 ‘스파게티’와 같은 외래어이다. 셋째, 일본과 우리나라의 ‘특수 관계’를 내세워 인정할 수 없다면 중국 음식점의 ‘우동’과 ‘짬뽕’도 같이 다루어야 하나,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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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했다고 경기(驚氣)하는 이 없으면 좋겠다. 어쨌든, 명동 언저리에 있는 ‘오뎅집’에서 생긴 일은 이랬다. 모처럼 정겨운 이를 만나 한잔 걸치며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고 있는데 주인장이 말을 섞으러 나타났다. 느닷없이 던진 말이 “아나운서가 왔으니, 문제를 내겠다”라는 거다. 그러고는 숨 돌릴 틈 없이 ‘문제 출제’를 한다. “바로 보나 거꾸로 읽으나 똑같은 글자가 7개 있다. ‘응’이 그 하나이다. 나머지 6개는?”. 얼떨결에 “곰”이라 답하니, ‘곰같이 군다’는 핀잔만 돌아왔다. ‘곰’을 180도 돌려서 거꾸로 읽으면 ‘문’이 된다. 나와 동료 뿐 아니라 그 곳 모든 손님들이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끝에 어찌어찌 7개를 다 찾기는 했다. 답은 이 글 끄트머리에 있다.
낱말 하나 두고 고민하고, 표현 하나 하면서도 곱씹는 일은 아나운서의 것만은 아니다. 방송 기자와 리포터, 작가, 연출자, 디제이(DJ)들의 몫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물었다. 지난 5월 말 엠비시 라디오 스튜디오가 있는 여의도 본사 7층을 오가는 방송쟁이들에게 ‘(방송하면서) 어떤 표현(발음)이 어렵냐’고 물은 게 그것이다. 짧은 시간에 참 많은 ‘고민’을 확인했다. 특히 ‘발음 원칙’과 ‘표준 발음법’에서 비롯한 게 많았다. 그 중에 몇 개만 추려서 함께 고민해보자.
1. ‘한강다리’는 [--다리], [--따리] 중에 어떤 게 맞는 발음이냐?
2. ‘도시가스’는 [--가스], [--까스] 둘 다 맞는 거냐?
3. ‘자장면’이 표준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식당 가서는 ‘짜장면’을 주문한다.(현실과 동떨어진 표준어는 문제 있는 거 아니냐)
4. ‘생닭을’을 읽으면서 [쌩-]과 [생-], [-다글]과 [-달글]을 두고 잠깐 망설였다. 방송은 [생달글]로 하긴 했는데, 왠지 ‘닭살 돋는’ 느낌이었다.
5. ‘세상읽기’란 꼭지가 있는데 [세상익끼]로 하면 이상하다. [--일끼]가
자연스럽다.
내가 ‘권위’를 갖고 답하기에 어려운 문제들이다. 하나같이 공감할 수 있는 고민과 지적이기도 했다. 1, 2번은 국립국어원이 운영하는 ‘가나다 전화(02-771-9909)’에 문의했다. 답은 이랬다.
1.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올라있지 않은 ‘한강 다리’는 띄어 쓰는게 맞다. ‘강 다리’도 그렇다. 따라서 된소리 [--따리]는 인정할 수 없다.
2. ‘가스’, ‘버스’ 따위의 외래어 발음에 ‘현실발음’은 인정하지 않는다. [가스], [버스]가 맞다.
일리는 있는 답이다. 그렇다고 선뜻 동의할 수 없는 ‘유권해석’6)
국가의 권위 있는 기관이 법규를 해석하는 일.(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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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도 하다. 문법도 법이지만 ‘표기대로 읽어라’만 고집하는 건 문제가 있기에 그렇다. 우리말에 ‘표기와 발음이 일치하지 않는 낱말이나 표현은 많다. 사람 이름 문자(文子)는 [문자], 한글과 한자 따위의 문자(文字)는 [문짜]로 읽는다. 토박이말 ‘안간힘’의 표준발음은 [안깐힘]이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다음 문장을 표기대로(발음법에 따라) 읽어보시기 바란다.
“기름값이 올라서 공공서비스인 도시가스요금과 버스요금이 인상되었 다”
[기름깝]씨 올라서 공공서비스인 도시가스요금과
버스요금이 인상되얻따]
이렇게 발음하셨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릿값이다. 표기는 ‘가스, 버스, 서비스’여도 된소리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문법도 법’이라 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법으로 옭아매면 [뻐스]를 타고 [써비쓰쎈터]에 가는 시민은 ‘범법자’가 된다.
방송에서 겪는, 아나운서 노릇하며 생기는 이모저모를 털어놓다 보니 볼멘소리도 튀어나왔다. 그래도 우리말과 글 닦아 ‘아름다운 말글 세상’ 이루려는 방송인들은 이런 나날을 보내며 산다. 어떤 나날? 오래전 아나운서들이 주고받은 대화 한 자락을 끝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동료 아나운서가 서둘러 퇴근하기에 누군가 한마디 했다. “바삐 가는 거 보니 좋은 일 있는 모양?” 했더니 “남이사”하며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남이사’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난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별별 얘기들이 오고갔다. 당시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옮긴다.
아나운서 1 : 남이사?
아나운서 2 : 그러게, ‘남이사’(방송에서) 써도 되나?
아나운서 3 : (컴퓨터 앞에서) 여기 있네, ‘남이사’ 사전에 있네.
아나운서 1 : 무슨 뜻?
아나운서 3 : ‘남이야 뭘 하든 무슨 상관이냐’는 뜻.
아나운서 0 : 그래, 사전에 진짜 나와?
아나운서 4 : 그럼, ‘남이사’도 표준어인가 보네, 방송에서 써도 되겠다.
아나운서 2 : 그러게
아나운서 0 : 내 사전에는 없는데, 이상하다.
아나운서 3 : 어떤 사전?
아나운서 0 :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
아나운서 3 : 그럼, 그 말 쓰면 안 되겠다. 거기 없으면...... .
아나운서 5 : (홀연히 나타나) 뭐, ‘남이사’? 그거 ‘남의 사(私)생활’,
‘남의 일(事)’에서 온 말이잖아. ‘남의 사(私, 또는 事)’
‘남이사’가 된 걸 거야. 영어로 하면 ‘It's non of your
business)’
아나운서 1,2,3,4,0 : 그럴듯하네(끄덕끄덕)
아나운서 0 : (여기저기 자료를 뒤적인 뒤) 답 나왔다! ‘남이사’는 ‘남이야(뭐하든 신경 쓰지 말아라)’의 경상도 사투리네.
‘내사’, ‘남이사’ 같은 뜻인데(사투리 억양으로) 내사~남이사~맞지?
* ‘아나운서 3’이 인터넷 검색으로 찾았다는 사전은 ‘네이버 오픈사전’이었다.(위 누리사랑방에서 발췌 요약, ‘아나운서 0’이 필자임).
“별것도 아닌 걸 두고 아나운서들은 참 말도 많다.” 이렇게 타박하는 분이 없길 바란다. 앞서 본보기로 세운 몇 가지처럼 공권력의 발음이 [공꿘녁]인지, [공꿜력]인지를 짚어주고 효과의 발음을 [효과]만 인정할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일, 문장의 호응이 제대로 된 건지 아닌지 따위를 꼼꼼히 따지는 일이 ‘방송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아나운서들의 중요한 업무이니까 말이다. ‘인기 높아지는 일’도 ‘돈 되는 일’도 아닌데 설왕설래하는 아나운서들, 속내를 들여다보니 쫀쫀하다고? 남이사!
<근, 늑, 를, 믐, 응, 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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